마흔
최승자
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 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 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 가도
벽이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연애와 직장생활 권태기의 7가지 공통점
1. 말수가 줄어든다
2. 단점을 지적한다
3. 의욕이 사라진다
4. 아까워 한다
5. 비교하게 된다
6. 비밀이 쌓인다
7. 거짓말이 늘어난다
(출처 : 로또는 꽝이고 내일은 월요일, 이하루, 홍익출판사)
퇴근길
안도현
삼겹살에 소주 한잔 없다면
아, 이것마저 없다면
('그리운 여우', 창작과비평사, 1997) 퇴근길
바람에 대하여 1
박재삼
결국은 우리는
바람 속에서 커 왔고나
그 바람은 먼 여행을 하고
지금도 안 끝나고 있다.
겨울의 아득한 들판 끝에서
봄의 노곤한 꽃 옆에서
여름의 숨차던 녹음 곁에서
그리고 드디어
이제는 빛나는 찬바람이 되어
소슬하게 가슴에 넘치게
수확의 열매와 함께 왔고나.
이 바람을 나는
나서 지금까지
거느리고는 왔으나
어쩔 것인가
아직도 그 끝을 못 잡고
어리벙벙한 가운데 살고 있네
필연
이장욱
나는 야위어가면서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필연이라고 생각하려 노력했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그것을 애인이라고
생일이라고
신문사에 편지를 쓰고
매일 실망을 했다.
고체가 액체로
액체가 에테르로 변하는 세계를 사랑하였다.
강물이 무너지고
돌이 흘러갈 때까지
사랑을 합니다, 라고 적고
밤과 수수께끼라고 읽었다.
최후라고 읽었다.
토성에는
토성의 세계가 있다고
칼끝이 우연히 고독해진 것은 아니라고
그런 밤에는 인기척이 툭,
떨어졌다.
누가 지금 막 내 곁에 태어났다는 듯이.
마침내 이 세계에 도착했다는 듯이.
오래 전에 자신을 떠나
검디검은 우주공간을 지나온 별빛의 모습으로
뭐라 말할 수 없는 모양으로 누워 있는데
누군가 하늘 저편의 그 검은 공간을
내 이름으로 불렀다.
(계간 『시산맥』 2012년 겨울호 발표)
언젠가 친한 친구와 술을 마시며 늦도록 애기를 하던 중에, 내가 예전에 했던 애기를 다시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 이 애기 내가 너한테 하지 않았던가?"
라고 물으니
친구가 "응, 했어"
한다.
"왜 말 안 해줬어? 지겹잖아, 들었던 애기, 이러다 나 나이들면서 했던 애기만 하고 또 하게 되면 어떡하지? 무섭네."
나는 이때 친구가 취해서 어눌한 말투로 했던 대답을 잊지 못한다.
"야...... 그러면 좀 어떠냐?"
그 말이 그렇게 따뜻하고 고마울 수 없었다.
겨우 술 한 잔
무작정 흘러가는 일상에
스톱버튼을 누르게 하는 힘.
흘러가던 바람을.
의식하지 못했던 햇살을
잡아다가 여기에 앉히는 힘.
딱딱해진 마음을 살살 풀어주고.
딱딱해진 관계도 어느새 풀어주는 힘.
때론 약간의 에너지.
때론 약간의 한숨.
때론 커다란 숨구멍.
때론 폭발하는 행복.
그 모든 것의 시작이
겨우 술 한 잔.
무려 술 한 잔.
('하루의 취향', 김민철 지음. ' 겨우 술 한 잔' 중에서)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벤댕이를 먹으며
이가림(1943~2015)
무게없는 사람을
달아보고 또 달아보느라
늘 입속에 말을 우물거리고만 있는
나 같은
반벙어리 보라는 듯
영종도 막배로 온 중년의 사내 하나
깻잎 초고추장에
비릿한 한 움큼의 사랑을 싸서
애인의 입에 듬뿍 쑤셔 넣어준다
하인천 역 앞
옛 청관으로 오르는 북성동 언덕길
수원집에서
벤댕이를 먹으며
나는 무심히 중얼거린다
그렇지 그래
사랑은
비릿한 한 움큼의 부끄러움을
남몰래
서로 입에 넣어주는 일이지...
오이지
신미나
헤어진 애인이 꿈에 나왔다
물기 좀 짜줘요
오이지를 베로 싸서 줬더니
꼭 눈덩이를 뭉치듯
고들고들하게 물기를 짜서 돌려주었다
꿈속에서도
그런 게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