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하루였다. 새벽에도 잠이 오지 않아 한참 깨어 있었다. 글은 거의 쓰지 않았다. 그래도 새벽 6시 반에 일어났고, 바닥을 청소했고, 전화 영어 수업을 받았고, 기타를 연습했고, 근력 운동을 했다. 하강 나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런 일들을 했다. 그런 나를 조금은 칭찬해줘도 될 것 같다.
쓰고 있는 소설에서는 주인공 형사가 수상한 참고인을 만나러 지방에 내려갔다. 참고인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형사와의 만남을 피한다. 형사는 이 사내를 꼭 만나야 하는데……. 그 다음에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이 막혔다. 이런 때 진짜 형사라면 어떻게 하려나.
여태까지 쓴 원고 분량이 200자 원고지로 1700매가 넘었다. 요즘 기준으로는 단행본 두 권이 충분히 나올 양이다. 앞으로 써야 할 분량도 300매는 넘을 것 같다. 완성 원고가 2000매를 넘지 않는다면 출판사에 두툼한 한 권으로 내자고 요구해볼 참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분권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온갖 사변으로 가득한 두 권짜리 장편소설을 요즘 세상에 선뜻 집어 들 사람이 몇이나 되려나. 이게 팔릴 책인가. 쓸수록 자신이 없어진다.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오전에는 또 일본 추리소설을 한 권 읽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안녕, 드뷔시』다. 피아니스트 탐정이 등장하는 시리즈라니, 책장을 펼칠 때에는 진지하게 들리지 않았는데 푹 빠져 읽었다. 앞뒤가 잘 맞아 떨어지는 웰메이드 추리소설이기도 했고, 음악소설이자 인간 드라마이기도 했다. 주인공이 겪는 고난이 가슴 아팠고 그녀의 노력이 감동적이기도 했다. 나도 저렇게 노력해야 하는데.
HJ도 요사이 몹시 우울해한다. 그 우울감의 원인 상당 부분은 나 때문이어서 많이 미안하다. 우울증은 마치 전염병처럼 곁에 있는 사람까지 우울하게 만든다. 한편으로는 그녀는 회사에서도 쉽지 않은 상황에 있었고, 부동산 투자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 때문에도 괴로워했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힘든가? 나도 HJ도 궁금해 했다. 이 우울감은 우리가 중년에 접어들었기 때문인가? 우리 부부에게 아이가 있거나 종교가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아니면 여기에 보다 근본적인 외부 요인이 있을까?
한국 사회, 더 나아가 세계 전체가 지금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불행해지는 환경으로 변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보람이 있는 일자리를 찾기는 더 어렵고, 노동으로 부자가 될 가능성도 희박해지는 세상이 시작된 것은 아닌가.
HJ는 요즘 경제 공부를 열심히 한다. 기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도 경제와 투자 관련 서적들이 점령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이 주식이나 부동산 시장이 과연 정상인지, 지금이라도 영혼까지 끌어 모아 뛰어들어야 하는 건지, 이러다 버블이 터져서 장기 불황이 오는 건 아닌지 속 시원히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다.
낮에는 마트에서 사 온 닭다리를 혼자 먹었고 저녁에는 남은 닭다리와 가래떡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수퍼 스윙 라거, 칼스버그 대니쉬 필스너, 1866 블론드를 마셨다. 만사 심드렁하던 차에 아무 생각 없이 수퍼 스윙 라거를 한 모금 넘겼는데, 눈이 번쩍 떠질 정도로 맛있었다. 어, 이거 뭐야……. 덕분에 가라앉아 있던 기분도 조금 올라왔다.
수퍼 스윙 라거는 일산에 있는 한국 수제맥주 회사인 플레이그라운드 브루어리의 제품이다. 라거지만 알코올 도수를 높이고 홉 풍미를 강조해 인디아 페일 라거라고 부른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 미국에서 탄생한 신생 장르다. 전에 플레이그라운드 브루어리의 제품들을 몇 종류 마시고 별 인상을 받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다음날에는 HJ가 재택근무를 했다. 나는 평소 사용하던 책상에서 작업하지 않고 HJ와 함께 식탁에 앉아 글을 썼다. 노트북으로 글이 잘 써지지 않는 것 같아 기분 전환 삼아 공책을 꺼내 거기에 볼펜으로 썼다.
각자 일을 하면서 가끔 잡담을 나누기도 했는데, 그러다 내가 현재 구상 중인 논픽션 두 편 중 한 편의 내용에 대해 HJ에게 설명했다. 한국 독자가 아니라 해외 독자들을 겨냥한 논픽션이었는데, 무모하다면 퍽 무모한 프로젝트였다. 크게 성공할 수도 있지만 끝내 해외에 소개되지 않고 국내에서 몇 부 팔리고 말 수도 있다.
HJ는 그 구상을 듣고 약간 감탄한 듯 보였다. 그 모습에 용기를 얻은 나는 다른 논픽션 구상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더 황당하고 더 도박 같은 도전이었다. 성공할 확률은 매우 낮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전과는 차원이 다른 작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HJ는 이 단행본의 주제는 더 높이 평가했다.
“난 전부터 자기가 이상한 생각들을 하는 모습이 좋았어. 엄청나게 크고 얼토당토않은 꿈을 꾸고 그걸 추진하려는 태도가 멋있어 보였어. 요즘은 그런 생각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HJ가 말했다.
“우울증으로 고생할 때도 계속 이런 생각은 하고 있었어. 그리고 이 구상들 다 안 풀릴 수도 있어. 모 아니면 도야.”
“알아. 그래도 멋있어.”
이날 저녁에는 헬스장에 가서 달리기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수퍼 스윙 라거를 네 캔 사 왔다. 수퍼 스윙 라거도 냉장고에 늘 몇 캔 두면 좋겠다 싶었는데 밤에 혼자서 그 네 캔을 다 마셨다. HJ는 옆에서 버드와이저와 호가든을 마셨다.
안주로는 아구포와 납작만두를 먹었다. 처음 먹어 본 아구포는 쥐포와 거의 비슷한 맛이었는데 좀 더 살집이 있었다. 내가 꾸는 꿈을 이해하고, 그런 꿈을 멋지다고 생각하는 여인과 함께 살고 있다니,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가 생각했다.
스윙 스윙 스윙
인생의 작은 기쁨들을 되찾겠어
큰 꿈도 놓지 않겠어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무겁고 복잡한 문제에 대한 통찰에 현장감 넘치는 르포와 인터뷰를 붙여 아주 술술 읽히게 썼다. 책의 통찰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극한 갈등의 수렁에 빠지게 되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두 번째는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에 대한 실질적인 조언이다. 보다 작고 사적인 갈등 상황을 다루는 데에도 유용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