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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 장편소설 『파견자들』(퍼블리온)

언젠가 우리 모두가 별의 자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충격을 받았었다.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은 모두 별에서 왔고, 인간은 그 물질이 우주적 시간 기준으로 찰나 동안 모여있다가 흩어지는 존재에 불과하며, 언젠가 다시 어느 별의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

태양은 항성 규모에 비해 중원소 함량이 높은데, 태양보다 먼저 그 자리에 있던 '퍼스트 스타'가 소멸한 뒤 만들어진 중원소가 태양의 재료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읽은 일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사라지지 않는 수많은 원자가 별을 통해 순환하는 과정의 일부에 불과할 테다.

'창백한 푸른 점' 위에 우연한 계기로 결합한 물질 덩어리에 불과한 인간이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자아로 살아간다는 건 착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기운이 빠졌던 기억이 난다.


이 작품은 인간이 독립적인 자아라 살아가는 게 가능한지, 낯선 존재와 공존이 가능한지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하게 묻는다.

비슷한 주제를 다뤘던 작가의 단편 <인지 공간>의 규모를 더 확장했다.

원고량이 상당한데도 술술 읽히고, 영화를 보듯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특히 작가의 전작들과 비교해 시각적인 묘사가 두드러진다.

다양한 색채로 이뤄진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인 세계를 상상하며 읽는 일이 흥미로웠다.

동시에 기시감도 많이 들었다.

범람체로 불리는 외계 생명체가 지상을 차지한 설정에선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지상을 탐험하는 주인공의 행보와 선택에선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아바타>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인간은 온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이미 다른 존재와 유기적으로 결합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 작품의 메시지는 설득력이 있었다.

인체 내 미생물 개체수는 약 100조 이상, 그 무게는 약 2kg으로 추정된다지 않던가.

심지어 그 미생물이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하고.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특별하고 개별적인 존재라는 생각은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읽는 재미와 작품의 밀도만 따지면 확실히 작가는 장편보다 단편에 훨씬 더 강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만큼 작가의 데뷔작인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대단했다는 말이겠지.

파견자들
파견자들
정세랑 장편소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문학동네)

현재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소설가 중에서 가장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를 한 명만 꼽자면 정세랑 작가를 꼽겠다.

<보건교사 안은영> 같은 장르 소설은 물론 <이만큼 가까이> 같은 성장소설, <시선으로부터,>처럼 현대사와 여성 서사를 훌륭하게 엮은 장편소설까지.

특히 <시선으로부터,>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온 한국 소설을 통틀어 최고작이라고 생각한다.

한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소재를 자유롭게 다루고 심지어 잘 쓰는지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짜증 날 때가 많다.

물론 질투 섞인 칭찬이다.

다음에는 어떤 작품을 내놓을지 진심으로 기다리는 몇 안 되는 작가인데, 역시 예상치 못한 장르의 소설로 뒤통수를 친다.

역사 추리소설이라니.

그것도 통일신라를 배경으로 다룬.


이 작품은 당나라 유학파 출신인 육두품 가문 남장여자가 신라의 수도 금성으로 돌아와 주변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사건을 해결하는 수사물이다.

총 네 가지 사건을 해결하는 에피소드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았다.

여기에 손재주 좋은 백제 출신 유민이 조력자로 등장해 홈즈와 왓슨처럼 콤비로 사건을 해결한다.


정세랑 작가의 작품답게 술술 읽히지만, 기대보다는 아쉬웠다.

배경이 통일신라이긴 하지만, 당대의 습속을 깊게 다루진 않는 편이다.

그 때문에 기존 역사물의 사각지대였던 통일신라를 다뤘다는 장점과 개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남장여자라는 캐릭터가 주는 특유의 아슬아슬한 매력이 잘 드러나지 않은 점도 아쉬웠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행보는 그냥 남성 그 자체여서, 주인공의 성별을 남성으로 바꿔 읽어도 크게 무리가 없을 정도다.

주인공의 비밀을 아는 조력자도 딱히 주인공을 전혀 여자로 보지 않아 '버디물' 같다는 인상이 강하다. 


더 매력적으로 캐릭터를 만들고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끝까지 남았지만, 이 작품은 시리즈로 기획돼 2권과 3권도(어쩌면 그 이상도) 출간될 예정이다.

첫술에 배부르랴.

'슬로우 스타터'라고 여기고 다음 권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다려 봐야겠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김하율 장편소설 『이 별이 마음에 들어』(광화문글방)

1978년 대한민국 서울에 불시착해 여공으로 살아가는 외계인.

설정만으로도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흥미롭지 않은가.

설정만 보면 SF스럽지만, 이 작품은 이방인의 시선으로 과거 대한민국의 열악한 노동 현실이 요즘에 어떤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노동소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읽기에 무거운 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경쾌하고, 심지어 웃기다.


주인공이 떠나온 행성의 생존 매뉴얼에 따르면, 낯선 행성에 불시착했을 때 생존율을 높이는 방법은 그 행성에서 가장 고등한 생명체로 변신하기다.

하필 주인공이 맨 처음 마주친 고등 생명체는 여공이었고, 주인공은 가장 평균적인 모습을 가진 여공으로 변신해 공장에 스며든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그야말로 미친 학습 능력을 발휘해 말도 안 되는 단기간에 시다, 미싱사를 거쳐 재단사 자리를 차지한다.

공감 능력과 사회성이 전혀 없는 주인공이 본의 아니게 활약하며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는 과정이 마치 시트콤처럼 펼쳐진다.

여담인데 주인공이 연구단지나 대학 캠퍼스에 불시착해 연구원이나 대학원생을 만났다면 노벨상을 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숲을 보려면 숲에서 나와야 한다지 않던가.

지구인을 가장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존재는 어쩌면 외계인일지도 모르겠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하고, 오래 일하면 골병들고, 일하다 다쳐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등 주인공이 감정 없이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본 노동 현실은 가혹하다.

이젠 널리 알려진 가까운 과거이지만, 소설로 접하니 이 정도로 야만의 시대였나 싶을 정도다.

과거의 부조리한 현실은 세대를 건너 주인공이 가슴으로 낳은 아들에게도 이어진다.

고용의 책임 구조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플랫폼 노동이라는 형태로 교묘하고 잔인하게.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보니 더 새롭고 선명하게 현실이 보인다.


주인공의 눈에 비친 인간은 답 없는 존재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희망 또한 인간에게 있다.

효율성과 이성만을 중시했던 주인공은 서서히 인간의 감정을 알아가며 누구보다 인간적인 모습으로 변화한다.

이 같은 주인공의 변화가 이와아키 히토시의 SF 만화 <기생수>의 주인공 '오른쪽이'의 심리 변화 과정과 비슷해서 인상적이었다.

'오른쪽이'도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인간의 여유야말로 멋진 거라며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던가.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스포하지 않겠다) 역시 '오른쪽이'처럼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런 인간적인 선택을 하는 인간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삐걱거리면서도 굴러가는 게 아닐까. 

재기발랄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이 별이 마음에 들어 - 제11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이 별이 마음에 들어 - 제11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백지영 장편소설 『하우스푸어 탈출기』(알렙)

평생 셋방을 전전하며 살다가 영끌해 평생소원인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

그런데 세입자를 들일 때마다 문제가 생기고, 얼마 안 되는 월급은 버는 족족 주택담보대출 이자를 갚는 데 써야 한다.

어깨에 짐처럼 짊어진 집을 끝까지 지키는 게 옳은지, 집에서 벗어나는 게 옳은지 고민하던 주인공.


그런 주인공에게 더 큰 고민을 짊어지게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회사 후배 직원이 상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호소하다가 억울하게 회사에서 쫓겨났는데, 공교롭게도 주인공은 성추행 현장을 촬영한 사진을 증거로 가지고 있다.

후배의 처지는 가엾지만, 괜히 나섰다간 상사에 밉보여 회사에서 쫓겨나 월급이 끊겨 이자 상환이 밀리고 집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주인공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 작품은 부당한 현실과 작은 양심 사이에서 고민하는 주인공을 통해 소시민의 작은 양심에 따른 행동이 이 사회를 지탱해주고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다소 뻔한 질문과 결론을 담은 착한 소설이지만,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페이지를 넘기면서 고개를 끄덕일 때가 많았다. 

사실 나는 이 작품에 담긴 메시지보다 오랜 셋방살이의 설움을 다룬 핍진한 묘사에 더 공감했다.

내 가족은 어린 시절에 정말 많이 이사를 다녔고, 꽤 오랫동안 단칸방에서 살았다.

어느 순간 동네 아이들 모두 유치원으로 가서 나만 홀로 공터에 하루 종일 남았던 일, 달동네에 산다고 부잣집 녀석들이 던진 돌에 맞아 코가 부러졌던 일,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다가 거기에 사는 아이들이 경비원에게 고자질에 쫓겨났던 일, 장마철에 집안에 물이 차서 자다가 일어나 쓰레받기로 물을 빼냈던 일 등 잊고 살았던 기억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소싯적에 지지리도 없이 살았다면, 울컥할 부분이 많은 작품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단 한 번도 이사를 가본 적이 없고, 평생 부모님과 함께 자가주택에서 살아왔다고 쑥스럽게 고백한다.

본인 경험 없이는 이렇게 자세히 쓸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반전이었다.

살짝 배신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철저한 취재가 실감 나게 소설을 쓰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해준 작품이었다.

하우스푸어 탈출기
하우스푸어 탈출기
배명훈 연작소설집 『화성과 나』(래빗홀)

소싯적에 과학자를 꿈꾸며 <학생과학>이나 <과학동아> 같은 잡지를 열독했던 시절이 있었다.

과학 잡지답게 우주 탐사를 주제로 다룬 기사와 사진이 많이 실려 있었는데, 지금까지 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건 튜브에 담긴 우주식량을 짜 먹는 비행사의 모습이다.

식사하는 비행사의 표정이 딱히 즐거워 보이진 않았지만, 나는 그 맛이 정말 궁금해 미치는 줄 알았다.


지금이야 튜브 안의 내용물이 유동식일 테고, 지구에서 차려 먹는 음식보다 맛이 없다는 걸 충분히 짐작하지만, 어린 시절 내 눈에는 그저 맛있어 보였다.

이젠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음식은 식량보다 사료에 가깝다는 걸 알기에, 비행사들이 당시에 얼마나 고생했을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요즘 우주비행사는 과거보다 음식다운 음식을 먹는 듯하지만, 잘 해봐야 동결건조 제품이나 통조림이더라.


매일 레토르트 식품을 먹는 상상만 해도 지겨운데, 먼 훗날 화성 탐사를 하게 될 우주비행사는 어떤 음식을 먹으며 생존하게 될까.

진정한 화성 거주는 정착한 인류가 지구에서처럼 평범한 일상을 보내게 될 때 가능하지 않을까.

이 연작소설집에 실린 여섯 단편은 그런 관점에 따라 화성에 정착한 인류의 삶을 현실적으로 그린다.


미래의 발달한 과학이나 과학기술을 다룬 전형적인 SF를 기대하고 읽는다면 지극히 지구다운 사건과 묘사에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화성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살인사건을 해결해야 하고(붉은 행성의 방식), 뜬금없이 간장게장을 먹고 싶어 고군분투하며(위대한 밥도둑),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사랑이 싹 트고(행성봉쇄령), 심지어 부동산 투기도 한다(나의 사랑 레드벨트).


이 연작소설집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쓸모없는 사람이 화성으로 건너가는 순간부터 문명이 완성된다(김조안과 함께하려면)는 작가의 관점이었다.

정착에 필요한 기술과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만 채워지면 100년이 지나도 사회가 완성되지 않으며, 쓸모없는 사람이 건너가 다음 단계를 위해 지금을 희생하지 않고 당장 행복해질 궁리를 할 때 비로소 문명이 완성된다는 관점.

이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관점이었고, 대단히 설득력이 있었다.


과학 기술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려면, 그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하고 이에 대응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인문학적 사고가 필요한 이유다.

내게 이 연작소설집은 먼 훗날 화성에 어떤 사회가 들어설 것인가를 예측하고 인문학적 관점에서 들여다본 훌륭한 보고서로 읽혔다.


화성과 나 - 배명훈 연작소설집
화성과 나 - 배명훈 연작소설집
이태관 시집 『어둠 속에서 라면을 끓이는 법』(현대시)

연근조림, 순간, 아욱국, 고등어조림, 땡초전, 양꼬치, 골뱅이무침, 순두부, 취하, 오징어볶음, 아귀찜, 청국장, 굴국, 동태찌개, 김치찌개, 깻잎전...


읽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아는 맛들이 크고 작은 일상과 버무려져 시어로 펼쳐지니, 읽으면 괜히 배가 고파지고 기분이 짠해지는 시집이다.

달아오른 숯에 닿은 양꼬치 기름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흩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를 생각하고(양꼬치), 매콤한 감자 짜글이를 먹으며, 아버지를 선산에 묻고 내려오던 길을 떠올린다(감자 짜글이).


때로는 시 자체가 레시피이기도 하다. 

오징어볶음을 만들 땐 식감 살리기 위해 1.5센티 몸통과 다리를 잘라야 한다고 조언하고(오징어볶음), 개성 강한 재료를 하나로 묶어 전으로 만드는 재료는 계란(깻잎전)이라는 식으로.


시집을 덮으며 누렇게 변해 들뜬 벽지와 그 벽지에 튄 김칫국물, 그 남루하지만 따뜻한 방안에 놓인 양은밥상을 떠올렸다.

정겹고 괜히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풍경이다.

시집은 소설책보다 얇지만, 시집에 담긴 이야기는 소설책보다 두껍다.


어둠 속에서 라면을 끓이는 법
어둠 속에서 라면을 끓이는 법
이경준 평전 『카펜터스』(그래서음악)

내가 카펜터스(Carpenters)에 관해 아는 건 그리 많지 않다.

'Top of the world' 'Yesterday once more' 등 멜로디가 좋은 히트곡을 여럿 가진 미국 출신 남매 듀오라는 게 내가 아는 전부다.

카펜터스가 활약했던 시대는 1970년대이고, 나는 그때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자세히 아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테다.

달달한 음악은 내 취향이 아니기도 했고.

그런데도 이 책을 사서 읽은 이유는 <딥 퍼플> <주다스 프리스트> 등 저자의 전작을 읽으며 쌓인 신뢰 때문이다.

지금까지 록을 주로 다뤄온 저자가 의외의 뮤지션을 다룬 단행본을 냈다면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다.


이 평전은 카펜터스의 멤버인 캐런 카펜터와 리처드 카펜터의 인생을 따라가며 그들의 음악 여정에 담긴 의미를 친절하게 짚는다.

그 과정에서 동원되는 다양한 참고 자료와 문헌이 생생함을 더하고, 저자는 애정을 담은 사견을 곳곳에 보태며 추임새를 넣는다.  

나는 음악 관련 책을 읽을 때 늘 그래왔듯이, 이 평전을 읽을 때도 카펜터스의 앨범을 연대기 순으로 들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놀라웠다.

과장을 보태자면 카펜터스의 노래 대부분이 내 귀에 익었다.

듣다가 "이게 카펜터스의 노래였어?" 하며 노래를 다시 확인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음악을 업으로 삼지 않는 내게도 카펜터스의 노래가 이렇게 익숙한데, 프로 뮤지션들의 귀에는 오죽할까.

실제로 이 평전은 활동 당시 평론가들에게 평가절하당했던 카펜터스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재평가받았으며, 오늘날에는 수많은 뮤지션이 카펜터스의 열혈 팬을 자처하고 있음을 밝힌다.

다양한 근거를 바탕으로 저자는 카펜터스가 당대 어떤 뮤지션보다 솔직하게 인간의 감정을 표현했고, 그 때문에 정당하지 못한 비난을 받아왔다고 변호한다.

카펜터스를 잘 몰라도 괜찮다.

이 평전에 실린 플레이리스트가 가이드 역할 해줄 테니 말이다.


이 평전을 읽는 내내 나는 엉뚱하게도 밴드 본 조비(Bon Jovi)를 떠올렸다.

몇 년 전 본 조비 내한 공연에 갔을 때, 나는 밴드의 모든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놀랐다.

본 조비는 학창 시절 내게 '겉'으로는 타도의 대상이었다.

순수한 헤비메탈 세계에 감히 팝을 몇 방울 떨어트린 부정한 존재.

하지만 본 조비의 음악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간증하듯 더 센 음악으로 본 조비를 씻어내곤 했다.

시간을 거슬러 학창 시절의 나를 만나는 기회가 생긴다면,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며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Kill Bon Jovi 외쳤던 밴드들 다 죽었다 이 놈아!"


카펜터스
카펜터스
은모든 장편소설 『한 사람을 더하면』(문학동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포르투갈 전 총리 같은 독재자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20세기 소년>에 등장하는 '피의 그믐날' 이후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날이 오면 이 작품 속 대한민국과 비슷하지 않을까.


이 작품은 코로나19 같은 팬데믹이 몇 차례 더 벌어지고 경제 위기가 심각해진 2040년대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적당히' 무너진 세상을 겨우겨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그린다. 

작품 속 대한민국 국민의 생활 수준은 계란 한 알 먹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거보다 열악한데, 디스토피아라고 부르기엔 뭔가 하찮다.

천천히 침몰하는 거대한 배, 천천히 끓는 물 속 개구리 같은.


지속된 경제 위기 때문에 안 그래도 낮은 출생률은 더 낮아지고 노년층이 급증하자 정부는 독신세 부담을 점점 늘린다.

이 같은 설정을 소설로만 받아들이긴 곤란하다.

대한민국은 이미 기혼자가 미혼자보다 각종 소득공제를 더 받는, 소극적 형태의 독신세를 거둬들이고 있다.

또한 여기저기서 독신세 논의도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대놓고 독신세라는 이름은 아니어도 사실상 독신세 역할을 하는 제도가 만들어지고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작품 속 대한민국 국민은 '집합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이뤄 독신세 부담을 줄이려고 한다.

쉽지 않은 선택이다.

집합가족의 결은 혈연으로 이뤄진 가족과 다르다.

혈연으로 이뤄진 가족과 달리 집합가족은 서로의 쓸모를 증명해야 하고 동시에 실제 가족과 같은 유대 관계를 소망한다.

그러다 보니 집합가족을 찾는 이들이 모이는 '무도회장'은 늘 눈치 싸움으로 바쁘다.

이게 과연 소설로만 그려질 미래일까? 

미리 미래를 엿본 것 같은 섬뜩함이 느껴졌다.


과일 한 번 먹는 게 연례행사와 다름없을 정도로 경제 상황이 열악한데도, 대놓고 정부에 불만을 터트리는 이들은 많지 않다.

정부가 언론을 극도로 통제하고, 공연하게 재력을 과시하는 행위를 막아왔기 때문이다.

이웃이 모두 가난하고 부자가 어떻게 사는지 잘 모르니 비교 대상이 없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마치 중국의 현재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중국은 최근 SNS에 재력을 과시하는 행위를 대대적으로 단속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부자들이 사라질까?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호의호식하며 살지 않을까?

이 작품 역시 부자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은밀하게 더 큰 부를 쌓고 있음을 수시로 암시한다.

그것도 지독하게 불법적이면서 비윤리적으로... 

이 작품은 언로를 막은 자본 독재가 눈부시게 발전하는 과학기술과 결합할 때 어떤 살풍경이 벌어지는지를 담담하고 서늘하게 묘사한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변화와 희망의 시작은 개인이라고 이 작품은 강조한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이렇게 제목을 지은 이유가 궁금했는데,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다소 심심한 마무리이지만, 이 마무리보다 더 나은 마무리를 상상하긴 어려웠다.


결론은? 투표를 잘하자.

한 사람을 더하면
한 사람을 더하면
최유안 연작소설 『먼 빛들』(앤드)

최근 들어 한국 문학계에서 보이는 중요한 흐름 중 하나는 일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소설이 과거에 없진 않았지만, 최근에 노동을 다루는 소설은 노동 그 자체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념을 강조했던 과거 노동 소설과 차이를 보여준다.

나는 현실에 발붙인 서사를 사랑하고 그중에서도 땀 흘리는 소설을 편애한다.


그런데 그런 소설을 읽다 보면 일부 노동 현장이 비어있음을 느낄 때가 많다.

그중 하나는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노동인 막노동이 이뤄지는 현장이다.

이는 나를 포함해 작가 대부분이 막노동을 구체적으로 경험한 일이 드물고, 막노동 현장을 오래 경험한 사람은 자기 경험을 굳이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평생 막노동을 한 아버지는 내게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밝힌 일이 없다.

최근에는 나재필 작가의 <나의 막노동 일기>, 천현우 작가의 <쇳밥일지> 같은 산문집이 소설의 공백을 채우는 모양새다.


막노동만큼이나 소설에서 소외된 노동 현장은 전문직, 그중에서도 여성이 전문직으로 일하는 현장이다.

언젠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이런 문제를 본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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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아버지는 현장에서 즉사했고 아들은 중상을 입은 채 병원 응급실로 실려 왔다.

응급실에서 의사가 소년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난 수술 못 해요. 이 소년은 내 아들입니다.”

의사는 왜 이런 말을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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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의 정답은 "의사가 아들의 어머니"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답을 찾지 못한 이유는, 의사라는 직업에서 자연스럽게 남성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얼얼한 기분을 느꼈다.

전문직 종사자는 남성이라는 고정관념이 이렇게 무서운 거다.


이 연작소설은 여성 전문직이 일하는 현장을 구체적으로 다룬, 현재 한국 문학계에서 매우 보기 드문 작품이다.

이 연작소설에 실린 주인공은 미국에서 한국의 법대로 스카웃된 교수,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 센터장, 비엔날레 예술 감독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꽤 높은 대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 힘을 쓸 수 있는 직업군이다.


다들 우아한 삶을 살 것만 같은데, 속내를 들여다보면 저마다 겪는 고충이 만만치 않다.

상대방이 대놓고 막 나가면 소리 높여 따지기라도 할 텐데, 점잖은 척 말의 칼로 푹푹 찔러대니 속수무책이다.

주인공들은 부조리를 해결하려면 어떻게든 힘을 키워 더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하고,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이용해야 하며, 사랑만으로는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알기 싫어도 알아나간다.


여성가족부의 ‘2021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4급 이상 국가직 공무원 중 여성의 비율은 17.8%로 2010년(6.3%)에 비해 11.5%포인트 상승했다.

공공기관, 지방공사와 지방공단 및 500인 이상 민간기업의 관리자 중 여성 비율도 2010년 15.1%에서 2020년 20.9%로 상승했다.

고위직 및 전문직 여성 종사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남성보다 소수라는 점은 변함없다.


정책을 결정하는 집단의 다수가 동질하다는 건 건강한 현상이 아니다.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간에 다수의 시각으로 만들어진 정책은 소수를 자연스럽게 소외시킬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백날 그런 분석을 보여주는 보고서를 쏟아내 봐야 보통 사람은 공감하기 어렵다.

나는 소설이 공감대 형성을 위한 훌륭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읽기는 가장 저렴하게 다른 삶을 간접 경험하는 방법이니까.

그리고 보고서를 읽고 분석하는 일보다 훨씬 재미있다.

특히 사회 진출을 앞둔 청년에게 이 연작소설을 추천하고 싶다.

덤으로 작가의 전작인 장편소설 <백오피스>도 함께.

먼 빛들 - 앤드 연작소설
먼 빛들 - 앤드 연작소설
문진영 소설집 『최소한의 최선』(문학동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존감이 바닥을 쳤던 때가 몇 차례 있는데, 그중 첫 번째가 고등학교 시절이다.

국민학교와 중학교 시절의 나는 반에서 1등을 도맡아 하던 우등생이었고, 앞으로도 1등은 계속 내 몫일 줄 알았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해 치른 첫 시험에서 나는 생전 받아보지 못한 등수(반에서 10등 이하, 전교에서 100등 이하)를 받았다.

처음에는 그저 실수라고 여겼는데, 거듭된 시험을 통해 그게 내 본래 실력이라는 점만 더 확실해졌다.

고등학교 3년은 내가 결코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매 시험을 통해 받아들여야 했던 시간이었다.


세상이라는 무대에 주인공의 들러리를 서고 싶은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들러리로 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당당히 그렇다고 말하기는 또 겸연쩍다.

나 또한 고등학교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느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만약 내가 3수를 시도했을 때 들인 노력을 고등학교 시절에 했다면 3수를 할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돌이켜 보니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최소한의 최선'을 했던 것 같다.

그땐 그 정도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고 느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아홉 작품 속 등장인물은 대체로 그런 사람들이다.

매사에 기운이 넘치는 사람을 보면 부럽고 그들처럼 살고 싶지만, 타고난 성향을 억지로 바꾸기가 쉽지 않은 사람들.

작가는 평범하게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의 쓸쓸한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를 통해 작가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몫만큼 '최소한의 최선'을 다한 평범한 사람들 때문에 주인공도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조심스레 묻는다.

빛이 있으니 그림자도 있는 것 아니냐고, 그림자는 그림자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답답하면서도 안쓰럽고, 외면하고 싶은데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문득 오래전에 읽은 '용기'라는 제목의 동시가 이 소설집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충분히 할 수 있어/사람들이 말했습니다/용기를 내야 해/사람들이 말했습니다/그래서 나는 용기를/내었습니다/용기를 내서 이렇게/말했습니다/나는 못 해요"


최소한의 최선
최소한의 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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