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저는 모 온라인 북클럽에, 동네 서점으로 참여를 했었습니다.
당시 진행했던 책은 [공포를 보여주마]였어요.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포의 임종 당시 그가 불렀다던 미지의 인물인 “레이놀즈”.
그 이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끝내 밝혀내지 못했어요.
작가는 여기에서 착안하여 포와 그의 가족, 지인들 그리고 레이놀즈를 등장 시켜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 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제목과는 달리 무섭거나 호러블 하지는 않아요.
북클럽에서 포와 관련된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그 때에는 왓챠에 “어셔가의 몰락”.
이 한 편 뿐이라 날짜와 시간을 정해 왓챠 파티로 함께 봤어요.
(그 외 OTT는 파티로 보는게 안 되거나 아니면 포 관련 드라마, 영화가 없었어요)
1920년대 후반 아방가르드 예술 영화로 칭송 받던 영화로, 영상미는 몹시 훌륭했으나 사실 좀 어려운 영화이기는 했어요. (웃음)(프랑스 예술 영화니 뭐…네…)
흑백 필름으로 촬영 되어 대사도 몇 줄 없었지만 꽤나 고딕 호러적이며 으스스했었죠.
이 이야기를 왜하냐면요.
오늘 (10월 12일) 넷플릭스에 [어셔가의 몰락]이 8부작으로 공개 되었기 때문입니다!!
트레버 메이시가 제작했구요 (힐 하우스의 유령 제작한 분)
각 화 제목은 :
1.음울한 한밤중.
2.붉은 죽음의 가면
3.모르그가의 살인 사건
4.검은 고양이
5.고자질하는 심장
6.황금벌레
7.함정과 진자
8.갈까마귀
입니다.
애드거 앨런 포의 현대적 재해석.
엄청 흥미진진하지 않나요.
아직 “힐 하우스의 유령”을 넷플릭스에서 보지 않으셨다면 한 번쯤 보시기를 권합니다.
이렇게 호러의 붐은 차근차근 오는가 봐요.
카미유 베르호벤 형사반장 시리즈나 ‘프랑스 현대사 역사 스릴러 연작’과는 별개의 길지 않은 소품. 리안 모리아티의 『허즈번드 시크릿』과 살짝 비슷한 분위기의 드라마다. 사람을 다치게 할까봐 운전도 꺼리는 나에게는 정말 무서운 이야기였다.
『오르부아르』의 속편이지만 전편을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 『오르부아르』에서 10년이 지난 1920년대 말을 배경으로 한다. 르메트르는 이런 식으로 프랑스 현대사를 10년 단위로 쪼개 그에 해당하는 장편소설을 한 편씩 발표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 엄청난 야심이 부럽다. 소설은 전편만큼 흥미진진한데 그래도 복수는 조력자 없이 홀로 해내야 제 맛이지 않나 싶다.
아직도 동아일보에 남아 있는 기자 동료 중에 나와 가장 친한 이는 위로는 M 선배, 아래로는 K 후배다. 다른 선후배들이 만나자고 연락을 하면 모르는 척 할 때도 있지만 그 둘의 요청에는 늘 응한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 어느 날 K와 내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를 본 HJ는 “둘이 사귀냐”며 웃은 적이 있다.
제주로 떠나기 전 M 선배와 K 후배가 각각 만나자고 연락을 해 왔고, 서울에 돌아와서 그들을 각각 따로 만났다. 나는 M 선배와 K가 서로 친하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와 만나기 전날 그 둘은 함께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고 한다. 술집에서 마시다가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오후 10시에 문을 닫자 사무실로 들어가서 차를 마셨다나.
K는 나와 저녁을 먹고 싶어 했으나 내가 점심에 만나자고 했다. 저녁에 만나면 술을 마시게 될 텐데, 특히 K와는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와 마시면 즐거워서 항상 과음하게 된다. 작년에 술을 마시다 필름이 끊긴 적이 딱 한번 있는데, 그게 K와 마실 때였다. 게다가 K는 간이 아주 안 좋다. 나는 진지하게 그의 건강을 걱정한다.
우리는 서울역사박물관 근처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날씨 좋은 봄날이었다. 나는 샌들을 신고 나갔고, K는 선글라스를 쓰고 왔다. K가 맥주를 마시자고 꾀었지만 나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냥 저녁에 만날 걸’ 하고 생각을 하기는 했다.
공교롭게도 K는 출판팀장이 되어 있었고, 문학 담당 후배를 두 사람 데려 왔다. 내가 퇴사한 뒤에 입사한 기자들이었다. 뭐, 나도 취재원이기는 하니까……. 그런데 그 후배들을 두고 K나 나나 옛날이야기들만 자꾸 하게 되었다. 내가 기자였던 시절 만났던 전직 동아일보 기자 선배들과 다를 게 없었다.
K는 내 신작이 언제 나오느냐고 물었는데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문학 담당 기자들에게 요즘 출판계의 재미있는 이슈는 뭐가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들의 답 중에 내 흥미를 끄는 이야기도 거의 없었다. 출판사가 운영하는 카페나 작가가 운영하는 출판사 이야기가 조금 재미있었지만 처음 듣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제주 이야기에 후배들이 반응했다. 한 달 간 그냥 여기저기 머물며 여행했다, 내려갈 때까지만 해도 언제 올라올지 정하지 않고 갔다, 여행 후반부 일정도 제주도에 가서 계획했다는 이야기에 기자들은 꿈같은 소리를 듣는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좋은 경험을 한 것 같다.
이날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서 HJ와 산책을 나갔다. 그 한 달 사이에 공원 주변으로 못 보던 가게들이 몇 곳 생겨 있었다. 경기가 좀 살아나나? 특히 분위기가 괜찮은 술집이 두 곳 들어서서 반가웠다. 편의점에 가서 맥주를 사 마시려다 그런 바 중 한 곳을 발견했다. 벽면에 통창을 내고 정육점마냥 붉은 조명을 단 인테리어가 근사했다.
즉흥적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손님은 우리뿐이었고, 남녀 직원은 아르바이트생인지 장사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잘생기고 예쁜 두 젊은 직원이 서로 사귀는 건지 썸을 타는 건지 무척 친근했는데, 보기 좋았다. 어둑어둑하고 붉은 조명 때문에 환상의 공간 같기도 하고 귀신이 나올 거 같기도 했다. 음악도 좋았다.
그러나 맥주는 테라와 코젤 다크 생맥주, 그렇게 딱 두 종류뿐이었다. 주로 칵테일과 위스키를 파는 매장이었다. 테라도 주문하고 코젤 다크도 시켰다. 안주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 소시지. 코젤 다크는 시나몬 가루가 뿌려져서 제대로 나왔다. 빔 프로젝터에서는 오래된 흑백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나왔다.
화장실이 가게 밖에 있고, 거기까지 가려면 자물쇠를 두 개나 열어야 한다는 점만 제외하고는 아주 훌륭한 가게였다. 그런데 손님이 하도 없는 데다 이 동네가 젊은이 취향이 그리 먹히는 지역도 아니어서, 머지않아 문을 닫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들었다. 당장 우리부터 바에 가기보다는 집에서 맥주 마시는 걸 더 편히 여기고.
코젤 다크는 나도 좋아하고 HJ도 좋아한다.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이 맥주를 좋아하지 않을까? 알코올 도수는 그다지 높지 않고, 적당히 달달쌉쌀하고, 어두운 색도 그럴싸하게 고상해 보이고, 사탄 숭배자가 그린 듯한 염소 그림 로고도 멋지다. ‘코젤’이 체코어로 염소라는 뜻이라고 한다.
처음 마실 때 놀랐지
무슨 맥주가 이렇게 달콤해
아내도 나도 좋아해
다음날 아침에는 칠레의 라디오 방송국과 줌으로 인터뷰를 했다. 한국 문학을 알린다는 취지로 기획한 시리즈 인터뷰인데, 나를 포함해 한국 작가 10명이 참여했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행사를 진행한 이는 나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아 뵈는 칠레의 기자였는데, 우리는 인터뷰 전에 서툰 영어로 한참 수다를 떨었다. 상대의 영어 수준이 딱 내 수준이었다.
그녀는 칠레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거의 아는 게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국토가 아주 길고, 피노체트와 이사벨 아옌데 같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고, 옆 나라 아르헨티나와 달리 국민들이 꽤 원칙주의자 성향이 있다는 정도……? 그나마도 정확한 얘기인지 모르겠다. 인터뷰를 할 때에는 통역을 통해 했다.
오후에는 동물병원에 가서 새롱이에게 항체가 제대로 생겼는지 검사를 받았다. 새롱이는 이 동물병원 수의사와 간호사에게 엄살이 심한 개로 찍혀 있다. 원래 이날 동물병원에는 첫째 조카와 같이 가기로 했는데, 조카가 막판에 친구와 놀이터에서 함께 놀기로 했다며 약속을 취소했다. 아이에게도 나름의 일정이 있다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동물병원에서는 새롱이의 고환이 아래로 다 내려왔다며 다음 주에 중성화 수술을 하자고 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어두워졌나 보다. 중성화 수술이 개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며 수의사가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나는 그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현대 도시에서 살기 위해 인간도 개도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다.
저녁에는 HJ와 함께 새롱이를 산책시켰다. 봄날, 잎이 무성해진 나무 아래 사랑하는 여인과 사랑하는 개와 함께 걸으니 정말 행복했다. 잊지 않기 위해 이렇게 써둔다.
부모님 댁에 가서 새롱이를 씻겼는데 개는 아주 질색 팔색을 하며 물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개를 제대로 씻기지 않으면 어머니가 질색 팔색을 한다. 그런데 어머니가 바닥이 더러워지는 것을 염려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나를 몰아붙이는 시간을 즐기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솔직히 든다.
The Price of Time: The Real Story of Interest
'금리의 역습'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처음 책장을 열고 읽기 시작했을 때 단순히, 이자란 무엇인가?하는 등의 일종의 경제사라고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수메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고대 사회부터 이자란 개념이 있었고 왕성하게 신용경제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식의 淵源(연원)을 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기본적으로 21세기 통화정책에 대해서 하이에크의 입장에서 케인즈 경제학을 비판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저금리 정책에 대한 비판은 수단이고 본질적으로 케인즈 경제학에 대한 비판이다.
칼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부르조아 자본주의 경제의 폭력성은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출현에 의해 상당히 순화된다. 소위 서유럽과 미국 사회의 사회민주주의라 불리는 수정자본주의의 政體(정체)는 소비에트 혁명이후 공산주의의 도전에 대한 자본주의 사회의 응전의 산물로 봐야 한다. 하지만, 스탈린 시절의 대숙청, 그리고 마오 시절의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나타나는 사회주의의 급진성과 미숙함은 이상적 공산주의에 기대를 저버리게 하고 무엇보다 그 매력을 크게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상주의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설득이라면 ‘매력’은 인간의 감정에 대한 직접적 호소일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인간에 대한 영향력은 더 커보인다.
소련의 붕괴와 중국공산당의 개혁개방은 공산주의의 실패라고 널리 인식되고, 이것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가속 페달이 되었을 것이다. 맨처음 사회주의 혁명의 급진성에 상당히 쫄아 있던 자본가계급은 혁명 대신 사회민주주의란 타협안에 동의하게 된다. 하지만, 공산주의를 표방했던 현실의 사회주의의 문제점과 모순을 발견하자마자 그 틈을 예리하게 파고들어 공략하는 대담함을 보인다. 이런 배경 하에서, 신자유주의의 확산 과정을 설명하는 자카리 카터(Zachary D Carter)가 쓴 “존 메이나드 케인즈”(The Price of Peace:Money, Democracy, and the Life of John Maynard Keynes)를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같은 문제(21세기 선진경제에서 보이는 빈부의 격차와 사회적 분열,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쇠퇴)에 이렇게 서로 다른 해석과 처방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롭다.
에드워드 챈슬러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케인즈와 하이에크의 경제이론 또는 경제학을 대비 또는 대립시킨다. 그리고 하이에크 입장에 서서 현대 경제의 통화, 재정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서양철학사의 관점에서 이 두가지 이론을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소위 목적론적(Teleology)세계관과 생성론적(Ontology)이라는 이 우주를 바라보는 입장의 차이가 그것이다. 거시경제학의 이같이 서로 다른 시각을 한걸음 물러나, 보다 巨視的(거시적) 입장에서 바라 본다면, 즉, 세계와 우주를 바라 보는 고대로부터의 상이한 두 시각의 경쟁과 변증법적 종합의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근시적myopic 현재의 찰나를 사는 우리들(그게 아니라면 나)의 입장에서는 그럴 여유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유주의'는 전근대의 구속과 속박으로 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근대라는 새로운 인간 역사의 지평을 열게 해 준 복음gospel이었음에 틀림 없다. 그러나, 시장은 언제나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 내고 그 혁신의 결과 발생한 불평등과 불균등이 고착화되면 더 이상의 창조적 파괴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때의 자본주의는 수정이 필요하고 규제가 필요해진다. 그래서 수정자본주의, 혼합경제가 필요한 것이다.
자카리 카터의 책, The Price of Peace와 에드워드 챈슬러의 ‘The Price of Time’이라는 두 개의 ‘가치Price’는 같은 이름이지만 각각의 평가(Appreciation) 척도가 이렇게 相異(상이)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이 참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기본적으로 케인즈의 입장을 옹호하는 편인 것 같다.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내면서 그 불편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부분적으로 에드워드 챈슬러의 비판과 지적질은 귀담아 들을 내용이 상당히 많다고 스스로 위안도 해 보았지만 거의 소용이 없는 일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을 끝까지 읽고 완전히 덮을 때까지 좌불안석이었다.
‘아시아의 힘’ 그리고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근대화’의 성공 요인을 모두 산업화 이전 농업부분에서의 토지개혁과 같은 혁신, 창조적 파괴에서 찾고 있다. 산업화가 시작되기 위한 보다 평등한 출발 조건들을 갖춘 사회 즉, 다시 말해 창조적 파괴가 가능한, 혁신이 가능한 조건들은 보다 경제적, 정치적으로 민주화된 사회에서 가능했고 그것이 바이럴처럼 민주화된 사회로의 지속적 발전을 담보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슘페터 역시 하이에크의 동료였다. 에드워드 챈슬러는 슘페터의 자본주의의 '창조적 파괴'란 개념이 다윈의 진화론, 적자생존 개념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자율이 그런 자연선택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해 열등한 것들, 다시 말해 경쟁력 없는 산업, 좀비 기업들을 시장에서 퇴출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전경제학의 시장 만능주의가 전부라고 한다면 산업혁명을 기폭제로 한 근대사회의 출현 자체가 모두 부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계몽사상에 기반한 근대 과학의 성취는 자연에 대한 대한 인위적 조작manipulation을 통해 생산력의 폭발적인 증가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에만 맡겼다고 한다면 근대사회의 출현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인간 문명은 자연에 대한 인위적Artificial 공작의 결과물이다. 고전 경제학이 말하는 Laissez-faire와 같은 자유주의적 경제질서에만 의탁하게 되면 그 최종 결과는 록펠러의 독점, 카네기의 독점이란 사실이 역사적 실증되고 있다. 완전한 자유주의적 경쟁의 최종 결과물은 독점, 완전한 약육강식, 카스트 생태계의 구현이다.
통화정책이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엘리트 계급, 이들 지배계급이 주도하는 대중매체의 선전과 선동에 춤추는 대중들의 변덕과 근시안은 이미 처음부터 평평한 운동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1999년 빌 클린턴 시절에 Banking Act of 1933 (Glass-Steagall)가 철폐된다. 이는 대공황 이후 만들어진 은행의 방만한 투자에 대한 규제를 해제하는 조지였다. 2000년의 닷컴 버블이 있었다. 2001년에 중국의 WTO가입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투표로 결정되지는 않았다. 정치, 경제 엘리트들의 결정이었다.
하지만, 또 그들을 마냥 비난할 수가 없다. 이 책의 저자처럼 모든 것을 연준의 통화정책 탓으로 돌릴 수가 없다.
사회과학은 자연과학이 아니다. 또 경제학은 20세기 미국에서 계량화 되면서 정치적 요소들을 거세해 버린 듯 하다. 정치경제학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정해 보인다. 미국은 신자유주의 드라이브를 통해 숙적 소비에트 연방을 무너뜨렸다고 믿었고 모두가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자유주의와 세계화 전략을 취하는 게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고 수순이었을 것이다.
정치적 상황은 항상 변하고 때론 케인즈에게 갔다가 때론 하이에크에게도 귀를 기울여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케인즈에 더 끌리는 것이 사실이다.
회사 상사에게 "이건 잘못됐다."라고, 시어머니에게 "그건 싫다." 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가 무서운 거야. 걔들한테는 지금의 생활이 주는 안정감과 예측 가능성이 너무나 소중해.
p.121
영화가 궁금하지만 제주에 사는 일반 사람이 볼 수 있는 영화 채널이 없기에 책을 사서 읽었다.
추석이 끝나자 마자 빗발치는 "우리 만나자~"
문자를 이 핑계 저 핑계로 거절했다. p.121에 나오는 장면은 명절마다 여기 저기에서 목격 가능하다.
30년이 지나도록 반복되고 있으므로 내 친구들이 지겹다. 이 책을 확~ 면전에 갖다 주고 싶다.
잘 살고 공부 잘 하던 여자 애들이 결혼하고 나서는 저 모양이므로, 듣는 귀에서 진물이 난다.
"니들 남편과 상사와 시어머니가 더 불쌍해..."
라고 말해주고 싶다. 변할 생각 없는 삶을 살면서도 관음증에 걸린 채 관종이라며 변화를 위해 시도하는 다른 여성들을 수다에 끼워 넣는다. 알고 보면 나도 관종일텐데, 자꾸 그 자리에 부른다. 나의 현금흐름성 행복도 자산성 행복도 감히 따라 할 수 없어서 부럽지만 내가 무너지기를 바라는 친구들.
나는 상사가 싫어서, 시어머니가 싫어서 떠나지 않고 그대신 계란을 부지런히 그들의 얼굴에 던지며 말했다.
"싫은데요. 나는 내가 소중해요."
그래서 결국 그들이 항복했다. 그리고 우린 따로 또 같이 각자의 삶을 지지한다.
뒷담화보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들에게 최면을 걸면서 내 편으로 만들려면 나도 지지 말아야 한다. 이 생을, 그리고 타인에게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 지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당신이 아니고 내가 어떻게 사는냐.'가 매우 궁금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