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하면 히말라야밖에 떠오르는 게 없었는데, 그 히말라야를 등반할 때 길잡이를 해주는 셰르파가 직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가문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신기했다.
카스트제도라고 하면 그저 악습이라고만 여겼는데, 적어도 네팔에서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됐다. 네팔이 다민족 국가라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됐으니 말 다했다.
다름을 배척한다는 게 혐오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해왔기에 다르기 때문에 배척하지도 않지만 섞이지도 않는다는 네팔 사람들이 특성이 제일 신기했다.
그렇게 책을 읽는 내내 신기했다. 뭔가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는 기분이랄까. 아시아에 있지만 어쩌면 이제는 심정적으로는 서양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한 내 눈에 네팔은 신비한 동양(서양이 바라보는)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것 처럼도 보인다.
독서가 불법화된 사회. 책을 불태우는 사회. 생각이, 사유가 금지된 곳.
읽는 내내 포탄이 날아다니고 머리위로 폭탄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지하에 도서관을 만들고 살기위해,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 책을 읽어나갔던 사람들-다라야에 지하비밀도서관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어느 쪽이 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어떤 글에서 원래 인간의 고유함이라고 여겨지던 영역, 예를 들어 창작과 같은 영역마저 인공지능에 침범당하면서, 인공지능의 발전이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고 읽은 적이 있다.
의도한건 아닌데 요 며칠, 인공지능을 다루고 있는 책 두 어권을 읽다보니 역시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이기에 아직 인간도 다 헤아릴 수 없는 두뇌기능, 감정이라든지, 마음이라든지, 의식의 모든 부분을 다 탑재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과 어느 정도 엇비슷하게 만들어질 인공지능이 나타난다면, 그리고 그들에게도 의식이 프로그래밍된다면 과연 인간과 기계를 나눌 선은 어디에 그어질 것인가. 과연 그 선이라는 것이 존재할 것인가.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수많은 질문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책이다.
십대 때 신일숙님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서 본 "삶은 예측 불허. 그리하여 그 의미 를 갖는다"라는 강렬한 문장을 좋아했었다. 인간의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행복은 예측할 수 없을 때 더 크게 다가오고, 불행은 예측할 수 없을 때 감당할 만하다."(p119)고.
그러고보면 과학자나 작가 혹은 인문학 또는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어느 경지에 이르면 공통의 통찰력을 내놓게 되는가보다. 그 통찰력에 닿게되는 과정이 다를뿐.
그 통찰력을 내놓는 인간의 뇌를 들여다 보는 것...그를 통해 인간 그 자체를 이해하고, 사회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미래를 예측하는 일의 단면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