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식장, 보호소, 개농장, 도살장 등 ‘한국의 개 산업’ 현장을 구석구석 찾은 르포. 우린 아직 개들을 사랑할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신파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톤이 차분해서 다행이었다. 특히 영화 같은 도입부는 압도적. 뒤표지에 “동물이 대접받는 나라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는데, 나치 독일 같은 반례도 있다.
배경 스토리가 넷플릭스에 있는 Stowaway와 동일한 설정인데 Stowaway가 우주선 배경의 산소 부족을 활용했다면 이건 잠수정 내부의 산소 부족을 다루고 있다. 충분히 표절 이슈가 될만한 부분인데 영화가 총체적으로 엉망이라 아무도 관심을 안 갖게 된 듯. 사실 나도 이런 영화가 개봉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CG를 생각하면 제작비도 제법 많을 듯 싶은데 검색해보니 128억원. 손익 분기점을 못 넘겼다.
모호하게 샛길로 빠져버리기 쉬운 챗GPT 책 가운데 예제 프롬프트 등 비교적 실질적.
그 유명한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 이야기. 인간은 참 이상한 동물이다. 픽션을 던져주면 너무나도 성실하게 거기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 한다. 흥미진진하고 매우 불편하다.
촘스키가 ‘온갖 문제 전문가’로 나서 발언한 강연 원고와 인터뷰, 에세이 모음집. 베트남전에서부터 문법교육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주제에 대해 말한다.
대한민국 국민 중의 한 사람답게 원래는 배달 치킨을 즐겨 먹었다. 특히 금요일 저녁이 되면 왠지 뭐라도 시켜야 될 것 같고 괜히 술 한 잔 마셔야 될 것 같은 들뜸이 항상 있었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 마냥 아주 오랜 시간 학습된 패턴이다.
그러던 내가 배달 치킨을 점차 시키지 않게 된 계기가 있으니 바로 '에어 프라이어'의 구입이다. 주방가전계에 돌풍을 불러 온 이 제품을 한동안 여러가지로 외면하고 있다가 몇 년 전에 구입했는데 정말 신세계다. (여러가지 이유라고 썼지만 여러가지 아니고 한 가지 이유인데, 음식을 먹을 때 굳이 너무 맛있게 먹으려고 노력하지 말자!는 나름의 원칙을 따르기 위해서였다. 그냥도 맛있는 게 많은 세상인데 에어 프라이어까지 동원해서 그렇게 매일매일 맛있는 걸 먹어야 될까? 하지만 이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먹을 거 앞에 무심해지자고 매번 다짐하지만 나도 모르게 최선을 다해 맛있는 음식을 찾으며 음식과 궁합이 맞는 소스와 반찬 등을 준비하고 따뜻하게 데워먹는 등 온갖 노력이 저절로 기울여지고 있다.)
아무튼 에어프라이어 구입 후 냉동 치킨들을 여기에 조리해 먹으니 시중 치킨점을 능가하진 못해도 그 나름의 별미 역할은 한다. 그래서 한동안 치킨 배달을 안 시키고 있다가 그제는 오랜만에 주문을 해보았다. 오븐마루 현미베이크 치킨(순살)인데 겉에 현미후레이크(?)를 뿌려 바삭바삭하게 씹는 맛이 있어 약간 과자 먹는 것 같기도 하다. 맛은 괜찮지만 양이 좀 부족.
칼을 쓰는 것과 총기를 쓰는 건
다른 영역의 재능인데
사용하는 근육과 신경부터가 다르다.
길복순 여사는 총기가 금지된
동아시아 지역에 특화된 킬러로 칼을 쓴다.
AI로 대체되기 힘든 직업에 종사.
“문학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런 질문을 받으면 그냥 솔직히 말한다. “잘 모르겠습니다.” 삶이 뭔지 모르면서 살고, 문학이 뭔지 모르면서 쓴다.
어렴풋이 추측만 할 따름이다. 그건 언어로 하는 일이다. 사람을 사로잡고 뒤흔든다. 하지만 그 힘이 꼭 구원, 진리, 아름다움, 사회비판, 공감, 위로를 향하거나 거기에서 나오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기엔 예외가 너무 많다. 걸작들의 공통점은 오히려 ‘역겹고 소름끼치는 인물이나 장면이 반드시 있다’는 것 아닌가.
이문열 소설 『시인』에 젊은 김삿갓이 금강산에서 늙은 시인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시는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니라는 노인의 말에 지친 김삿갓이 “그럼 시는 도(道)냐”고 따진다. 노인은 자신이 ‘덜된 중놈이나 엉터리 도사’가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시가 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캐롤 스클레니카가 쓴 집요하고 고통스러운 평전 『레이먼드 카버』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다 서설이 길었다. 카버가 누군가. ‘내가 바로 문학이다’라고 외치는 듯한 사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십대에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나이 오십에 죽을 때까지 글쓰기에 매달렸다. 알코올중독을 심하게 겪고 두 번 파산하는 동안 주옥같은 단편소설을 쓰고, 마침내 술을 끊고, 주옥같은 작품을 더 쓰고, 명성을 얻고, 미국 단편소설의 르네상스를 주도하고, 전설이 되었다.
깜깜한 밤, 가로등이 없는 길을 자동차가 달리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다고 상상해보자. 길은 자동차 불빛의 궤적을 통해서만 제 모습을 잠시 드러낸다. 내게는 『레이먼드 카버』가 그런 자동차처럼 여겨진다. 한 작가가 평생에 걸쳐 추구했던 어떤 길, 그를 놔주지 않았던 ‘무언가’를 언뜻언뜻 보여주는 평전이다.
대작가가 아닌 우리는 그 힘의 형태를 이렇게 간접적으로만 볼 수 있는 것 같다. 카버 본인은 자기 공책에 이렇게 썼다.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걸 지금 원한다.’ 다른 공책에는 이렇게도 적었다. ‘이 모든 게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헛된 시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면 그는 그 ‘무언가’를 어느 정도 이루고, 그것이 무엇인지 거의 깨닫는 것처럼 보인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척 괴로운 책이다. 960쪽에 이르는 분량이 아니라 우상의 추락에 관한 얘기다. 카버는 그냥 술꾼이 아니었다. 그는 한동안 상습 가정폭력범이었고, 책에 묘사되는 폭력의 수위는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나는 423쪽에서 한동안 책 읽기를 멈췄다. 516쪽에 나오는 일화는 웬만한 공포영화 뺨친다. 읽으려는 분들은 꽤 각오해야 한다.
스티븐 킹, 클라이브 바커, 조지 R. R. 마틴, 닐 게이먼 등이 참여한 좀비 단편 앤솔로지. 소재를 한정하면 작가의 상상력이 더 자극된다는 좋은 증거 사례 아닐는지.
한 사조나 학자의 사상을 그 시대의 눈으로 한번, 현대의 관점으로 다시 한번 평가하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철학사 서적’에서 ‘철학 서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