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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7. 죽여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시작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과 너무 흡사해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는데 얼른 그 궤도에서 벗어난다. 주인공이 그렇게 힘들여 남의 복수를 대신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연쇄살인마니까?),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이고 다른 인물들도 다 시원시원하다. 하여튼 흡인력은 대단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
죽여 마땅한 사람들
24-011 | 이응준, 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

민음사 (231207~240119)


❝ 별점: ★★★★☆

❝ 한줄평: 주기적으로 다시 읽고 싶은 삶과 죽음 사이의 글들

❝ 키워드: 이별 | 인생 | 삶 | 죽음 | 시간 | 슬픔 | 사랑 | 마음 | 지금 | 행복 | 어둠 | 희망 | 사막 | 믿음 | 모순

❝ 추천: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빛과 어둠에 관한 글을 읽고 싶은 사람


❝ 어둠은, 삶으로 규명하면 밝아진다. ❞

/ 「이 어두운 세계의 빛나는 작법」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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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가 너무 슬퍼서 이 책을 어떻게 읽어갈지 걱정했는데 중간중간 분위기를 환기하듯 웃긴 부분들이 있어서 좋았다. 묵직하지만 너무 무겁기만 하지 않은 산문집이라 좋았다.


✦ 나의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빛과 어둠에 관해 계속 성찰하게 되는 글들이었다. ‘나’로 산다는 것은 아무도 나 대신 죽어주지 못하고, 아무도 나 대신 살아주지 못한다는 것(「이 어두운 세계의 빛나는 작법」). 내가 나의 등불이 되어 나의 어둠 속을 간다는 것(「잘못된 세계를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밤길」).


✦ ‘모든 사랑이란 결국 마음을 강하게 가지는 것’(「명왕성에서 이별」)이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을 강하게 갖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폭염서정(暴炎抒情)」)이라고 하시는 부분은 아직 잘 와닿지 않았다. 마음을 강하게 가지는 것을 넘어, 마음을 가지지 않게 되는 날이 오긴 할까? 언젠가 마주하게 될 이별의 순간에 다시 이 책을 꺼내 읽고 싶다. [📝 23/01/20]


(*민음사 이벤트 당첨자로 선정되어 도서를 증정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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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은 삶보다 위대하지 않다. 죽음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그의 삶이다. 죽어서도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천만 배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사람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위대할 필요가 없다.

/ 죽음에 관한 소견 (p.80)


| 사실상 인생은 시나 소설이 아니라고. 인생은 순간순간 한 편의 수필(隨筆)이다. 우리 모두는 시인이나 소설가나 수필가도 아닌 ‘수필인간(隨筆人間)’이다. 인생과 인간은 시처럼 비장하고 아름답지도, 소설처럼 풍성하고 구조적이지도 않다.

/ 수필인간(隨筆人間) (p.84)


| 문학은 정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 사라지지 않을 권리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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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
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
뿌리는 없고 가지만 남은 타이완 민주주의

*이 게시물은 2024년 1월 17일 경향일보의 오피니언에 게시된 '보석같은 대만 민주주의'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2024년 타이완에서 치루어진 선거에 수많은 관심이 쏟아졌으나 나는 오히려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타이완이라는 지역에 대한 관심은 하나도 없이 모든 문제를 양안관계에 종속시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들 은 말로만 '하나의 중국'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중국이 없는 한 타이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충실한 중화민족주의자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타이완의 민주주의가 백년이 넘은 중국인들의 투쟁의 결과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중국의 의회제 논의는 1900년대부터 본격화된다. 이러한 여론에 힘입어 중국 역사상 최초의 헌법초안인 1908년 흠정헌법대강이 반포된다. 그러나 청나라가 진지하게 내각제를 검토하지 않는다는 불만여론이 커져 결국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되고 황제는 퇴위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혼란으로 입헌시도는 현실적으로 난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여러 시도로 내전을 끝내는 시도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현실적인 진전은 없었다.


한편 중화민국 원년의 국민당을 복원하겠다는 의도하에 창설된 중국 국민당이 전국을 통일하면서 논의는 다시 진전되게 된다. (출처 :이승휘, 손문의 혁명) 국민당은 군벌들의 부패로 중화민국의 정통이 상실되었기에 혁명적 정당이 국가를 개조한다는 명목으로 일당독재를 실시한다.


이후 국민당 내부에서는 헌정을 준비하는 6년간의 훈정 시기간에 갈등이 벌어졌다. 후한민을 중심으로 한 국민당 당권파는 쑨원의 저작만이 임시 헌법의 권한을 가진다고 주장한 반면 국민당 좌익계열과 국민당 외부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임시 헌법을 통해서 정부의 정통성을 확보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갈등은 결국 중원대전, 1차 양광사변이라는 내전을 낳았으나 이러한 와중에서도 왕징웨이의 초안(타이위안 임시약법이라 불린다.), 쑨커의 초안(오오헌초라고 불린다.)이 발표되어 헌정 정치를 향한 시도는 지속되었다.


이러한 시도하에 1947년 마침내 중화민국 헌법이 반포되어 중국은 헌정체제로 들어간다. 그러나 국공내전으로 인하여 헌법은 또다시 무력화되었고 마지막 근거지로 철수한 타이완에서 국민당의 일당독재가 지속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간의 여러 시도가 벌어진 논의들은 헌법에 근거한 정치만이 정상적인 정치라는 것을 대다수 사람들에게 각인시켰고 본토 수복을 명분으로 철권통치를 강행하던 국민당도 결국 1992년 중화민국 헌법을 정상화시키면서 오늘날의 민주주의 타이완이 완성되게 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이러한 역사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망각되었다. 왠만한 중국 근대사 책을 집어보아도 중국 공산당의 투쟁과 혁명만 가르치지 그 동안 중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두어야할 사실은 오늘날 타이완의 민주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이룩된 것이 아니라 백여년 동안 축적된 중국인들의 노력이라는 기틀에 힘입은 바가 컸다는 사실이다.


나는 타이완이 중국의 일부냐는 명제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이 문제는 그것과는 '독립'된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타이완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이루어졌냐는 것이고 나는 그 관심사를 중국 정치사에서 일부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국민당 백색테러 시기의 타이완 민주 운동사는 다른 차원에서 논의될 문제다.)


그러나 타이완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수립될 수 있었는가는 무시한 채 반중 정권이 수립되었다, 민주주의의 승리 만세!를 외치는 것은 중국 공산당이 내부 갈등을 외부 분쟁으로 눈속임하려는 행위하고 유사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현상이 도출되었다는 것이지 실제는 관심없다는 고백이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새 총통의 이름을 못 외웠다는 언급은 의미심장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조금 더 특정한 현상이 지니는 바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러저리 세상의 풍파에 쉽게 화내고 웃어지는 가벼운 사람이 되고 말테니까.




의견 1 :박훈 교수는 의회를 시대와 국가를 불문하고 똑같은 의회 정치로 간주하는데 일본 근대사 전공자로서 굉장히 의아하게 생각된다. 일본부터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남성의 보통선거권이 인정된게 1925년인데 '개돼지가 뽑은 의원'이라는 명제가 당대 중국에서 수용될 수 있을까? 애초에 2차 호법운동에서 쑨원의 권위가 국회의원들의 임시선거에서 나왔는데 그럼 쑨원은 개돼지들의 임시대총통이었을까?


의견 2 : 한편 박훈 교수는 2007년 자신의 논문에서 중국 의회제의 논의를 1890년대 강유위에서 시작하고 있는데 1880년대에 이미 의회제에 대한 주장이 있었다는 점과 강유위의 의회방안은 법률심사권 없이 황제에게 건의만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이 부분은 솔직히 기억이 모호합니다. 기억이 맞다면 민두기 <중국근대개혁운동의 연구>가 출처일 것입니다. 아니라면 근거없이 허튼 소리를 한 바이니 미리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의견 3 : 동일한 논문에서 청조의 입헌 시도가 황제권 유지를 위해서라고 주장하지만 반대 의견도 있다. 예컨데 황제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근거를 천명 사상에서 헌법으로 전환하여 영국식 입헌제도로 추구할 목적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신우철 <청말 입헌군주제 헌법 소고> 참고.


의견 4: 동일 논문에서 중국에서 입법부의 의견이 제약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국회가 행정부보다 열세인 것은 정치,행정학의 문제지 역사학에서 다룰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의견 5: 동일 논문에서 오오헌초가 1934년 반포되었다고 언급하는데 실제로는 1936년에 반포되었다.

24-010 | 김소연, 촉진하는 밤

문학과지성사 (240103~240118)


❝ 별점: ★★★★

❝ 한줄평: 여러 의미를 품은 밤

❝ 키워드: 시간 | 밤 | 잠 | 생각 | 슬픔 | 진실 | 꿈 | 두려움

❝ 추천: 밤의 여러 이미지와 의미를 품은 시들이 궁금한 사람


❝ 밤은 사방에서 모여들어 아늑하게 내려앉고 있습니다 ❞

/ 「비좁은 밤」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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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연 시인의 시집은 처음 읽어본다. 문학동네의 시 뉴스레터 ‘우리는 시를 사랑해’의 필진으로 참여하시게 되었다 해서 그의 시가 궁금해서 읽게 되었다.


✦ 쉽게 읽히는 것 같으면서도 여러 번 곱씹게 되는 문장들에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시집은 아니었다. 단어와 문장들을 꼭꼭 잘 씹어서 소화하고픈 시집이었다.


✦ 제목 ‘촉진하는 밤’에서 알 수 있듯 ‘밤’을 담은 시들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은 적막 속에서 잠들지 않은 한 사람을 상상’(「이 느린 물」, p.22)하게 하고, ‘나를 숨겨주고 더 많은 나를 깊이 은닉해주는’(「푸른얼음」, p.70) 밤. ‘너무 많은 말들이 밤으로 밀려가고, 터덜터덜 걸어가고, 헤아리다 만 생각들이 밤에게 도착하고, 후회가 낮을 배웅하며 밤을 기다리고, 다시 밤은 사방에서 모여들어 아늑하게 내려앉는’(「비좁은 밤」, p.116) 것. 밤의 다양한 모습들을 본 것 같아 좋았다. [📝 24/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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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우리는 너무 떨어져 살아서 만날 때마다 방을 잡았다.

그 방에서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었고 파티를 했다.

자정을 훌쩍 넘기면 한 사람씩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지만,

누군가는 체크아웃 시간까지 혼자 남아 있었다.

가장 먼 곳에 사는 사람이었다.

건물 바깥으로 나오면

그 방 창문을 나는 한 번쯤 올려다보았다.


2023년 9월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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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커튼을 들추고 

  창문 앞에 서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창문 하나를 마주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은 적막 속에서

  잠들지 않은 한 사람을 상상했다

  

  저 사람은 불만 켜둔 채로 깊이 잠든 걸까

  불이 꺼진 어떤 방에도 잠들지 못한

  누군가가 있을까

/ 「이 느린 물」 (p.22)


 

  기다린다는 것은 거짓말

  그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야

  견디고 있는데 무엇을 위해 견디고 있는지를 더 이상 모르므로

/ 「2층 관객 라운지 같은 일인칭시점」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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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았던 시 


1부

✎ 「며칠 후」 ⛤

✎ 「촉진하는 밤」

✎ 「이 느린 물」 ⛤

✎ 「2층 관객 라운지」

✎ 「문워크」

✎ 「푸른얼음」 ⛤


2부

✎ 「꽃을 두고 오기」

✎ 「2층 관객 라운지 같은 일인칭시점」 ⛤

✎ 「비좁은 밤」 ⛤

✎ 「디버깅」 ⛤

✎ 「내가 시인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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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진하는 밤
촉진하는 밤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 - 가시와기 하루코

문학동네에서 만화책도 냈나? 싶어 살펴보니 그 유명한 <중쇄를 찍자> 도 문학동네에서 나왔구나. 만화책을 열심히 출간하고 있는 줄은 잘 몰랐다. 이 만화는 도쿄의 동구청 (아마도 동구는 가상의 행정구역인듯)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된 새내기 공무원 요시쓰네 에미루의 일화들을 통해 일본 사회복지제도의 허점과 현실을 살핀다. 다양한 소재를 다루는 일본만화의 저력을 이 작품에도 어김없이 맛볼 수 있다. 저자인 가시와기 하루코는 이 만화를 그리기 위해 사회 복지 일을 하는 사람들과 단체를 밀착 취재했다고 한다.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 1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 1
나이를 또 먹었구나

그제 아침 신한은행 본점쪽에서 북창동으로 건너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수문장 교대식을 하는 사람들이 남대문 시장쪽에서 대열을 지어 건너오고 있었다. 빨강, 노랑의 즐겁고 흥겨워 보이는 색조의 옷을 입고 건너편에 서 있는 수문장들은 나의 마음을 관광객으로 만들어 들뜨게 했다.


초록불로 바뀌고 수문장들은 대열을 맞춰 내쪽으로 왔고 나는 그들쪽으로 다가가며 가까워졌다. 가까이서 그들을 볼 때 앳돼 보이는 젊은이도 있고 어느덧 중년으로 접어든 것으로 보이는 분도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관광상품(?)이었던 그들을 덕수궁 앞이 아닌 건널목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 보니 생활인으로 보였다.


이 사람들은 추운 겨울 저렇게 입고 일하며 얼마를 받을까, 이 일을 즐기고 있나, 제대로 쉴 수는 있을까, 이 일을 본업으로 할까, 본업으로 하면 먹고 살 수는 있을까, 4대보험은 나올까, 정사원일까, 공부를 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걸까, 어린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고 가장인 사람이라면 배우를 하며 하는 일일까 등등.


부디 제대로 대우 받으며 이 일로도 충분히 생활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20대 때라면 그저 '와, 덕수궁 앞이 아니라 이렇게 마주치고 보게 되니 더 재미있네.'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랬던 것 같다.


나이가 들며 갑자기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것을 인지할 때가 있다.


생각해 보니 그 최초는 전경들이었다.


숭의여중, 여고를 다닐 시절, 안기부가 남산에 있을 때, 나는 충무로쪽에서 걸어서 학교에 등교했다. 데모가 한창이어서 올라가는 길에 전경들이 인도에 100m 정도 쭈욱 앉아 있었다. 10대 소녀인 나는 그런 군인아저씨들 코앞에서 걸어가며 받는 시선이 너무 싫었다. 특히 조례와 예배가 있는 월수는 치마를 입고 등교해야 했는데 걸어올라갈 때 치마가 자꾸 무릎 위로 말려 올라가 손으로 잡아내리며 가는 그 100m는 수치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대학신입생이 되며 전경들은 나를 감시하는, 아무 잘못이 없어도 잡혀갈 것 같은 두려운 존재가 되었고, 친구들이 입대하며 친구들로 보였고, 남동생이 입대하자 동생처럼 보여 애틋했고, 더 나이가 드니 귀여워 보였다.


같은 사람들인데 조금은 무섭고 징그럽게 느껴지던 사람들이 귀엽고 사랑스럽고 안쓰러워졌다.


소녀 같고,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진 나도 좋았지만 인간을 좀 더 인간답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역시 나이가 들어야 하는 것 같다. 좀 더 완고해지기도 하지만 좀 더 너그러워지기도 한다.

즐거운 시선을 잃지 않고 완고해지지 않고 넓어지며 나이들 수 있기를.

24-009 | 김기태, 성해나, 예소연, 소설 보다 : 겨울(2023)

문학과지성사 (231216~240117)


❝ 별점: ★★★★☆

❝ 한줄평: 서로 다른 혼란스러움을 겪는 세 편의 이야기

❝ 키워드: 교육, 보편성 | 믿음, 진짜와 가짜 | 은총, 열망

❝ 추천: 강렬하고도 아련한 소설들이 궁금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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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대했던 만큼이나 좋았던 이번 겨울 소설집. 새로운 작가님들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읽어본 적 있는 작가님의 새 작품을 만나는 것도 늘 설렌다.


✦ 특히 성해나 작가님의 단편 「혼모노」의 강렬함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읻다의 『여름 기담: 매운맛』에 실린 작가님의 단편 「아미고」가 참 좋았기 때문에 이 단편도 기대를 하고 읽었는데 마지막 결말부가 머릿속에 그려지며 소름이 돋았다. 꽤 작품을 많이 쓰셔서 앞으로 찾아 읽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 겨울 눈송이를 닮은 표지 그림. 이 책을 끝으로 소설 보다 : 2023 시리즈를 모두 읽었다. 한 해를 네 권의 단편집으로 추억할 수 있다는 것, 참 낭만적인 것 같다. 특히나 좋았던 여름과 겨울의 소설집은 올해 여름과 겨울에 다시 꺼내 읽고 싶다. [📝2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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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보편 교양」

: 교육과 보편성, 파괴와 패배


| 곽은 상자 속에 있던 피낭시에, 혹은 다쿠아즈나 비스코티일 수도 있는, 유럽 어느 언어로 된 이름이 분명한 디저트를 하나 입에 넣었다. 역시 달콤했다. 경박한 단맛이 아니라 깊이가 있고 구조가 있는, 하지만 묘사해보려고 하면 이미 여운만 남기고 사라져서 어쩐지 조금 외로워지는 달콤함. 사람을 전혀 파괴하지 않고도 패배시킬 수 있는 달콤함.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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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나, 「혼모노」 ⛤

: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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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소연, 「우리는 계절마다」

: 누구나 혼란스러움을 겪었을 그 계절, 학창 시절


| 나는 지금도 인생이 적당한 시점에서 최악의 결말로 끝나버릴 거라는 염세적인 기분이 종종 들곤 한다. 하지만 최악의 결말은 존재하지 않고, 늘 최악의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건대, 그 감각은 세계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가해한 상황으로 구성되고, 나는 속절없이 휘말릴 뿐이라는 것을 그 시절에 이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p.13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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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언젠가부터 ‘가르치다’라는 말의 뉘앙스가 나빠졌지요. ‘왜 날 가르치려고 해?’ 같은 문장만 떠오릅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게 그렇게 나쁜가요. 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영향력을 주고받고 함께 변화하지 않고서 어떻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까요. (김기태 × 이희우, p.55-56)


| 그런 정보를 접하여 가짜나 거짓일지라도 다수 혹은 내가 믿으면 진실이 되어버리는 작금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단어가 ‘혼모노’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무속 역시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허위나 다름없지만, 그에 의지하는 이들에게는 신앙이 되잖아요.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진짜도, 가짜도 될 수 있는 기현상을 소설을 통해 재현하고 싶었어요. (성해나 × 소유정, p.109)


| 누군가의 삶은 안온한 사랑으로 충만하고 누군가의 삶은 치덕치덕한 불행으로 가득해요. 그 속에서 아이들이 갈구하는 ‘은총’이란 조금이라도 자신의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이 정처 없는 삶 속에서 갑작스럽게 내려지기를 바라는 단 한 줄기 희망이라고 생각했어요. (예소연 × 최선교,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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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겨울 2023
소설 보다 : 겨울 2023
876. 아메리칸 급행열차 (제임스 설터)

전투기 조종사였고, 참전 용사였고,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했으며, 마술 같은 문장들을 썼던 제임스 설터의 단편집. 마르고 무겁고 흐리터분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균열과 진실까지는 모르겠고, 가끔 이런 문장들을 아주 빠른 속도로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설터는 소설에 대한 기준이 높았고, 자기 작품에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아메리칸 급행열차
아메리칸 급행열차
875. 야경 (요네자와 호노부)

어느 것 한 편 거를 것 없이 다 좋고, 어느 것 한 편 예외 없이 다 어둡다. ‘소시민 시리즈’의 작가와 동일인이라는 게 안 믿길 정도. 곰곰 생각해보면 범인의 동기가 납득이 안 가거나 범인을 찾는 과정이 지나치게 우연에 의존하는 작품도 있긴 한데, 읽는 동안에는 서술이 하도 자연스러워 그런가 보다 하고 납득하게 된다.

야경
야경
12월 31일의 의식(儀式)

매년 한 해의 마지막 날 유서를 쓴다. 순서는 이러하다. 작년에 쓴 유서를 파일함에서 불러온다. 읽어보고 고치고 싶은 부분을 수정한다. 유서는 크게 정성적인 부분 (올해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나의 마지막은 이러저러하기를 바랍니다.) 과 정량적인 부분 (무슨무슨 은행에 얼마 있습니다, 무슨무슨 연금보험 들었습니다.) 으로 나누어진다. 두 부분을 모두 읽어보고 업데이트할 부분이 있으면 업데이트한다. 정량적인 부분이 매년 조금씩 늘어나는 것을 보는 것도 유서쓰기의 작은 즐거움이었는데 올해는 늘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줄었다. T.T


유서를 쓰고 난 뒤 과메기와 와인을 먹으며 남편과 각자 쓴 유서를 읽고 이를 녹음한다. 덤덤하다가 갑자기 이때쯤 되면 울컥하는 마음에 유서 읽던 목소리가 갈라지게 된다. 술기운이 조금 올라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나의 지난 삶이 통탄스럽고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 고맙고 미안해진다. 생각해 보면 별일도 아닌 걸로 다른 이들을 힘들게 했다. 같은 상황에서도 조금 더 온화하게 미소 지을 수 있었고 더 너그러울 수 있었다.  


매년 마지막 날 왜 하필 과메기와 와인이 등장하게 되었는지는 우연이다. 처음 유서를 쓰던 해,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와인이 집에 있어 그날 마침 땄던 것 같고 과메기도 평상시 잘 먹지 않는 음식인데 이맘때쯤이면 여기저기 눈에 자주 띄길래 한번 먹어봐야지 했었다. 그렇게 우연히 우리의 리추얼이 시작되었고 매년 반복하고 있다. 


과메기와 와인, 12월 31일에는 어떤 의미도 없을지 모른다. 과메기와 와인보다는 치킨과 맥주가 우리 부부의 취향이고 12월 31일과 1월 1일은 새 달력을 뜯는다는 것 이외에 조금도 다르지 않은 하루일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은 종래에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그래도 의식에는 힘이 있다. 아무것도 아니지 않고 싶은 나의 연약한 마음과 결심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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