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극장에서 자주 보는 편은 아닌데 영화 <노마드랜드> 는 개봉하고 얼마 안 되어 바로 보았다. 광활한 미국의 자연환경을 넓은 스크린에서 보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그즈음 회사생활에 마음이 떠서 결국 나도 노마드 인간이 되리라는 어떤 예감에서였는지는 모르겠다.
영화는 참 좋았다. 주인공 배우의 연기와 화면 위로 펼쳐지는 넓고 쓸쓸한 대지의 풍광, 담담한 음악도 어울렸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의자에서 일어나며 우리의 어떤 시절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착이나 안정 같은 것들은 어쩌면 내가 감히 꿈꿀 수 없는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에 나오지 않은 내용이 조금 더 궁금해서 책을 찾아 읽었다. 영화에는 밴에서 생활하는 여성들이 겪는 성적 폭력 문제가 나오지 않는데 분명 그러한 곤란함이 클 거라고 짐작했다. 책에도 관련된 내용이 별달리 묘사되지 않는 걸 보니 다행히 내 예상만큼 심하지 않나 보다.
궁핍한 노년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물론 우리 나라가 전 세계에서 노인 빈곤 문제로 1위를 찍고 있긴 하지만 미국에서도 밴에서 생활하는 이들은 대부분이 은퇴 시기를 훌쩍 넘긴 노인들이다. 그래도 그들은 아마존이라는 대기업에 취직되고 파트타임 일거리들을 찾고 서로 연애도 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미국이랄까…
안정적인 회사에 취직해 부지런히 일을 하다 점차 승진이 되고 월급을 받아 복닥거리며 아이들을 키우고 조금씩 돈을 모아 모기지로 집을 사고 차를 바꾸는 중산층의 생활. 이제는 안다. 이러한 삶이 얼마나 얻기 어려운 것인지. 하지만 달디 단 오후의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우리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 책은 다른 이들이 어떻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삶을 이어가고 있는지 들려준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최소한의 생활 이상의 무언가를 열망하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음식이나 거주지만큼이나, 희망이 필요하다. 15쪽
“처음 시내에 차를 대고 잠을 잘 때는 끔찍한 낙오자나 홈리스가 된 듯 느껴지요.” 실비앵 설명했다. “하지만 그게 인간의 위대한 점이에요. 우리가 어떤 것에나 익숙해진다는 거요.” 38쪽
모두들 어떻게 노년을 살아갈 수 있는 걸까? 린다가 평생 가져본 숱한 직업 가운데 그 무엇도 지속되는 경제적 안정을, 아주 조금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59쪽
우리는 미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캠핑을 하거나 밴에서 살기에도 너무 나이가 많아지면, 사람들은 어디로 가게 될까요?” 351쪽
음악에 비해 에세이는 별로인 작가가 있다. 이석원이 그렇고 이적과 오지은이 그렇다. 생각해보면 본업이 가수니까 당연한 거 같지만 때때로 작가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는 이들이기에 아쉬움이 남곤 했다. 아무튼 '아무튼, 영양제'는 오지은의 에세이 가운데 가장 좋았다. 아리라민 EX 플러스를 알아봐야할 듯.
채소 권장 자기개발서. 몸에 좋은 채소 섭취를 자산 투자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부분이 신선했지만 내용의 깊이는 없다.
나는 여섯살 때 00국민학교 병설 유치원에 입학한 뒤로, 단 한번도 소속기관이 학교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새해라고 해도 1월 1일에 하루 더 쉴 뿐,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 핑계로 한해를 정리하는 일을 ’3월에 하지 뭐’ 라고 변명하면서 미루지만 정작 3월이 되면 ‘새해가 되고 세달이 다 되어가도록 제대로 한 일이 없네’라고 생각하며 또 어영부영 새학년도를 시작하곤 한다. 아침은 굶고 점심은 건너뛰고 저녁엔 그냥 잔다.
늦었지만 2023년의 독서 결산
2023년에는 28권의 책을 읽었다. 33권을 읽은 2022년에 비하면 약간 덜 읽었다. 아쉬운 점은 좀더 많은 책을 이북으로 읽으려고 했는데 10권 정도밖에 이북으로 읽지 못했다. 크레마클럽은 해지했다. 겸손해 져야지. 아무도 안 물어보고 안 궁금해 하지만 내가 꼽는 2023년 비문학, 문학책을 하나 적어본다.
2023년의 비문학 책: “공부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크레마클럽에서 알고리즘으로 추천책으로 떠서 읽게 된 책. 다 읽고나서 내 인생책이 되었다. 종이책을 사서 소장하고 몇 번 더 읽었고, 친구들에게도 선물했다. 글쓰기 관련된 책들의 대부분이 소설, 에세이 등 문학작품을 많이 쓴 작가가 쓴 것이지만 이 책은 대학교수가 쓴 책이다. 논문을 안쓰고 안써서 데굴데굴 구르는 교수들을 어르고 달래서 글쓰기 클리닉을 운영하는 교수가 쓴 책. 연초에 읽어서 디테일은 많이 까먹었지만 두 가지 핵심적인 내용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았다. 1) 마감에쫓겨서 쓰게되면 스트레스가 높은 상황에서 쓰게 되고 이는 나중에도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2) 글을 쓰는 마인드셋으로 전환할 때 감정환기파일을 써라. 1)은 아직도 고치지 못했고, 2)는 그나마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2023년의 문학 책: “오르부아르”
나는 그저 현실을 잊고 재미를 얻고 싶어서 소설을 읽는다. 그러니 내게 가장 좋은 소설은 읽는 동안 아무 생각없이 현실을 잊게 해주는 소설이다. 오르부아르를 읽던 기간은 내가 정말 힘들었던 기간이었지만 아무 생각없이 소설에 푹 빠져서 지낼수 있었다. 제목이 무슨 뜻인지는 소설을 다 읽고나서야 알게 되었다.
2024년이 되어서 처음으로 완독한 책. 정아은 작가의 책은 잠실동 사람들을 읽다가 너무 매운맛이라 중단했던 적이 있지만 완독은 처음이다. 그 중 앞으로 꼭 새기고 싶은 구절은
그러니 진정으로 글을 쓰고 싶다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잘 쓰지 않겠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끝까지 쓰겠다.
올해는 논문을 쓸 때 끝까지 써야겠다. 어떻게든. 그리고 초고를 빨리 손에 쥐겠다.
Before& after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는 이미 5계절 전 즈음 경험했습니다. 올해도 자알 부탁드립니다:)
ㅡ 🎹 에 이어 🎨 까지 마수를 뻗치려는 자
무시무시하게 많은 책을 출간한 조르주 심농은 1930년부터 매그레 시리즈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 소설은 1953년에 발표했다. 짧고 따라가기 쉬운 줄거리에 적당한 속도감과 사회성. 스케일은 소박하다. 영국, 프랑스, 벨기에, 러시아,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TV 드라마로 만들어진 것도 그런 요소들 때문 아니었을까 혼자 멋대로 상상해본다.
러브크래프트, 로버트 E. 하워드와 함께 《위어드 테일스》의 3인방이었다는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의 단편들을 모았다. 러브크래프트와 비슷한 듯하면서 다른 정취. 앞보다 뒤에 수록된 단편들이 더 마음에 든다. 간혹 이상하게 안 읽히는 작품도 있다. 「지트라」와 「마법사의 미로」가 좋았다.
2023년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하기에 읽다가 말았다. 세이노의 글은 언젠가 2000년대 초반쯤에 인터넷에서 봤던 기억이 있는데 왜 하필 이 시점에 이게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가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한다. 한국 출판계가 망했다는 어떤 징후적인 스냅샷.
호들갑스러운 반전과 예측불허까진 아니고 보다는 마지막 장에 이르면 어느 정도 범인이 예측 가능해진다. 방주의 구조도 도해와 등장인물 일람이 없이 텍스트만으로는 홀로서지 못했을법하지만 텍스트에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을 거 같다. 어쨌든 중반까지 등장 인물 이름을 구분 못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지는 잘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