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처진 사람들'이 될까봐 두려웠어
2025-07-05 19:23:10
저자의 페이스북계정을 팔로하고 있어서 책이 나온 것은 오래 전에 알았지만 사실 일부러 돈 주고 살 생각은 하지 않았던 책이다. 저자의 이전 책<세습 중산층 사회>는 전자책으로 샀었는데 사실 통계로 가득찬 책이어서 조금 재미가 없었고 (....) 그냥 내용이 뻔할 것 같아서 그랬다. 내가 뭐 정치경제학에 정통한 사람도 아니고... 피크아웃 코리아다 이거지. 정치는 갈등을 해결하지 않고 부추기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국가 경쟁력은 점차 떨어지고 있고 양극과는 심해지고 그게 북유럽이나 미국 쫓아가고 싶었는데 사실은 이탈리아 꼴이다.. 뭐 그거 아니야?
하지만 요즘이 선거철이고 이준석 지지하는 열아홉살 아들과 말다툼을 하고 나니 우리 가족과 이 나라의 미래가 막막한 느낌이 들어 삼주 전 도서관에 책 반납하러 가면서 이 책이 눈에 띈 김에 데려왔던 것이다. 사실 이전 책보단 좀 덜하지만 통계와 인용이 꽤 되어 진도가 썩 잘 나가지는 않았는데 그 방대한 reference가 사실 좀더 탄탄하고 객관적인 결론에 이르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것을 나름 adacemia에 속한 자로서 모르지는 않는다 전공 바깥의 약간 더 깊이있는 내용을 읽으며 드는 에너지가 부족했을 뿐...
아무튼 반납일에 간신히 완독했고 한편 나는 사전투표를 했으며 아들은 또 이준석이 저지른 희대의 막말을 옹호하여 나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결국 서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소신에 따라 투표하자며 나름 훈훈하게 마무리했다고 생각하는데 아들입장에선 안 그런 모양이다. 적어도 용돈 입금했다는 문자에는 늘 감사하다는 댓글을 달았는데 오늘은 몇 시간째 읽씹인 걸 보면..
사실 책의 결론은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 다르지는 않지만 좀더 완결성있는 구조의 관점을 가지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른바 '노무현질서'라는 저자가 정의한 단어로부터 책은 시작한다. 노사모로부터 시작된 정당에 의존하지 않는 대중정치의 본격화, 그리고 대기업의 글로벌화로 경제적으로 보다 풍족해진 중산층이 그 대중정치를 이끌면서 그렇지 않은 '뒤처진 사람들'을 떨어져나가게 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몰락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경제라는 하부구조에 있었다. 보수정당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마찬가지로 지지연합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봉착해있었다. '먹고사는 문제'와 큰 관련이 없는 정치적 전선음 상대 정당과의 극단적인 대립 구도를 만들기 쉬워 강성 지지자를 동원하기 용이하지만, 동시에 경제적 문제 해결을 원하는 중하층의 뜨뜻미지근한 지지자들의 불만을 야기하고 이탈을 불러일으켰다. '뒤처진 사람들'의 불만이 정권 교체 등 대규모 정치 구조 변화를 야기한다는 건 '노무현 질서'가 갖는 불안정성의 근원이자 주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p83)
한편 선진국화된 경제시스템은 성장률이 저하하고 인구가 줄어들며 플랫폼 경제가 등장하며 청년과 노년, 서울과 지방,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들 사이의 양극화와 정당지지계층의 균열을 한층 벌리고 있다. 공공재를 정부가 직접 공급하지 않고 민간에 의존하면서 관리만 하는 '공동구매' 방식의 사회복지시스템 역시 한계에 봉착하고 있는데, 이를 조정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무산된다. 공공재를 생산하는 민간영역 노동자 중 한 사람으로서 공감하는 얘기다.
한국의 경제와 사회복지 시스템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공동구매'라 할 수 있다. 주택, 보육, 의료, 교육, 교통 등 공공재 성격이 강한 재화나 서비스를 공급하는 데 필요한 재원을 시민들이 갹출해서 조성한다. 굳이 이걸 공동구매라고 표현한 이유는 정부가 좀처럼 돈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또 민간이 공공재 생산 및 공급에서 상당한 역할을 담당한다. 돈을 낸 사람이 낸 만큼 혜택을 받는 경우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정부는 공공재 생산에 직접 나서기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어떠한 방식으로 생산할 지 규칙을 정하고 그 제도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제도를 도입하고 유지하는 데 행정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p201)
문제는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운영 원리로서 공동구매가 더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선진국에 걸맞게 경제 성장률이 뚝 떨어진데다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공동구매 방식은 대개 경제 규모가 계속 커지고, 국가 재정 역량도 확충되는 것을 전제로 했다. 사회복지제도 중 상당수는 처음 시작단계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인센티브를 꽤 주면서 공급과 수요 양 측면에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는 걸 최우선시하면서도 별 탈 없이 돌아갔다...하지만 경제규모나 1인당 소득이 정체 상태에 접어들면 결국 '제로섬' 에 가까운 이해조정 문제가 된다. (p206-207)
특히 연령대별 1인당 보건분야 공적 이전 그래프를 보면서는 놀랍지 않으면서도 한편 놀랐다. 80대에게 들어가는 보건분야 비용은 2010년에 비해 거의 두 배로 늘어난 것이다. 60-70대는 약간 늘거나 거의 비슷한 것과 대조된다. 1인당이므로 단순히 머릿수가 늘어난 경향이 아닌 것이다. 사실 10년전만 하더라도 80대 암환자에서는 수술이나 항암치료를 잘 하지 않던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요즘은 많이 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법 하다 싶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추세를 그냥 두면 큰일나겠다 싶은 것이다. 그 연령대가 치료를 할수록 합병증이 더 생길 위험이 커서 부담이 눈뭉치같이 늘어나기 때문. 건강한 노인에게는 치료를 해야겠지만 정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서 치료의 한계를 적절히 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단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포퓰리즘이고 아군과 적군을 나누어 소위 '갈라치기'를 하는 전략으로 정권을 잡는 자들이 번갈아가며 집권을 하고 다시 적에게 공격을 받아 실권하는 행태가 앞으로 일반화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는다.
정치학자들은 포퓰리즘을 '정치의 방식'으로 규정한다. 카스무데와 크리스토발 칼트바서는 2017년 저서 (옥스포드 대학교 출판부 아주 짧은 입문서 시리즈)에 "사회가 궁극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두 진영, 즉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로 나뉜다 여기고 정치란 민중의 일반의지의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중심이 얇은 이데올로기"라고 썼다. (p234)
(포퓰리즘이) 구체적 정치적 행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세계관이 필요하다. 부패한 기득권을 어떻게 규정할 것이고, 그들과 맞서 싸울 정치세력은 누구이며, 어떻게 민중의 의지가 반영되어야 하는가를 설명해주는 다른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야 한다. 포퓰리즘이 어느 정도 명확한 세계관을 공유하면서도 고정된 형태를 가지지 않는 이유다 (p235)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대립과 갈등에 올라타 지지자들을 동원해야 하지만, 막상 정권을 잡으면 중도층(경우에 따라서 자신의 당에 속한 불만 세력)까지 포함한 거대한 불만 세력에 둘러싸이는 양상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던 '촛불정부'가 5년만에 정권을 내주고, 이어 등장한 윤석열 정부가 60%가 넘는 부정 평가를 받는 건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 한국 정치의 일반화된 형태가 될 가능성이 크다. (p260)
책은 2023년 출판되었고, 지금은 다시 어처구니없는 계엄사태로 그 '촛불정부'가 재현되려고 하고 있지만 문재인 정권보다 더한 포퓰리즘을 바탕으로 (아마도 높은 확률로) 집권할 이재명정부가 비슷한 운명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나라와 미래를 위해 새로운 정부가 다시 그 덫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책을 읽고 나니 전망은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다.
이런 상황에서 나의 선택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책에서 말한 여러 다양한 사회적 계층 중 나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블록이자 '노무현질서' 속에서 경제적 과실을 따먹은 세대에 가장 가깝기는 하다. 물론 의사집단은 대체로 민정당 계열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그룹이긴 하지만 윤석열 정부 당시 의정사태를 계기로 많이 돌아섰고 (....) 개인적으로는 4.3 희생자의 자손으로서 도저히 그 계열 정당은 지지할 수 없는 지역적 역사적 배경이 있다.
어쨌든 사회적으론 전문직 상류 중산층이며 서울에 자가주택을 (변두리이긴 하지만) 가지고 있으며 소득도 비교적 높고 정년이 보장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서 말하는 '뒤처진 사람들'에 내 자녀들이 속하게 될까봐 늘 불안에 시달린다. 그래서 이것저것 사교육도 시켜보기도 했지만 워킹맘으로서의 정보부족, 아이들을 본격적인 사교육의 굴레로 밀어넣을 결단력부족, '상급지' 로 일찌감치 전입하고 주택을 마련하는 판단력 부족 (이것이 아직도 계속 후회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때문인지 첫째는 특목고-명문대 또는 의대로 가는 루트를 타지는 못했다. 아니, 실력도 안되었지만 본인도 관심이 전혀 없었으니 안 탔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 길이 아니면 실패한 인생이라는 뉘앙스로 종종 말하곤 했던 부모에게 짜증과 미안함의 양가감정을 느끼는 것 같다. 그건 내가 미안하기도 해. 늘 네가 말했듯 너 자신이 아니라 너의 커리어를 어떻게 만들어가느냐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을 인정한다. 엄마 아빠는 서울의 명문대를 나온 과실을 너무나 달게 맛보았고 그 바깥의 세상에 대해 전혀 몰랐고 지금도 잘 모르니까.
이젠 내 아이들이 '뒤처진 사람들'에 속할까봐 안달하기보다는 '뒤처진 사람들'도 마음놓고 살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5번 권영국에게 표를 던졌다.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 프리랜서와 플랫폼 노동자에게도 노동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그의 정책에 동감해서다. 사실 아이는 그런 주장 자체도 민주당을 비롯한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상류중산층 40-50대의 위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모두를 위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기성세대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의 집권에 이용되는 논리일 뿐이라고.
그런 면도 없지 않다. 아니 많다. 이러한 정책을 내거는 진보정당은 너무 약하고, 종종 민주당의 2중대로 활동하며, 한편 이재명의 민주당은 소위 '중도보수'를 표방하며 불평등을 해소하는 구체적인 정책을 내놓는 것에 소극적이다. 한편 청년과 미래를 위해 연금혜택을 줄이고 지금 세금을 더 걷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너의 불만과 불신에 충분히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학식에 가서 대학생들과 대화하는 이준석을 왜 학식에서 밥을 먹을 수도 없는 (재수 중이다. 재수도 실패하면 군대 갈 예정) 네가 지지하는 거지. 혹시 군대 다녀와도 대학진학에 실패하면 좋아하는 음악을 하며 생계는 알바로 유지해도 좋다고 이야기하는 너를 여성과 남성, 청년과 노인,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갈라치기를 하는 정당이 과연 대변해줄 수 있을까. 너는 어떻게 해서든 성공할 거라고 말하고, 그 정당은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는 사회를 말하지만 나는 정치는 누구나 실패할 수도 있는 사회의 구성원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 자체가 허상일 뿐이라고, 최소한의 공정을 보장하는 것 정도가 정부가 할 일이라고 말한다면, 그게 허상이 아니라고 믿는 많은 사람들 덕분에 역사가 조금이라도 진전해온 것이라고 답하고 싶어. 책의 마지막 문단에서 이야기하듯이, 정치가 '진정한 자유의 조건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보장해주려고 노력하는지' 질문을 던지며 살아갈 것이다. 그게 너와 미래세대와 사회에 대한 내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마키아벨리는 <로마사논고>에서 "자유가 보장된 모든 도시와 지방들은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매우 커다란 번영을 누린다. 이는 무엇보다도 인구가 증가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자신의 가산을 빼앗길 것이라는 두려움이 사라져 아이들을 기꺼이 낳아 키우기 때문"이고 "아이들이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태어난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통해 뛰어난 인물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유'를 현대적으로 풀이하면 단순히 신체적 자유 등 소극적인 자유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사회경제적 여건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현재 한국의 정치가 이렇듯 진정한 자유의 조건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보장해주려고 노력하는지 질문을 던졌을 때, 답은 회의적이다. 지금의 정치가 의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위기에 빠져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겉보기에 그럴듯한 민주주의에 머물러 있을 뿐, 사람들의 정치적 욕구를 반영하는 조직이 제대로 구성, 운영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가 만성적 위기로 미끄러져 가는 국면에서 정치의 근본적인 재구성이 필요한 이유다. (p286)
별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