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계급과 슬픔과 일에 대한 이야기
2025-10-06 00:14:46
#가난에 대하여
*대런맥가비는 <가난사파리>에서 독자에게 한 가지 태도를 제안한다. "나는 우리가 먼저 정직해지는 데서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혁명은 없을 것이다. 우리 평생에는 없을 것이다. 이 체제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나갈 것이고 우리도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한때 정치권력이나 체제가 바뀌기를 '순진하게' 기대했다. 이제는 그저 일정 부분 망가진 울퉁불퉁한 길을 일단 걸어가 본다. 내면의 힘을 발견하고 기르는 편에 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려 한다.
<아주 평범한 가난> 중에서 p75
나는 가난한 적은 없다. 그러나 늘 가난을 두려워하며 살아왔다. 왠지 선대에서부터 가난 또는 계급하락의 위기가 반복되어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빠가 겪은 위기는 진정한 가난이었다. 아빠의 집안은 4.3 으로 대부분 목숨을 잃었고 삶의 기반이 와해되었다. 그는 진짜로 가난한 감귤농부인 홀어머니의 아들로 살았고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진학하고 국책기관 연구원을 거쳐 교수가 된 아빠의 서사에서 나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역경 속에서도 빛나며 결국 계급 상승을 이뤄낼 수 있는 것'이라는 전형적인 자유주의의 교조를 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 '역경'은 사실 이념전쟁 속의 양민학살이었는데. 그리고 아빠가 이룬 건 그의 명민함과 노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60-70년대의 역동적 경제발전 중 드물지 않은 계급 상승 중 하나였던 것인데.
내가 겪은 위기는 그런 아빠의 암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엄마의 헌신, 그리고 아빠가 남겨둔 많지는 않은 그러나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 정도의 유산 덕에 나는 사실 가난에 발을 담근 적이 없었다. 나와 동생들은 모두 서울의 4년제 대학에 진학했다. 등록금을 못 낸 적은 없었다. 방학엔 남들 다 가는 유럽 배낭여행을 가지 못했고 본과에 가서도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던 (의대생들은 예과때만 알바를 하고 본과에 가면 대부분 학업에 집중한다) 정도의 상대적 궁핍을 나는 가난이라 여겼다. 과외를 하러 다니며 올려다 보는 저 많은 서울의 아파트에 내 몸 하나 뉘일 곳이 없다는 스산한 마음을 나는 가난이라 여겼다.
그래도 70년대생인 나와 남편은 그나마 자산을 쌓을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는 않을 수 있었다. 일단 서울에 집이 있고 빚이 없다. 지금은 검정고시를 본 후로 음악을 한답시고 대학에 갈 생각이 없는 아들이 가난의 굴레에 빠질까봐 증여 상속이라도 해줄 돈을 불리고자 ETF 투자에 기웃거리고 있다. 이미 불장에 늦어버리긴 했지만. 아이를 정석대로 키우지 못한 것이 대를 잇는 가난의 위기를 다시 촉발하는 것이 아닐까 또다시 전전긍긍하고 있는 중이다.
저자는 80년대생인 것 같다. 기자이지만 실업계 고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한 후 대학에 진학 후 기자가 되었다는 다소 특이한 이력을 지녔다. 가족과 친지 중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는 "가난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벗어나고 싶었다"고 솔직히 고백하며, 이젠 가족과 친지와 다른 세계에 살게 된 자신에 대한 낯섦, 여전히 가난 속에 살고 있는 동생과 조카에 대한 아픈 마음을 드러낸다. 가난하지 않은 기자가 취재하는 다른 사람의 가난은 기사에서 많이 보았지만 가난했던 기자가 지금 여전히 가난한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은 처음이어서 눈물이 났다. 그리고 나의 전전긍긍이 좀 부끄러웠다.
'정직해지는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대런맥가비의 말을 이해하려면 <가난사파리>를 읽어보아야 하겠지만 정치나 운동으로 가난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나에게는 아들이 가난해지더라도 어쩔 수 없고 그것은 아들의 몫이며 다만 가난하여도 존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방법을 아들이, 그리고 사회가 찾아야 할 것 같다는 결론으로 다가온다. 그럴 수 있을까.
#일에 대하여
p163
많은 사람들이 단언한다. 언젠가는 종이 매체가 사라질 거라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다짐한다. 그 시대의 안과 밖을 잘 쓸고 닦다가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p206
함께 일하는 친구들에게 당부하게 되는 건 언제나 결과보다는 태도다. 내가 잊지 않으려 하는 건 이런 것들이다. 기자는 기본적으로 2차 생산자라는 점. 우리 일은 기본적으로 사건과 사람에서 출발한다. 누군가에게 빚지지 않고 쓸 수 있는 기사는 없다. 기사란 대부분 누군가의 불행과 불편에서 출발한다.
p209
만화가 이종범씨가 '거지같은 만화판'에 대한 이야기만 주구장창 듣던 지망생 시절, 선배인 <덴마>의 양영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화가 되면 너무 좋아. 빨리 만화가 해." 그 글을 읽은 이후 나 역시 기자 지망생을 만나면 "기자가 되면 정말 좋아. 빨리 기자 해"라고 말하는 사람으로 살자고 다짐했다. 어떤 직업을 좋은 일, 필요한 일로 만드는 힘과 책임은 그 직업군에 속한 사람에게도 있다. 내가 하는 일을 뒤에 오는 사람에게 권할 수 있으려면 내가 선 땅이 좋아지도록 부지런히 일궈야 한다.
의료계와 온 나라를 휩쓸던 의정갈등이 끝나고 첫 명절이다. 사상 최대의 긴 연휴동안 이틀에 한번 꼴로 출근을 한다. 종양내과의사가 출근해서 하는 일을 나는 환자를 '산에서 끌고 내려온다'고 표현한다. 대단한 시술이나 수술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소위 '산으로 가는 배를 끌고 내려와' 환자들의 치료방향을 정해주는 것이 종양내과의사가 하는 일이다. 환자의 상태와 예후를 가장 잘 알고 우선순위를 아는 의사여서 할 수 있는 일이다. <숨결이 바람될 때>의 저자 폴 칼라니티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메다가 담당 종양내과의사인 엠마를 보았을 때 느낀 안도감. 의료분야에서의 "WICOS problem (Who is the Captain of the Ship)"을 해결할 수 있는 선장.
그제는 항암제 부작용으로 악화되고 있는 환자에게 전공의 선생님과 중환자실 담당의사가 연명치료를 보류하려고 하고 있어서 그건 안된다고, 이 분은 회복될 수 있는 분이니 중환자실 치료를 고려해봐야 한다고 확인하고 처방을 조정하고 왔고, 오늘은 다른 환자가 여러 과에서 처방한 약제로 부작용이 생겨서 온 것을 보고 말기암 상태에서 필요한 약과 필요없는 약을 정리하고 왔다.
책 <슬픔의 방문>에서 본 미덕 중 하나는 일에 대한 사랑이다. 워커홀릭의 일 자랑이 아닌 일의 본질에 대한 사랑. 필수의료는 망해가니 새로운 세대의 의사들에게 버림받을 거라고들 말한다. AI가 곧 의사를 대체할 거라고들 말한다. 의대 입학경쟁률은 경이롭게 높은 수준이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팽창하는 미용의료산업의 수익을 독점할 수 있는 권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들 속에서 낡고 흔들리는 배의 선장이 되고자 하는 마음들을 잘 골라내어 "종양내과 의사 되면 정말 좋아. 빨리 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도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