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허물어지는 미래를 상상하기
2026-01-16 12:43:57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브리검 앤 위민스 병원의 외과 의사이자 유명 작가인 아툴 가완디의 2014년 작이며 우리나라에는 2015년에 번역된 베스트셀러이다. 이미 많은 분들이 읽은 책이고, 번역된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아툴 가완디는 외과 레지던트 때부터 뉴요커에 글을 써온 타고난 대단한 글쟁이이자 지난 십수년간 나의 우상이었다. 전작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원제 Complications)>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하다 (원제 Better: a surgeons’ notes on performance)>를 읽었을 때부터 임상 현장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은 그의 글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전작들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놀라움을 선사한다. 어떻게 이런 광범위하고 무거운 주제를 접목하여 생동감있고 깊이있는 취재와 버무려 설득력있게 전달한단 말인가. 이미 10년전 책이 출판되자마자 읽었었지만 의사로서의 삶을 10년을 더 살고 다시 읽어보니 더욱 새롭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책의 서문은 죽음을 가르치지 않는 의과대학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작한다. 의대생 시절 단 한번 죽음을 주제로 학교에서 토론을 벌인 것이 톨스토이의 중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다뤘던 것이었다는 대목을 다시 읽으니 지난 학기 수업이 떠올랐다. 나도 지난해 본과 2학년을 대상으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소재로 수업을 했었는데.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은 것은 수업을 준비하기 훨씬 이전이었지만, 사실 <이반 일리치…>를 고른 이유는 이 책의 서문에서 영감을 받아서는 아니었다. 그냥 <이반 일리치….>가 분량이 적어서 다른 공부도 해야 할 학생들에게 방해가 덜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책값도 저렴하고…. 책 속에서 아툴 가완디와 그 동급생들은 이반 일리치가 의사와 가족에게도 무시당하고 외면 받는 소설 속 장면을 19세기 러시아에서나 일어날 만한 무지몽매한 상황으로 여기며, 현대 의학에서는 죽음을 둘러싼 상황이 보다 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학생들은 그보다는 훨씬 성찰적이고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의 심정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들의 공감능력이 더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워낙 고전이니만큼 수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학습이 된 AI의 도움을 받아서가 아닌가 싶긴 했다.
그러나 막상 죽어가는 환자를 대하면 무력감을 느끼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는 것은 60년대생인 아툴 가완디의 세대도 그랬고, 70년대생인 나도 그랬으며,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과정을 AI의 조언에 힘입어 신실하게 살펴본 우리 학생들도 의사가 되면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이 나온지 10년이 지났지만 병원의 문화는 크게 바뀐 것은 없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죽음은 여전히 실패이고 언급을 피해야 하며 인정할 수 없는 대상인 것이다.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는 환자를 만날 때만큼 정체성에 위협을 받는 때는 없다(p.19)”는 책 속의 문장은 아프게 다가온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노년의 삶
“….이런 (독립적인 자아가 존중되는) 삶의 방식에는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독립적인 자아에 대한 숭배가 삶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립이라는 이 불가능해지는 때가 온다는 현실 말이다. 언젠가는 심각한 질병이 나 노환이 덮쳐 오게 될 것이다. 해가 지는 것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독립이라면, 그걸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p.44)”
저자는 아내의 할머니 이야기로 노년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그는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노인으로 행복한 노년을 지내는 것 같았지만, 결국 사리판단에 문제가 생기고 낙상을 하며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요양원에서 외로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할머니의 모습이 현대의 전형적인 죽음의 풍경이며, 우리 대부분이 두려워하며 ‘그러느니 안락사하겠다’며 피하고 싶은 생애 말기의 시간이다.
자유롭고 독립된 인간으로 살아가다가 순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살면 어쩔 수 없이 누구나 점점 쇠퇴해가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온다는 것은 명징한 사실이다. 그런데 씻고, 먹고, 심지어 배설하는 것도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그런 삶을 나는 살 수 있을까? 실은 책을 읽으며 나 역시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당혹스러웠다. 이 상황 자체를 생각하기 싫고 건너뛰고 싶은 마음이 ‘그러느니 죽겠다’는 안락사 찬성 여론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또한 한동안 들썩이다 순간 무색해진 ‘저속노화’ 열풍 역시 이런 늙음과 독립성의 상실에 대한 저항 또는 무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속노화’라는 말에 담긴 취지는 ‘미리 준비해서 건강한 노년을 보내자’는 것이었지만, 노인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도 않은 이 사회에서 그 슬로건이 그토록 엄청난 사회적 호응을 얻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노년이라는 취약한 시기를 마치 본인이 노력하면 피할 수 있다는 환상과 결합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의 부재
“의학, 그리고 늙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의학이 만들어 낸 기관들이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게 무언지를 두고 잘못된 관점을 가져왔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아예 관점 자체가 부재한다는 사실이다. 의학은 아주 작은 영역에 초점을 맞춘다. 의료 전문가들은 마음과 영혼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신체적인 건강을 복구하는 데 집중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바로 이 부분이 고통스러운 역설을 만들어 내는데-삶이 기울어 가는 마지막 단계에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할 권한을 의료 전문가들에게 맡겨 버렸다.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질병, 노화, 죽음에 따르는 여러 가지 시련은 의학적인 관심사로 다뤄져 왔다. 인간의 욕구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 기술적인 전문성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우리 운명을 맡기는, 일종의 사회공학적 실험이었다.” (P.200)
의학이 삶의 의미를 바라보는 관점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없다”는 지적에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론 저항감을 느꼈다. 그게 의료서비스의 영역이 맞을까? 개인이 규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의사나 간호사들이 철학자도 아니지 않은가. 또한 의학에서는 환자의 단순한 생존 뿐만 아니라 삶의 질을 측정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지속해왔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적 전문성을 가진 이’들이 생애 말기에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고 있다는 말은 부정할 수 없다. ‘의학적 처치를 받는다’는 것이 ‘삶을 지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면서 의료인들은 의도치 않게 환자들의 죽음의 방식을 결정하는 악역을 떠맡게 되어버렸다. 당사자가 죽음을 둘러싼 상황을 미리 계획하고 정해놓지 않는다면, 사실 선택은 불행한 두 가지밖에 남지 않게 된다. 불필요한 의학적 처치를 받거나, 삶의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소외된 채 죽거나. 상급종합병원 응급실에 실려오는 말기암 환자들이 흔히 그렇지 않은가. 가망이 없으니 2차병원으로 가라는 응급실 의료진의 말에 낙담하여 쫓겨나듯 전원을 가거나, ‘강력히 원하여’ 입원해서 온갖 의미 없는 연명치료를 받거나 둘 중 하나다. 죽음에 임박해서라도 뒤늦게나마 평화롭고 인간적인 마지막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실 상급종합병원은 급성기 질환 진료를 하는 것도 너무 바쁘다.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다. 정부에선 상급종합병원에 임종실을 설치하도록 법으로 강제했지만 그것만으론 아툴 가완디가 에필로그에서 말한 ”자축할 수준“까지 가기엔 너무 먼 것 같다.
“완화치료 분야는 발전을 거듭하면서 말기 환자든 아니든 상관없이 심각한 질병을 앓는 환자들 누구에게나 비슷한 접근법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아직 자축할 수준까지 간 것은 아니다.
모든 의료계 종사자들이 환자들을 돌볼 때 같은 사고방식을 적용할 수 있게 될 때에야 비로소 샴페인을 터뜨릴 수 있을 것이다. 완화치료 분야가 따로 필요하지 않은 상태 말이다. (p.395)”
여기서 ‘완화치료의 접근법’이란 환자의 바램을 존중하고 그것에 맞춘 치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끝이 있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환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맺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반면 급성기 의료는 고비를 넘기면 환자가 회복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을 전제로 하므로, 고비를 넘기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 큰 고통과 비용이 수반되더라도. 사실 우리가 의과대학에서 배우고 현장에 나와 실천해온 의료는 급성기 의료가 전부다. 반면 완화의료는 ‘포기하는 것’ ‘죽게 내버려두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일쑤다. 그나마 많은 완화의료 전문가들의 노력과 건강보험 수가 신설 등 제도 정비에 힘입어 그 영역이 넓어지고는 있어서 할 일이 앞으로도 많을 것 같다.
대안적 돌봄- 어시스티드 리빙
아툴가완디는 노인의 개별적인 생활방식과 취향이 존중되는 <어시스티드 리빙>을 현재까지 등장한 이상적인 돌봄의 형태로 꼽는다. 개, 고양이, 새 등 동물들과 식물들을 들여서 노인들에게 삶의 의미와 돌봄의 즐거움을 안겨주는 새로운 방식의 요양원 프로그램인 <에덴 얼터너티브>, 요양원이 학교와 마당을 공유하여 세대 간 어울림을 실현한 <뉴 브리지 온 더 찰스>, 아파트 주민들이 나이가 들어도 살던 곳에서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샌본 플레이스> 등이 비슷한 어시스티드 리빙의 형태다. 한 방에 여러 명을 수용해놓는 전형적 형태의 요양원이 아니라, 노인 각자가 독립적인 공간에서 자율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휠체어에 의존한 노인도 혼자 살아가되 이웃과 교류하고 외출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제공한다.
책을 읽으면서 노년의 돌봄에 대한 대안은 가능하구나 싶어서 안도감이 드는 한편, 이런 곳들이 과연 비용적으로 지속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자꾸 넘어지고 제멋대로 하려는 고집불통이거나 문제행동이나 실수를 반복하는 노인들도 개별적 취향을 존중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쓸 수 있게 (p.218)” 도울 수 있을까? 그것도 가족의 노동과 인내력을 소모하지 않은 채 사회복지의 일환으로? 이런 건 선진국 얘기 아닌가. 아니 그런데 실은 우리나라도 선진국이긴 한데. 내가 늙어도 이런 돌봄을 받고 싶은데. 그런 돌봄에 비용을 지불할 의지가 있는데. 노인들이 늘어날수록 지금처럼 상가 건물에 노인을 수용해놓는 형태의 대다수 요양원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지금도 고급화된 실버타운 등이 그 대안으로 등장하고 있기도 한데, 다만 돌봄인력 부족과 고령화, 저임금과 나쁜 처우 문제 등 우리에게 특히 고질적인 인력 문제를 생각하면 긍정회로를 돌릴 수만도 없다.
제3세계 출신이지만 어쨌든 남성인 아툴 가완디의 시선의 한계도 이 지점인 듯하다. “어시스티드 리빙”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돌봄노동의 가치와 이에 수반되는 고통과 피로를 너무 가볍게 건너뛴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돌봄노동은 수요가 높음에도 이상하게 가격이 좀처럼 오르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인 것 같다. 물론 지불하는 입장에서는 너무 비싸지만 보통 동일 시간의 일반적인 남성 일자리에 비해서 더 임금이 높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돌봄이 여성의 일이라는 인식, 그리고 특히 제3세계 이민자의 일이라는 인식이 크게 작용한다. 하지만 미래의 돌봄이 돌봄노동에 대한 가격인상만으로 해결이 될 것도 아니고, 그 가격인상이 우리사회가 감당하기도 어려울 것은 분명하다. 막연한 생각으로는 각자의 시민에게 납세나 병역과 같이 돌봄의 의무를 부여하고 (그 대상이 가족이던 아니던) 일년에 몇 시간 이상을 돌봄노동에 종사하도록 하며, 돈으로는 그 의무를 해결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어떨까 싶다. 다들 직접 해 봐야 힘든 걸 알고 가치를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참 좋은데 설명할 방법이 없네
책의 전반부가 노인의학 및 노년의 돌봄에 대한 고민을 풀어내었다면, 후반부는 말기암 환자들과 완화의학, 그리고 척수의 성상세포종이 진행되어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저자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맺는다. 죽음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젊은 암환자인 세라와 그를 둘러싼 의료환경에 대한 이야기는 뼈를 때린다. 우리 종양내과 의사들이 좋아하는 생존곡선의 “long tail”이 어떤 면으로는 일종의 희망고문일 수도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long tail 자체는 희망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 들어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하듯, ”현대 의학 시스템과 문화는 그 긴 꼬리를 위해서만 만들어졌다.”
“우리는 의학적으로 마치 복권과도 같은 것을 제공하기 위해 몇 조 달러에 달하는 체제를 만들었으면서도, 복권에 당첨될 확률이 거의 없는 환자들에게는 아주 기본적인 서비스만을 시행하고 있을 뿐이다. 희망은 계획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계획은 희망밖에 없다. P.263”
책에는 말기 환자들을 효과적으로 돕는 일에 특화되어 있고 신념과 능력을 고루 갖춘 완화의학 의료진들이 등장하는데, 환자인 아버지를 비롯해 어머니도, 아들도 의사이지만 역시 죽음 앞에서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던 저자의 가족들도 호스피스 간호사의 도움을 받는다.
….. 호스피스의 목적은 모든 과정을 자연스럽게 맡기자는 것 아니었던가?
"호스피스의 목적은 그게 아니에요." 크리드가 말했다. 일반적인 의료 행위와 호스피스 케어의 차이점은 치료하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는 것이었다. P.248
말기 심부전으로 호스피스에 의뢰된 환자의 가정방문에 동행한 저자가 호스피스 담당 간호사인 크리드와 나눈 대화의 일부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는 호스피스를 가장 단순하게 잘 설명하는 말이지만 막상 환자에겐 잘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환자에게 호스피스를 권하면서도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 상황을 종종 경험한다.
“가서 뭘 하는 건데요?”
“여기서 받는 치료랑 다르지 않아요 복수를 빼고 통증을 조절하고…”
“그럼 그냥 여기서 치료받으면 안돼요?”
아니, 그렇지 않다고, 일반적인 급성기질환을 다루는 병원에서는 환자분에 대한 치료가 제대로 되기 어렵다고, 냉정히 말하면 급성기병원에서 당신과 같은 말기환자는 치료의 우선순위가 떨어진다고, 당신의 평안과 행복을 우선순위로 두고 그 문제를 다루는 것에 더 유능한 의료진에게 가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이렇게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말하는 것에는 늘 실패하고 만다. 결국 나의 의도와 관계없이 환자에게는 “당신을 포기했고 이제 버릴 것”이라는 말로 들릴 테니까. ”우선순위“라는 말, 한쪽에서 보면 참 냉정하기도 하면서도 반대쪽에서 보면 따뜻한, 신기한 말이긴 하다.
결국 뒤돌아서서 중얼거릴 뿐이다. ‘그거 참 호스피스 좋은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네…..
세 가지 의사상
실은 아툴 가완디는 종양내과 의사를 대체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반면 아버지를 수술한 클리블랜드 클리닉의 신경외과 의사에 대해서는 평가가 후하다. 저자의 아버지는 지역사회에서 일해온 비뇨기과 의사다. 당장 수술을 권했던 보스턴의 동료와는 달리, 클리블랜드 클리닉의 의사는 직업과 사회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최대 관심사였던 아버지의 바램을 존중한다. 결국 수술을 미루었다가 증상이 진행될 때 비로소 수술을 하였으며, 일시적으로나마 마비가 호전되는 효과를 얻는다. 환자의 관심사를 우선순위에 두고 공유의사결정을 하는 해석적 (interpretive) 의사상의 전형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수술 후 화학방사선치료를 권장한 종양내과의사와 방사선종양학과 의사는 “치료효과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치료실패 후 이차 화학요법에 대해서는 ‘정보를 전달하는(informative)’ 의사 모드로 바뀌어 환자와 가족의 혼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치료법을 나열하기에 바빴다고 혹평한다.
…뒤이온 설명은 나나 부모님이나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우리 셋 다 의사인데도 말이다. 너무 많은 선택지들이 있었고, 그에 따른 위험이나 효과도 너무 많아서 가능한 모든 경로를 검토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따라서 아버지에게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인지, 아버지가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삶을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지를 논의 하는 데까지는 이르지도 못했다. 그녀의 상담은 내가 환자들과 여태껏 해 온 상담, 그러나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게 된 상담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이 의사는 정보를 제공하고 아버지에게 선택하라고 했다. 빨간 약을 원하십니까, 파란 약을 원하십니까? 하지만 각 선택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p.332)
환자와의 의사소통의 측면에서 3가지 다른 의사상, 즉 가부장적(paternalistic), 정보를 전달하는 (informative), 해석적인 (interpretive) 의사의 모습은 아툴 가완디가 전작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하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인기를 끌자 이 책도 <어떻게 일할 것인가>로 제목을 바꾸어서 번역본이 다시 출간되었다. 개인적으론 원작 제목에 충실한 이전 번역본 제목을 더 선호한다) 에서도 풀어내었던 주제이다. 이 문제제기는 내 마음에도 오래 남아서, 환자에게 어려운 결정을 맡겨서 혼란에 빠뜨리지 않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여기게끔 되었다.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환자를 던져놓지 않고 무엇이 환자에게 최선인가에 대한 내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배려라고 여기게끔 된 것이다.
그러나 최근엔 내가 interpretive 라기보단 paternalistic에 가깝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 일이 있었다. 항암치료를 하다가 폐렴이 생겨 쇠약해진 노인에게 치료를 쉬도록 했는데, 회복되고 나서도 다시 같은 문제가 생길까 걱정이 되었다. 복막전이는 CT에서 거의 보이지 않았기에 항암제를 쉬기를 권유했다. 결국 수 개월 후 병은 진행했는데, 2차요법 시작한 지 2년만의 진행이었으니 완화적 화학요법의 효과로서는 기대이상 끈 것이었다. 그러나 환자는 내가 권해서 항암을 쉬다가 나빠졌다며 원망했다. 점잖은 분이라 그동안 치료를 해 준데 대한 감사인사는 잊지 않았으나 다른 병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무턱대고 치료를 권유하는 가부장적 의사가 되지 않으려 했고, 치료의 장단점만 늘어놓고 환자에게 선택을 맡기는 정보를 전달하는 의사도 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환자의 최선의 관심사는 충족해주지 못한 셈이다. 신체적인 삶의 질을 보존하는 의학적인 최선은 이루었을 지 몰라도 환자 본인에겐 후회와 원망을 안겼으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환자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과연 건강이 훼손되더라도 항암을 계속 하고 싶었던 것인지, 항암에 기대하는 바는 무엇인지, 혹시 완치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항암을 그만하자는 권고를 따른 것인지, 그런 것들에 대해 얘기해본 기억이 없다. (사실 대학병원에서 그렇게 진료했다가는 외래가 마비될 것이다) 그래, 제한된 상황에서도 임상적인 성과는 나쁘지 않았으니 환자가 어떻게 생각하건 나는 최선을 다한 것이니 후회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절차는 늘 빠져있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시간이 짧아도 그 질문 하나는 할 수 있었을 텐데.
읽고 나서
그 외에도 읽으면서 여러가지 떠오르는 이슈들이 있었지만 (말기 환자와의 의사소통, 노인의학과 완화의학의 힘, 전근대사회에서 돌봄을 담당해온 여성의 사회화를 마치 돌봄 문제의 원인으로 바라보는 듯한 시각에 대한 불편함, 인도의 끔찍한 요양원의 풍경에서 떠오르는 시립병원 행려병동의 기억, 강박과 비위관으로 상징되는 요양원의 비인간적 돌봄,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서 누구 하나만을 탓할 수 없는 긴 노동시간과 적은 복지지출, 빠른 고령화….. ) 무엇보다 많이 떠오르는 것은 가족들이었다. 퇴행성 뇌질환으로 긴 와병생활 끝에 PEG를 꽂고 연명하다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떠오르고, 끝까지 호스피스 가기를 싫어했던 췌장암으로 돌아가신 이모, 폐암치료 후 회복되셨지만 언제 나빠질 지 모르는 80대의 시아버지, 아직은 건강해 보여도 언제 허물어져 갑자기 일상이 정지될 지 모르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그리고 매일같이 이번엔 연명의료계획서 얘기를 꺼내야지, 하다가 시간이 없어서, 마음이 약해져서, 내가 힘들어서, 또는 환자가 힘들어해서 다음으로 미루게 되는 나의 진료실.
외할머니를 PEG 삽입부위 감염으로 교체를 위해 노년내과에 부탁해서 입원시켰을 때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도 기억난다. 계속 이렇게 영양공급을 하는 게 과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어보셨다.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말을 못했고, 병실에 갔을 때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래도 도저히 PEG를 뽑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엄마는 외할머니를 보내고 난 후 본인은 저런 상태가 되면 절대로 PEG 를 넣지 말라고 하셨다. 이미 사전의향서를 쓰셨지만 중요한 사전의료결정을 하나 더 추가한 셈이다. 만약 엄마가 음식을 넘기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도, 나는 PEG를 넣지 않는 결정을 아프지만 단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에게도 좀더 구체적으로 물어봐야겠다. 엄마는 항상 간병이 필요한 상태가 되면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집에 계속 있고 싶겠지만 도저히 안되면 요양 병원 가는 것도 괜찮겠어? 엄마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뭐야? 파크골프나 여행 못가고 누워있어야 하면 너무 힘들겠지만 견딜 순 있어? 아니면 못견딜 것 같아? 엄마한테 중요한 사람들은 누구누구야? 만약 많이 위독하면 우리가 이모 삼촌 말고 어떤 사람들에게 연락해야 할까? ……
꺼내기 어려운 대화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떠올려보니 챙길게 너무 많았다.
나의 경우엔 스스로 구체적인 사전지시서를 만들어서 매년 업데이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위관이나 PEG 같은 인공영양공급은 안할 것이고, 섬망이 심하면 완화적 진정을 선택할 것이다. 가능하면 집에서 개인 간병인을 쓰고 싶지만 여력이 안된다면 요양병원에 갈 수 밖에 없겠지. 스스로의 미래를 생각하니 접근 가능하고 믿을 수 있는 노년 돌봄체계에 대한 바람이 더욱 절실해진다.
우상향이 아닌 미래, 점점 기울어져가고 무너져가는 미래, 결국 끝이 있는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걱정하며 절망하고 그래서 회피만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노년과 질병과 죽음을 떠올릴 때 자신의 이야기를 쓰며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는 방법을 상상해본다면, 그것이 약간의 흥분과 희망에 들뜬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