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과 자본이 남긴 희망 섞인 아픔
2025-08-17 07:30:19
아편 전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작하자마자 그런 안이한 생각이 박살났다. 중국사 쪽에서만 좀 찾아봤지, 중국에 수출된 그 많은 아편들을 재배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 사람들에 대해 질문해본 적이 없는 보통 독자의 한계를 다시금 자각함. 나름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자 노력은 하지만, 결국 나는 먼 나라의 고통에 무지한 소시민에 불과하다는 걸. 정치가도 부자도 아닌 하루살이 오덕이 처리할 수 있는 정보와 능력, 정신적 용량의 한계가 뚜렷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렇게 씁쓸한 건 그걸 매끄럽게 해내지 못하는 미성숙함 때문이겠지.
인도의 도시들과 광동, 영국과 미국까지 이어지는 아편 자본의 흐름을 보며 처음엔 분노하다 점점 낯설지 않은 패턴들과 정보에 지쳐간다. 원흉은 확실하고 욕하는 건 쉽지만, 그 때 만들어진 광범위하고 복잡한 사슬 관계가 앞으로도 사라질 일 없이 남으리란 게 참...아편 때문에 일그러진 구조가 정착된 지역을 갑자기 다 뜯어고칠 방법도 없고, 아편 수익으로 아이비 리그가 만들어졌다고 학생들이 학업을 그만둘 수도 없고 기업에 채용된 직원들은 일해서 먹고 살아야할 뿐.
언급되는 재벌들의 행태와, 이 시기를 지배한 자유 무역 교리의 도덕적 충격이 나아지기는 커녕 심화일변도인 모양새를 보면 내가 지금 묵시록을 읽고 있는 것인가 탄식이 나온다. 그래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느끼는 건, 현재의 중국과 인도 관계에도 불구하고 아편 무역 속 인도의 역할이나 한 세기 넘게 지속된 피해들이 지금 중국의 정책들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저자의 태도 덕이다. 이 미친 무역을 진심으로 반대했던 매우 드문 서양인들, 영국이 후드려 패는데 무슨 방법이 있었겠냐고 입 씻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 해악의 일각을 담당한 걸 부끄러워했던 인도인들, 아편의 연쇄를 막을 방법을 궁리하고, 포기하지 않고 뭉쳐서 성과를 거두었던 풀뿌리 운동 연합의 이야기들도 뭉클하고...인간이 아편으로 행한 악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에 더 알려져야 하는 것은 이런 이야기들이겠지.
상당히 쓰라리지만 안도할 수 있는 숨구멍도 있는 감동(너무 직접적이고 짧은 단어지만, 진짜인데 어쩌겠는가)의 한 권이었다. 중간중간 언급된 트릴로지도 꼭 읽어야하니, 독서 리스트에서 빠진 건 한 권인데 세 권이 추가된다 크흑. 재미있는 책이 많은 건 행복한 일인데 왜 눈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