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 필요한 그림들을 남겨준 사람
2025-10-15 07:27:50
예전에 케테 콜비츠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던 책에는 그의 작품 분량이나 소개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 몇 장만으로도 그 한 권을 다 채우고도 남는 어두운 충격이 있어, 작품을 찾아보는 게 진지하게 두려웠다. 그런데도 이 책을 발견했을 때 '읽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든 건 왜일까.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 때문인지, 약간은 용기가 생긴 것인지...이미 권두의 작품 사진들 보는 시점에서, 숨소리도 내면 안 되는 미술관에 들어선 듯 긴장이 시작된다. 그림들과 어우러지는 개인사를 따라가다 보면, 누군가가 내 얼굴을 들어올리며 똑바로 봐야 한다고 압박하는 듯한 느낌까지 받으니 얇은 책인데도 불구하고 쉽지 않았음.
가족이 함께 책 낭독하던 습관이 있었다는 게 슬쩍 부러우면서도, 우물쭈물한 어린이가 자랄 수 없는 가정 환경에 움찔한다. 신조 때문에 무려 법관을 때려치고 미장이로 전직한 아버지라니. 한편 자기 주장이 이렇게 뚜렷한 사람이, 이미 어린 시절부터 불안과 죽음에 관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당황스럽다. 그런 요인을 가지고 뭉크 같은 사람이 아니라 돌직구 사회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은 환경이 전부가 아니라는 증거일까. 화가에게 감탄하면서도, 투지는 성격이 아니라 선택인 것인가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리고 전쟁...가버린 아이를 위해 작품을 만들었으나 결국 부숴버렸다고 적은 일기에 몸이 저릿하다. 상실과 온몸으로 나눈 대화가 그 조각이라면, 다 끝났으니까 부숴야한다는 선택이 맞겠지. 너무나 개인적인 환상의 작품을 궁금해하는 대신, 묵직한 문장들에 집중하려 애쓴다. "그렇지만 도대체 윤리적으로 고양되는 한편, 동시에 독일인이 아닌 사람들에 대해 증오. 거짓, 적대감을 키워가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는 마치 가족끼리 사랑하면서도 밖으로는 모든 문을 닫아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스케치는 거의 식스센스급 충격. 부분적으로 웃는 얼굴이 들어간 다른 작품도 있기는 했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은 사랑의 함박 미소에 놀라 자빠질 뻔 했다. 놀라움이 가라앉은 뒤엔 서글픈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 메울 수 없는 상실 뒤, 시간이 흘러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만큼 회복했지만, 끝에는 또 다른 슬픔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참...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작품들처럼, 선명하고 일절의 흐리멍텅함이 없는 길을 간 사람을 위해 책상 앞에서나마 묵념한다.
"망아지처럼 바깥 구경을 하고 싶어 하는 베를린의 소년들을 한 여인이 저지한다. 이 늙은 여인은 자신의 외투 속에 이 소년들을 숨기고서 그 위로 팔을 힘있게 뻗쳐 올리고 있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이 요구는 '전쟁은 이제 그만!'에서처럼 막연한 소원이 아니라 명령이다. 요구다. (일기, 194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