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땅속에서 던져지는 물음들
2025-12-14 07:10:15
분명 과학책이고 주제가 사람이 아닌데도, 지상의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끊임없이 돌아보게 만드는 희한한(좋은 의미로) 책이다. 당장 초장의 '지하에 대한 혐오' 설명을 보며,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개념을 처음 점검해본다. 닿지 않는 하늘에는 환상이 있고, 생명이 자라는 땅 아래에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 생각할수록 미묘. 이어지는 우주와 우드 와이드 웹을 보며 체질도 아닌 상념에 잠기다, 몸이 끼일 정도로 좁고 위험한 통로에 거리낌 없이 도전하는 이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놀라면서 한숨 짓는다. 각종 사고 설명을 보니 왕년의 생매장 호러물들이 주던 공포가 스물스물 올라옴. 역자분이 스릴러물 같다고 쓰셨는데 정말 공감한다...
우주를 알기 위해 지하에 내려가야 하는 상황, 경이로운 고대 벽화와 너무나 대조되는 포이베 대학살, 안 녹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얼음 밑에 파묻은 폐기물들의 컴백 feat 지구 온난화 등, 이미 놀라운 언더랜드의 풍경과 오랫동안 인류가 벌여 놓은 변화들에 마음이 복잡해진다. 마냥 감탄할 수도 울적해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 '우리는 좋은 조상인가'라는 거듭된 질문이 겹치니 혼란만 몰아침. 이 마음이 친절하게 언급된 '두꺼운 언어'의 현상인지, 단순히 자신의 어휘력 부족의 문제인지 혼자서는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이해를 포기하는 것도 옵션이 될 수 없으니,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일들에서 인간이 도망갈 방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후손들이 플라스틱괴의 지층을 연구하며 과연 지금의 인류를 어떤 조상이라 생각할지, 가라앉은 마음으로 우울하게 아름다운 책을 덮는다.
"인류세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 심지어 인류세에 살면서 말하는 것이 어렵다. 아마도 인류세는 상실의 시대로 가장 잘 표현될 것이다. 종의 상실, 장소의 상실, 사람의 상실. 우리는 이 시대를 위해 슬픔의 언어, 그리고 더욱더 찾기 어려운 희망의 언어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