꿉꿉한 스위스제 고농축 허무
2026-02-19 07:16:18
간만에 믿고 보는 세계문학전집에서 하나 골랐는데, 읽고 나니 마음이 복잡하다. 원래 이 카테고리에 읽고 나서 룰루랄라 행복한 책이 거의 없고, 평소 하지 않던 생각을 해보는 것도 독서의 의미 중 하나지만...이 정도로 에너지가 소진될 줄 몰랐다.
별로 두껍지도 않은 소설인데 여러모로 당혹스럽다. 일단 개인적으로 이름 전혀 보고 싶지 않은 인물이 주연 중 한 명에, 실존 인물들이나 문화적 요소를 등장시키는 데 비해서는 각종 설명이 뻥에 가까운 수준. '재구성한 또 다른 현실'이라고 표지에 써 있으니 속은 것은 아니지만. 등장하는 모든 것들이 회색 크레파스를 짓뭉갠 듯한 이 허무한 분위기를 만드는 장치일 뿐인 작품이니 정확한 지식이 필요가 없는 것도 맞고. 절반 가까이 읽을 때쯤 겨우 분위기에 적응했는데, 문제의 저주 능력(내용에 기 빨리느라 잠시 잊었던)이 발동하며 다시 당황하기 시작한다. 이게 스위스식 매지컬 리얼리즘인가요. '이 분위기면 아무래도...'라고 몰살을 예감할 때, 네겔리가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살기로 결심하고 살아있는 풍경을 찍기 시작하는 모습에는 다른 의미로 놀랐다. 보통 주인공이 이런 경험을 하면 마지막에 희망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한 것에 경악 2연타. 영화는 완성했으나 조용히 주변에 묻어가는 태도는 그대로인데다, '저주는 했지만 결과를 내가 모르면 책임 없다'는 대단한 마음가짐이 마지막 페이지 이다의 모습과 맞물려 거의 공포소설급으로 섬뜩하다. 머릿속에 담배 연기가 꽉 찬 듯한 이 기분 어쩌면 좋노.
그래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과 관련 지식들이 담긴 상세 해설에 감탄하며 기분이 좀 풀렸다. '그들은 현실 세계에 발을 반쯤만 걸치고 있다'라는 말이 너무 찰떡같이 맞는 표현이라 마음속으로 밑줄 쫙. 일단 질식할 것 같은 세계문학의 파워를 맛봤으니 당분간은 좀 쉬어갈 수 있는 책을 찾아야겠다. 사유도 중요하지만 마음에도 환기할 시간이 필요하니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