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릴러...인 것 같은 단체 고행 드라마
2026-03-03 07:21:53
상도 많이 받았다는 작품이 두께도 상당하니 기대감이 샘솟는다. 그러나 얼마 읽지도 않았는데 신발 속에 겨울비 스미는 듯한 느낌에 착잡해지기 시작. 번뜩이는 추리나 신나는 반격 따위는 없으리란 슬픈 예감은 이럴 때만 맞아떨어지고...주요 화자들은 정해져 있지만, 등장인물 전체 수가 대하사극 수준이라 간만에 러시아 고전 볼 때처럼 메모하며 봐야하고 여러모로 빡세다. 그래도 책장 넘길수록 뒤가 궁금해지는 파워와 더불어, 화자들 시점 전환 속도가 빠른 덕에 완독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으니 OK. 이런 내용이 한 마디 한 마디 음미하는 분위기로 서술되었다간, 다 읽기 전에 내과 가서 위장약 처방 받는 사태가 생겼으리...
그들만의 질서로 노는 상류 계급 이야기는 무슨 장르의 책에 나와도 기분 나쁘지만, 이 책에선 어이없음도 두 배다. 조금만 신경 쓰면 온동네에서 자기들 평판이 바닥치는 걸 알고도 남을 상황에서, 마치 평소에는 평판이 대단히 높고 좋았다는 듯 남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겠다는 모양새 뭡니까. 결국은 아랫것들의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이 태도까지, 현실이나 픽션 속이나 별 차이 없는 것 같아 두통이 온다. 한편으로는 결국 어느 쪽으로 굴렀어도 구원 받을 길이 없는 앨리스를 보며, 책에 입냄새 배었을까 걱정할 정도로 줄한숨. 불행한 청춘들은 또 왜 이리 많아 멘탈 약한 어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가. 70년대 닫힌 사회 이야기 참 녹록찮다.
그래도 결말에선 어느 정도 구원이 있어 다행이다. 일말의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하네유, 작가님. 일 터지면 이상한 짓 말고 로펌에 돈 부어야 한다는 진리와, 지역 유지가 버티는 산촌 혹은 어촌 방문은 극력 피해야 한다는 믿음을 재확인하며 오늘의 잡상 종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렇게 거대한 거짓은
예기치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는 그가 길을 안내하는 법을 배울 때,
아버지가 철저하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숲속에서는 한번 결정을 내리면 뒤집을 수 없으며,
때로는 비극을 부르기도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