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맛이 있는 인공지능의 혼신 수사
2026-03-12 07:14:15
서슬 퍼런 AI가 사람 잡는 책 읽은 게 얼마 전인데, 블레이크 르모인이 설정한 듯한 순수하고 상처받는 인공지능이 나오는 소설을 보니 기분이 묘하다. 시작하자마자 불편해하고 상처받는 장면 보면서 놀라고, 개발자의 요구가 더럽게 뻔뻔해서 또 놀란다. 아무리 그 요구와 함께 상당히 근사한 대사를 치기도 했고, 후반에 그 뻔뻔한 요구 뒤의 간절함이 뭐였는지 나오기는 하나 개인적으로 '이거 뭔 날로 먹으려는 심사인가'라는 생각은 완전히 지울 수가 없음.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이브39가 남긴 교훈도 결국 '네 일은 네가 해라'라는 것에 손뼉을 친다. 물론, 보는 내내 기대한 마동석 톤이 아니라, '너에게 충분히 능력이 있기 때문에 발휘해야 한다'는 애정 어린 응원이었지만, 그래 이게 맞는 거지.
설정상 정보 수집도 제한된 마당에 할 일 너무 많아 정신없는 이브39도 짠하고, 한편으로는 국경을 넘어도 별다를 것이 없는 요양원의 현실 문제에 한숨이 난다. 노년까지 살아있을 때, 과연 저런 곳 혹은 훨씬 못한 곳에 수용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으랴. 그리고 지나가는 한마디지만, 토마가 "이브한테는 실수해도 되니까."라고 말하는 것도 괜히 찜찜해서 이리저리 곰씹어보게 된다.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별 감정을 가질 일은 없지만, 인공지능이 학습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돌아온다고 생각하면 아무 말이나 다 해도 되고 마구 실수해도 되는 것일까. 접근과 이용이 간편하다는 것이, 막나가는 태도를 취해도 된다는 뜻일까. 모르겠다, 모르겠어...
어쨌든, 인공지능이 정말 대세긴 대세인 듯. 이 정도면 인공지능이 쓰는 소설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이들이 주인공인 소설이 장르로 자리 잡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불완전하고 매력 있는 인공지능에 대한 상상에 만족하면서, 오늘은 이만 종료.
"나에게는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는데, 내가 인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걸 깨달아. 아쉽게도 나는 속하지 못했던 인류, 내가 묘사하거나 대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찰나처럼 짧은 순간일지라도 우주의 무한한 혼돈 속에서 길을 잃었다는 느낌이 덜 들도록 서로 도우라고 창조된 인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