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순삭 캐나다 고전 탐정물
2026-04-20 07:19:46
이미 표지에서 컬트 집단의 존재는 확정이니, 어느 정도 질척하고 끈적한 얘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좋은 의미로 예상을 벗어났다. 시작하고 열 페이지도 안 된 시점에서 주인공의 설정과 성질머리에 "왔구나!"하며 입꼬리 급상승. 이제는 점점 멸종해가는, '대체로 주머니가 빠듯하나 입은 아주 제대로 살아있고, 언뜻 보면 제멋대로이나 중요할 때는 인간적인 탐정'을 다시 접하니 감동이 파도치고...누구를 상대해도 이빨로는 안 털리는 이 모습, 나이스!
작은 마을과 소규모 단체 안의 신경전도 흥미진진. 개인적으론 최근 이런 소재가 다뤄지는 작품들보다 가학적이거나 인간 밑바닥을 보는 장면들의 수위가 좀 낮아서 정신적 부담도 덜한 점도 만족스럽다. 취향에 따라선 '역시 옛날 작품은 자극이 적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선 넘어가면 전체 이야기가 재미있어도 읽고 나서 멘탈 고갈되는 사람에겐 이 정도가 딱.
다들 어느 정도 문제가 있고 자기 합리화도 하지만, 대화들이 진전될수록 드러나는 '이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라는 꽤나 보편적인 바탕에 납득되는 부분도 생긴다. 이런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별로 기분이 좋진 않지만...하아. 공감 가는 대사들, 혹은 공감은 안 가도 왜 저런 소리 하는지는 알 것 같은 대사들도 넘치고 여러모로 빠져든다. 역시 고전이란 훌륭해!
시리즈물이 아니라 조 퀸의 입질과 추리가 여기서 끝난다는 게 슬프다...3부작 정도는 남겨주시지 그랬습니까 밀러 선생님. 반세기도 더 지난 지금 구시렁대봤자 소용없는 일이고, 어설픈 속편 없이 끝나는 게 최고일 수도 있으나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음. 어딘가에서 또 멋진 탐정을 만나길 바라며 오늘 잡담 종료.
"오고먼이 낯선 남자에게 접근했다고 해서, 당신의 삶이 달빛과 장미가 가득하던 아름다운 시간에서 쓰레기로 바뀌어버리는 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의 삶이 그렇듯이, 어떨 땐 달빛도 내리고, 어떨 땐 장미도 피지만, 어떨 땐 쓰레기도 있는 인생인 거죠. 당신은 특별한 영광과 특별한 재난을 위해 선발된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고, 오고먼은 영웅도 악인도 아니라 그저 재수가 없던 남자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