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워도 마주해야 하는 피의 나비효과
2026-04-25 07:32:06
인도네시아. 한때 나의 심장을 지배했던 이코 우웨이스의 나라임에도 아는 것이 많지 않으니, 마주친 김에 조금이나마 지식을 보충하자는 마음에 집어 들었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그런 마음으로 읽기에는 내용이 속을 짓누를 듯이 무겁다는 걸 알게 되지만...
피비린내 나는 반공 우방 건설의 과정에 몸을 떨다가, 공포의 수위가 어느 순간 한계를 넘고 감정이 마비되기 시작한다. 잔인한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지만, 뚜껑 열어보면 또 새로운 요소가 드러난다는 것이 너무나도 괴롭다... 한 도시의 이름이 지구 저편에서 도살 작전의 대명사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일그러진 일인가. 복종, 혹은 수십 만의 피가 흐른 뒤의 복종이라는 지옥의 양자택일이 현실 문제라는 걸 그 시절의 사람들이 몰랐다는 걸 순진하다 말할 수는 없다. 일반 상식으로는 도저히 말이 안 되니까. 말도 안 되는 것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것은 꿈이 아니라 돈과 폭력이라는 걸 지금의 우리들이 명확하게 아는 것은, 당신들이 그렇게 죽고 다쳤기 때문이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현재의 모습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다고 머리로는 생각해도, 페이지를 넘길수록 세상과 특정 국가에 대한 신뢰가 점점 더 낮아지는 허약한 내가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 회초리를 날리는 것도, 그 학살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말이다. 어떻게 그런 일을 겪고도, 복수를 바라지도 않으며 조국이 역사와 화해하기를 바랄 뿐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지.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정말 세상의 한 줄기 희망인지도...그러니까 '어차피 난 힘이 없다', '모르면 편하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아직은 정보의 충격을 소화하는 것도 벅차다...
세계로 가지치며 뻗어 나간 이 학살의 연쇄가 과연 끊길 수 있을까. 냉전은 끝났어도, 미국의 근본적인 태도가 너무나 일관적이라는 점에서 변화의 가능성이 과연 있을까. "미국인이 보는 세계의 풍경에는 회색지대가 없다. 선하거나 악하거나, 옳거나 그르거나, 영웅 아니면 악당만 있을 뿐이다." 폭력이 휩쓸고 간 자리에 이 세계관이 뿌리를 박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선 제일 무서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일들을 있는 그대로 공유한다는 것조차 제대로 될지 의문스럽고, '한국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말의 울림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도 역자 후기의 말처럼, "과거를 직시하는 것만이 현재를 구할 수 있다"고, 대화가 막히면 상대편을 전부 죽여 버리면 된다는 사고의 확산만이라도 다 함께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믿음이 허망하게 끝나는 경우는 세상에 널렸지만, 믿을 수 있을 때 믿어보는 것이 죄는 아니겠지.
"나는 많은 나라에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역사가 너무나 중요하며
미국인들은 이 사건들과 그 나라들을
다 잊었을지 몰라도,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망각이라는 선택지가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