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장 터지는 발자크표 속물지옥
2026-07-27 07:29:19
가끔 고전을 보자는 마음에 집었는데 시작부터 낭패다. 일반적인 도입부가 아니어서 '으음?'하다가 각주와 내용 보고 완전히 뜨악함. 『잃어버린 환상』의 후속작인데 『잃어버린 환상』을 아직 안 봤고(......), 인간관계와 자녀 양육에 대한 심각한 불신감을 심어주었던 『고리오 영감』의 등장인물들 대거 재등장! 댁들 중 아무도 다시 보고 싶은 인물이 없었건만 이게 뭔 일인가. 고민하다 그냥 읽기로 했다. 정말 명작이면 읽는 순서 바뀌었다고 감동이 없지는 않을 테니.
『고리오 영감』보다 배경의 판이 커진 만큼 인물들이 그리는 지옥도도 커지고 답답 지수도 상승한다. 처음에 에스테르한테 설교할 때부터 제정신이 의심스러운 에레라의 정체 나올 땐 그냥 고개 끄덕끄덕. 그런 짓도 했으니 이런 짓도 하는 거겠지. 어떻게 가공의 인물도 제 버릇을 개 못 주냐. 그리고 예전 읽는 사람에게 뒤로 넘어갈 분노를 선사했던 델핀 부부는 나이 든 진상이 되었을 뿐 잘 살고 있으니 정말 발자크가 그리는 세상엔 정의가 없다. 뤼시앵은 대체 어느 포인트를 얼마나 쥐어잡혔길래 하라는 말을 다 듣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잃어버린 환상』을 꼭 봐야 한다는 마음도 커진다. 이랬는데 읽어봤더니 별일 없으면 다시는 발자크 소설 근처도 안 가야지. 지금처럼 정보를 얻기 힘들었던 당시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썼을 이런저런 제도의 해설이 상세해, 읽는 데 도움이 되면서도 너무 길어서 템포가 끊긴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중간중간 식히고 넘어가라는 배려인가 설마.
뤼시앵의 행보가 너무 허망해서 희망을 잃는다. 차라리 복수를 시원하게 한다던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에게 뭘 해준다던가 하는 목적이 뚜렷했으면 좋았을 것을. 악당에게 이용당하고 꿈이 있던 직업도 버리고 제일 사랑하는 이를 매매하기까지 했는데 딱히 가슴 속에 뭘 채운 것도 아니고 그냥 욕망의 급류에 떠내려간 꼴이니...... 에스테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스스로를 위해서는 뭘 바란 적도 없는 청춘에게 이런 결말을 선사하다니 발자크 선생 잔인하십니다. 한편으로는 아직 분량 한참 남았는데, 이 커플 빼고 대체 지금부터 무슨 얘기가 나올 것인지 궁금증 폭발한다. 그리고 범죄자고 사법부고 자기합리화랑 보신밖에 모르는 건 매한가지라는 걸 보여주는 전개에 유구무언. 이래도 됩니까? 당시 프랑스 사회의 부조리가 정말 이 정도로 심했는지는 미묘하지만, 이 소설 마지막 문장에 담긴 결말이 작가가 보여주려던 모든 걸 담고 있는 것 같다. 오래 꽃길 걸으려면 비열해야 한다고...... 권말 해설 읽으면서 악당에 대한 짜증은 더 커진다. 고전 걸작 읽으면서 고상하거나 철학적 문장이 아니라 육두문자를 구사하고 싶은 것은 나의 소양이 모자란 탓이리. 으윽.
뭐, 속물 독자도 이 정도 막장 속물들이 가득한 이야기를 보면 욕심을 좀 버리게 되니 어쨌든 이 허무와 한숨 뒤에 얻은 것이 있다. 내용 까먹기 전에 『잃어버린 환상』을 봐야 할 텐데, 이 속 뒤집히는 심리적 롤러코스터를 또 맛본다 생각하니 울적하긴 하지만...... 어차피 볼 거면 열린 마음으로 보자. 설마 후편보다 전편이 막장이겠어.
"인간은 자기 삶이 파렴치할수록
거기에 더 집착하는 법이다.
파렴치한 삶이 매 순간 할 수 있는 일종의 항거요
복수인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