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모님의 블로그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주지하다시피 '기억의 장소'란 프랑스 역사학자 피에르 노라에 의해 제안된 개념으로, 그에 따르면 '기억의 장소'는 국가의 기억이 농축되어 국가를 체계화하고, 결정화하는 장소이다."
음, 들어본 적이 없어 창피하지만, 늦게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막연히 알함브라를 떠올리며 열어본 책은 예상 외의 이야기들로 터져 나간다. 런던이나 파리에 역사적인 대형 모스크가 있다는 얘기도 금시초문에(나만 몰랐나?;;) 요새 같은 시기에도 무슬림 노예 동상이 당당하게 이탈리아 도시에 버팅기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플라멩코처럼 섹시한 춤에도 이슬람 문화의 영향이 있다니 동공 작아질 시간이 없음. 하긴, 같은 종교여도 그룹에 따라 세부 규제 차이도 클 테고, 기본적으로 사람 사는 동네에 춤과 사랑의 시가 없을 리가 없는데...이놈의 무지와 편견을 우찌할꼬 쩝.
읽으면서 한국 쪽 사정도 궁금해지는 건 '스페인어 속의 아랍어' 챕터. 직접적으로 아랍어가 들어온 경우뿐 아니라, 다른 외래어가 아랍어를 쿠션 삼아 스페인어에 들어오는 신기방기한 이야기를 보니 감탄사 절로 나온다. 언뜻 떠오르는 건 일본 쪽 번역을 거쳐 들어온 단어들이나 범어들 정도지만, 분명 찾으면 '이 단어가 그렇게 멀리서 왔어?' 하는 단어가 있을 것 같은데...아 궁금혀...
"에스닉 푸드가 유행한다고 에스닉 그룹을 바라보는 시선이 긍정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말에 울적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으나(음식이 애정을 만들 수 있다면 인종주의나 차별이란 단어들은 죄다 사어가 되었겠지...), 자본을 통해서든 폭력을 통해서든 결국 이렇게 뒤엉켜있는 게 이슬람과 유럽뿐 아니라 온 세계의 모습이 아닌가. 그것만 인정하더라도, 화합이나 대통합까지는 무리라도 일단 서로 줘패지 않는 상태는 좀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단절의 결과는 폭망이라는 조상님들의 대교훈을 떠올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날 어휘 체계를 토박이 낱말로만 구성한
인간언어가 과연 지구상에 존재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일 것이다.
현재 지구상에서 사용되는 모든 자연언어는
토박이 낱말만으로 어휘 체계를 구성하지 않으며,
구성할 수도 없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인간언어는
타 언어(들)에 뿌리를 둔 차용어의 도움 없이
고유어로만 어휘 체계를 유지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오직 토박이 낱말로만 이루어진
인간언어를 상상하는 것조차 어렵다.
이는 비단 '현재'라는 공시적 단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과거의 공시적 단면에도 그랬고,
미래의 공시적 단면에도
의심의 여지 없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잠든 살인자라니 이 무슨 신기한 소재인가. 시원하게 낚이고 재미있게 읽었으나, 정보를 참 감질나게 던져주기 때문에 성질 조금만 더 급했음 숨 넘어갈 뻔. 보통은 이렇게 쪼금씩 단서 흘리는 작품도 반전 시작되면 봇물 터지는데, 이번엔 클라이막스까지 무슨 다 쓴 치약 쥐어짜는 리듬이다보니 진상을 알아가는데 도 닦는 기분이다. 진정 이야기를 즐기려면 참을성이 있어야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요새 스트레스가 쌓인 탓인가 조마조마한 박자를 즐기기가 약간 힘들었다. 그리고 벤의 과도한 열정에 이게 뭔 일인가 싶음. 아무리 치료가 간절하다 해도, 정신과 의사가 환자 치료할 때마다 현장 실습(?) 해야한다면 치료 끝나기 전에 의사가 환자 되겄네.
여튼...과거 극복은 애꿎은 사람들 끌어들이고 사람 잡으면서 하는 게 아니라 의학적 도움을 받으면서 하는 게 좋고, 목적이 '나의 만족' 뿐이라면 남의 과거 함부로 파는 거 아니라고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였음. 그리고 와다다다 굴러가는 이야기 없나 좀 찾아봐야겄다...


'인공지능 윤리', 전부 아는 단어의 조합임에도 불구하고 그 실체는 머릿속에서 아직도 애매하니 일단 읽는다. 첫 질문인 '인공지능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면도 있음. 최근 챗GPT의 답변 능력에 놀라 숨이 막힐 뻔한 일이 몇 번 있다보니,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거나 변화에 취약하다고 이 정도로 단정지어도 되는지 의문이다. 단기간 이용해본 일반인과 전문가의 입장이 같을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 능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윤리적인 면을 책을 낼 정도로 염려하는 것이 아닌가?
이어지는 여섯 가지 질문들, 분명 모르면 안 되는 이야기들인데 아는 게 병이라고 이 뒷맛 어쩌노. 환경 문제 도서들 볼 때랑 비슷한데, 어떻게 하지 않으면 큰일날 것이 분명한데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고, 다 같이 고쳐가는 데는 시간이 너무 걸리며 기업의 이해상충을 따지면 환경 문제보다 더 힘들지도 모르는 과제들 산더미. 존재도 몰랐던 황당한 앱 딥누드처럼 도덕 따위 안 따지는 개발자들의 상품들이 널렸고, 책임 소재가 분명하지 않다는 상황을 더 이용하고 싶어할 회사들도 많겠지. 게다가 노동법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도 의문인 인공지능 개발회사들이 개발팀에 윤리 담당자를 일부러 고용한다는 게 가능할까. 저자들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행동 촉구 제언을 다섯 개나 제시해주지만 마음은 가벼워질 줄 모른다. 도덕적인 면의 피드백을 받는 게 판매에 도움이 된다고 회사가 판단하지 않으면, AI 시민 참여가 과연 작동할 수 있을까?
읽으면서 쓰잘 데 없는 질문이 가장 많이 떠오른 챕터는 '인공지능은 공정할 수 있을까?'. 이제 판사가 참고한 인공지능 자체를 문제 삼거나, 반대로 인공지능의 의견을 판사가 무시했다고 항소하는 일도 생기는 건가? 부정적 편향을 주는 정보를 무시하는 알고리즘을 쓴다는 건 좋지만, 정상참작이 필요한 사건에서 그 배경이 되는 사항들을 다 지워버리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한다고 답이 나올 리도 없고, 당장 우리나라는 어떤가 검색하니 사법부 인공지능위원회와 재판지원 AI 계획이 시작된 게 올해였다. 피할 수 없는 수순이고 오히려 늦은 감도 있지만 참 불안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인공지능이 완전히 도입된 이후에 일부러 공정하지 않은 알고리즘을 누가 삽입한다면...그런 일이 없도록 함께 생각하고 노력하자고 이런 책이 나온 것이겠지. 더 읽고 인공지능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도가 높아지면 불안이 줄어들고 용기가 생길까? 여러 시행착오는 피할 수 없어도 분명 좋은 쪽으로 굴러갈 기술에 대해 내가 너무 믿음이 없는 걸까? 물음은 끝날 줄 모른다.
"정리하자면, AI에 비관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무시하거나 AI 의 부정적 영향은 필연적인 결과이므로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자포자기할 유인이 많다.
우리는 결코 이런 생각을 받아들여선 안 된다. 부도덕적이라고 예측되는 행동을 피함으로써 스스로 도덕적인 규제를 가하는 AI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심과 헌신적인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규제, 조직 관행, 교육 자원, 민주적인 기술을 설계함으로써 AI가 해롭고 부도덕한 방식으로 사용될 가능성을 낮출 수도 있다. 이러한 일을 최선의 방식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AI 시스템 작동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의 수준을 높이고 인류에게 해악이 아닌 이득을 가져다주는 방법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도 있다. 이는 AI 시스템의 범위를 확장하고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일과는 다르지만, 역시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과학적 탐구다. 심지어 인간의 지능과 의식에 대한 오랜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통찰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해부학만 따로 떼어 본다는 게 처음엔 의아했는데, 읽다보니 색다른 맛도 있고 생각할 일도 많다. 우리 육체 내부에 대한 지식을 아는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나름 완성된 지식이 자리잡은 지금도 세포 단위로 계속 새로 발견하는 게 있으니 지상 위의 몸이 가진 신비가 우주 못지 않구나. 괜히 사람을 소우주라 한 게 아니구먼...
이름을 들어본 유명인들도 있지만, 저술에 집중했던 이들이나 삽화가들은 이런 책 아니었으면 이름을 볼 일이 없었을 듯. 본인들도 아마 '역사적으로 대접받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업하지 않았겠지만, 시각적 정보가 굉장히 중요한 분야에서 큰 역할을 한 만큼 교과서에 조금이라도 실려도 좋을텐데...내부 장기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시대가 아직 아니라서 무리인가. 법으로 금지된 상황에서도 목숨 걸고 해부하고(제대로 된 소독이나 환기 시설도 없는 상황에서 시신을 해부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목숨을 건 행위다만...), 열심히 작업해서 지식을 세상에 풀면 동업자가 대놓고 표절해서 돈 버는 것도 감당해야 하는 상황들에서는 지식에 대한 욕구와 도둑놈 심보는 동서고금을 초월하는구나 한숨 절로 나온다.
소소하지만, 그림에 덮개를 만들어 인체 외부랑 내부를 다 볼 수 있게 해놓은 교재를 이미 베살리우스 시절에 만들었다는 게 깜놀. 효율적인 학습 교재의 모습도 21세기에 바로 생긴 것이 아니니, 닫힌 생각을 또 반성한다. 생각보다 긴 그레이 해부학의 역사에, 이 정도면 경전으로 분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일반인이 볼 일 없는 책이라곤 해도, 현대에 병원을 드나드는 모두가 저 책에 목숨의 몇 분의 일 정도는 빚지고 있으니까 성스러움은 이미 충분한 듯.
눈이 번쩍하는 이야기들과 도판들에 빠져있다가, '해부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짧지만 묵직한 언급에 고개가 숙여진다. 로키탄스키 씨의 글이 뒷표지에도 적혀있다는 건, 출판사에서도 이런 부분을 읽는 사람이 기억해주길 바랐기 때문이겠지. 알려던 사람들과 자신의 육체를 내주었던 사람들 모두가 있어 의학도 발전하고, 누구나 가볍게 인체 도감이나 미술용 해부도를 접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에 감사를...


멘붕을 극복하려는 목적으로 책장 정리를 시작했는데, 예상보다 감정소모가 더 크고 한때 신봉했던 콘마리 메소드도 이번에는 적용이 잘 안 됨. 아무래도 가이드북이 필요하다 싶어, 뭔지는 몰라도 100개나 버린다는 책을 집었다. 책을 정리하는 데 책을 본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하지만 이게 나라는 인간의 속성이니 지금 와서 어쩌겠나...
도움이 되는 말들이 많지만, 사회적 을은 하고 싶어도 적용 불가인 항목들도 있다. 왜 메일 답장 늦냐고 거래처에서 펄펄 뛰는데 "집중력이 떨어지는 잡무는 오전에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용기를 분명 누군가는 가지고 있겠으나 저는 그런 거 없고요. 그리고 텔로미어 설명은 분명 어느 정도 맞는 말인데도, 이 부분만 떼놓으면 신비주의 책에 실어도 될 것 같은 건 왜인가. 여러모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간절하게 도움을 찾으려다보니 평소같으면 고개 끄덕이고 넘어갈 부분에 토를 달게 되는 듯.
책장에도 신진대사가 필요하다고, 기분 전환을 하고 싶을 때는 물건을 버리고 정리하라는 말들 너무나 믿고 싶다. 어디 만화 표현처럼 혼이 입에서 빠질 것 같은 이 감정이, 책장 대정리가 끝나면 기쁨으로 바뀔 거라고 믿지 않으면 조만간 앓아 누울 것 같으니까...멋진 신간을 들이려 빈 자리를 만든다는 발상이 마음을 바로 가라앉혀주지는 않으나, 조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라고 작은 위로가 된다. 그리고 "누구나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물 수는 없"는데 서점서 가져온 책만 영원할 리도 없는 노릇...그리고 70번 항목의 말처럼, 최선은 다해야 하지만 잘 안 되어도 지구가 망할 것도 아니다. 의욕이 없으면 한 발 물러나라는 조언도 있으니, 심호흡 좀 하고 또 시작하자. 한 권 읽었다고 성격 어디 가지는 않지만, 며칠이라도 약발 들을 동안은 할 수 있는 일만 생각하자!


저자분의 인생 이야기, 암 연구 현황, 암과 인간의 진화, 한 발 물러나 보는 마음가짐까지 꽉 찬 엑기스들이 조용하면서도 강한 문장들을 통해 전해져온다. 바로 확 날아오는 싸다구가 아니라, 읽으면서 그 문단 끝날 때까지 주우욱 차오르는 놀라움이 책 곳곳에 포진 중. 울고 싶어지다가, 잠시 멈추고 문장을 다시 읽어보다가, 태아와 암의 공통점 파트에서 눈이 튀어나올 것 같다가, 막판에는 참회의 시간을 경험한다. 암에 걸린 게 불운이 아니고 암에 안 걸린 것이 행운이라는 걸 의학적인 해설로 들을 때는 머릿속에 천둥이 꽈광. 일단 매일 생성되는 세포 수가 너무 많고, DNA 복제 오류의 원인도 넘쳐나니 암에 걸릴 확률이 10분의 9가 아니라 3분의 1이라는 게 인체의 신비다. 암이 아니고 어떤 사인이라도, 정확한 정보 획득이 곧 해탈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죽음은 사람들의 바람과 무관하다"부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우연과 필연에 관한 문장들에 감정이 조금씩 고조되다 "서사를 걷어내면 나는 그저 주어지는 시간을 살다가 가는 존재일 뿐이다. 수명이 다하면 죽는다. 자연의 일부인 나는 내 생각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에서는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는 감정이 가슴을 꽉 채운다. 이런 사고방식이 낯선 건 아니지만,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한편 그만큼 서러워서...저자분과 환자분들의 이야기와 함께 생각하고 지금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니 구멍이 난 것처럼 가슴 언저리가 허전하다.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계속 앞을 봐야한다는 것은 너무 어렵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지금도 또렷하게 그려낼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저자분 본인도 아직 슬프고 화가 난다고, 모르는 것이 많다고 언급하시니 너무 움츠러들지 말고 어떻게든 생각이란 걸 해야겠지. 하나라도 더 읽고, 비울 것들은 비워내다보면 가닥이 잡힐 날이 올까...
"부족한 것은 나의 이해였지
세상이 이상한 게 아니었다."


드넓은 우주라면 모를까, 지구에 떨어진 운석들이 한 두개도 아닌데 뭐 엄청난 이야기가 있을까 했던 생각이 어리석었음을 읽고 반성 또 반성 중이다. 지구의 초창기 운석 노출(파스퇴르 실험이랑 비교하는 신박한 그림 덕에 마치 다 이해한 듯한 착각이...), 매일 백 톤 이상 운석 물질이 지구에 떨어지고 운석에 엉덩이를 맞을 수도 있다는 사실, 이게 뭔 일인가 싶은 운석 비지니스의 희비와 머리가 지끈거리는 운석 연구 과정 설명(간략화된 설명과 가득한 삽화에도 불구하고 죽을 맛)까지...아재 개그는 사람마다 평가가 다르겠고, 전혀 기대하지 않은 트럼프 사진은 쪼까 그렇지만 참 재미있었다.
4장의 내용은 어디 교육방송에서도 좀 나오는 게 좋지 않을까 읽으면서 꿍얼꿍얼. 아리스토텔레스가 오류를 낸 건 시대와 기술 때문에 어쩔 수 없다해도, 따로 실험을 해본 것도 아니면서 옛사람 말이 최고에 서민들 증언을 죄다 동네 가십 취급하는 사람들 때문에 과학의 발전이 얼마나 저해된 것인지. 운석 연구가 뭔 심령 현상 분석도 아니고 참...그리고 본문의 큰 흐름과는 관계없는 일이지만, 많은 운석들이 사람들의 뱃속으로 사라졌다는 거 왜 이리 무섭노. 생각해보니 엑스맨에 나와도 될 것 같은 설정이긴 하다. 부모님이 운석을 먹고 낳은 슈퍼 히어로! ...아닌가?
한 권 읽었다고 갑자기 운석 매니아로 변신한 건 아니지만, 실물을 보면 좋겠다는 마음은 충분히 든다. 투손 박람회까지 가서 진기한 운석들을 보는 건 무리겠고, 대전이라도 좀 힘내서 가봐야하나. 엉덩이가 무거운 자, 우주의 신비를 구경하지 못하리...


한참 방치해두다가, 대대적으로 책꽂이를 정리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읽었다. 간만에 귀여운 동심의 세계에서 웃음도 나고, 슬쩍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즐거웠다. 역시 오래 사랑받는 작품엔 이유가 있어...
대부분의 모험 아동 문학이 그렇지만 도입부는 어른 시점에선 완전 악몽이다. 길냥이를 마음대로 줏어오질 않나, 9세 어린이가 무려 잭나이프를 챙겨서 가출하지 않나(어릴 때는 자각하지 못한 일이지만, 집에 위험한 물건 있으면 어른이 아무리 숨겨도 애들은 귀신같이 알드라...), 출처 불명의 물품들을 한가득 안고 돌아오질 않나...모험에 챙겨간 물건 목록들이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험난한 여정에서 모든 물건들이 엄청나게 쓸모가 있었으니 엘머의 선견지명에 탄복. 용과 가족들의 수난이 어른에게도 현실 세계의 아픔을 상기시켜서 놀라기도 했다. 편견에서 자유롭기는 참으로 어려우나, 이 이야기가 수많은 아이들에게 마음을 여는 첫 걸음을 떼게 해주지 않았을까 짐작. 게다가 2권 엔딩에서 설마했지만, 3권의 마무리가 정말 이렇게 될 줄이야. 상황에 맞게 옳은 결정 내린 엘머의 태도가 황당할 정도로 쿨해서 그렇지, 감성적인 문단들 추가되었으면 눈물 좀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런 방향이 아니어서 이 책이 좋은 책인 것일지도 모르지.
그림이 부드럽고 귀여운데다 두 어린이(?)의 쿵짝을 보며 마음이 편안했다. 늦게나마 읽어 다행이고, 어찌보면 정들자 바로 이별(?)이지만 그래도 책의 엔딩처럼 쿨하게 헤어질 시간. 안녕 엘머, 안녕 보리스...


'심해'라는 뽀대나는 단어에 해저 2만리 감성 느끼려고 펼쳤는데, 모든 내용이 여러 가지 의미로 놀랍다. 당장 오프닝에서 2021년 기준 화성 탐사용 로버가 3대인데 심해 잠수정은 1대라고 하는 언급부터 엥? 소리가 나는데, 다시 생각하니 심해 화산이나 발광 생물들로는 적을 죽일 수 없으니 당연한 것인가...이어지는 심해 연구의 역사나 중간중간 화보에 든 신비한 외견의 생물들은 꽤 상쾌한 놀라움을 주었으나, 이미 상당히 진행된 심해 오염과 임박한 위기들 부분에선 욕이 절로 터지는 충격이 있다. 해양 연구비는 대기 싫으나 해구에 플루토늄은 폐기해도 된다는 뻔뻔함이나, 아무리 동네 사람들이 현장답사 올 방법이 없다지만 과학 상식이란 게 존재하는 시대에 거긴 생물 읎어서 막 파고 더럽혀도 오케이라고 되도 않는 드립치는 채굴 업체를 보면 '역시 인간이란 이런 존재라서 조만간 쪄죽을 운명을 맞이하는구나'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음. 난파선을 둘러싼 추잡한 흐름은 덤...
중간중간 심해생물의 못생김(...) 얘기가 나오는데, 개인적 의견으론 못생기기는 커녕 고대라면 신이나 신수라고 여겨졌을 여지가 충분한 외관이다. 짤막한 화보 페이지에 실린 게 이만큼이니 직접 심해에서 생물들을 만나면 확실히 인생관 많이 바뀔 듯. 그러나 75만 달러라는 대단한 심해 관광비가 있다한들 그 깊이까지 갈 용기는 없으니, 정보를 전해주는 이런 책이 있다는 데 감사할 따름이다.
방구석에서 상상하는 것보다 백 배는 아름답고 신비할 세계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벌써 인간이 투척한 쓰레기가 넘쳐가는 심해의 상황을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하다. 지금의 불충분한 심해 탐사 기술을 가지고도 심해 생태계를 초토화시켜 돈 벌려는 회사가 있는 마당에, 더 좋은 잠수정들이 나오면 그야말로 최후의 보루인 이 곳은 어떻게 될까. 본문 곳곳에 정확히 알아야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고, 문제를 모르면 해결책이 없다고 언급하지만, 지금 사람들이 문제가 뭔지 몰라 지구를 열사의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니기도 하고...하아...그래도 저자와 베스코보(외모가 '난 탐험가야'라고 외치는 사람이 아직 이 시대에 있을 줄 몰랐음), 트라이턴 서브마린스의 영상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감상하다보니 아름다운 심해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싶어진다.
"과거의 우리는 몰랐어요.
50년 전만 해도 모르는 것이 정말 많았잖아요.
이제는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고,
지식이라는 막강한 힘도 갖추고 있죠.
저는 아이들한테 이렇게 말해요.
'21세기의 인간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렴.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면 어땠겠니?
해결책을 모른다면 어땠겠니?
그러나 이제는 둘 다 알고 있지."


피렌체 서점 이야기 같은 분위기려나 했는데, 소개된 인사들의 개성이 뚜렷해서 의외의 재미가 넘쳤다. 인물들도 그렇지만 이름도 처음 듣는 별쇄 기술에 순간 홀랑 넘어감. 지금이야 전자책 하나 사고 포토샵 깔면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이런저런 꾸미기를 해볼 수 있지만, 책이 전혀 싸지 않은 시대에 내 책 꾸미기를 하려고 책들과 판화를 구매해 붙인다는 건 집중력과 금전을 동시에 빨아먹는 궁극의 오덕 활동이 아닌가. 책 대여업으로 떼돈 벌어 홀에서 파티 열고 작가들과 출판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는 건 다른 의미로 놀랍고...책을 빌리려고 아침부터 줄을 서고, 해외에서도 신청해서 배편으로 책 상자를 받아보다니. 극장보다 도서관이 인기였다는 거 실화인가요. 책을 읽겠다고 불타오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게 미라클이다. 이해가 가기도 하고 전혀 안 가기도 하는 여러 열정인들 목록에 실속왕 프랭클린이 있다는 게 슬쩍 웃기면서도, 읽으니 웃음이 싹 가신다 이런 □●...
디지털 시대에도 종이책이 없어지는 날은 없겠구나 읽으면서 거듭 생각하게 됨. 종이책 고집하던 하모니의 미레이처럼 독자가 종이책을 원하는 경우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드는 쪽이 '물질화된 책', '싸지도 않고 기술도 불편하지만 내가 원하는 정신을 구현한 책'을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는 걸 처음 생각해본다. 활동했던 시대도, 책으로 전하려고 하는 목적도 전부 다른데다 몇몇은 주변에 있으면 거리를 많이 두고 싶은 성격이기도 하지만, 언급된 이들의 열정만은 놀라움으로 기억하고 싶다. 괜히 서점 가서 책 하나 건져와 팔랑팔랑 넘기고 싶은 유혹은 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