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모님의 블로그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배낭여행기들이 막 출간되던 고리짝 시절에 읽은 부다페스트의 모습이 신비로워, 책 제목도 구체적인 묘사들도 잊은 지금도 어둠 속에 번쩍이는 아방궁 같은 상상 속 이미지가 뇌리에 남아있다. 멋지구리한 책 표지를 보니 그런 추억도 떠오르고 혹해서 봤는데 참 많은 의미로 대단했다. 한 나라와 수도의 역사를 한 권에 넣었으니 상당히 간결함에도 불구하고, 엑기스도 압축되었는지 던져지는 내용들의 묵직함에 움찔.
역사가 긴 국가가 흥망성쇠를 되풀이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사람이란 존재도 현명하기도 했다가 집단으로 미치기도 했다가 사랑이 넘쳤다가 오락가락한 존재인 것도 새삼스러울 일 없는데...마자르족도 본디 정주하던 민족이 아닌데다, 지금 봐도 엄청나게 열린 태도의 건국시조가 있던 나라가 상식을 뛰어넘는 민족주의에 점령당하고, 유대인들을 무슨 정기 행사마냥 도륙했다는 건 무슨 뒤틀린 흐름인지. 관용을 베풀다 갑자기 작살내기를 반복하는 격한 성정의 주체들도 그렇지만, 수틀리면 분풀이 대상이 되리란 걸 몰랐을 리 없는 소수 쪽이 헝가리를 대체 왜 이리 사랑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너무 꼬인 것인가, 책 안에 나름 설명이 있기는 해도, 이 사랑과 헌신이 환타지 소설이다. 대체 부다페스트 현지에 무슨 매력이 터지길래...마지막 장에 저자가, 지금 부다페스트의 유대인들은 다른 중동부 유럽보다 더 자유롭고 평등하게 지내고 있다는 말을 안 남겼으면 졸지에 책 읽다 마음에 스크래치만 남긴 독서가 될 뻔. 툭하면 외세에 터지고 도움은 못 받는 역사 속에서, 세금 한 푼 안 내는 귀족들과 평민 비율이 "16대 1, 외국인을 제외하면 8대 1"로 살고 있으면 대다수의 사람들 속에 분노가 엄청났으리라는 건 이해하지만...나치 이전부터 시작해 나치보다 더 비인간적인 학살들 뒤엔 오점과 세계 정상급 인재 대량 유출 말고 남은 것도 없으니 이게 다 뭐냐...
다민족 국가가 민족주의 논하다 진짜 단일민족 국가 될 때까지의 과정도 속터지긴 마찬가지. 남의 나라 역사에 과몰입하는 것도 황당한 일이지만 갑갑함이 계속 차오른다.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전부 다 패전국 되고, 공산국가 되면서 어마무시한 숙청이 이뤄지고(인구의 7퍼센트가 비밀경찰 끄나풀이 되는 게 실제로 가능하다는 충격은 덤이다), 짧은 혁명 뒤엔 소련에 작살이 나고. 고난 파트가 하도 기니까 마지막 몇 장 속 회복이 정말 구원이다 크흑.
하지만 오래도록 화려함을 칭송받은 도시답게, 잘 나갔을 때의 모습은 참 놀라웠다. 지금은 사라진 전설의 도서관을 만든 마차시나 부다페스트에 다리를 놓은 '가장 위대한 헝가리인' 세체니 이슈트반, 양심을 지키고 유대인들을 구하려고 한 사람들처럼 읽다가 무릎치게 만드는 인물들도 있고, 생각보다 훨씬 헝가리 정치에 큰 의미였던 시시의 이야기 등등 순간적으로 읽는 사람 정신 흡입하는 이야기들이 보람차기도 하다. 당장 죽을 위기 겪고 탈출한 유대계 헝가리 이민자인 저자가 꽤 유연한 태도로 자기 가족 이야기나 죽다 살아난 유대인들이 하던 블랙 유머를 슬쩍 주석으로 넣는 것에서 느끼는 바도 있고...책을 덮으며, 후대의 물 건너 독자도 기억하고 싶은 헝가리 건국의 아버지의 말을 메모해둔다.
"이주자들은 크게 이롭다.
그들은 다른 언어와 풍습을,
다른 솜씨와 무기를 가지고 온다.
그 모든 것은 이 나라를 더욱 빛나게 하고,
우리의 적들을 놀라게 한다.
그러므로 아들아,
새로운 이주자들을 만나고
그들을 친절하게 대우해라.
그러면 그들은 다른 곳이 아니라
너와 함께 있기를 좋아할 것이다.
단 하나의 언어와 단 하나의 풍습을 지닌 나라는
허약하고 연약하다."


'피로한 삶에서 잠시 낯선 곳으로 떠나 인생의 의미를 찾는' 카테고리의 작품들이 두텁게 자리를 차지하는 건,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만 가득한 나 같은 이들이 세상에 많기 때문이겠지. 이 동네서 못 얻은 깨달음을 저 동네 간다고 얻을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책들은 '누가 어디로 떠났냐'에 따라 항상 다른 맛이 있으니 발견하면 반자동으로 손이 나간다. 번역이 2018년에 나왔으니 좀 늦은 발견이지만, 천 년 전에 쓰인 작품도 읽는 세상이니 뭐 이 정도야...
큰 굴곡은 없으나 뻔해야할 장면이 뻔하지 않은 점이 굿. 당장 책 시작부에 나오는 여성의 정체도 그렇고, 주인공 성격도 그렇고...분명 극단적 생각을 할 만큼 우울한데 행동이 황당할 정도로 자연스럽고 담담해서, 이것이 복지로도 해결 안 된다는 노르딕 스타일의 우울인가 돌팔이 진단 같은 생각도 잠깐 해본다. 게다가 스바누르가 새벽에 갑자기 들이닥쳐 조용히 감성철학 펼친 뒤에 탄알 얘기 하니까 왜 이렇게 웃긴지...주인공도 어이없어 하거나 짜증내는 게 아니라 동요하지 않고 '아 그래' 식으로 받는 이 해괴한 상황 무엇인가. 먼 곳에서 가서도 큰 사건은 없는데 예상대로 되는 일도 없는 이 희한한 흐름이 생각보다 즐거웠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과는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슬쩍 불편한 부분은 있다. 주인공의 계획이 나름 가족에 대한 배려에서 나왔다는 설정이긴 하지만, 선진국의 여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는 발상이라는 걸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음. 국가 임무 수행 중에 순직하는 경우면 모를까, 일반인의 시신을 해외에서 운구하는 데 얼마나 돈과 시간과 서류가 많이 필요한데, 대체 아이슬란드 정부가 얼마나 이런 데 지원을 해주길래...가족들이 데려오는 것 포기하고 그냥 그 동네 매장하더라도 기력과 돈을 있는대로 잡아먹는 건 똑같으니, 그냥 깨달음 얻고 여행 잘 끝나는 이야기인 게 다행이다. 막판에 보철 의족 대량 외상도 솔직히...아이슬란드가 의족을 국영기업에서 생산해 헐값로 팔고 있다면 모를까, 졸지에 딸한테 폭탄을 던진 모양 아닌가. 픽션의 세계에 이런 거 따지는 내가 프로불편러인가...쩝...
어쨌든 보고 나니 여행이 간절하다. 요나스처럼 전쟁이 막 끝난 나라에 가서 노동하는 여정은 부처 레벨의 깨달음을 얻는다 해도 사양이지만, 한적한 이국 어딘가에서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더듬더듬 이야기할 기회를 생각만 해도 싱숭생숭. 일단 여행기라도 한 편 집으며 마음을 달래봐야지...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까지도."


제목만 보고 미제 사건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판타지 러브 스토리였다. 복잡한 심경으로 확인하니 원제에는 형사란 단어가 들어가지 않음. 하아...그래도 샤오주와 톈닝의 상당한 매력에 꽤 즐거운 시간 보냈으니 많이 따지지 않기로 한다. (샤오주가 탐정이고 톈닝이 주변인물인 이야기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사장이 부여한 미션 클리어 뒤 톈우가 얻은 답에서 느끼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음. 정녕 이게 다여라? 이렇게 행방 궁금하게 해놓고 이 답변은 방치 플레이 아닌교? 직업이 편집자인 사람이, 서점에서 책을 사지도 않고 모서리에 침을 발라가며 읽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 - 지적은 좀 하더라도 - 는 설정이 사장의 존재보다 더 판타지로 다가오는 건 그냥 성질 탓. 서점에서 집은 책이 침 범벅이라는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으윽!
윤극영이 언급될 때는 내용과 관계없이 깜짝. 중문 작품에 한국 관련 언급이 그렇게 낯선 건 아니지만, 노래 가사라고는 해도 문학적 인용은 처음 보는데다가 그것이 최근의 유명한 작품들도 아닌 '반달'이라니. 좋은 글은 언제 국경을 넘어 누구 마음을 후려쳐도 이상할 게 없는데도, 이 시대에 이런 일에 놀라다니 나 너무 촌스러운가...
톈우의 선택이 끝나고 책을 덮은 뒤에는, 쉽게 잊는 것들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된다. 당장 한 시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불안한 것이 인생이지만, 그 불확실함 때문에 기회가 주어진다는 걸. 더 나빠질 기회와 더 나아질 기회가 한 세트라는 것이 문제지만, 어쨌든 하루하루는 분명 기회의 날들이고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걸...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어둠이 내 몸에 스며든 적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고 내 손엔 손전등 하나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나는 손바닥만 한 불빛이 비추는 곳을 따라가며 천천히 청소를 해서, 그 작은 불빛으로 나를 비추고, 또 앞길을 비춰야만 한다. 이게 바로 내 사명, 사람으로서 내가 가진 사명이다. 크고 거창한 도리 때문도 아니고, 다른 무엇 때문도 아니다. 그저 내가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집이 내가 사는 곳이고, 나와 가까운 이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일단 제목이 끝내준다. 표지에 인류학 문구가 있으니까 '엇?' 소리는 나오지만, 홍콩 느와르가 아닐지라도 반드시 내용을 확인해야겠다는 마음 뿜뿜 솟아남. 그리고 내용은 예상하지 못한 골때리는 방향으로 굴러갔다. 각종 도시 전설의 진원지 청킹맨션 내 탄자니아 커뮤니티라니 이 무슨 묘한 단어의 조합인가. 처음엔 '이런 분야도 연구하는 사람이 있구나' 했는데, 다 읽고 나니 '이게 뭔지 알고 싶어서 연구를 하는 거구나' 생각이 든다. 이 미묘함을 책으로 정리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에 감사하는 한편, 만일 무슨 일이 생겨서 탄자니아에 가야 한다면 극동의 쫄보는 살아남을 수 없으리란 걸 알게 된다. 평생 살고 있는 이 사회 안의 인간 관계도 어려운데, 배짱과 더불어 유연하게 거리 조절하는 감각이 필수인 나라에선 방법 없음.
"하지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동료에게 의지하기'는 독립독행의 정신이 강한 이들에게 '자력으로 살아가기'와의 균형 위에서 모색되는 것이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력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정말로 어려울 때에는 서로 돕는 관계가 성립한다. 하지만 그 균형을 잡기란 매우 어렵다." 설명만 봐도 놀라움과 땀이 숭숭...
사기당할 가능성도 숙지하고, 저 사람 수상쩍은 것 알면서도 도와주는 데 그 바탕이 무한 긍정이나 보살같은 자비심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백퍼 신뢰하는 일이 없다는 것에 '이게 가능한가' 끊임없이 놀란다. 세상에 내가 모르는 문화와 관습이 많다는 깨달음이야 항시 오긴 하는데, 오랜만에 제대로 벙찜. "타자를 쉽게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럼에도 누군가를 믿어보겠다고 결심하지 않으면 비즈니스는 개척되지 않는다." 그렇군, 탄자니아는 강한 멘탈의 용자들의 나라군. 그리고 자각은 예전에도 있었지만, 평생 비즈니스 개척은 글러먹었네 ●□...
일반적인 자본주의 세계에선 생각하기 힘든 방향의 부지런함을 가지고, "성실히 일하기 위해 홍콩에 온 게 아니라 새로운 인생을 찾아서 홍콩에 왔다"(순간 비속어 튀어나올 정도로 멋있는 말이었다 진짜...)고 말하는 카리마에게 박수를. 저렇게 살 수는 없다 해도, 호수성과 인간 관계에 대한 각오에 대해 생각은 해봐야겠다. 아무리 내향인이고 관계 범위가 좁아도, 당장 내일 어떤 인간 관계가 생길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니...


작년에 입에서 '오메오메' 소리 나오게 했던 책의 공동 저자 중 한 분의 책을 뒤늦게 집는다. 그렇게 관심 있으면 나오자마자 봐야 마땅하나, 독서 계획은 언제나 생각대로 굴러가는 법이 없어서...두꺼운 책도 아니고 읽어서 분명 좋은데, 마음이 어지럽다. 이런 책들 읽으면 자신을 의심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참여한 일에 편승하는 일이 아니라, 대다수가 참여하지 않더라도, 혼자라서도 옳은 일을 위해 내 얼굴이 팔리는 일이나 육체적인 고통을 감수하며 일어설 수 있는 용기가 내 안에 과연 존재할까. "팔짱 끼고 지켜보는 사람", "할 말을 잃은 다수"라는 말들에 고개 숙이다, '체념도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라는 대목에선 답답해서 잠깐 쉬었다. 온세상이 이렇게 시끄러운데도, 아침에 일어나면 일단 식사를 잘 하고 싶은 나는 뭔가를 바꾸려 얼마나 노력하는 걸까? 뭔가를 지지할 때, '옳으니까'가 아니라 '이러이러한 것이 어떠한 해악을 끼치고, 그걸 방지하면 어떤 이득이 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일까? 누군가가 함께할 때의 효과에 대해 카릭 씨가 적어놓긴 했지만, 오로지 스스로의 생각과 용기를 바탕으로 행동함이 마땅한 연령에도 저자의 질문조차 버거운 자신에게 실망한다. 하지만 당장 하루아침에 바닥에 본드로 내 몸 붙이고 1인 시위할 배짱이 생길 리도 없으니 어떻게 해야좋은가...
읽을 때마다 갈피를 못 잡고 끙끙대도, 용기 있는 사람들의 글을 읽는 걸 그만둘 수도 없다. 상황에 대한 자각마저 사라지면 그땐 진짜 끝일테니. "짐승도 신도 아닌 자신"을 과연 발견할 수 있을까. 고민은 끝이 없다.
"변화는 일어나야만 한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모든 저항의 시작이자 끝이나 다름없는 다음 물음의 답을 찾아야 한다. 당신은 어디서 있는가?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가? 더 간단히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만 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폭탄마 이야기가 아니라 리얼 게임 이야기라 시작하자마자 살짝 김이 새긴 했다. 그러나 빌딩이나 다리가 마이클 베이 영화마냥 터지지 않더라도, 천재 소녀의 활약과 산뜻한 고교생활 이야기는 사람 신나게 하기 충분. 단지...지뢰 글리코 게임도 계단 그림 보면서 계산하느라 시간이 걸렸지만, 뒤로 갈수록 스토리 보는 시간들보다 메모하면서 게임 이해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니 결국 마지막 포 룸 포커는 이해를 포기하고 읽었다...게임도 안 하고 패배한 셈이니, 도박에 손대지 않고 살아 진짜 다행이다.
마토와 에소라 사이에 대체 뭐가 있었는지 궁금하면서도, 학생의 영역을 넘는 뭔가가 나올까 불안했는데 그럭저럭 받아들일만한 선이라 안도. 물론 상당히 문제가 있는 사건이긴 한데, 아직 어렸던 '친구를 위한 마음'이 학생들 나오는 이야기다워 납득은 간다. 마토처럼 화려한 인물은 아니지만, 읽는 어른이도 고다가 좋기도 하고. 게임 승부 작품들에 빠져있던 소싯적도 생각나고, 실패는 했으나 간만에 두뇌도 굴려보았고 뒷맛도 상쾌한 여름 독서였다. 그나저나 책에 나온 게임 한 번 해보자고 지인을 불렀다간 정신 상태를 의심받겠지. 만의 하나 승낙을 받아도 이 더위에 계단 45단 오르다 서로 호흡 곤란 올지도 모른다. 게임 앱이 나오면 반복학습 해보고 싶은데 기대하면 안 되려나 쩝...


나름 발랄한 톤인데도 읽으면서 한숨이 멈추질 않는다. 실제로 리벤지 포르노의 피해자와 가해자 연령이 점점 낮아지는 이 세상이 우울하고, 주인공 스스로도 자각이 있는 성격 문제도 갑갑하다. 연령상 경험 부족은 어쩔 수 없긴 하나, 마고도 피해자들도 안전 대책이란 개념이 너무 없어서 보는 어른 속을 있는대로 태우고...중간중간 삽입되는 문자들 보고 예상은 했지만, 베스한테 전화오는 장면에선 오랜만에 머리 싸매고 '아 제발!' 소리 뱉게 됨. 이런 일 현실에서 많기도 하고, 청소년인 마고가 성장하는 장치인 건 알지만 고장난 진공청소기처럼 한숨이 나온다...그래도 그 끝에서 '당사자가 원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니 다행이지만...한바탕 속 썩은 뒤 "세상 모든 것이 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마고의 대사가 짠하다.
꼭 미성년이 아니더라도, '나 혼자', '우리끼리' 해결하려는 건 대체적으로 잘 되지 않고 마음도 무거워지는 일이란 것도 새삼 생각해본다. 도움을 구할 수 없는 경우도 매우 많은 것이 삶이지만, 그래도 도움을 청할 용기 있는 사람들이 마고와 단톡방 학생들처럼 전진할 수 있다고 믿고 싶네유...


표지도 강렬하고, 부제도 좀 세게 다가오는 단어라 무슨 얘기려나 궁금해져 읽었다. 예상과는 꽤 분위기가 다르고,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이 별로 안 되긴 했는데(반전 에서 그닥 놀라지 않은 이유 중 하나. 아마 감정 이입을 크게 했으면 꽤 놀라지 않았을까...) 나름 재미있었다. 소설 속에서 기업이 저지른 범죄도, 비슷한 일들이 현실에서 현재진행형이니 공정무역 브랜드를 자주 확인하자 오랜만에 생각하고...
저자가 잘 나가는 법률가라 그런지(전문 분야서 성공한 사람이 영문학 박사 학위 따고 소설까지 쓰다니, 역시 재능이란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여...), 주인공이 이런저런 법 이야기를 하는 장면들이 법률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실감난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법이나 계약이라는 것에 피로함도 느껴짐. 분명 이런 제도들의 목적은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것인데, 이야기 속에선 사람 목을 죄는 단어 게임이니까...
다른 건 몰라도 근래에 본 작품들 중 빌런을 제일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인 건 확실하다. 그냥 놔뒀으면 우울증 의심하며 끝났을 걸, 굳이 이상한 쪽으로 해결하려고 해서 폭망하는 컨셉이라니...나서야할 때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갈 때를 구분 못하면 인생 한 방에 간다는 교훈이 확실한 한 권이었다.


스테로이드가 통증 치료 말고도 쓰이는 치료가 많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뭐가 어떻게 되길래 근육 만드는 약으로 다른 치료를 하는가 궁금하던 차에 딱 책과 마주쳤으니 인생은 역시 타이밍. 좀 어렵겠지 각오하고 봤는데 굉장히 편한 어투인데다 재미있는 일화가 워낙 많아 책장 넘어가는 거 순식간이다. 그러나 역시 화학식의 이해는 무리였음. 분명 쉽게 이해시키려는 목적으로 들어있는 분자 구조 그림을 보는데도 무슨 숨은 그림 찾기 하는 마냥 시간을 들여야 하니 슬퍼진다. 과학도 못하는데 이젠 관찰력과 시력도 저하되는구나...
일단 스테로이드가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범위가 매우 넓은 단어이고, 여성 호르몬 조절과 피임약들도 포함하고 있다는 데서 뒤늦은 끄덕임. 그렇구나...발음도 한 번에 하기 힘든 ‘단백동화 안드로겐 스테로이드’와 그 일당들의 역할만 뉴스에서 잔뜩 보고 이게 다라고 생각한 것이 민망하다. 각 물질들의 발견과 합성에 성공한 과학자들 이야기도 참 신기하고. 뭐 이런 사람이 있는가 잠시 어안이 벙벙해지는 괴인 러셀 마커도 놀랍고(요새라면 회사 측 고소는 물론이고, 같이 연구하던 사람들도 가만히 안 있겠지. 보통 범죄 미드 보면 이런 사람이 칼 맞으면서 시작하지 않나?) ‘세상을 바꾼 약’ 개발자 명단에 두 번이나 이름 올린 유동원 교수님을 몰랐다는 것에 내가 뉴스를 얼마나 안 보는 건가 반성하게 됨. 이 분 이야기가 더 많이 홍보되면,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의 과학 교육에 좀 더 적극적이 되지 않을까 잠시 생각하다 관둔다. 어느 분야라도 떼돈 벌 목적으로 공부한다면 끝이 편안할 리가 없지. 차라리 95세까지 계속 논문 발표하면서, 자신의 연구를 다른 이들이 이어주기를 소망한 스토크 박사 쪽이 위인전에 넣기에는 훨씬 적절해 보인다. 평생 공부하고 건강 관리를 해야하니 이 방향도 엄청나게 빡세지만...
이 많은 약들이 기억에 다 저장될 것 같지는 않으나(점점 포기가 빨라진다...) 어디서 스테로이드 언급되거나 처방받을 경우 생겨도 놀라지는 않을 듯. 저자분 말씀대로 아플 때는 꼭 약 먹고, 복약은 꼭 지도받은 대로 하면서 건강을 보전하자!
“지금껏 인류가 개발한 약 중에 부작용이 없는 약은 하나도 없다. 스테로이드 의약품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독성을 개선하고 용법을 찾아냈을 뿐이다. 제대로 사용하면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약이지만, 방심하는 순간 건강을 갉아먹는 독으로 돌변하는 위험한 물질이니 전문가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에 맞춰서 사용하길 바란다. 그게 어렵다면 스테로이드 의약품이 위험한 약이라는 사실 하나만이라도 기억했으면 싶다. 그것이 한때나마 신의 물질이었던, 속절없이 타락했다가 보란 듯이 부활한 이 경이로운 약을 길들이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표지도 멋지구리하고 메리 데이질의 설정은 매력있지만, 읽기 전 기대가 너무 컸는가 살짝 허무하다. 등장인물들이 너도 나도 메리의 카리스마를 논하는데도, 그 박력이 별로 와닿지 않는 탓이 큰데 그냥 내가 둔해서 그런가. 오히려 등장인물들 중에서 제일 서툴고 외로워 보이는 건 어설픈 독자의 생각일까...애초에 추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분위기를 먹어야 하는 류의 이야기니, 이 더운 여름보다 늦가을에 봤으면 더 좋았을 책이었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가족애나 책임감은 엿바꿔 먹었고, 존은 초장부터 쓰레기인 거 대놓고 나오니 귀족의 양념을 친 막장이 부족함 없이 나온다. 설정만 절친이지 온도가 꽤 낮은 루시와 린디 관계의 미묘함, 귀족 간 결혼에 얽히는 편안하지 못한 관념들까지 다른 씁쓰무리한 볼거리(?)도 많고...개인적으로는 린디랑 애런이 투톱이고 나머지 인물들이 적당히 양념인 버전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런 내용은 살아남아 한국까지 번역되지 못했겠지 쩝. 어쨌든 긴 시간, 자매가 솔직하지 못하면서도 서로를 위해 살았다는 것에 예상 외의 놀라움이 있었고, 메리의 인생이 참 무상하기도 하고...아무리 격하게 사랑하고 미워해도, 긴 시간 지나고 마지막이 다가올 땐 결국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더운 날 땀 흘리며 생각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