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모님의 블로그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암 환자가 주인공이니 인생을 돌아보는 장면은 반드시 나오리라는 건 예상하더라도,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역시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 오렌지빛 과거 속에서 그렇게 아름다웠는가 알지 못했던 기억을 발견하고, 자신은 자신답게 잘 살았다는 걸 깨닫는 과정들이 추위에 떨고 들어온 날 아랫목에서 몸을 녹이는 것처럼 다가온다. 작가가 실제로 간호사여서 그런가 환자의 육체적 고통이나 간호와 관련된 부분이 알기 쉽고 실감난다. 그렇게 두꺼운 책도 아닌데 참 많은 것들이 녹아있었다.
"신문에 날 만큼의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하지 않고, 크게 눈에 띄는 일 없이 살아가고....... 산에 자라난, 한 그루의 나무 같은 인생이었다." 마지막 나날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삶을 살기는 정말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소망한다.


개인적인 생각일수도 있지만, 공부도 안 하고 접접도 없는데 뭔가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쉬운 학문 중 톱 클라스가 고고학이 아닐까 싶다. 인디아나 존스가 고고학자라 생각한 시절도 있었지만 나이들어 다시 보면 문화 유적의 보존과 발굴 측면에서는 국제 수배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고; 유적 발굴 영상 좀 봤다고 고고학을 안다고 하는 것도 택도 없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잘 읽었다. 학술 용어를 내가 다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고, 소개된 유물 유적들은 기본적으로 일본 중심이다만 유익한 안내서다. 높은 학문 수준과 더불어 과학 지식도 필요하고, cm 단위로 땅을 파고 표시하는 미친 노동을 감수해야 하며, 그 고생해놓고도 내 연구 방향을 반박하는 유물이 나오면 어떻게 할 길도 없는 험난한 학문이라는 걸 이해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리고 어쨌든 자신이 찾고 싶은 것을 찾아 발굴을 하지만, 그 해석에는 항상 위험성이 있다는 것도...
굉장히 신기했던 산소동위원소비 연륜연대법(발음도 한 번에 제대로 못하겠다...)를 보면 아아, 레이저 쏘는 것만 첨단 연구가 아니라 이런 거 있구나! 싶고. 석기에서 철기로 가면서 무기가 나오는 걸 설명하는 부분에 '살상인골로 복원한 검의 사용법' 그림이 나오는데, 사실 그림 자체도 골때린다만 그냥 인간의 존재가 슬퍼진다. 무기가 무디고 쓰기 썩 편치 않아도 상대를 죽여야겠다는 일념에 효과적인 방법을 찾고 집단으로 학습하는 것이 인간인가 싶어서...
모든 학문이 다 대단하지만, 고고학 분야에 대한 존경심이 쭉 올라간다. 이렇게 연구하는 사람들 덕분에 편하게 책 보았다.


추천사 읽을 때 이미 입에서 감탄인지 자조인지 모를 소리가 입에서 샌다. "장서가로 신분이 바뀌게 되면 이제는 책이 상전이 되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등장으로 인한 말의 퇴출 과정까지 논하며 종이책의 미래를 생각하는 출발은 근사했으나, 중심부는 책덕의 적나라한 중독 또는 덕력 상태의 피로이며 솔직히 읽으면서 내가 과연 웃고 싶은지, 당장 이 꽉 물고 내 책부터 처분해야 하는 건지 생각하게 된다. 그나마 책이 얇아 고뇌의 시간이 짧았으니 다행...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라도 방식은 제각각이니 의견이 다른 부분도 있다. 주머니 사정이나 절판 여부에 따라 헌 책을 사기도 하지만 나는 새책 넘기는 순간을 너무 좋아하고, 제이슨 본이 하드커버로 악당을 작살낼 때 책의 훼손을 걱정하기보다 '책은 호신용 무기도 될 수 있다!' 고 수집욕을 정당화하기도 했으니. 그러나 쟁여놓으려는 욕구가 꿈틀대고 나서 밟는 코스는 다들 똑같은가 보다. 저자는 책장 탑까지 만들 공간의 부동산이라도 있지 나는...생명의 유한함과 예측불가성을 고려하면, 당장 무슨 일이 생겨도 가족이나 공무원들이 책 처분에 괴로워하지 않게 깔끔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만은 간절히 하긴 한다. 그러나 어쩌다 큰 마음 먹고 처분해도 그 자리에 고스란히 다른 책이 들어오니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한탄할 따름이다.
저자가 걱정하는 책문화의 미래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당장 국제도서전의 엄청난 인파에 놀라고 나서는 더 그렇다. 읽는 방법이 바뀔 수는 있어도 저자의 말처럼 텍스트의 매력이 떨어지는 날은 없을 것 같고, 이제는 거의 고전이 되가는 '세기말 하모니'에 나왔던 것처럼 전자책이 기본인 시대가 되어도 특별한 느낌을 원해서 일부러 종이책 제본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지 않을까. 개인의 "특별함" 이 점점 중요해지는 시대니까. 나의 좁아터진 책장이 깔끔해질 가능성보다 서적 문화의 밝은 미래의 가능성이 더 크리라 믿는다. 책 읽는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


제목부터 별 생각이 다 들던 책이다. 옛날옛적 입시생일 때 나의 마음의 메아리인가 망상하다가, 약간 부코스키 책 제목 같다고 중얼대다가(꿈나무들에게 읽힐 책 내용이 그래서는 큰일 나겠다만). 숙제하는 소녀가 주인공인데 시작부터 루이스 캐럴이 나와서 한 1초 질겁하고(애들 옆에 이 사람이 있는 그림 자체가 개인적으로 달갑지 않다...). 그리고...애들 책이라고 생각하고 읽다가 나의 이해력에 경악했다. 이럴 수가...오랜 세월 수학 공부와는 담 쌓고 지냈으니 어쩔 수 없다해도, 이 정도였다니!
매우 쉽게 시작하다가 갑자기 101의 계승이 등장하면서 호흡 곤란이 오고, 합성수 지우기에서는 나는 단연코 이걸 정규 교육에서 배우지 않았다고 절규가 입에서 샌다. 구구단의 첫 자릿수와 둘째 자리 구하기의 법칙(이런 게 존재했다고?), 마방진, 피보나치 수열...어렵다! 아이들에게 수학의 즐거움을 알려주려는 책, 그것도 전세계에 100만 부 이상 팔았다는 책인데 다 큰 어른 머리에 한 번에 넣을 수 없다니 절망이 파도친다. 외우고 이해해서 생활 속 계산에 자연스럽게 쓸 수 있다면 매우 행복하겠다만, 마음 속 악마가 포기하고 계산기나 쓰라고 속삭인다. '읽어놓고 배움을 포기하다니 네가 정녕 독서의 의미를 모르는구나!'라는 호령도 어디선가 들려는 오는데...이도저도 못하고 자신감을 잃은 어른이는 대자로 드러눕습니다 어이쿠.


겁보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다만, 어지간한 유령 이야기나 스플래터 잔치보다 그냥 하루 생활에서 바로 접할 확률이 큰 이야기가 더 오싹하고 나중에도 계속 생각난다. 미해결 사건에 서 돌고돌아 마주하는 진실이, 픽션이라고, 물 건너 이야기라고 속 편히 생각할 수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 학교 도서실에 열 권씩 배치해야 하는 책이라 생각한다. 최소한 이걸 읽은 날만이라도 건강한 식생활을 해야겠다고 경건히 생각할테니...후반으로 가면서 소 때문에 오는 충격이 너무 커서 좀 잊어먹게 되지만, 거대 체인이 지방 상권을 가루로 만드는 과정도 충분히 소름끼친다. 결말은 참 미묘하지만, 다른 생각 못 하고 마지막까지 한 번에 쫙 읽었으니 보람찬 시간이긴 했다. 여름 독서는 이런 거지...


표지만 봐도 마음이 명랑해져 골라보았다. 제목은 또 얼마나 근사한지. 레고 무비같은 느낌에 책장을 열면, 우주 모험의 꿈을 꾸는 열 여섯 소녀가 등장한다. 마치 나의 괴로움을 날려주 려 나온 책인가 하는 망상까지 잠깐 했고...똘똘한 가출 계획과 새 친구, 미지의 세계, 카세트 테이프와 녹음기(이제는 이게 뭔지도 모르는 아이들도 많겠지)에 마냥 행복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제목을 봤을 때 이미 알아야 했다. 작가의 명성을 생각해도 그리 단순하고 얇은 이야기일 리가 없는데...
픽션의 세계라도(...픽션에서만 가능하겠지만) 세상을 구한다는 건 분명 보람있고 대단한 일이고, 때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품이 명작이라거나 스스로의 선택이 어떻다거나 하는 점은 아무래도 좋다. 아이가 자신의 미래를 희생하는 것은 반칙이 아닌가. 세상에 미성년의 시련을 다룬 책이란 셀 수 없으니, 이런 소리만 하다간 읽을 수 있는 책이 없지만...상상 속에서만이라도, 아이들은 그저 현재진행형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비틀린 독자는 바랄 뿐이다.


"외부에 여유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나는 사실 아내가 죽음에 대해 느꼈을 공포와 거의 같은 크기로 혼자 남을 나에게 올 고독 때문에 공포스러웠다. 그러니 내가 아내에게 한 "간병하는 지금이 행복하다."는 소리는 사실 겁에 질린 나에 대한 위로였다."
긴 병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히 당사자이지만, 주변인들도 고통스럽고 마지막까지 평화롭기 어렵다. 그래도 이 고통 속에서 얻은 정보를 서적이나 영상으로 나눠주시는 분들이 계시고, 이 책은 긴 시간 같이 한 '나의 반쪽'과 함께 한 항암 치료에 대한 글이다. 약 이름이면 모르는데 의사 실명이나 민간 요법 해주는 곳 이름까지 다 말하는 책은 의사가 쓴 책 외에 본 적이 있었나 싶고. 마지막에 어머님 이야기도 나올 때는 살짝 갸우뚱했으나, 그 시점까지가 저자분의 이별 여정이라면 그렇구나 싶다. 본인 책에 사랑하는 나의 가족 이야기를 더 쓰는 게 문제는 아니겠지.
의료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치료가 시작되면서 환자와 가족이 느끼는 감정, 치료를 둘러싼 환자와 가족들의 입장 차이(그저 환자가 낫기를 모두가 바랄 뿐인데도...), 편안히 가고 싶어도 반복되는 치료와 몸상태의 변화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과 보험 문제, 암환자들의 희망으로 수익을 내는 정규 루트 밖의 각종 시설들...개인적으로는 들어본 것 같으면서도 깔끔하게는 몰랐던 것들이다. 주변에 암 환자나 그 가족이 있으면, 격려라면 모를까 환우도 아니면서 '유명한 의사 아시나요? 그 치료 뭐예요? 실손보험 되나요?' 이런 질문은 떠오르지도 않거니와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살면서 암을 피해갈 수 있는지 의문인 세상이니 지식이 있어야하는 부분인데...사후 선산의 매장이라던가 제사 이야기는 좀 특수한 경우겠지만, 친인척 규모에 따라서는 이런 이야기도 도움이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책을 백 권 읽는다고 해도 대비할 수 있는 여정이 아니다만, 일어날 수 있는 일들과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남겨진 이들이 마음의 평화와 만나기를 바라면서.


나온 지가 꽤 된 책이라, 언급되는 광고 중에 '이런 게 있었지...'부터 '이런 게 있었나?' 싶은 광고들이 많다. 사실, 첫 단락부터 영화 E.T를 모르는 학생들에 저자분이 경악하는 것이라(...) 지금 학생들이 읽으면 심리적 거리가 크겠다만...그래도 읽으면서 즐거웠다. 아는 그림들은 아는 그림대로 광고에서 쓰이는 예시나 맥락이 신기하고, 몰랐던 그림들은 모르는 대로 신기하니까. 도판 인쇄가 알아보기 좀 어렵긴 하다만 검색하면 다 나오니까 큰 일은 아니다.
최근에 이집트 관련 강의나 책에 있던 말들이 그대로 나와서 놀라기도 하고, 맨유 뮤지엄에 있다는 예수 칸토나(...)에 폭소하고, 현대미술관의 당시 위치에 대한 격노에 약간 당황하기도 한다. 제프 쿤스의 2013년 작품이 5천 5백만 달러에 팔린 것을 두고 예술의 불편한 진실이 논해지는데 이 책이 출간된 뒤에는 9천만 달러 넘는 작품을 팔았으니 참 놀라운 일은 끝이 없다.
미술을 알아야 사는 시대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아도, 우리들이 광고와 옛 그림들의 연결을 통해서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신기한 체험을 한다는 건 즐거운 일이고, 이 시대니까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내일은 길가의 간판들을 한 번 더 눈여겨 봐야겠다.


종이가 싸지도 않던 시기에 14만 여 통의 서신을 남긴 이가 있다니 그 자체로 꽤 놀랍다. 한 상인이 남긴 유산 덕에 일단 제일 기뻐한 건 이탈리아 역사가들이겠지만, 시간도 공간도 다른 곳의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기술도 가치관도 너무 달라서 같은 지구 위에 있었다는 것 외에는 뭐가 같냐 싶다만, 프란체스코와 그 가족친지들의 이야기를 보면 참 사람이란 다 똑같구나 싶기도 하고...
당시의 길드나 도시문화도 그렇다만(재미로 보기엔 좀 심각한 부분도 많다...), 거의 딸 뻘이고 식재료 하나도 남편 지시가 없으면 구매하지 못하는 지경에도 당차게 할 말 다 하고, 성질은 내지만 또 할 일은 다 하는 부인 마르게리타나, 과일 배불리 못 먹어서 죽은 사람 얘기 들어봤냐고 편중된 식생활을 팍팍 까대는 의사 로렌초, 읊어대는 모든 게 철학인 친구 마체이...살아서 서로를 칭찬하고 꾸짖고 돈 때문에 난리를 떨고 하는 모습을 보다보면 책장이 금방 넘어간다. 이 많은 서신을 굳이 유언으로 고스란히 남겼다는 것은, 언제 읽히더라도 자신의 삶에 자신이 있었다는 것이겠지. 아직 조야한 감상문을 남기는 데도 망설임이 있는 입장에서는 그 마음가짐이 좀 부럽기도 하다. 라포의 서신이나 본문에 명문장이 많지만, 읽다가 남의 이야기같지 않아서(...) 의사의 서신을 메모해둔다.
당신 나이에 음식을 조금도 자제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당신이 생각해도 건강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수치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내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은 싼 것"라고 변명하지 마세요. 신학자들과 도덕철학자들은 세속적인 문제들에서 절제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큰 죄라고 생각합니다. 탐욕의 노예로 불리게 되는 것이 노년에 어울리는 훌륭한 명예인지를 이제 생각해 보세요!


인간이 소비하는 모든 물질에는 이야기가 있으며, 그것이 과학 분야든 역사 분야든 다루는 책들이 많다. 그런 와중에도 이 책에 특별함이 있다면, 인간이 어떻게 다방면으로 지구를 갉아먹고 한 자원에서 다른 자원으로 발을 옮기는가가 좀 더 알기 쉽게 정리되어 있고, 알기 쉬운 만큼 쓴 맛도 더하다는 점이겠지. 환경 문제만 전문적으로 다룬 책들보다 마음이 더 무겁다.
지구를 갉아먹는 행태가, 지금만큼 엄청난 수준이 아니어서 그렇지 이미 고대 로마부터 존재했고, 모피를 얻으려고 동물뿐 아니라 소수 민족들까지 씨를 말리던 행태나 정치적 변화를 읽다보면 옛날 일이라도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진행형인 금과 석유, 러시아병 문제도 울적하고(저자의 이 부문에 대한 언급은 유튜브에도 있었다) 맺음말 전체가 묵직한 한 방처럼 다가온다.
사족이지만 캉디드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배경 지식이 그냥그냥 있던 상태에서 별 생각도 없이 읽었던 것이, 저자의 시작부터 맺음말까지 꾸준한 인용과 해설을 접하니 내 감상에는 엄청난 구멍이 있었구나 싶어서...소개라기 보다 내가 중간중간 다시 보면서 기억해야 할 것 같아 메모해둔다.
캉디드는 우리가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세상을 돌아보면서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수세기 동안 인간은 시종 선량함과 평화에 대한 설교를 되풀이하면서 서로에게 고통을 가해왔다. 그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같다. 일부 사람들은 탐욕스럽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리석기 때문이다. 탐욕과 어리석음은 자연이 우리 안에 심어준 연대의 토대를 시시각각 갉아먹는다. 그 때문에 인류는 마치 아름다운 자연의 몸에 자라는 악성 종양처럼 자연의 즙을 게걸스레 빨아먹고 유독물질로 자연을 더럽힌다.
캉디드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참으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가꾸어야만 합니다." (463쪽. 마지막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