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모님의 블로그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쉽고 재미있는 의학 역사서들이 많고, 최근에 발견된 것들까지 보고 싶다면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책을 고르는 게 좋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항상 교훈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출간된지는 좀 지났지만 즐거움이 있는 책이기도 하다.
당장 책을 시작하는 첫 단어가 혁신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매우 혁신적이고 사람들의 인식을 뚜렷하게 바꾼' 10가지 발견은 워낙에 유명하기도 하니 모두가 들어본 적은 있겠지만, 이렇게 설명을 다시 따라가면 놀라운 발견 뒤의 사람들 이야기에 또 놀라게 된다.
히포크라테스가 의학적 성과만 큰 게 아니라, 질병에는 원인이 있지 무슨 신 타령이냐고 당대의 개념을 뒤짚어 엎었다는 것부터(시대를 고려하면 살해당하지 않은 게 용하다...) 비위생적 환경이 질병을 일으킨다고 보고서를 만들고 공중보건법을 통과시킨 변호사 에드윈 채드윅, 분만통 완화하려던 여성을 불경하다고 화형(...)시킨 스코틀랜드 왕이 있었다는 언급, 엑스선 발견 초기의 말같지도 않은 사람들의 상상에 발견만 무시당한 게 아니라 정말 삶의 길이 왜 이리 불편한지 안쓰러워지는 멘델의 이력...다 읽고 나면 또 친절하게 에필로그에서 교훈까지 정리해준다. 좀 놀라운 건 원서 발간이 2009년이라 '교훈을 배웠는가?' 대목에 신종플루 이야기가 나오는데, 격리조치를 제외하면 코로나 때랑 똑같다! 아무리 고난이 커도 시간이 지나면 바로 잊는 게 사람인 것일까...그래도 사람도 의료 기술도 항상 더 나아질 거라고 믿기 때문에 이 책도 나온 것일테지. 역시나 두 세번은 더 봐야할 책인데, 읽고 싶은 책들이 밀려서 참...


감사하게도 어떻게든 번역이 나오는 시리즈인데도, 출판 순서나 시기 때문인지 읽을 때마다 잠깐 전작들을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목소리는 재출간이다만 빼먹고 본 작품이니 이렇게 접할 수 있다는 것에 그저 출판사에 거듭 감사할 뿐이다.
산타 복장으로 죽은 도어맨의 주변을 파헤치며, 희생자의 씁쓸한 과거뿐 아니라 자신의 과거와도 씨름하는 에를렌뒤르. 살아있는 피로감을 묘사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북유럽 작가 그룹 답게(발전된 복지제도가 있어도 추운 데서 살면 행복감 증진이 어려운 건가...) 읽으면서 나까지 몸이 무겁다. 재능과 돈을 둘러싼 우울한 집착은 동서고금이 없다는 것도 갑갑하고...그래도 어쨌든, 범인을 잡았고 전혀 매끄럽거나 훈훈하지 않아도 딸과 스스로의 마음과도 대면하고, 정신없는 와중에 나름 연애를 시도하기도 하면서 주인공은 할 일을 다 하였다. 대단한 요소는 아니지만, 마지막에 거액의 자산의 행방을 아무도 모르게 되며 끝났다는 게 마음 편하다. 그런 물건은 소설 속에서라도 그렇게 사라지는 게 제일 낫겠지...


갑자기 모든 것을 다 내던지고 뛰어드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책이라면, 정열에 화르락 불타오르는 인물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 책도 분명히 그런 인물들이 나오는데...온도가 너무 낮다. 꽁꽁 추운 건 아닌데 비오는 날 싸돌아다니다 몸 식을 때랑 비슷하다.
남자주인공의 태도는 종종 칙칙하기까지 하니 연애소설로 어디 추천하기에는 미묘하다. 만나자마자 목숨을 논하는 사랑 고백을 할 정도인데도, 한없이 방어적이고 사람에게도 정이 없으며 갑자기 보내놓고 갑자기 다시 찾아오고...여주인공도 끊임없이 전전긍긍하는데 행복을 논하는 순간에도 전혀 온기가 없다. 원래도 고독했지만 인연을 만나도 고독하고, 그렇게 11월, 언젠가를 위해 미뤄놓은 모든 것은 허무하게 끝나니...혼자서 아무도 없는 낙엽길 걷듯 책을 읽고 싶은 이에게는 꽤 좋은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멋들어진 제목이니 안 읽을 수가 없다. 강력히 추천하는 가상세계 배경의 소설 100(실제로는 약간 모자란다)이라는 제목이었다면 전달은 쉬웠겠지만서도. 완전히 작가가 세계 전체를 만들어낸 작품부터, 대체 역사 속에서 다른 모습이 된 도시들까지 흥미로운 배경을 가진, 그리고 당연하지만 유명하고 재미있다고 집필진들이 추천하는 책들이 관련 삽화들과 더불어 소개되어있다.
그냥 소개하는 게 아니라 중요한 분석이나 잡학, 중요한 삽화나 지도 등이 실려있으니 이미 알거나 본 책이 나오더라도 충분히 새롭고 재미있다. 고전이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에 영향을 준 게 있으면 알려주는 부분도 좋았고. 동양 쪽 책은 소개가 정말 적은 게 아쉽지만 서양 책이니 어쩔 수 없나 싶다. 사실 이런 책들은 보고나면 책 욕심만 확 늘어나서 안 보는 게 나은데...루드비 홀베르처럼 작가 이름을 아예 처음 들은 경우도 있고, 읽은 지가 너무 오래되어 인용하는 대목이 아예 기억이 안 나서 다시 봐야할 책도 있고...디스크월드 시리즈는 너무 궁금하지만 저걸 다 구해읽으려면 돈 시간 공간이...능력도 안 되면 욕심이라도 버려야 하는데 내가 참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리 좋으니 읽으라고 부채질하는 책을 무슨 수로 이기겠는가. 집어든 내 잘못이지...


좋은 책이고, 지금 꼭 알아야할 내용인데 마음이 무겁다. 모르면 책에 나온 말마따나 피라미드서 아예 걷어차이는 신세가 될 지도 모르는데, 이 부문마저 투표랑 공부 말고는 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가 싶고...거대한 문제인 것도 모자라 기후변화보다 압박 속도가 더 빠른 것 같아서 드러눕고 싶다.
Ai가 매체에 굉장히 많이 다뤄지니 그래도 흐름은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지금 나온 디지털 기기들이나 앱들도 다 따라잡지 못하고 사는데...알파고 이후 당연히 많이 변했겠다고는 생각했지만, 후속작들의 정확한 학습시간과 성적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정체성까지 변화를 주면서 질문자에게 맞춰가는 챗gpt, 이미지와 문자로 생각을 이미 구현하는 기술, 향후 10년 노동자 90퍼센트 해고 예상, ai를 악용하는 정치...
삶은 편리해질테지만, 정말로 '역사상 가장 큰 판도라의 상자'가 다 열렸을 때 무엇이 펼쳐질지, 책에서 던진 화두의 반이라도 인류가 답을 준비하고 그 시기를 맞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답을 모를 때는 불안보다 희망을 가지는 게 정신 건강에는 좋겠다만...


제목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화성이 아니고 토성? 궁금해서 집어드니, 정말 신기방기하면서도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정보가 가득하다. 사실 책이 출간된 지가 꽤 오래 되어서 - 원서가 16년, 번역이 17년 - 이니 여기 언급된 많은 사항들은 진전이 되기도 했고 아니기도 하고...이런 걸 개정판이 나와서 한 번에 볼 수 있으면 좋겠다만 거기까지 바라면 안 되겠지;;
번역판 제목에는 토성이라고 되어있다만 실제로 언급되는 건 토성의 위성 타이탄이고, 책 출간 당시(그리고 아마도 지금까지?) 행성 표면의 액체가 발견된 유일한 곳이란다. 너무 추워서 가서 물을 쓰려면 또 기술이 필요하다만;; 그 외에도 화성이건 토성이건 상관없이 인류를 보호해줄 대기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먹는 거랑 멘탈 문제, 중력 문제 등등 해결할 게 참으로 많다. 그래도 쪼개고 쪼개서 생각하면 필요한 기술을 하나씩 하나씩 클리어해서,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분명히 먼 우주로 가는 건 가능한 일이다. 그 이전에, 이 기술들이 다 상용화될 정도면 지구에서도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바뀔지 정말 상상이 안 된다. 지상천국? 악용 때문에 어그러지는 지옥?
기술이 당연히 있어야 하지만, 읽다보면 역시 사람들이 같이 살 때는 멘탈과 정치가 제일 중요한가 싶어 약간 기운이 빠지기도 한다. 바이오스피어 실험도 그런 게 있다는 것만 알았지 대놓고 실패한 줄도 몰랐다. 극지방 기지나 심해만 해도, 심심치 않게 그 안에서 일그러진 사람들의 심리를 그리는 소설들이 꽤 있는 마당에 더 멀고, 더 고립된 곳이면 사람이 어떤 일을 일으킬지가 기술적인 실패보다 더 무서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sf적인 요소가 강한 미래 예상이긴 해도, 먼저 도착한 집단이 후발 집단을 통제하려고 하거나 아예 지구와 분리되고 싶어하는 것도 이주가 현실화되고 나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고. 뭐, 그 걱정은 다음 세대로 넘어가게 될 것 같다만, 최소한 기초적인 대비는 지금부터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일단 버진 갤럭틱은 상업 우주비행에 성공 중이다만 티켓값이 45만 달러니까, 1만 달러 이하가 될 때 수많은 발전들이 뒤따를 거라는 책의 예상 범위까지 가려면 아직 멀기는 하다. 책 출판 당시 3호까지 발사된 중국의 달 탐사는 바로 이번 달에 6호가 발사되고, 23년 발사를 예상했던 후속 타이탄 탐사선은 원자력 전지를 달고 28년에 발사될 예정이다. 스페이스엑스의 스타십 시험비행은 4차가 이번 달에 진행될 것이고 나사의 텐시그리티 로봇은 제일 최근 기사가 인명구조에 쓰인다는 내용이었으며 정말 현대의 마법처럼 보이는 이온 엔진은 점점 쓰이는 범위가 넓어지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과학이 정말 마법이다...) 식량 문제는 있다만, 어차피 우주에 안 가고 지구에서만 살아도 식량 문제가 더 심각해지면 맛 같은 거 따질 사치는 못 누릴테니 그냥 적응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정말 내가 살아있는 동안 워프 기계가 작동할 가능성은 없어보이지만, 누가 알겠는가. 찰리와 초콜릿 공장처럼 초콜릿 보내는 정도는 성공하는 걸 볼 수 있을지도...
현실은 참 삭막하지만 우주에 남아있는 무궁무진한 꿈을 볼 수 있어서, 설명을 따라가는 시간이 즐거웠다. 다음 안내서가 혹시 나온다면, 그때는 더 많은 발견이 이루어졌기를...


사전 정보 없이 집은 책이라, 도입부에선 이거 괴기 소설인가 했는데 - 하염없이 애인을 기 다렸다던가, 뭔가를 알게 된 회사 직원들이 갑자기 증발한다던가 - 점점 안개와 습기가 느껴지는 착 가라앉은 책이었다. 추리 요소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부분이 부각되는 것도 아니고, 책장은 분명 빠르게 넘어가는데 울적함은 천천히 누적된다.
아무리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더라도, 평범한 사람이 여자들을 자기한테 목을 매게 홀랑 빠지게 할 수 있는가는 잘 모르겠다만 일단 넘어가고...사랑하는 존재를 빼앗는 것이 복수긴 해도, 사실 자기 삶이 있는 한 사람을 그냥 복수의 도구로 삼는 잔인한 일이라 씁쓸하기 그지없다. 상대가 상처하고 얼마 안 되어 바로 재혼해버리면 큰 의미도 없어보이고...조니의 시점이건 경찰의 시점이건 결국 원하는 바를 이뤘어도 만족도 돌아오는 것도 없는 허망함, 이상하게 선명한 '사랑이 식는' 장면들과 할머니의 대사들...이런 착잡함이 매력이라 지금까지 계속 읽히고 있는가 추측만 할 뿐이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것이 어쩌면 그렇게 흉악해질 수 있을까. 그렇게 올발랐던 것이 어쩌면 그렇게 잘못될 수 있을까."


서울을 포함해서 유명한 도시들에 대한 책들은 아주 많고 다 나름대로 재미있다. 그 중에서 이 책이 좀 더 즐겁게 다가오는 건 '도시그림'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아는 장소들과도 연결되는 부분들을 보는 재미가 있어서다. 현대에는 지도와 풍속화의 구분이 확연하지만, 그 경계가 아직 미묘하던 시절의 지도인지 풍경화인지 풍속화인지 딱 끊기 어려운 작품들. 그 속의 도시의 모습들을, 이 부문에 대한 사랑이 머리말부터 뿜어져나오는 이의 해설과 함께 볼 수 있어서 참 즐거웠다.
계속 모습이 바뀌고 있다고는 하지만, 당시에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바탕으로 도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이 성공하면서 지금까지 도시가 살아있는 바탕이 된다는 것. 분명 굉장한 일인데도 그냥 살고 있거나 어쩌다 여행 가거나 할 때는 크게 생각해보지 않는 부분이다. 당장 지금 부분적으로라도 서울 재정비 계획이 나오면, 그게 실제로 이뤄진다고 해도 결과물이 몇 백년을 갈지 장담하기 힘들테니까.
뭐, 깊은 생각 하지 않더라도 일단 실려있는 지도와 그림들이 보기만 해도 재미있다. 부분부분 확대해서 보여주는 청명상하도도 그렇고, 뭔가 자세히 보면서 눈이 좀 피로해지는 암스테르담 지도(다른 지도들도 그렇지는 하지만 정말 펜끝의 집념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처음 들어서 더 신기했던 이스파한의 프라이버시 제일주의 건축, 돈도 안 주는 교황 명으로 그린 놀리 지도(너무 슬프다...), 설명 들으면서 보니까 놀랍고 아주 착잡한 경기감영도랑 백악춘효(어찌보면 그냥 내가 몰랐던 것뿐이니 부끄럽다...), 뭔가 레고 그림을 방불케하는 매력 만점 뉴욕 지도...시대랑 상관없이 서민의 주택사정은 항상 빡세다는 슬픈 사실은 덤이다.
그림 자료들이 정말 많고 부분 확대된 것들도 두세번은 들여다보며 즐겨야하는 그런 책인데, 당장 읽으려는 책이 너무 밀려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일단은 시간 나면 리움 가서 경기감영도를 다시 보면서 책 내용을 곰씹어야겠다.


적당한 알콜로 삶의 긴장을 풀고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 동시에 죽지 못해 사는 삶에 알콜을 필터삼는 사람들도 많다. 술에 대한 글들도 찬가부터 읽는 사람에게 숙취 후의 타는 목마름을 전염시키는 글들까지 수두룩하니, 나름 어느 정도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또 좀 새롭다. 긴 시간을 거주 증명서도 없이 떠돌이 노동자로 보냈다는 작가의 이력, 구소련 체제 러시아 작가에 그 동네 기준으로도 알콜 중독자라는 설명이면 이미 또 다른 차원(...)의 글이리라 예상은 하게 된다. 그리고 항상 예상을 뛰어넘는 일은 일어나고...
구소련의 각종 애환과 부조리를 정성담긴 각주와 더불어 곰씹으며 진지하게 읽어야겠지만, 이렇게 마시고 인간이 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들이부으며 현실과 미친 환상을 오가는 주인공을 보고 있으면 내 혼도 동시에 빠져나가는 듯 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고리키랑 성경을 또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다. 미친 알콜 칵테일 레시피들은 실재를 믿고싶지 않으며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알콜 중독이 되어야 메틸알콜이나 제동오일을 마실 정도로 판단력이 떨어질까?) 주인공과 함께 열차를 탄 사람들의 알콜 섭취와 썰도 결코 뒤떨어지는 수준이 아니다. 취한 상태에서 계속 술을 찾는 모습이나 술 깨고 느끼는 추위가 참으로 실감나니 중독의 힘(...)이 놀라울 뿐이다. 대단한 책이지만, 이런 책이 나오기 위해 알콜과 찌든 현실이 필요하다면 그냥 이 책이 독보적인 존재로 계속 남는 것이 좋은 일이겠지...책을 덮은 지금은 그저 단 한 방울의 알콜도 사절하고 싶다.


나온 지 꽤 된(원서 2007년, 한국어판 2012년) 이탈리아 코미디언이자 정치가 베페 그릴로의 책이다. 본업이 코미디언이니까 공공의 광대를 자칭한 것인가 싶기도 했는데, 검색하니 이 사람을 비판하는 미디어들도 비꼬아서 크라운 프린스라고 하니 나름 여러 의미를 담은 자칭인가 싶다. 이 책 이후 세상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저자의 정치 활동에 대한 평가는 각각이겠다만(트럼프랑 동급으로 묶이기도 하는 듯...) 어쨌든 이 책이 지적했던 문제들에 틀린 이야기는 없는 것 같으니(이탈리아어도 모르니 다 검색해서 체크하진 못하고, 어느 정도 찾은 뉴스들을 보고 짐작할 뿐이다만) 당시의 이야기에 집중할 뿐이다.
당장 서문부터 열기가 훅 뿜어져 나온다. "곁을 스치는 쓰레기 같은 현실을 그냥 쳐다보기만 하는 것,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삶은 없다. 그 자괴감은 우리 몸 안의 에너지와 영혼을 몽땅 빼앗아 간다." 정치적 행보는 둘째치고 입만 털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인 건 분명하다.
저자의 비판만 뜨거운 게 아니라 나열되는 정보들도 놀랍다. 시작은 저자가 범죄 이력이 있는 정치인들을 국회에서 몰아내려 했던 정화 운동의 기록인데, 막연히 뇌물이나 권력 남용을 생각하고 검색하니 이 종목들은 기본이고 갱단 활동, 방화, 납치(!)까지 아주 후덜덜하다. 그릴로의 말마따나 "이탈리아 범죄의 온상지 나폴리 스캄피아 지역의 주역 범죄자 수보다 높은 숫자"의 범죄자들이 내가 사는 나라 국회에 있다면 뚜껑이 열릴 법도...한국 국회도 선거 때마다 전과자 후보들 이야기는 나온다만, 잠자는 사람 몸에 불을 붙이거나 하는 수준은 아니겠...지?
No Tav 운동(놀랍게도 아직도 하고 있었다! 2010년에 이 운동 때문에 저자는 체포도 되었던 모양이다...), 식수 민영화(!!!!!!!!)의 폐해, 장르 불문 범죄자 단체 사면(!), 임시고용법으로 악화된 청년 실업률...이탈리아 시민들을 괴롭히던 문제들을 지적하는데, 이 문제들이 다 심각하긴 하지만 이 넓은 범위를 다루는 열의가 더 놀랍다. 블로그를 통해 사람들에게서 정보를 받았다고는 해도, 한 두 분야면 모를까 정경유착부터 환경, 국제관계, 미성년 대상 범죄까지 다루는 건 어지간해서는 힘들지 않을까. 거기다 아예 공직자랑 언론인들 가족 관계를 쫙 나열한 부분을 보면 용케 살아있다 싶다. 아무리 온라인에서 이미 돌던 정보라고 본인이 써놨다만, 수식어를 찾을 수 없는 배짱이다.
경악스러운 전화요금 제도는 다행히 지금은 개선된 모양이고 2020년 마지막으로 책정된 '사업하기 좋은 나라' 순위도 이 책이 쓰여진 2007년보다는 올랐으며(70위에서 58위. 대한민국은 5위더라) 당시 돈으로 4천 5백만 유로 들여놓고(가치 환산 사이트에서 계산하니 지금 한화로 약 천 억...) 내용이 아예 없었다는 국가 관광 포털 사이트는 정상적으로 운영 중이다. 발칸 증후군은 미국이 부인하니 어느 순간부터 현황 기사가 없다가 슬프게도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다시 언급되긴 하지만 자세한 정보를 찾는 건 실패했고, 후반부의 안타까운 사연들도 근황을 알 수 없으나 나아졌기만 바랄 뿐...
십 년도 더 전의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보기에는,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많은 일들. 지금도 해결까지 갈 길이 멀어보이고 여러 모로 심란하지만, 늦게라도 읽어본 의미는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