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모님의 블로그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어느 분야건 너무 몰두하면, 상식을 넘어가는 걸 본인만 모르는 상태가 종종 생긴다. 책도 예외는 아니고, 시대를 아우르는 책덕들의 광기를 훌륭하게 다룬 젠틀 매드니스같은 책도 있다. 그리고 나만 뒤늦게 알았구나 싶은, 백 년도 더 전의 책덕들의 상황을 그 시대의 눈으로 쓴 바로 이 책, 애서광들이 있다. 어디까지가 실화인지는 읽으면서 애매하지만, 어느 이야기든 백 퍼센트 소설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으니 부분적으로는 저 광기가 뭔지 좀 감이 잡히기 때문(...).
나름 진지하게, 지금은 도저히 불가능한 서간을 통한 연애 이야기가 나오는 초반에는 '시대의 낭만이구만...' 하다가, 그 뒤부터 점점 웃어야할지 한숨을 쉬어야할지 모르는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책을 갖겠다는 일념에 면식도 없는 이랑 결혼하려고 하지 않나, 뭔 관심법(...) 개발해서 헌책방 주인한테 써먹고, 겁내 비싼 사설 음서 도서관에 영혼을 바치고...
웃기는 부분들 빼고서라도, 미래의 도서 상황에 대해 책덕들이 모여 상상하는 챕터는 따로 빼서 많은 이들이 보면 즐겁겠다 싶다. 소리와 영상이 발달하면서 책 시장이 언젠가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대목들은 크게 보면 꽤 적중한 부분이기도 하고. 단지, 책이 소멸할 거라는 슬픈 예상은 다행히도 아직 실행되지 않았으며, 책이 소멸하면 어리석은 주장이나 무가치한 정보를 접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긍정적인 예상은 전혀 일어날 일이 없을 듯 하다만.
즐거운 독서 뒤, 그래도 난 저지경은 아니라고 정말 자신있게 말하려면 올해는 정말 책들을 정리해야겠다. 이게 방인지 헌책방 뒤 창고인지 모를 마당에 내가 선현(...)들을 평가한다는 게 어불성설이지 하아...


울적할 때 좋은 책들은 큰 위안이다. 그리고 허전하고 집중력도 떨어질 때, 제일 편안하고 즐거운 건 먹는 얘기다. 번역이 나온지가 십 년이 넘어가는 책이지만, 각종 소소한 이야기거리를 즐기면서 세상에 내가 모르는 어떤 맛난 게 또 있나 눈을 좀 번뜩여보기 적절했다.
나이 드니 별 이상한 데서 찡해질 때가 많은데, 벌써 역자의 말에서 찡하고 - 한국의 빵 과자 전래 역사에 비해 역사서가 없는 것이 안타까워, 제과업계에 몸담은 기술인으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했다는 이야기 - 기술은 커녕 뭐 제대로 의사소통은 되었겠나 싶은 옛날에 긴 교배를 통해 7쌍 염색체의 밀을 21쌍 염색체로 탄생시킨 이야기나 - 얼마나 배고프고 필사적이었겠는가 - 사과가 몸에 좋다는 말 한 마디 하는데 시대와 맞서는 용기가 필효했다는 것에 또 찡...밥줄 걸리면 체면이고 자시고 없는 건 시대를 초월한다는 게 좀 슬픈 대목도 있고, 이 책 보기 전에는 존재 자체를 몰랐던 부세 아 라 렌느도 참으로 먹어보고 싶고...갑갑한 마음을 좀 샤워도 시켜주면서 이것저것 알려준 즐거운 책이었다.


가벼운 독서수다를 떨고 싶어서 그믐에 가입했으나
공개적인 곳에 글을 쓸 용기가 나지 않고,
어떻게 뭘 쓰지 고민하다 새해는 시작해 보기로 했다. 뭘 쓰기는 써야, 같은 책을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생길 수 있겠지...그리하여 2024년 읽은 첫 소설 이야기를 써본다. 신간도 아니고(국내 출간은 2016년이다) 시작부터 속이 갑갑한데도, 읽다보니 구질함 속의 햇살이랄까, 지속력은 매우 짧지만이야기가 끝나면 느끼는 '그래, 인생엔 희망이 있어!' 타임을 맛보았기 때문에 희망이 간절한 연초에 꽤나 적절한 책이었다.
자연재해에 대한 사회적 복구라는 개념도 별로 없던 백 년 전, 이미 동네는 한 번 초토화가 됐고 그 와중에 간신히 남아있던 제방 터지면 아주 가루가 될 지경인 미시시피 시골마을. 치안도 아주 대단해서 동네 경찰은 뇌물이나 받아먹고, 금주법의 시대에 어쩔 수 없이 출동하는 단속원들은 어디서 총맞고 묻힐지도 모른다. 이미 이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빡세건만, 여주인공은 남편 잘못 만난 것도 부족해 이미 갓난 아기를 잃은 상태. 초반 몇 장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스트레스가 오르기 시작한다. 이거 행복하게 안 끝나면, 차마 책을 태울 수는 없겠지만 일기장에라도 작가 욕을 쓰겠다 다짐하게 된다.
체구는 작으나 총질도 잘 하며 적응력이 뛰어나고 아픔 속에서 깨달은 게 많은, 읽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딕시 클레이. 그리고 갓난 아이가 배경에 없었다면 참으로 오글오글한 딕시와의 첫만남을 갖게 되는 또 한 명의 주인공, 밀주 단속원 잉거솔. (본문에도 있지만 책 뒤에 아예 등장하는 노래 리스트를 작가들이 정리해 놓았고, 첫 만남에 잉거솔이 부른 노래를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 있다. 아름다운 노래다만 멋들어진 만돌린 실력뿐 아니라 이 노래를 부르며 '깊고 두려움 없는 목소리'까지 뽐내다니...몸이 오그라든다) 둘이서 2주간 빡세게 인생의 쓴 맛을 보고 얻어맞고 채이고 물에 빠지고 사랑하고, 읽는 사람도 기진맥진할 무렵에 드디어 잔잔한 행복이 시작된다. 작가는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쓸 뿐이고 나를 행복하게 할 이유가 없을진대, 읽으면서 '아 제발 쫌!' 을 연발하던 나의 바람과 결말이 같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아아 딕시!
악역들은 생각보다 빡센 인과응보를 겪지 않았으나, 이것들의 길고 꾸질한 고통보다는 주인공들의 새로운 출발로 빨리 넘어가는 게 내 정신건강에도 좋았으니 더 따지지 않을 것이다. 새해라는 것이 사실 달력상의 숫자가 바뀌는 것이지 내가 새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만, 희망을 갖고 싶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게 되는 시기가 아닌가. 이럴 때에, 답도 없고 인터넷도 없는 환경에서 인생에 두들겨맞고 감당할 수 없는 재해까지 만나지만, 그 끝에 드디어 꿈꿔본 적 없는 조용하고 따스한 행복이 있다고 말해주는 이야기를 읽으니 뭉클하기 그지없다. 이런 만남은 우연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서에 과도한 감정이입을 하지 않는다만, 한 편의 이야기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죄는 아니지 않은가. 독서와 함께 부푼 희망이 이삼일은 갈지 잘 모르겠지만, 그 뒤에 또 새로운 책들을 만나겠지. 그리고 또 끄적여볼 용기가 생기면, 홀로 또 꾸역꾸역 써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