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모님의 블로그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광고라는 개념이 생긴지도 얼마 되지 않던 시절이니 이런저런 해프닝과 웃음을 기대하며 펼쳤는데 예상과 좀 다르다. 물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고, 사기나 과장 광고가 없던 시기는 없다는 사실도 재확인했지만...꿈을 직접 제공하던 공간인 경성 백화점 이야기와는 또 다른 광고 뒤 생활상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그 시절의 도덕적 엄격함이란 게 체감온도로 치면 지금의 100배는 될 것이고, 당장 본문에 나오는 각종 모던 걸들과 여배우들 까는 얘기만 봐도 머리가 아픈데 광고들은 그렇지 않으니 대체 그 잣대란 건 뭐였던가. 여성 나체 일러스트를 마구잡이로 광고에 넣고, 유흥업소, 포르노 서적, 성 기능 증진제와 성병 약을 아무렇지도 않게 광고하고 사람들이 구매하는 세상에서 카페 웨이트리스를 비판하는 논리는 평생 생각해도 모를 듯. 그 와중에 서비스료를 광고로 투명하게 공개하는 기생 권번조합 여성들의 상도덕에 에 박수. 그러나 바로 뒷 페이지가 추노 마냥 도망간 기생 잡는 현상금 광고라 밀려오는 안타까움이 두 배...
살찌는 약, 의친왕 마케팅, 총포상, 아편, 책 검열 등등 슬퍼지는 이야기들 가득하다. 배 가득 채우기도 힘들고, 지금은 고칠 수 있는 병들에 고통 받고, 파리 모기 때문에 목숨을 잃으면서 식민지인이란 서러움도 삼켜야 하는 시절. 광고 속 사람의 욕망에는 큰 변화가 없으나,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한들 지금 좋은 시절을 살고 있다는 데 감사해야겠다. 고난길을 버텨내셨던 서바이버인 조상님들께도...


사실 남의 나라 역사니까 고대만 삼천 년인데도 부담 없이 즐기는 것이지, 시험이라도 친다면 입에 거품 물 이집트의 역사. 그 긴 기간 중에서 콕 집어 기원전 1400년 1년 간의 모습을 일상물 웹툰 보는 기분으로 신나게 감상했다.
아주 밥맛 없는 캐릭터로 설정된 투트모스 4세(선물 뭐 가져왔냐고 보채는 게 살아있는 신이라니 하이고...) 빼면, 농부부터 대신까지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흐뭇하다. 술 원산지 위조나 양조장에서 술 슬쩍 훔쳐마시기 등(전혀 고대의 일이라 느껴지지 않는 단어들...)은 어디까지가 사료 근거인지는 알 수 없는데도 분명 건수가 많았으리란 확신이 솟구침. 의사 파트가 꽤 분량이 있는데도, 당시 의과 대학에서 뭘 가르쳤는지 설명이 별로 없는 것은 좀 아쉽다. 일단 이야기 속에 나오는 외과 시술, 대머리 치료(이때 만약 치료에 성공했으면, 이집트는 고대 문명보다 탈모 치료 종주국으로 더 유명했겠지. 그것도 나름 괜찮았을텐데...), 주문 외우기는 교과목에 있었으리라 추측하지만 나머지 과목들은 뭐였을까. 그나저나 맹수의 지방을 획득해서 머리에 바르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을텐데, 모발 획득을 위한 사람의 욕망이란 그토록 큰 것인가...
열심히 일하고, 욕하면서 세금 내고 부역도 하고, 축제 때는 열과 성을 다해 먹고 마시는 모습은 고대 이집트나 지금 세상이나 똑같으니, 사람의 기본적인 모습은 시공간과 관계없구나 재차 생각한 시간이었다. 다 읽고 나니 , 표지 아래 적힌 '내 평범한 하루도 역사가 될 수 있을까?'라는 글이 실감나면서 슬쩍 소름. 만의 하나라도 미래의 사람들이 나의 하루를 통해 2025년 일반인의 모습을 공부하리라 생각하면...노오오오오 어우 끔찍해! 제발 후대의 사람들이 참고하는 데이터는 나머지 인구 80억의 것이기를...


백 년 전 백화점의 물품이나 유행이라는 게 당연히 지금과는 다른데, 카테고리와 선전 방식, 유행이 퍼져가는 모습, 그에 대한 반발 등등이 단어만 바꾸면 그냥 지금 얘기다. 평균적으로만 따지면야 백화점 드나들 형편이 안 될 사람들이 더 많았을 시절이지만, 일단 한 번 꽂히는 물건 생기면 다른 지출을 틀어막아서라도 그걸 사고야 마는 사람 심리도 그렇고. 온갖 유행, 특히 젊은이들의 패션에 대한 비평을 넘어선 막말들을 보면 웃긴데 피로하다. 니가 사줬냐...과시성 사치나, 자기 사정에 너무 안 맞는 소비를 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었겠지. 그러나 지금보다 제약아 더 많았던 세상에서, 새로운 물건들을 접해보고 소소한 행복을 맛보았을 이들을 어찌 비난하리. 한편으론 이런 비난들에도 불구하고, 사고 싶은 거 사서 입고 먹고 인생의 즐거움을 찾았던 그이들의 강력한 멘탈(혹은 지름 욕구)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당시 의학 수준을 고려하면 쪼까 무서운 다리 지방 제거술 얘기도 있지만...시술 받으신 분들이 별로 없었기를 바랄 뿐이나, 인간 한 번 뭔가에 필사적이 되면 누가 무슨 말 해도 소용없으니 분명 누군가는 큰 낭패를 보았겠지.
지금 봐도 그럴듯한 광고 문구들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맛있게 먹는 것은 사치가 아닙니다. 건강의 열쇠입니다.', '충치가 되면 공부를 잘 못한다'(어머니들이 정말 사력을 다해 치약을 구매하셨을 듯...), '머리치장은 사치가 아니라 예의' 등등. 핸드백 파트의 김기림 작가 수필 인용에서 진짜 빵 터져서, 이거 원문 꼭 봐야 된다 다짐. 그리고 바로 다음 문단의, 소설가 이태준의 '핸드백보다 좋은 책을 든 분이 더 빛나보인다'는 말엔 참 묘한 기분이 든다. 손에 책 들고 있다가 들어본 소리는 '유난 떤다' 밖에 없는 입장에선, 저런 발상하는 사람도 있구나 생각할 뿐. 하긴, 나도 누가 손에 책 들고 있으면 '들고 다닐 정도니 겁내 재미있는 책일 것이다' 생각하면서 제목 훔쳐볼 생각만 하지 들고 있는 사람 얼굴 보지 않으니 이래저래 빛나는 모습이랑 거리 너무 멀다.
어쨌든 ●빡센 식민지 치하에서, 소화제를 먹어가면서 전통주와 서양주를 공평하게 많이 들이붓고, 쪼코레트도 씹고, 이도 열심히 닦으시면서 수많은 조상님들은 인생의 즐거움을 찾으려고 애쓰셨더라.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뒤에 어떻게든 재미있게 살아야겠다는 욕구도 올라오니, 여러모로 읽어 뿌듯하다.


와이너 선생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멋진 책을 써서 수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작가들의 글에서 자신을 의심하거나 우울해한다는 대목을 가끔 접하게 될 때는 눈 앞이 깜깜하다. 대단한 사람들도 이런 생각하는데 나는...자기 비하하면서 시간 보내봤자 책 살 돈 한 푼 생기지 않으니, 어떻게든 생각을 돌려보지만...벤자민 프랭클린의 인생을 와이너 선생과 들여다보고, 선생의 고민을 같이 생각하는 과정이 재미있고 즐거우면서도 굉장히 괴로웠다.
이 여정에서 선생은 긍정적인 결론을 내렸지만, 난 잘 모르겠다. 무서운 일도 일어날지언정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고, 좋은 일들이 존재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문제는 '쓸모'다. 프랭클린이 말하는 '실용적인 쓸모'를 살면서 성취해본 적이 없고, 남은 인생에서 그런 일이 있을지도 자신할 수가 없으니까.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마음이라도 넓어 무재칠시하고 사는 것도 아니니 프랭클린의 눈으로 보면 이게 사람인가 싶겠지. 망할. 손발 다 묶인 기분이다. '내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바쁜 상황'은 노력만으로 만날 수 없잖은가. 설상가상, 벤자민의 독서 스타일을 평가하는 대목에선 벼락맞은 기분이다. 나는 독서를 멈춰야 할 때를 아는가? 책으로 도피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책을 안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런 두려움을 털어버리자는 의도가 책 속에 있는데도, 방향이 반대가 되니 몸에 한기 든다. 어쨌든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뭐라도 읽으면서 마음 가라앉히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좋은 말들도 많이 보았으니, 어떻게든 힘이 나는 부분만 기억하자.
"우리는 상처의 총합이 아니다. 모든 오자는 교정할 수 있다. 그저 실력 있는 인쇄공만 만나면 된다. 아니, 직접 수정해서 인쇄하면 된다. 저자는 실수를 바로 잡아 신판을 낸다. 결국 우리는 자기 삶의 저자이며 우리 모두가 1인 출판사다."


진지하고 차분한 안내서인데, 중간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보통 학자분들이 이런 책 쓰시면 애정을 못 숨기고 '여기도 좋고 저기도 좋고~' 가 되는데, '보존 상태 별로', '따로 찾아가기엔 빈약', '굳이 안 들어가도 됨' 이라는, 뭔가 인솔자의 피로가 느껴지는 문장이 아무렇지 않게 나옴. 큰 유적지 아니면 성에 차지 않는 고객들의 갖은 클레임들을 거쳐 나온 말들이라 추측되니, 웃으면 안 된다 생각은 하는데 참...헬레니즘 이후 유적은 본토에서도 큰 대접하지 않는다는 것도 괜히 웃긴다. 깊은 역사 가지면 이런 문제도 있구만.
도판 수가 그렇게 많지 않은데도, 소개되는 조각상들 수준 끝내준다. 수탈당해서 제국에서 전시하는 작품들은 남의 나라 교과서에도 실리는데, 비슷하게 혹은 더 대단한 것들의 본토 전시가 덜 유명한 현실에 갑자기 입맛 뚝. 외쿡인 생각도 이러니 그리스 사람들은 속이 속이 아닐 듯. 게다가 남의 나라 군대들이 와서 전쟁하는 통에 박살난 신전들까지...그러고도 이 정도로 남아있다는 게 그리스의 빠와인가. 카찬차키스에 관한 부분이나, 지금도 열리는 운동 경기들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유물 유적 중심이라 먹는 얘기는 없다는 게 살짝 아쉬우나, 티비고 유튜브고 외국 맛집 가는 영상들이 가득한 세상이니 정말 갈 일 있을 때 검색하면 그만이겠지.
그리스 여행을 갈 때 분명 도움이 되는 내용을 알고 나니 일정이 꽤 고민된다.(언제 갈 지도 모르는데 사서 걱정 뭐냐고...) 거의 모든 동네에 어느 정도의 유적들이 있고, 작은 나라도 아니니 바쁘게 버스 타고 며칠 안에 동네들 찍기도 무리가 있고. 다 포기하고 패키지로 가거나, 한 달 살기로 가서 하루 한 동네 천천히 마실 다니거나 둘 중 하나인데...뭐, 고민은 그때 가서 하고, 일단은 소개된 지식들을 쪼금이라도 애써서 기억하자. 언젠가는 갈 테니까!(제발...)


솔직히 어려웠다. 오랫동안 공부도 별로 안 하고 유전자나 DNA나 머릿속에서 뭉뚱그려지는 저렴한 지식 상태다보니, 각종 용어와 단백질들 등장하니 슬쩍 눈물이 날 지경. 그러나 저자분의 혼이 실린 말투에(읽다보면 나 같은 사람들 때문에 속터져서 쓴 것이 아닌가 의문이 생긴다) '세포는 사용자고 DNA는 도구'라는 것만이라도 절대 잊어먹지 않아야겠다 굳게 다짐한다. 전문용어들 태반은 아예 외우기를 포기했지만 이것만이라도!
좀 힘들긴 했어도 읽어 후회할 일은 없는 것이, 중간에 신기방기한 얘기들 엄청 많다. 제목이 비유로 쓴 문장이 아니고 진짜였던데다, 나와 외모가 닮은 사람은 외모를 구성하는 유전자도 흡사할 것이라는 말에 허걱. 많은 공상과학 작품에 등장하는, 내가 사랑하던 고인과 똑같은 복제인간이라는 게 왜 불가능한지의 설명을 보면서 다행이라는 마음과 섭섭한 마음이 동시에 드는 내 속을 나도 모르겠음. 배아 연구가 지금에 이르는 과정 속의 끼워맞추기 연구나 정치질은 반갑지 않은 양념이긴 한데, 일어난 일인 것을 어쩌리. "특정 연구자가 생물학적 체제에서 놀라운 결과를 보고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를 재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때 그 연구자는 그런 실험을 할 수 있는 천재성과 기술은 자신에게만 있다고 주장하며 허영심을 드러내곤 한다." 이런 주장하려면 해리 포터 월드로 가셔야지...그러나 단어만 몇 개 바꾸면 모든 인간사에 다 해당되는 소리니 어쩔 도리 없는 듯. 이런 일이 뭐 앞으로는 없겄냐...
뒤로 갈수록, 이런 뉴스들을 놓친 스스로가 의심스러워지는 발견들이 있어 눈이 번쩍 뜨인다. 특히 교토대 연구팀의 생식세포 연구! 저자도 책 출간될 때 얼마나 더 진행되었을지 궁금하다고 써놨는데, 검색하니까 난원세포랑 정원세포를 대량 배양하는 기술이 개발된 게 작년이다 우오오오! 다음 목표가 정자랑 난자의 인공 제작이라는데, 이거 성공하면 세상 진짜 어떻게 되는 걸까? 블레이드 런너가 현실화되는 걸 목격하게 되나요? 갑자기 흥분한다고 간신히 집어넣은 전문용어들 머리에서 다 튀어나가긴 했는데...안드로이드 산업 재벌의 등장보다는 사람들이 덜 아프고 빨리 치료될 수 있는 세상이 올 거라고 기대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도 좋겠지. 과학책 쪼금이라도 더 보면서(정말?) 멋진 뉴스를 기다려야겠다.


샤넬 넘버 파이브야 워낙 유명하지만, 소련제 향수는 금시초문이다. 향수 안 만드는 나라 찾는 게 더 빠를테니 당연히 있었을텐데도 소련과 향수라니 단어 연결 왜 이리 어색한가. 어쨌든 그 시작부터 갈림길, 얽힌 사람들의 인생들을 보니 신기하기 그지없다. 향기로운 화장품 얘기하면서, 수용소와 화약, 시신의 냄새도 나오니 후각이 둔한 사람에게도 확 꽂히는 대비 효과 장대하다. 짧은 언급이지만 처형 집행자의 향수 얘기엔 정신도 약간 아득해짐. 매력의 부가가 아니라 죽음의 탈취라니, 이런 기능 별로 알고 싶지 않아...
폴리나 젬추지나의 이름도 처음 접하지만, 샤넬과의 대조가 아니더라도(항상 생각하지만, 이 정도 운 좋은 사람 진짜 드문 듯...) 이 행보를 기구하다고 해야할지 희한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형용사를 고르다가 그냥 포기함. 곤경을 겪은 뒤에도 이어지는 스탈린 사랑에선 머릿속에 물음표만 가득해지니, 정신과 의사의 코멘트가 없는 게 참으로 아쉽다. 한 길 사람 속이 역사보다 어려운 거...
풍족하지 못한 시절의, 막판엔 '늙은 아줌마 향수' 취급까지 받은 소련제 향수를 현재의(원서 출간이 2020년이니, 5년이나 지난 전쟁통에선 어떤지 모르지만) 러시아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찾고 있다는 것이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으나 심정적으로는 알 것도 같다. 딱히 모든 게 다 좋았던 시절이 아닌데도 뒤늦게 갑자기 그리워지는 비합리적 현상은 인류 공통인가?
흥미롭기도 하고, 수용소 냄새 파트에 소개된 「콜리마 이야기」가 궁금해 읽을 책 리스트에 추가(...언제 읽을지는 모르지만). 세상을 보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고 언제나 모르는 것들을 발견하니, 부족하고 소심한 이는 그저 빨리 한 글자라도 더 읽어야지...
"냄새와 향기는 고유의 생산 시간과 고유의 소멸 시간이 있다. 정권이 붕괴하고 이데올로기가 사라져도 냄새는 오랫동안 남는다. 그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향기의 주기는 선거 시기와 일치하지 않는다. 향기는 자신의 시간을 갖는다. 향기는 혁명보다 더 오래 존속할 수 있다."


오랜만에 어릴 때 아동용 과학잡지 보던 시절 생각났다. 시종일관 톤도 경쾌하고, 그림들도 간단하면서 알아보기 쉽게 되어있는 것도 좋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형광의 원리에 대해 말해보라면 아마 못 할 것 같지만;;;) 무엇보다 우주보다 더 많은 신비가 바닷속에 더 남겨져 있다는 말 자체가 흥분된다. "어느덧 화성까지 날아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건만 당장 집 문 앞에 펼쳐진 바다의 밑바닥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얼마나 많이 아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돌고래야 워낙 사랑받는 동물이고 언급이 많이 되니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코로 발성하는 것이나 무려 각자가 이름에 해당하는 음성을 보유한다는 신기방기한 이야기에 완전 뿅. 개인적으로 우와아 탄성이 절로 나온 건 열수 분출과 바이러스 이야기. 갑자기 머릿속에서, 열수 구름을 가르고 나오는 초거대 물고기들, 탐사선에 들러붙어 지상에 올라오는 해저 바이러스 등등이 춤을 춘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종들이나 정확한 결과가 없는 이론들로 누군가 현대판 해저 2만리를 지금 쓰고 있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하게 됨. 우주 연구보다 속도가 더딘 데 대해서는 비용 문제도 간간이 언급되는데 , 솔직히 '신비한 바다의 연구'가 아니라 '노화 방지 연구'로 후원자 찾으면 돈이 갈쿠리로 모이지 않을까? 이걸 또 그런 식으로 선전하지 않는 것이 과학자들의 양심이려나...
플라스틱 문제나 인간의 과도한 행동들도 중요하게 나오니 읽으면서 마냥 좋아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 연안이 세계에서 미세플라스틱 농도 가장 높다는 불명예스런 구절에 촐싹대다 등짝 맞은 기분. 1인당 플라스틱 폐기물 생산량도 세계 3위라는 말도 나오니, 또 다시 n분의 1의 죄가 추가된다 끄흑. 그래도 마무리에 변함없이 명랑하게 들려주는 긍정적인 이야기들에 약간이나마 마음이 가볍다. 시간이 지나 더 많은 바다의 신비가 공개될 때엔, 죄보다는 개선된 결과에서 n분의 1을 차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니 갑자기 저자분 너무 고마운거...물론 이 말들이 면죄부는 안 되니, 노력하며 다음 신비의 세계 가이드를 기다려야겠지.
"과학적인 배경, 창의성, 돈이 없더라도 어디에 사는 누구든 바다를 보호할 수 있다. 굳이 온 세상을 뒤흔들 필요는 없다.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물고기를 소비하고, 플라스틱을 덜 사용하고, 자동차를 더 자주 주차장에 놔두고, 때때로 해변이나 호숫가에서 다른 사람이 버린 쓰레기를 가져오기만 해도 이미 올바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로마 공화정이 망한 거야 호랑이가 담배 피우기도 훨씬 전 이야기니, 지금 새롭게 발견할 무언가가 있는지 책을 들면서도 약간 의아했다. 한국어판 서문이 조금은 간지럽기도 하고. 하지만 뭐든 파고들면 또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니, AI가 득세하는 시대에 로마 역사를 읽다 전율하는 경험을 한다. 다 읽고 나서 서문들을 돌아보니 간지럽던 문장들도 새로움이 있더라. 그렇구나...
공화정을 흔들기 시작하는 폭력의 만연이 왜, 어떻게 시작되는지가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다. 정치인들이 '최대한 많은 시민들의 이익'이 아니라 '이 정책을 내놓는 나를 무조건 밀어줄 사람들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며 일어나는 혼돈의 게임은 지금도 너무나 흔한 풍경인데, 여기에 대해 분노하거나 고민하기보다 무감각해지는 스스로를 자각하니 속이 싸하다. 나는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의 실수를 그냥 되풀이하는 중이 아닐까? 내 밥그릇과 편의 중심이 아니라, 현 상황의 개선을 위한 고민과 투표를 하고 있는 게 맞나? 만의 하나라도 독재자가 등장했는데 나의 당장의 이익에 부합되는 정책을 진행해서 주머니가 꽤 넉넉해질 경우, 그걸 포기하고 더 많은 이들의 정의를 위해 일어설 마음가짐을 정말 구비하고 있는가?
그리고 정치뿐 아니라 지금 사회 전반에서 구경하기 어려운 관용의 문제가 머리 아프다. "이제 정치적 실패는 죽음을 의미했다." "만약 카이사르가 옳은 일을 하면서 권력을 자발적으로 포기했다면 그는 기소되거나 처형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권력을 계속 유지한다면 로마 공화국이 4세기 전에 없앤 왕처럼 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었다." 다행히 그 시절 로마처럼 칼이나 몽둥이의 직접 공격은 일반적이지 않은 지금이지만, 지면 죽는다는 식의 분위기가 꽤 오래 이어지고 있으니 양심보다 내 목 보전이나 절대권력 찾는 정치인이 안 나오길 바라는 게 무리일지도 모른다.
읽은 보람은 분명 있는데 입맛은 쓰다. 2025년의 우리들이 과거를 반복할 것인지,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인지는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알 수 있겠지...
"공화정은 구할 수 있었다. 이 사람들과 그보다 덜 유명한 많은 사람이 구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리고 로마 공화정은 사람들이 멸망을 허용했기 때문에 멸망했다."


있던 원고를 발굴하여 덧붙였다고 작가가 설정해 놓았다고는 하나, 시작부터 자신감 너무 뿜뿜이라 당혹스럽다. "우리의 조국이 이 책을 보유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떠올랐다네." "이처럼 훌륭한 작품은 보고 입을 다물든가 아니면 화를 내지 말기를 바란다." 독자에게 이 정도로 일갈할 수 있어야 세계문학전집에 실릴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되는 것인가...
군데군데 편견 넘치는 문장에 짜증은 나지만, 1500년에 쓰인 책이니 참아야지 별 수 없다. 각종 사회적 제약과 이단 심문소가 있던 살벌한 시기에도 사람들이 지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모양도, 귀천 없이 입에 욕을 달고 사는 것도 신기하다. 황당한 건 사람 등쳐먹고 악마 불러가며 사술까지 쓰는 셀레스티나가 하느님 타령 제일 많이 한다는 거. 그 와중 하인 파르메노 완전 명언 제조기네. 입 바른 소리 할 줄 안다고 양심 지킨다는 보장 없다는 거 온몸으로 보여줘서 씁쓸하긴 했지만...
사건의 중심에 있는 연인들이 나오는 부분들은 솔직히 지루해서 피곤하긴 했다. 특히 칼리스토 징징댈 때마다 '하아...'하면서 포기하는 심정으로 읽다가, 한 번이긴 하지만 셈프로니오가 말 많다고 까는데 빵 터짐. "말씀을 너무 많이 하시다가 주인님도 죽으시고 주인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도 죽이시잖아요." 세계명작 읽으면서 이런 걸 명대사로 꼽으면 안 되려나?
어쨌든 저자가 전달하고 싶었던 말들은 아주 확실하게 전달되는 책이었다. 세월과 국경 관계 없이 적용되는 얘기들이라 현대의 한국까지 소개되었다는 건 이해하지만...'사람 사이의 모든 애정의 근본이 이기심이며 인간은 물질 앞에 그저 무력하다'는 말을 아직은 백 퍼센트 믿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인류가 멸망하지 않은 것이라고, 나같은 쫌생이의 마음에도 이기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을 거라 믿고 지낼라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