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모님의 블로그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서울을 포함해서 유명한 도시들에 대한 책들은 아주 많고 다 나름대로 재미있다. 그 중에서 이 책이 좀 더 즐겁게 다가오는 건 '도시그림'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아는 장소들과도 연결되는 부분들을 보는 재미가 있어서다. 현대에는 지도와 풍속화의 구분이 확연하지만, 그 경계가 아직 미묘하던 시절의 지도인지 풍경화인지 풍속화인지 딱 끊기 어려운 작품들. 그 속의 도시의 모습들을, 이 부문에 대한 사랑이 머리말부터 뿜어져나오는 이의 해설과 함께 볼 수 있어서 참 즐거웠다.
계속 모습이 바뀌고 있다고는 하지만, 당시에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바탕으로 도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이 성공하면서 지금까지 도시가 살아있는 바탕이 된다는 것. 분명 굉장한 일인데도 그냥 살고 있거나 어쩌다 여행 가거나 할 때는 크게 생각해보지 않는 부분이다. 당장 지금 부분적으로라도 서울 재정비 계획이 나오면, 그게 실제로 이뤄진다고 해도 결과물이 몇 백년을 갈지 장담하기 힘들테니까.
뭐, 깊은 생각 하지 않더라도 일단 실려있는 지도와 그림들이 보기만 해도 재미있다. 부분부분 확대해서 보여주는 청명상하도도 그렇고, 뭔가 자세히 보면서 눈이 좀 피로해지는 암스테르담 지도(다른 지도들도 그렇지는 하지만 정말 펜끝의 집념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처음 들어서 더 신기했던 이스파한의 프라이버시 제일주의 건축, 돈도 안 주는 교황 명으로 그린 놀리 지도(너무 슬프다...), 설명 들으면서 보니까 놀랍고 아주 착잡한 경기감영도랑 백악춘효(어찌보면 그냥 내가 몰랐던 것뿐이니 부끄럽다...), 뭔가 레고 그림을 방불케하는 매력 만점 뉴욕 지도...시대랑 상관없이 서민의 주택사정은 항상 빡세다는 슬픈 사실은 덤이다.
그림 자료들이 정말 많고 부분 확대된 것들도 두세번은 들여다보며 즐겨야하는 그런 책인데, 당장 읽으려는 책이 너무 밀려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일단은 시간 나면 리움 가서 경기감영도를 다시 보면서 책 내용을 곰씹어야겠다.


적당한 알콜로 삶의 긴장을 풀고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 동시에 죽지 못해 사는 삶에 알콜을 필터삼는 사람들도 많다. 술에 대한 글들도 찬가부터 읽는 사람에게 숙취 후의 타는 목마름을 전염시키는 글들까지 수두룩하니, 나름 어느 정도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또 좀 새롭다. 긴 시간을 거주 증명서도 없이 떠돌이 노동자로 보냈다는 작가의 이력, 구소련 체제 러시아 작가에 그 동네 기준으로도 알콜 중독자라는 설명이면 이미 또 다른 차원(...)의 글이리라 예상은 하게 된다. 그리고 항상 예상을 뛰어넘는 일은 일어나고...
구소련의 각종 애환과 부조리를 정성담긴 각주와 더불어 곰씹으며 진지하게 읽어야겠지만, 이렇게 마시고 인간이 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들이부으며 현실과 미친 환상을 오가는 주인공을 보고 있으면 내 혼도 동시에 빠져나가는 듯 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고리키랑 성경을 또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다. 미친 알콜 칵테일 레시피들은 실재를 믿고싶지 않으며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알콜 중독이 되어야 메틸알콜이나 제동오일을 마실 정도로 판단력이 떨어질까?) 주인공과 함께 열차를 탄 사람들의 알콜 섭취와 썰도 결코 뒤떨어지는 수준이 아니다. 취한 상태에서 계속 술을 찾는 모습이나 술 깨고 느끼는 추위가 참으로 실감나니 중독의 힘(...)이 놀라울 뿐이다. 대단한 책이지만, 이런 책이 나오기 위해 알콜과 찌든 현실이 필요하다면 그냥 이 책이 독보적인 존재로 계속 남는 것이 좋은 일이겠지...책을 덮은 지금은 그저 단 한 방울의 알콜도 사절하고 싶다.


나온 지 꽤 된(원서 2007년, 한국어판 2012년) 이탈리아 코미디언이자 정치가 베페 그릴로의 책이다. 본업이 코미디언이니까 공공의 광대를 자칭한 것인가 싶기도 했는데, 검색하니 이 사람을 비판하는 미디어들도 비꼬아서 크라운 프린스라고 하니 나름 여러 의미를 담은 자칭인가 싶다. 이 책 이후 세상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저자의 정치 활동에 대한 평가는 각각이겠다만(트럼프랑 동급으로 묶이기도 하는 듯...) 어쨌든 이 책이 지적했던 문제들에 틀린 이야기는 없는 것 같으니(이탈리아어도 모르니 다 검색해서 체크하진 못하고, 어느 정도 찾은 뉴스들을 보고 짐작할 뿐이다만) 당시의 이야기에 집중할 뿐이다.
당장 서문부터 열기가 훅 뿜어져 나온다. "곁을 스치는 쓰레기 같은 현실을 그냥 쳐다보기만 하는 것,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삶은 없다. 그 자괴감은 우리 몸 안의 에너지와 영혼을 몽땅 빼앗아 간다." 정치적 행보는 둘째치고 입만 털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인 건 분명하다.
저자의 비판만 뜨거운 게 아니라 나열되는 정보들도 놀랍다. 시작은 저자가 범죄 이력이 있는 정치인들을 국회에서 몰아내려 했던 정화 운동의 기록인데, 막연히 뇌물이나 권력 남용을 생각하고 검색하니 이 종목들은 기본이고 갱단 활동, 방화, 납치(!)까지 아주 후덜덜하다. 그릴로의 말마따나 "이탈리아 범죄의 온상지 나폴리 스캄피아 지역의 주역 범죄자 수보다 높은 숫자"의 범죄자들이 내가 사는 나라 국회에 있다면 뚜껑이 열릴 법도...한국 국회도 선거 때마다 전과자 후보들 이야기는 나온다만, 잠자는 사람 몸에 불을 붙이거나 하는 수준은 아니겠...지?
No Tav 운동(놀랍게도 아직도 하고 있었다! 2010년에 이 운동 때문에 저자는 체포도 되었던 모양이다...), 식수 민영화(!!!!!!!!)의 폐해, 장르 불문 범죄자 단체 사면(!), 임시고용법으로 악화된 청년 실업률...이탈리아 시민들을 괴롭히던 문제들을 지적하는데, 이 문제들이 다 심각하긴 하지만 이 넓은 범위를 다루는 열의가 더 놀랍다. 블로그를 통해 사람들에게서 정보를 받았다고는 해도, 한 두 분야면 모를까 정경유착부터 환경, 국제관계, 미성년 대상 범죄까지 다루는 건 어지간해서는 힘들지 않을까. 거기다 아예 공직자랑 언론인들 가족 관계를 쫙 나열한 부분을 보면 용케 살아있다 싶다. 아무리 온라인에서 이미 돌던 정보라고 본인이 써놨다만, 수식어를 찾을 수 없는 배짱이다.
경악스러운 전화요금 제도는 다행히 지금은 개선된 모양이고 2020년 마지막으로 책정된 '사업하기 좋은 나라' 순위도 이 책이 쓰여진 2007년보다는 올랐으며(70위에서 58위. 대한민국은 5위더라) 당시 돈으로 4천 5백만 유로 들여놓고(가치 환산 사이트에서 계산하니 지금 한화로 약 천 억...) 내용이 아예 없었다는 국가 관광 포털 사이트는 정상적으로 운영 중이다. 발칸 증후군은 미국이 부인하니 어느 순간부터 현황 기사가 없다가 슬프게도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다시 언급되긴 하지만 자세한 정보를 찾는 건 실패했고, 후반부의 안타까운 사연들도 근황을 알 수 없으나 나아졌기만 바랄 뿐...
십 년도 더 전의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보기에는,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많은 일들. 지금도 해결까지 갈 길이 멀어보이고 여러 모로 심란하지만, 늦게라도 읽어본 의미는 있었다.


제목은 저자의 꾸뻬씨 시리즈보다 훨씬 근사하다. 사실 꾸뻬씨 시리즈도 듬성듬성 보고 그나마도 시간 순서도 안 맞았지만, 말랑말랑하게 즐길 수 있는 책이었고 이 책도 그렇다. 지구인의 지구여행(분명히 지구여행인데 판타지세계같은 건 기분탓일까..)에서, 화성에 살던 지구인이 문명이 퇴화한 지구별 여행으로 이동하고, sf니까 인공지능도 좀 나오고.엑또르가 배움을 메모했듯이 '젊고 아름다운 주인공'(읽다보면 저자가 굳이 언급한 이 수식어들이 무용하게 느껴진다...)은 성찰 메모를 남기고 나중에 연인에게 코멘트를 받는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의 출생 이야기는 딱히 놀라운 부분이 없었고, 아무리 지구가 핵 때문에 한 번 작살이 나서 인프라가 제로에 가까워졌다고는 하지만 문명이 굳이 거의 원시시대로 돌아가고 그게 펼쳐지는 게 폴리네시아 언저리라는 게 언짢기도 하다. 그 동네 사람들이 지금도 전통을 중요시한다는 사실은 기회 생기면 기꺼이 원시인이 될 거라는 가능성이랑 손톱의 때만큼도 연결되지 않으니까. 차라리 백인 원시인이 라스코나 알타미라에 살고 주인공이 프랑스어를 말하는 게 자연스러운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 책의 메인은 성찰메모고 나머지는 다 그걸 위한 배경이니, 작가나 출판사가 딱히 신경 썼을 것 같지 않다. 아니, 그냥 나 말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지도 모른다...이런저런 생각이 들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보면 이 정도로 끝내고 싶다. "내가 확신하는 거라고는 소외되는 사람, 용도 불명, 잉여 인간이 없는 세상을 원한다는 사실이다." 읽는 사람들 대부분은 같은 생각이 아니겠는가. 흐르듯이 읽어야하는 책은 그냥 그렇게 덮기로 한다. 어쨌든 사랑과 자유의지는 위대했다고...


표지에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라고 적혀있지만, 읽고 나면 이게 맞는 수식어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꾸준히 연구하고 또 연구하는 데에는 참을성과 가끔 깨달음이 있을 뿐이고, 미스테리가 끼어들 곳은 없으니...
시작부터 좀 슬프다. 일단 유명한 과학 작가가 한 권을 한 사람에게 할애한 책인데도, "그 자취가 너무나 희미해 영영 그럴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대로 자료가 없어서인지 엄청 얇다 (주석 빼면 200쪽이 안 된다). 그나마도 헨리에타 리비트 본인의 이야기보다 그걸 자료로 활용했던 사람들 이야기가 더 많다. 어떻게든 없는 자료로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려 한 작가에게 감사의 마음이 들 정도다. 책이 나온 지 20년이 다 되어가니 책 안에 있는 연구 자료들은 업데이트가 되었겠지만, 헨리에타 본인에 대한 이야기들은 더 없는 것 같다.
너저분한 작업실에서 사진 건판을 들여다보면서, 칼라도 아니고 흑백 사진에 찍힌 수많은 점들을 식별하면서 기록하는 것의 무한 반복...점들이 커지고 작아지는 걸 적고 또 적고, 그 가운데 별들의 밝기와 주기의 관계를 발견하고...작가 말대로 이보다 못한 일에도 박사학위가 수여되던 시기, 아는 사람은 다 알았다고는 해도 좀 더 많은 명예를 얻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하다못해 조금만 더 오래 살았으면, 노벨상을 꼭 못받아도 후보로서 더 많이 언급될 수도 있었을텐데. 달 구덩이에 이름이 남았다고는 하지만, 살아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좋은 대접 받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작가의 또 다른 말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시간이 흐르면 다른 누군가가 헨리에타의 법칙을 발견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발견이지 발견자가 아니다." 스타 과학자들은 존재하지만, 그 사람들의 발견만 중요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쌓아올린 연구 결과가 없었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성과들도 많다. 그나마 헨리에타는 누군가 책이라도 써줬지만 그 정도 언급도 없는, 그러나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결국 우리에게 혜택을 주는 모든 과학의 성과는, 이렇게 매일 매일 답답한 환경에서 반복 작업을 성실하게 하며 견디는 수많은 사람들의 공적이겠지. 성과가 있어도 뽐내지 않고, 그저 신중히 묵묵히 일하고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는 사람들, 헨리에타와 그 자취를 따라가는 세상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번역판의 부제 - 본문에서 잠깐 언급되는 - 가 참으로 근사하다. 영어판의 밋밋한 제목(The Photographer's Wife) 보다 멋지다. 책 소개만 보면 사실 긍정적 전개를 기대하기 어려운데, (식민지 시대의 피지배층 + 여성 인권 바닥인 시대 직업에 도전하는 여성 + 마누라의 재능을 시기하는 남편이면 완전 삼진 아웃...) 그렇게 끔찍하지 않고 술술 넘어가서 놀랍기도 하다.
나폴레옹 때부터 신물이 나게 유럽 애들 샌드백 신세던 이집트의 1890년대부터 약 십 여년의 시간을 배경으로, 시리아계 기독교도 이집트인 부부는 만나고. 멀어지고, 성장하고 퇴화하고, 처음 그 자리로 돌아온다. 시작부터 흔하게 생각하는 식민지의 궁핍과는 거리가 있고, 주인공 도리스가 사진가로 성공하면서부터는 거의 벼락부자인데다 중간중간 묘사되는 이집트의 거리는 활기가 넘친다. 읽으면서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의 태도에 욕이 저도 모르게 입에서 샌다만, (그 잘난 백인의 부담 드립 여기서도 나온다. 하긴, 지금도 나오는 드립인데 쓰여진 당시에는 얼마나 유행했을지...) '근동제국민들' 씹다가도 도리스 당신은 예외라고 허둥대는 식으로 주인공은 차별도 피한다. 기실 불행의 씨앗은 남편 하나...
이렇게 써놓으니 무슨 엄청 가벼운 소설처럼 보이는데 그렇지 않다. 내 문장력이 모자란 것뿐...역자 후기에 미셸 투르니에도 강추했다고 나오며, 작가의 영문판이나 한국어 번역 작품이 적어서 그렇지 아랍어와 프랑스어로 나온 다른 작품들이 많고 평가도 좋다. 일단은 이집트 사람이 직접 쓴 이집트 소설이라는 데서, 르포가 아니고 소설이다만 좀 믿음이 가기도 하다. 사람이 이민을 가면 자연스럽게 ○○계 ○○인이 된다만, 이민이 흔하지도 않은 시절 시리아계 이집트인이란 개념도 생소하고 그 안의 대가족들의 모습도 신기하다. 사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첨단 기술에 눈뜨고 더 다가가려고 공부하고 매혹되는 모습은 분야와 상관없이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 있고...마지막에 남편이 아주 비참하게 페이드아웃했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속터지는 시대(중간에 파쇼다 사건을 놓고 이집트에 살던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의 태도가 좀 다뤄지는데, 아무리 소설이라도 죄다 비오는 날 먼지나게 맞아야한다는 생각이 든다)지만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나아갈 길을 찾으며 방황하는 것은 시대와 상관없는 사람의 태도인가 싶고. 도리스에게 화가 나는 부분도 있고, 담장을 넘어간 맘루크와는 다른 결정을 했다는 게 아쉽지만, "사로잡힌 사람"의 결말은 이런 것일지도.


개인적인 견해지만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지옥같은 이야기가 동화처럼 흘러가면 좀 각오를 해야한다. 대놓고 건조한 책들보다, 느닷없이 끔찍한 전개가 융단폭격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그래도 이번엔 그정도는 아니었다. 아니지, 한 대목 한 대목 곰씹으면 비극이 가득한데 너무 꽉차서 수용감각이 마비되었는지도 모른다. 재미있게 읽었는데도 책 속의 상황들, 아마도 지금도 계속되는 이라크의 모습들을 생각하면 재미있다고 말하는데 죄책감이 든다.
폐품업자의 미친 짓 - 나중에 짤막하게 나름의 이유는 언급되지만 - 으로, 안 그래도 폭력이 난무하는 바그다드에 태어난 복수의 킬링머신이 어느 순간 명분도 잃어버리며 살기 위해 꿈틀이고, 그 와중에 거하게 캐릭터성 터지는 인물들이 - 강렬한 캐릭터가 강렬한 호감으로 이어지지 않기는 하다 - 얽혀들어가면서 정말 페이지가 어떻게 넘어가나 모르겠다. 폭탄 터지고 사람도 죽고 정신이 없는 마당에 무명씨의 추종자들이 선거 참여할 고민하는 대목에서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샌다(그냥 나에게 경건함이 부족한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막판에 죽을까봐 걱정되던 유일한 인물이 안 죽었기 때문에 책을 덮으면서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흐르기도 했고. 이정도 작가의 책 번역이 한 권뿐이란 게 참 아쉽다. 영미권에 번역이 된 책 위주로 국내에 출판이 되니 어쩔 수 없겠지...


작가의 표현대로 공장이나 마찬가지인 환경에서 자란 과일들이 소비되는 시대에, 과일의 역사를 논한다고 하면 그냥 농업 노동의 역사를 좀 낭만과 섞어서 - 대개는 낭만의 대가로 더 빡센 노동을 하며 - 풀어주는 책이려나 지레짐작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편견과 지식 부족을 반성하면서 즐겁게 잘 읽었다. 과일 길들이기의 역사라고는 하지만, 과일을 먹고 과수원을 발전시키려던 인간의 노력을 생각하면 과일의 인간 길들이기 역사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나무가 씨앗을 퍼트리려 단 맛의 과일을 만들어내는 것은 자주 언급되지만, 그걸 먹으려고 머리를 굴리면서 영장류의 지적 능력과 뇌가 발달했다는 이야기는 시작부터 놀랍다. 당분 들어간 식량을 먹겠다는 절박함이, 지금의 뇌와 더불어 식탐, 뱃살로 계승된 것일까...약간 낯선 야자나무 농업, 고대의 정원들(높은 수준만큼 정원사들 노동 강도도 빡셌던...), 아르간나무가 그냥 모로코 특산이 아니라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것, 루이 15세는 프랑스에서 키운 파인애플을 먹었다는 것 등등, 관련된 재미난 정보들이 빼곡하다. 그리고 과일에 대한 작가들의 글, 미술작품도 많이 실려서 시각적인 재미도 쏠쏠하다. 명말의 과일 목판화에 나온 불수귤의 모습을 믿을 수가 없어서 검색해보고 더 놀랐다. (그림이 좀 필터링이 되고 훨씬 운치가 있다) 그리고 참 슬픈 서바이버, 코르비니안 아이그너의 이름을 안 것만으로도 나는 이 책에 감사할 이유가 충분하다.
먹거리, 문화적 자산, 자연과 함께 사는 미래에의 투자...저자가 말한 것들을 기억속에 얼마나 오래 간직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진열된 과일들을 볼 때마다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감사하게도 '느려터진달팽이'님이 댓글에서 안내해주신 책이다. 이제라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인 책이고, 분명 많은 이들을 도왔을 책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반복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좋은 책이다. (쓸쓸한 일이지만, 평균 수명까지 산다면 아는 사람 중에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을 테니까)
상실을 겪은 사람들의 책은 모두 어딘가에 큰 절실함이 있고, 읽는 이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면서 자신들의 길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이 책은 정말 구체적으로 많은 예시를 들어주고, 상당히 실용적인 대응도 제시한다. 짧지만, 언론에서 주목하는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어떤 면에서 주의해야 하는지까지 다뤄졌으니 어지간한 경우의 수는 다 들어있다. 그러면서도 대답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하고, 왜곡될 수 있는 감정들에 대해서 해설해준다. 함께 애도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가도 생각하게 한다. 남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변할 수 밖에 없지만, 우정에 기회를 주라는 말도 인상적이다. 고통을 표현하는 것은 권리이지만, 한편으로 다른 이가 공감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들도...
책에서는 상담가나 자조 모임에 대해서도 다루는데, 한국은 아직 이런 모임들이 없지는 않지만 드물기 때문에 그런 부분의 아쉬움은 있다. 그리고 내가 종교적이지 않아서 신앙 회복이란 주제는 약간 미묘하지만, 정신적으로 몰려있는 사람이 안정을 찾는 길에는 정답이란 게 없으니...저자들 말대로 상실의 이야기가 지문만큼이나 다양한 만큼, 어떻게 마주할지 사람들의 선택도 다르지 않겠는가.
'애도에 대한 질문들이 자신을 변화시켰다'고, 고통을 겪는 모든 이들이 그렇게 일어설 수 있기를, 현실에서는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책을 덮는 이 순간 다만 바랄 뿐이다.


표지에 세상에서 가장 쉬운 고대 이집트 강의라고 써있다. 나를 위한 책이구나 싶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건 있지만 그 토막지식들은 인터넷도 없던 시절 부정확한 지식과 사람들의 상상이 뒤섞인 오락 작품들에서 온 것이니 기실 초등학생들보다 더 안다고 자신감을 가질 수가 없으니...일단 역사가 너무 방대해서 그런가(항상 궁금하다. 이집트 사람이 국사 시험에서 100점 받으려면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지...) 이집트 통사 책은 찾기도 힘들고, 쉽게 좀 시작해보기로 했다.
일단 지도가 있는 게 엄청 고맙다. 시작할 때 도시를 상징하는 상형문자들도 소개되어서, 도저히 다 외울 수는 없지만 밑의 해설을 보면서 보면 이런 것들이 지금의 로고들로 이어지나 싶어 신기하다. 하트셉투트 여왕 이름도 처음 보는데, 업적으로 보면 이 사람이 클레오파트라보다 유명해야할텐데 그렇지 않으니...역시 아무리 잘나도 미디어가 다뤄주지 않으면 안 되는가...그리고 고대사가 이미 수천 년이니 당연히 미술 양식이 변할텐데도 자세한 건 하나도 모르고 아마르나 양식이란 단어도 생전 처음이다. 피라미드나 신전도 하나만 꼴랑 세우는 게 아니고 아파트 단지와 상가들마냥 다 계획적으로 연결되고, 전문직이 우대받고 보드게임도 유행했으며 위생적이고 잘 먹고 날씬한 시민들이 열심히 사는 사회였다.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였다고 다 정체불명의 신비로 덮여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노동이나 지혜에 놀라게 된다.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였지만 인간사에서 그게 특이할 것도 없고, 생각해보면 우리들은 조상님들의 지적 수준을 너무 의심하는 실례를 범하는 게 아닐까.
지도나 도면 지식들은 당연히 한 번에 외울 수는 없어도, 여행 떠나기 전에 복습하고 가면 감동이 더 크지 않을까. 역사를 감동하자고 배우는 건 아니긴 하지만. 그리고 천천히라도 고대가 아닌 이집트도 알아가고 싶고...
별 관련없는 지식이지만, 만화 왕가의 문장이 아직도 안 끝났고(!) 얼마 전에 뮤지컬까지 공연한 걸 알고 정말 놀랐다. 시간이 흘러도 이집트의 꿈은 계속되누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