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모님의 블로그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솔직히 어려웠다. 오랫동안 공부도 별로 안 하고 유전자나 DNA나 머릿속에서 뭉뚱그려지는 저렴한 지식 상태다보니, 각종 용어와 단백질들 등장하니 슬쩍 눈물이 날 지경. 그러나 저자분의 혼이 실린 말투에(읽다보면 나 같은 사람들 때문에 속터져서 쓴 것이 아닌가 의문이 생긴다) '세포는 사용자고 DNA는 도구'라는 것만이라도 절대 잊어먹지 않아야겠다 굳게 다짐한다. 전문용어들 태반은 아예 외우기를 포기했지만 이것만이라도!
좀 힘들긴 했어도 읽어 후회할 일은 없는 것이, 중간에 신기방기한 얘기들 엄청 많다. 제목이 비유로 쓴 문장이 아니고 진짜였던데다, 나와 외모가 닮은 사람은 외모를 구성하는 유전자도 흡사할 것이라는 말에 허걱. 많은 공상과학 작품에 등장하는, 내가 사랑하던 고인과 똑같은 복제인간이라는 게 왜 불가능한지의 설명을 보면서 다행이라는 마음과 섭섭한 마음이 동시에 드는 내 속을 나도 모르겠음. 배아 연구가 지금에 이르는 과정 속의 끼워맞추기 연구나 정치질은 반갑지 않은 양념이긴 한데, 일어난 일인 것을 어쩌리. "특정 연구자가 생물학적 체제에서 놀라운 결과를 보고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를 재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때 그 연구자는 그런 실험을 할 수 있는 천재성과 기술은 자신에게만 있다고 주장하며 허영심을 드러내곤 한다." 이런 주장하려면 해리 포터 월드로 가셔야지...그러나 단어만 몇 개 바꾸면 모든 인간사에 다 해당되는 소리니 어쩔 도리 없는 듯. 이런 일이 뭐 앞으로는 없겄냐...
뒤로 갈수록, 이런 뉴스들을 놓친 스스로가 의심스러워지는 발견들이 있어 눈이 번쩍 뜨인다. 특히 교토대 연구팀의 생식세포 연구! 저자도 책 출간될 때 얼마나 더 진행되었을지 궁금하다고 써놨는데, 검색하니까 난원세포랑 정원세포를 대량 배양하는 기술이 개발된 게 작년이다 우오오오! 다음 목표가 정자랑 난자의 인공 제작이라는데, 이거 성공하면 세상 진짜 어떻게 되는 걸까? 블레이드 런너가 현실화되는 걸 목격하게 되나요? 갑자기 흥분한다고 간신히 집어넣은 전문용어들 머리에서 다 튀어나가긴 했는데...안드로이드 산업 재벌의 등장보다는 사람들이 덜 아프고 빨리 치료될 수 있는 세상이 올 거라고 기대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도 좋겠지. 과학책 쪼금이라도 더 보면서(정말?) 멋진 뉴스를 기다려야겠다.


샤넬 넘버 파이브야 워낙 유명하지만, 소련제 향수는 금시초문이다. 향수 안 만드는 나라 찾는 게 더 빠를테니 당연히 있었을텐데도 소련과 향수라니 단어 연결 왜 이리 어색한가. 어쨌든 그 시작부터 갈림길, 얽힌 사람들의 인생들을 보니 신기하기 그지없다. 향기로운 화장품 얘기하면서, 수용소와 화약, 시신의 냄새도 나오니 후각이 둔한 사람에게도 확 꽂히는 대비 효과 장대하다. 짧은 언급이지만 처형 집행자의 향수 얘기엔 정신도 약간 아득해짐. 매력의 부가가 아니라 죽음의 탈취라니, 이런 기능 별로 알고 싶지 않아...
폴리나 젬추지나의 이름도 처음 접하지만, 샤넬과의 대조가 아니더라도(항상 생각하지만, 이 정도 운 좋은 사람 진짜 드문 듯...) 이 행보를 기구하다고 해야할지 희한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형용사를 고르다가 그냥 포기함. 곤경을 겪은 뒤에도 이어지는 스탈린 사랑에선 머릿속에 물음표만 가득해지니, 정신과 의사의 코멘트가 없는 게 참으로 아쉽다. 한 길 사람 속이 역사보다 어려운 거...
풍족하지 못한 시절의, 막판엔 '늙은 아줌마 향수' 취급까지 받은 소련제 향수를 현재의(원서 출간이 2020년이니, 5년이나 지난 전쟁통에선 어떤지 모르지만) 러시아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찾고 있다는 것이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으나 심정적으로는 알 것도 같다. 딱히 모든 게 다 좋았던 시절이 아닌데도 뒤늦게 갑자기 그리워지는 비합리적 현상은 인류 공통인가?
흥미롭기도 하고, 수용소 냄새 파트에 소개된 「콜리마 이야기」가 궁금해 읽을 책 리스트에 추가(...언제 읽을지는 모르지만). 세상을 보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고 언제나 모르는 것들을 발견하니, 부족하고 소심한 이는 그저 빨리 한 글자라도 더 읽어야지...
"냄새와 향기는 고유의 생산 시간과 고유의 소멸 시간이 있다. 정권이 붕괴하고 이데올로기가 사라져도 냄새는 오랫동안 남는다. 그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향기의 주기는 선거 시기와 일치하지 않는다. 향기는 자신의 시간을 갖는다. 향기는 혁명보다 더 오래 존속할 수 있다."


오랜만에 어릴 때 아동용 과학잡지 보던 시절 생각났다. 시종일관 톤도 경쾌하고, 그림들도 간단하면서 알아보기 쉽게 되어있는 것도 좋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형광의 원리에 대해 말해보라면 아마 못 할 것 같지만;;;) 무엇보다 우주보다 더 많은 신비가 바닷속에 더 남겨져 있다는 말 자체가 흥분된다. "어느덧 화성까지 날아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건만 당장 집 문 앞에 펼쳐진 바다의 밑바닥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얼마나 많이 아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돌고래야 워낙 사랑받는 동물이고 언급이 많이 되니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코로 발성하는 것이나 무려 각자가 이름에 해당하는 음성을 보유한다는 신기방기한 이야기에 완전 뿅. 개인적으로 우와아 탄성이 절로 나온 건 열수 분출과 바이러스 이야기. 갑자기 머릿속에서, 열수 구름을 가르고 나오는 초거대 물고기들, 탐사선에 들러붙어 지상에 올라오는 해저 바이러스 등등이 춤을 춘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종들이나 정확한 결과가 없는 이론들로 누군가 현대판 해저 2만리를 지금 쓰고 있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하게 됨. 우주 연구보다 속도가 더딘 데 대해서는 비용 문제도 간간이 언급되는데 , 솔직히 '신비한 바다의 연구'가 아니라 '노화 방지 연구'로 후원자 찾으면 돈이 갈쿠리로 모이지 않을까? 이걸 또 그런 식으로 선전하지 않는 것이 과학자들의 양심이려나...
플라스틱 문제나 인간의 과도한 행동들도 중요하게 나오니 읽으면서 마냥 좋아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 연안이 세계에서 미세플라스틱 농도 가장 높다는 불명예스런 구절에 촐싹대다 등짝 맞은 기분. 1인당 플라스틱 폐기물 생산량도 세계 3위라는 말도 나오니, 또 다시 n분의 1의 죄가 추가된다 끄흑. 그래도 마무리에 변함없이 명랑하게 들려주는 긍정적인 이야기들에 약간이나마 마음이 가볍다. 시간이 지나 더 많은 바다의 신비가 공개될 때엔, 죄보다는 개선된 결과에서 n분의 1을 차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니 갑자기 저자분 너무 고마운거...물론 이 말들이 면죄부는 안 되니, 노력하며 다음 신비의 세계 가이드를 기다려야겠지.
"과학적인 배경, 창의성, 돈이 없더라도 어디에 사는 누구든 바다를 보호할 수 있다. 굳이 온 세상을 뒤흔들 필요는 없다.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물고기를 소비하고, 플라스틱을 덜 사용하고, 자동차를 더 자주 주차장에 놔두고, 때때로 해변이나 호숫가에서 다른 사람이 버린 쓰레기를 가져오기만 해도 이미 올바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로마 공화정이 망한 거야 호랑이가 담배 피우기도 훨씬 전 이야기니, 지금 새롭게 발견할 무언가가 있는지 책을 들면서도 약간 의아했다. 한국어판 서문이 조금은 간지럽기도 하고. 하지만 뭐든 파고들면 또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니, AI가 득세하는 시대에 로마 역사를 읽다 전율하는 경험을 한다. 다 읽고 나서 서문들을 돌아보니 간지럽던 문장들도 새로움이 있더라. 그렇구나...
공화정을 흔들기 시작하는 폭력의 만연이 왜, 어떻게 시작되는지가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다. 정치인들이 '최대한 많은 시민들의 이익'이 아니라 '이 정책을 내놓는 나를 무조건 밀어줄 사람들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며 일어나는 혼돈의 게임은 지금도 너무나 흔한 풍경인데, 여기에 대해 분노하거나 고민하기보다 무감각해지는 스스로를 자각하니 속이 싸하다. 나는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의 실수를 그냥 되풀이하는 중이 아닐까? 내 밥그릇과 편의 중심이 아니라, 현 상황의 개선을 위한 고민과 투표를 하고 있는 게 맞나? 만의 하나라도 독재자가 등장했는데 나의 당장의 이익에 부합되는 정책을 진행해서 주머니가 꽤 넉넉해질 경우, 그걸 포기하고 더 많은 이들의 정의를 위해 일어설 마음가짐을 정말 구비하고 있는가?
그리고 정치뿐 아니라 지금 사회 전반에서 구경하기 어려운 관용의 문제가 머리 아프다. "이제 정치적 실패는 죽음을 의미했다." "만약 카이사르가 옳은 일을 하면서 권력을 자발적으로 포기했다면 그는 기소되거나 처형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권력을 계속 유지한다면 로마 공화국이 4세기 전에 없앤 왕처럼 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었다." 다행히 그 시절 로마처럼 칼이나 몽둥이의 직접 공격은 일반적이지 않은 지금이지만, 지면 죽는다는 식의 분위기가 꽤 오래 이어지고 있으니 양심보다 내 목 보전이나 절대권력 찾는 정치인이 안 나오길 바라는 게 무리일지도 모른다.
읽은 보람은 분명 있는데 입맛은 쓰다. 2025년의 우리들이 과거를 반복할 것인지,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인지는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알 수 있겠지...
"공화정은 구할 수 있었다. 이 사람들과 그보다 덜 유명한 많은 사람이 구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리고 로마 공화정은 사람들이 멸망을 허용했기 때문에 멸망했다."


있던 원고를 발굴하여 덧붙였다고 작가가 설정해 놓았다고는 하나, 시작부터 자신감 너무 뿜뿜이라 당혹스럽다. "우리의 조국이 이 책을 보유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떠올랐다네." "이처럼 훌륭한 작품은 보고 입을 다물든가 아니면 화를 내지 말기를 바란다." 독자에게 이 정도로 일갈할 수 있어야 세계문학전집에 실릴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되는 것인가...
군데군데 편견 넘치는 문장에 짜증은 나지만, 1500년에 쓰인 책이니 참아야지 별 수 없다. 각종 사회적 제약과 이단 심문소가 있던 살벌한 시기에도 사람들이 지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모양도, 귀천 없이 입에 욕을 달고 사는 것도 신기하다. 황당한 건 사람 등쳐먹고 악마 불러가며 사술까지 쓰는 셀레스티나가 하느님 타령 제일 많이 한다는 거. 그 와중 하인 파르메노 완전 명언 제조기네. 입 바른 소리 할 줄 안다고 양심 지킨다는 보장 없다는 거 온몸으로 보여줘서 씁쓸하긴 했지만...
사건의 중심에 있는 연인들이 나오는 부분들은 솔직히 지루해서 피곤하긴 했다. 특히 칼리스토 징징댈 때마다 '하아...'하면서 포기하는 심정으로 읽다가, 한 번이긴 하지만 셈프로니오가 말 많다고 까는데 빵 터짐. "말씀을 너무 많이 하시다가 주인님도 죽으시고 주인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도 죽이시잖아요." 세계명작 읽으면서 이런 걸 명대사로 꼽으면 안 되려나?
어쨌든 저자가 전달하고 싶었던 말들은 아주 확실하게 전달되는 책이었다. 세월과 국경 관계 없이 적용되는 얘기들이라 현대의 한국까지 소개되었다는 건 이해하지만...'사람 사이의 모든 애정의 근본이 이기심이며 인간은 물질 앞에 그저 무력하다'는 말을 아직은 백 퍼센트 믿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인류가 멸망하지 않은 것이라고, 나같은 쫌생이의 마음에도 이기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을 거라 믿고 지낼라우...


이 글로벌 시대에 '이국적'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뭣하기는 하나, 페르시아라면 아직도 아라비안 나이트(...) 생각하는 수준이다보니 읽는 내내 머리 속에서 exotic의 네온 사인이 깜빡거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나오는 아이템들, 풍습, 저주의 종류까지 죄다 낯설다보니 이거 참 신비한 거.(정보 부족이 원인이니 사실 창피한 일...) 그러나 환상을 논하기엔 얘기에 생활상이 너무 찐하게 배어있다. 맛있는 음식, 악에 받친 고함소리(이 동네는 목소리 작은 주민이 없는 것 같다...), 물건 깨지는 소리, 오줌과 생리, 출산, 불결함(더러운 묘사가 요상하게 야물다), 미신, 사랑과 증오 등등이 얇은 책에 정말 꾸덕하게 눌려담겨 동공이 줄어들 여유가 별로 없음. 개인적으로 여성 생식기 이야기가 이렇게 생활밀착형으로 수시로 나오는 책 처음 봐서 놀라움이 두 배다. 세상은 정말 놀라움으로 가득해...
17세의 임산부 나오는 시점에서 이미 결말에 대한 희망은 반 접고 들어갔지만, 설마 플로라가 아니라 꼬맹이 나지아가 후반에서 이리 사람 놀래킬 줄은 몰랐음. 아무리 픽션이라지만 성인 입장에서 보면 뒤로 넘어갈 것 같다. 물라의 근사한 명언도 들어먹지 않는 이 열세 살 어쩜 좋노. 결말 보면서 이게 비극인가 아닌가 고민하다 포기함. 등장 인물들의 대부분도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분류가 어려우니(꾸준하게 개차반인 샤힌 같은 인물들도 있긴 하지만) 그냥 이 동네고 저 동네고 사람 모여사는 게 이런 모양이라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피곤해서 잡스러운 감상을 다 열거는 못하겠으나, 조혼이 정말 천하에 불필요한 악습이라는 건 새삼 확실해짐. 작가의 데뷔작인 이 책보다 반자전적 소설이 훨씬 구설이 많았나본데, 짧은 소개글에 이미 희망이 하나도 없어서 읽어야겠다는 의지가 확 꺾인다. 뭐, 연이 닿으면 어떻게든 보겠지...


꿀돼지님의 멋진 감상문을 보고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작품을 이제야 집었다. 실제로 보니 소개 페이지로 보는 것보다 표지도 더 뽀대난다 오오...
장르가 초자연물이 아니니 까(그런데도 탐사보도하는 언론사에 '귀신과 조폭의 콜라보'로 퓰리처상까지 생각하는 기자가 있는 설정은 좀 충격;) 죽음 뒤에 존재할 설명을 기대하며 계속 침을 삼킨다. 보통 템포가 빠른 책들도 중간에 배경 지식 해설이 나오면 속도가 훅 느려질 때가 있는데, 그런 부분들도 읽기 쉽게 되어 있어 책장도 거침없이 넘어감. 다크 히어로물의 영원한 숙제인 사적 제재에 대해서도 재차 생각하기도 하고. 정답이 없기 때문에 이런 장르가 존재하는 것이지만, 잊지 말고 가끔 생각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니...
이기우 기자의 이야기가 이야기 중간이 아니라 2부로 따로 나눠진 걸 보고 갸우뚱하긴 했는데, 그 관계가 명확하지 않아서 더 긴장하며 읽었으니 상관 없으려나. 이름만 언급되었을 때, 기자 뒤에 숨겨졌을 비밀에 대해 상상력을 너무 불태웠더니 진상은 오히려 덤덤하게 받아들이게 됨. 후속작이 나오겠구나 생각하면서 작가의 말을 읽는데, 본문에 나온 단어가 전작 제목인 걸 보고 뒤늦게 시리즈구나 깨달았다; 앞권 챙겨 읽고 거자의 이야기를 망상(...)하다보면 신간 소식이 들리겠지.


읽고 나니 혼돈의 시대라는 부제가 아주 온건하게 느껴진다. 나라가 종류별로 아수라장을 통과하는 시기에 은행만 멀쩡하게 굴러갔을 리가 없으니, 미리 예상했어야 하지만...어느 시대의 상황이 더 나빴는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지경인데, 마무리까지 무슨 절망의 예고편같은 문장이니 한숨이 안 나올 수가 없음. 인간, 내용 다 알고 보는 영화라도 예고편이나마 좀 다르기를 바랄 때도 있는데 참으로 짤없다. 그나마 좀 서프라이즈 감상하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는 건 초반에 소개된 위폐 사건인데, 규모도 그렇고 담당 판사가 길에서 총 맞아 사망할 정도라는 것에 움찔. 이게 뭔 금주법 시대 하드보일드! 정판사 위폐사건 기사 검색 결과가 상당히 많은 걸 보니, 이것도 세상이 다 아는 데 나만 몰랐다고 혼자 꿍얼꿍얼...네 정녕 아는 게 무엇이더냐...
식민지 은행들과 사람들 사이 서열 생기고, 미쿡이 은으로 중국과 일본을 번갈아 후드려 패고, 그 와중에 위폐를 아편에 담그자는 발상을 하는 인간까지 있으니 세상을 들쑤시는 경제 정책의 힘에 새삼 소름 돋는다. 조선에 있는 은행인데 조선의 은행이 아닌 조선 은행 이야기도 속이 쓰릴 대로 쓰리고...까메오처럼 우장춘 박사가 등장할 때 놀라고(사실 이 대목에서 제일 놀라운 건, 이미 내 자식이 둘인 마당에 남의 애를 넷이나 키우라고 보내는 남자와 그걸 또 알았다고 키우는 여자의 존재...), 해방 직후 통역관들을 둘러싼 이야기에도 벙찌고, 전혀 기대하지 않은 롤러코스터 타는 기분을 과도하게 맛보았다. 한국은행 시작까지만 다뤘는데 이 정도라니.
지금의 한국은행도 당연히 완벽하지 않고 구멍이 많겠지만, 이런 위기들을 거쳐서 겨우 생겨난 조직이라 생각하니 좀 달라보인다. 기회가 되어 현재 한국은행의 모습에 대한 책도 보면 좋겠는데, 위장약을 준비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건 왜일까...


삼국지라는 소재는 정말 어느 분야로 가도 중간 이상은 가는데다(가끔 너무 황당할 때도 있지만, 기존의 모습들과 비교하는 맛은 기본으로 깔고 가니까...) 표지에서 프로이트가 "기대해보시오, 아주 재미있을 거요!"라고 하니 무엇을 망설이리. 작가분이 심리학 전공은 아니시고, 예상과는 분석 방향이 다르기도 했는데(살짝 나온 정도지만 MBTI까지 나올 줄은 몰랐음) 어쨌든 삼국지는 삼국지라 이래 보니 또 골 때리는 맛이 있다.
얼마 전 읽은 오후 님의 보여주기에도 언급이 있었지만, 원술 원소 진정 총체적 난국이다. 씹히는 항목이 한 두 개가 아니니 분량만 보면 이 책의 진주인공들. 그나마 좋은 평가가 '여론 선동의 대가'인데 칭찬이라기엔 좀...생각 못한 왕윤의 ●찌질함에 깜놀하고, 나름 전문 용어들 사이에 갑자기 '낭만적 돌쇠' 같은 표현 나올 때 뿜으며 재미있게 봤다. 한편으론 언급되는 문제들이 참 보편적이라 살짝 기분 쳐지는 면도 있다. 마치 나는 하나도 문제 없는 마냥 속편히 웃을 처지가 아니니, 그저 나의 어리석음으로 쌩고생시킬 아랫사람 없는 현대인인게 복일세.
개인적 하이라이트는, 속에 능구렁이가 한 백 마리 있는 이미지인 유비에 대해 마틴 셀리그먼의 긍정 심리학이랑 밀당의 완급 조절을 논할 때.
'아무리 힘겹고 우울해도
유비는 그 원인 탐색에 매달리지 않았고,
대신 행복을 주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곁에 있던 관우, 장비, 조운, 제갈량 등도
모두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유비는 긍정적인 정서를 발휘하며,
방안 탐색에 몰입했고
그 사건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했다.'
눈을 반짝이는 폴리아나 유비라니 왜 이리 거북시러븐가. 방향이 좀 다른 표현이지만, 나의 유비는 이렇지 않아! 뭔가 무서워!
착융이나 법정을 비롯해 기억에 없는 인물들이 꽤 있어서, 나이듬을 한탄하는 한편 소설이든 정사든 다시 한 번 봐야겠다 결심. 새로운 번역이 있나 보려고 검색했는데, 생각보다 여러 버전이 있어 깜놀. 하긴, 삼국지만 유구한 것이 아니라 삼국지 오덕들의 역사도 유구하니, 불타는 덕심으로 더 나은 번역을 꿈꾸는 역자분들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한가. 일단 나도 모르는 새 머리맡에 쌓인(...) 책들을 빨리 해치우면 바로 들어가자!


표지에 나온 말처럼 이 책으로 현대 문명의 실상까지 알았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크기 문제를 이런 식으로 들여다본 적이 없으니 재미있다. 로그 함수처럼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 기억이 안 나는 단어들 나와서 움찔하기도 했지만, 내가 계산해야 하는 거 아니니깐 오케이. 계산이 가능하여 유용하게 쓰이는 경우와 재는 게 무의미한 부분이 번갈아 나오므로 수학으로 뭐든 해결 가능하단 얘기도 아니고, 골때리는 형식의 최종장(책 내용의 1000단어 요약 → 100단어 요약 →1단어 요약)에서도 그런 방법 전혀 없다고 써있으니 그냥 사람의 착각부터 비행기 좌석, 80/20 법칙 같은 재미있던 이야기들만 기억하면 되겠지(...정확히 따지면 그 외의 이야기를 아마 기억하지 못하겠지).
걸리버 여행기로 소인과 거인의 신체대사를 얘기하는 걸 읽으며 떠오르는 다른 작품들이 있었는데, 끄적이다보니 내가 고대 유물이 된 기분이라 적고 지웠다. 가는 세월 크흑...스밀 선생도 설마 그런 이유로 보편적인 고전을 선택하...지는 않았겠지 하아. 어쨌든 평균적인 사람의 체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급격히 줄어들거나 커지는 게 무리라고 하니, 갑자기 머릿속에서 많은 작품들의 결말이 비극으로 바뀐다. 한 발 내딛고 허벅지뼈 부러져 사망, 시야 좁아져서 사고 나서 사망, 몇 배로 뛴 대사량만큼의 식량을 도저히 못 구해서 사망...앞으로 이런 주제의 작품 볼 때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테니, 아는 게 병이라고 툴툴대다 재미를 잃을 수도 있으려나. 뭐, 당장은 잘 봤으니 됐음!
"요컨대 이 파악하기 힘든 질서를 탐구함으로써 배운 교훈은, 우리 은하의 별다른 특징 없는 항성계 중 하나에 있는 작은 행성에서 진화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적 문명으로서, 우리 존재의 본질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끔 해준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