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98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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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따라 진화된(?) 능력 수사물

이런 소재의 이야기를 보는 게 꽤 오랜만이다. 한때 흔했던 설정이 언제부터 보기 힘들어졌나 생각하다, 시간의 흐름에 잠시 한숨. 디지털 시대에 새로 보는 사이코메트리 수사에는 나름 특수 설정이 붙어 있어, 만능인데 만능이 아닌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자키의 능력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코우키의 인맥 활용도 있으니, 리얼한 하드보일드 찾는 독자들에겐 소화가 안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든다. 개인적으로는 재미가 있고 범인만 잡으면야 뭐든 관계없으니 오케이.

 이런 능력이 다뤄지는 만큼 수사 과정도 좀 가벼운 느낌일까 했는데, 나름 나올 수 있는 건 다 나오니 ‘오호~’ 소리도 종종 나온다. 초능력이랑은 거리가 먼 막판 육탄전도 재미있었고. 개인적으로는 인간 병기가 시원하게 펼치는 액션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이런 아슬아슬한 상태에서 어떻게 이길까 조마조마해하는 것도 맛이다. 어디까지나 ‘이런 설정에서 주인공이 죽을 리가 없다’고 믿으니 즐길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3인방의 확연한 개성이 마음에 들기도 하고, 이 전개를 봤을 때 당연히 후속작이 있겠거니 했는데 없어서 당황. 전작에서 3년이면 슬슬 나올 때가 되었으니, 기대를 버리지 말고 기다려야겠다.

나에게만 보이는 살인
나에게만 보이는 살인
구구절절 마음을 울리는 특별한 여행기

추상적인 내용이 잔뜩 나올 것 같은 제목에, 여행 팁을 얻기에는 출간된 지 너무 오래 지났다. 게다가 최근의 여행기들의 일부도 그렇기는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갈수록 현지인들을 깔보거나 비난하는 경향이 강한 책들이 많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어 ‘읽어는 봐야지’라고 생각만 하고 꽤 시간이 지났는데...지금이라도 읽어봐서 정말 다행이다. 간만에 잠시 필사를 고려해볼 정도로 한 마디 한 마디가 기가 막힌 데다, 낭만을 찾으려는 경향은 분명히 있지만, 동네마다 다른 사람들의 상황을 마음을 열고 이해하면서 따라가는 태도 완전 심쿵이다. ‘이 국적과 이 성격의 작가’와 ‘이 시기’가 맞물리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여행 코스와 사람들과의 대화도 흥미진진. 이후 이 동네들에 더 큰 시련이 찾아오고, 일부 지역엔 아직도 피와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허무하기도 하다. 고난 속에서도 노래하며, 시를 좋아하고 당당한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현재 휘둘러지는 폭력 아래서, 이 문화적 유산은 과연 이어지고 있을까. 한편으로는 예상 못한 폭소 포인트들, 위험에 대한 직간접적인 경고들도 다양하게 포함되니 걸러낼 문장이 하나도 없다.

 시간이 상당히 흘렀는데도, 이란에서 만난 미국 청년과의 대화를 보면 기시감이 엄청나다. 이해가 부족한 ‘구원자’의 입장이란 지금도 너무 흔하니까...“자기 나라에서 좋은 것이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낯선 곳에서 과연 나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었는가 반성도 해 본다. 그리고 아무리 적응력이 강하고 낙관적이어도 꺾일 만한 몇몇 대형 사고의 기록(특히 원고 분실. 읽는 사람 입에서도 신음이 흐른다...)에서도 슬쩍슬쩍 감동. 쌩고생한 과정이나 갑갑한 마음은 솔직하게 쓰면서도, 낯선 곳에서 문제가 생길 때 흔히 보이는 ‘현지인들과 그 문화에 대한 저주’ 따윈 없으니 잭 런던 같은 작자와는 천지 차이다. 정확한 시각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으나(대부분의 그림들로는 동네 식별 불가능), 두 사람이 겪은 일화에 강렬한 이미지를 더해주는 그림들에도 뒤로 갈수록 정이 붙는 여러모로 멋진 한 권이다. 이 넓은 세상을 내 입맛대로 판단하고 떠들며 끝내지 않고, 몰랐던 것들을 알아가며 모자람을 채워가기 위해서라도 이 여운을 최대한 오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싶다.

 본편의 흐름에선 좀 벗어나지만, 권두의 사진에 등장한 피아트 토폴리노에도 감동. 문제 생겨서 수리도 종종 하지만, 어떻게든 이 길고 험한 여로를 버팅기는 소형차의 성능 뭡니까. 스포츠카 나오는 영화들에서도 느끼지 못한 이태리 차에 대한 믿음이 갑자기 샘솟는다. 마지막에 트럭 타고 발굴팀들 만난 뒤 토폴리노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게 이 책의 유일한 아쉬움...

 

“그가 그들을 상냥하게 대하는 것은 반쯤은 진정한 인도주의적 정신에서였고, 또 나머지 반쯤은 그들의 가족으로부터 총을 맞을까봐 두려워서였다. 세상을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동기가 다 필요한 법이다.”


세상의 용도 (양장)
세상의 용도 (양장)
중요한만큼 울적한 그 회의의 상세

역사서는 어쨌든 엔딩으로 승부하는 장르가 아니니 - 스포일러 시작된지 너무 오래되었으니까 - 세부 사항에 대한 기대만 약간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그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깨달았다. 경악이나 실망으로 인한 탄식 없이 넘어가는 페이지를 세는 편이 더 빠를 정도니까. 맥밀런 선생의 강조처럼, 분명 이 결정자들이 책임은 있지만 모든 게 이 사람들 탓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이 복잡한 상황에 속병이 날 것 같다. 회의에 참가하지도 못했던 나라의 자손으로서는 제국주의의 탐욕을 실컷 비난하고 끝내고 싶지만, 세상 또 그렇지가 않아...일단 교과서에서는 마치 희망의 등불인 양 언급되었던 민족자결주의가 이런 식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우울하다. 아무리 담겨있는 의도 혹은 해석이 선하더라도, 그 정의부터 정확하지 않은 개념을 무작정 투척할 때의 부수적 피해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니까. 모두가 고생했으나 아무도 만족하지 못하고, 한 국가의 숨통이 트이면 다른 나라에서 피가 흐르는 모습에 질식할 것 같다. 분명 많은 요구들이 과한데도, 뜯어보면 다 사정이 있고 하다못해 독일조차 항변의 이유가 있으니...이런 자리에 낙관주의를 가지고 참석한 이들이 아직 있었다는 사실에는, 인간의 긍정성을 평가해야 하는지 현실감각이 떨어졌다 해야하는지 모르겠다. 이게 다 민족자결주의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뭐하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정말 하나도 없다.

긴 드라마 속에 생각해야할 문제가 너무 많아, 하나하나 따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국가나 지도자의 도덕이란 대체 뭔지 답답해지고, 일단 한 표 가진 시민의 입장에서 스스로의 마음도 지금 잘 모르겠다. 일단 발언권을 밀어붙일 수 있는 국력이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여러 나라와 척을 지고 쌍욕을 먹더라도 최대한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결과를 물어오는 대표와, 다 같이 평화롭게 살아야하니 어느 정도 손해는 감수하자는 대표 중 한 사람을 지지해야 한다면 과연 나는 후자에 표를 던질 것인가...최근의 뉴스들을 보면 지금이야말로 나만의 답을 작성해야하는 시기인데, 참고할 사례들이 있어 오히려 너무 어렵다. 어쨌든, 봐서 행복하지는 않으나 엄청난 책을, 매우 잘 보았다...


+ 웃을 건덕지가 없는 이 책에서 딱 한 군데, 지금까지 본 빌헬름 2세에 대한 언급 중 가장 간결하고 직설적인 문장에는 잠시 모든 것을 잊고 대폭소. "그는 병리학적으로 보면 정신이 나간 상태였을 수도 있었다." 모든 인물이나 상황은 단식 판단하면 안 되지만, 이 짧은 답이 정답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음...

파리 1919 - 새로운 세계 질서를 향한 6개월
파리 1919 - 새로운 세계 질서를 향한 6개월
재미난 와중 살짝 피로한 직장 애환 미스터리 속편

불곰국 소설을 읽은 뒤라 기분 전환이 필요하기도 하고, 전작을 즐겁게 본 기억이 있으니 집어 들었다. 속 편히 잘 읽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갑갑한 순간도 꽤 많다. 갑질하는 사람들이 죄다 시체로 발견되는 경우라면 모를까, 직장 내 갑질 정말 싫다고요. 어이구...전작의 진주인공(?)의 더욱 격해진 수난, 살려는 몸부림이 참 순탄하지 못한 린코, 안 볼 줄 알았는데 또 보는 루루(어느 정도 규모 넘어가는 일터엔 이런 스타일 꼭 있지...) 덕에 이게 기분전환 타임이 맞는가 잠깐 의심하기도. 그렇다고 이런 자잘한 요소들이 재미를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니 어쩌리. 그래도 마지막에 경쾌(?)하게 끝났으니 다행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겨.

아무리 봐도 후쿠로코지 다음 권에 또 끌려나올 것 같음. 분명 회사를 그만 뒀는데도 상사나 후배들 등쌀에 결국 도로 돌아가는 그런 스타일이야...이것이 예상인지 망상인지는 다음 권에서 확인할 수 있겠지.

바스커빌관의 살인
바스커빌관의 살인
부조리 속에서 '인간'으로 버틴다는 것

너무 편견이 쌓였는가, 소련 시절의 소설은 집기 전부터 한기가 느껴지고 첫 페이지에서 이미 최악의 상황을 자꾸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날 읽어야 해!'라고 부르짖는 듯한 제목에 상당히 각오하고 픽업. 일단은 예상보다 훨씬 마일드한(?) 분위기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읽기만 해도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 묘사도 없고, 배고픔이나 복장 얘기는 수용소 소설들에 비하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 그러나 흐루시초프까지 나서서 깠던 작품에는 이유가 있으니, 구성이 4부인데 이미 2부 끝나기도 전에 부조리함이 소화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갔다. '새해 벽두부터 이런 속터짐에 몸을 맡겨야 하는가?' '어차피 읽을 거면 후딱 읽어!' 나 홀로 고뇌하다, 이대로 중단하면 오히려 없는 속터짐까지 상상할 수도 있어 더 위험하니 그냥 GO.

능력 있는 신인을 견제하거나 착취하려는 정치적 움직임이야 어느 나라나 존재하지만, 불곰국, 아니 쏘-련의 이 모양새는 역시 한 차원 다르다. 다른 나라 소설에서 이런 회의 장면 나오면 '이 책의 장르는 블랙 코메디구나!' 생각했을 텐데, 이 책에선 그게 아니니 죽을 맛. 그리고 뭔가를 바꾸고 싶다면 이런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게 맞는데도, 힘내라고 주먹을 불끈 쥐는 게 아니라 '이렇게까지 버텨야 하는가' 라고 한숨 쉬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예전에 브레흐만 책에서 까던 비겁한 시민의 사고가 내 머리 속에 있는가...

로빠뜨낀의 성격과 권두 해설에 나온 작가가 겹쳐보이는 것도 착각이 아니리라. 예상보다 매우 긍정적인 결말에 박수가 절로 나오면서도, 차라리 배드엔딩으로 끝났으면 오히려 두딘체프 씨는 윗전의 노여움을 덜 샀을지도 모르겠다 싶어 울적해진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는 어디서 배웠나 싶은 기득권의 바보짓을, 버티고 버티고 또 버텨서 '멀쩡한' 주인공이 이겨낸 것에 '이것들이 우릴 이겨먹을 거라 생각하고 있네! 아주 꿈도 못 꾸게 해줘야지'라고 분노한 것이 아니려나.

어쨌든, 부조리 고발에 그치지 않고, 그걸 이길 미덕과 희망이 소시민들 속에 있다는 걸 새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읽은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인간다운 인간'으로 만들어가야 할텐데...자신도 없고 불안하지만, 조금은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믿음을 갖고 싶다. 새해니까...


"이제 전쟁은 끝나고 그는 승리를 거두었다. 승리자는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축배를 올린다. 그러나 전쟁은 또한 승리자에게 깊은 상처를 가져다 준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기대 이상의 재미가 있는 복고 미스터리

40년도 더 지난 작품에 제목부터 '용신 연못'이니, 요코미조 세이시 작품들 생각하면서 집었다. 그리고 예상과는 매우 좋은 의미로 달라서 깜짝. 분명히 지금 적용될 수 없는 개념들은 있고, 도모이치나 마키코가 보이는 안일함에 슬쩍 성질도 난다. 하지만 아이들이 입은 시대의 상처나 교육자의 자세 꼬집기부터, 스리슬쩍 튀어나오는 각종 명언들, 철학적 질문, 명탐정(?), 설마 이런 방향일 줄 몰랐던 결말까지 여러모로 볼거리 만점. 무려 미쓰다 신조 선생의 해설에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안 풀렸다'는데, 나는 눈치채지 못했으므로 이대로 오케이. (해설에서까지 독자에게 추리를 시키다니, 역시 사람 성격 어디 안 간다...)

개인적 최고의 장면은 주인공의 언동에 '아니 이 ●○ 뭐여'라고 생각할 무렵, 딱 맞춰서 미오가 팩폭 퍼부을 때. 그래! 그런 얘기 통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이걸 일침으로 여기지 않고 여자의 흥분이라 생각하는 시점에서 미래가 없는 기야...어쨌든 잘 보았고, 절판 당시 애호가들처럼 프리미엄 가격까지 감수하지 않고 이렇게 볼 수 있어 두 배로 만족.

어쩌다보니 이게 2025년 마지막 감상문이다. 일 년간 여러 일이 있었지만, 적어도 책들은 여전히 기쁨과 가르침을 나눠주었으니 감사할 일이다. 책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겨우 깨닫기 시작한 한 해이기도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의 모든 책들을 다 읽을 수는 없으니까. 욕심내기 보다는 한 권 한 권 새로운 책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소중히 생각하고, 보낼 책들은 떠나보내야지...예상보다 마음 다잡기가 힘들어 아직도 정리 중이지만, 일 년 뒤에는 책 정리가 다 끝났다고 메모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용신 연못의 작은 시체
용신 연못의 작은 시체
초거대 행성 엔진의 신비와 위기

'머신'이라는 표현에 약간 의아해하면서 집었다. 보통 자연을 다룰 때는 '살아있는' '측정 불가능한' 느낌을 풍기는 단어를 많이 쓰니까. 서문을 읽으면서 이 비유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책을 읽고 나서는 '우리는 심해보다 달과 화성에 관해 아는 것이 더 많다'라는 개념에 대해 저자가 조용하지만 아주 확실한 분노를 보이는 이유도 약간이나마 피부에 와닿는다. 거대한 지층이나 고래들부터, 눈에도 보이지 않는 균과 플랑크톤이 촘촘하게 연결된 시스템의 설명이 여러모로 놀랍다. 그리고, 한두 군데에 문제가 생겼다고 멈추지 않을 정교한 엔진을 불과 두세기 정도의 시간 동안 작살내고 있는 우리들은 무엇인가 새삼스레 전율. 안 돼, 생각해도 답도 없고 남는 건 된소리뿐이야, 생각하지 마....그러나 토머스 미즐리 이야기를 읽으면 이런 생각을 도저히 떨굴 수가 없다. 지구를 작살내는 기술을 두 개나 만들어낸 건 미즐리 한 사람이지만, 그걸 이용한 상품들을 신나게 사용해 댄 건 지구 각지의 소비자들이니...

숫자를 잘못 읽었나 순간 눈을 의심하게 되는 거북이의 눈물이나, 하와이의 전통 양어장, 증기선 이후의 항해가 가지는 의미나 고래들과 재순환 시스템 전체의 위기 등 재미있지만 마냥 재미있게 볼 수 없는 이야기들 정말 많다. 그나마 전문가가 추려서 설명해준 게 이 정도니, '숨겨진 신비가 더 많을 거야!'라고 좋아해야 할지 '숨겨진 우리들의 악행이 더 많을 거야...'라고 눈물을 흘려야할지 모르겠음. 그래도 체르스키 선생은 참여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하다고 격려해주시니 다행이긴 하다. 나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들에서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그리고 학창시절 이후 끊은 해수욕은 앞으로도 할 일 없을 것 같다. 아주 꽉 찬 플랑크톤 국물 속에 들어간다는 생각 너무나 안 즐겁고요. 아마 플랑크톤들도 내 몸에 붙은 것들 섭취하는 게 즐겁지 않기는 매한가지일테니, 천상 방에서 조용히 책이나 보는 걸로.

블루 머신 - 바다는 어떻게 세계를 만들고 생명과 에너지를 지배하는가
블루 머신 - 바다는 어떻게 세계를 만들고 생명과 에너지를 지배하는가
2025년 만난 당혹스런 이상

제목만 보고 집었다가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내용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3부작의 마지막 권이라는 것을 모르고 집어들었기도 하고, 화폐 제도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이나 반정체성주의를 2025년 만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사회주의든 반자본이든 당연히 연구가 계속 이루어지는 분야니까 잘 아시는 분들이 보면 초짜의 당황에 헛웃음 지으실 수도 있겠지. 그러나 자본론은 출간된 지 백 년이 넘은 고전이고 이 책은 신간이니, '지금' 이런 꿈을 꾼다는 것에 대해 뭐라고 생각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게다가, 저자 본인이 희망은 수동적인 '희망' 이 아니라 '희망에 대해 생각하기'가 필요하다고 계속 말해서 읽는 사람 끙끙대게 해놓고, 마지막에 '답은 없고 나는 모름' 이러면 아오....! 된소리를 목 안에서 삭히며 생각해보니 자본론도 화폐가 없을 때 경제를 굴리는 방법 얘기는 없었던 것 같으니 똑같은가. 아닌가, 읽은지 너무 오래 되어서 내가 기억을 다시 쓰고 있는 건가. 그렇다고 지금 자본론을 다시 읽고 확인할 기력과 의욕은 없고요...

드높은 이상을 가지고 등장한 비트코인조차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테크 수단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 현실에, 대안 없는 '나빠요'가 정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인가? 화폐 없는 세상보다 환경오염이 없어지는 세상이 더 빨리 올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내가 너무 꼬인 탓일까. 당장 예시로 든 사빠띠스타나 로자바도 현재 경제 면이든 사회 분위기 면이든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 것 같지 않은데...

개개인이 그냥 마음을 여는 게 아니라 집단으로 반정체성을 노래하는 세상이 올 거라는 생각은 아예 안 든다. 인간처럼 정체성에 목을 매는 동물이 그걸 포기할 수 있을까? 국가나 인종을 초월하는 것도 힘든데, 성 정체성이나 직업 등 수많은 요소들을 다 버린다라...좋은 정체성은 없다고 말하지만, 애초에 정체성이 좋고 나쁘고로 평가할 수 있는 그런 것인가? 모르겠다. 한없이 갑갑해지고 질문만 나오는 것은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일까. 이런 문제들은 분명 생각해볼 가치들이 있지만, 하다못해 작은 실마리라도 주어져야지, 화폐 경제가 붕괴되면서 극단적으로 나빠지는 사례만 넘쳐나는 가운데 '알아서 생각하라'는 말은 어딘가 가혹하게 느껴진다. 나중에라도 앞의 두 권을 읽으면, 약간이라도 정리된 답을 생각할 수 있을까.


+ 본편 다 끝나고 약간 가라앉은 마음으로 옮긴이 후기를 읽다가, 2002년도의 붉은악마가 '세계인과의 연대'라는 얘기에 놀라서 눈 돌아갈 뻔. 짧은 시간이지만 단군 이래 한반도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지구상에 제일 많았던 시기라고 알고 있는데, 축구 게시물만 들여다봐서 내가 왜곡된 현실관을 갖고 있던 것인가? 모르겠다 모르겠어...

폭풍 다음에 불 -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
폭풍 다음에 불 -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
의외의 이야기가 가득한 고서 너머 풍경

대단히 눈에 띄는 제본과 더불어, 추리소설 시리즈를 방불케 하는 제목에 혹해서 집었다. 쉽게 쓰인 고서의 이모저모에 추리소설에 버금가는 재미가 있어, 멋진 선택이었다고 혼자 뿌듯하다.

고서라고 하면 박물관이나 연구기관만 떠올렸는데, 역시 세상은 넓고 오덕이 없는 분야는 없다는 것부터, 학술서적을 넘어 공문서, 일기, 하다못해 찢겨 나간 한 페이지까지 다루어지는 것이 놀랍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사이트에 물건 뜨면 구매하려는 쪽이 실록이나 역대인물정보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내용을 검증하는 것이 묘하게 웃음이 난다. 모든 문화재 혹은 골동품의 조사나 보존에 최신 기술이 이용되는 건 당연하지만, 극단적인 아날로그 서적들이 세상을 돌기 위해 디지털 기술이 필수가 되다니...

고서 자체의 내용들도 쓴맛 단맛 다양하다. 당장 오프닝 에피소드는 저자분 말씀대로 "가슴이 텁텁"하다. 아무리 실시간 뉴스 피드가 없던 시대라도, 권력의 꼭대기에 있는 인물들이 옆 나라 소식도 몰랐을 리가 없는데 그런 내용이 동인 시집에 한 구절도 없다니. 그리고 현실 인식이나 돈 버는 감각은 제로인데 책 제본 기술만 일류인 건 대체 뭔가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다른 진기한 내용들이 재미있어서 텁텁함이 상쇄되고도 남는다. 다른 의미로 무서워지는 성적표(만의 하나라도 내 성적표가 후대에 고서상 사이트에 올라온다고 생각하면...어우 소름...), 의외의 사실들을 알려주는 족보들과 이혼 문서, 풍류인지 그냥 엉덩이가 무거운 걸 포장한 건지 모르겠는 와유에 국뽕에 합격 기원용 개명에...개인적으로 제일 놀란 것은 퇴계선생 파트. 언해 작업도 그렇지만, 교육용 동요를 만든 사실이야말로 교과서에 실려 마땅한 업적이 아닌가? 교과서나 지갑에서 만날 때마다 감흥 제로였던 자신을 급반성. 선생님 몰라뵈어 죄송했네유 흑.

  앞으로도 고서는 박물관에서나 접할 것 같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더 많이 숨어있다 생각하니 이 책의 속편이 간절히 읽고 싶다. 1판이 2019년이면 슬슬 보물탐뎡 2를 내실 때가 된 것 아닌가요 작가님. 개정증보판이라도 제발...

보물탐뎡 : 어느 고서수집가의 비밀노트
보물탐뎡 : 어느 고서수집가의 비밀노트
기적에 가까운 한 어머니의 기록

읽은 이를 압도하는 내용에, 읽고 나서도 한참 동안 생각이 정리되질 않는다. 미리암이 약 4년간 해낸 일들이 보면서도 믿겨지지 않는다. 부당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기고, 시신을 거두는 것만으로 남겨진 가족들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미리암처럼 움직인다는 건 쉬운 일도 아니고, 솔직히 정답인지도 모르겠다. 슬픔에 압도당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유족들이나, 침묵 외엔 남은 가족들을 지킬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묘지 관리인의 선택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말이 쉽지, 범인의 추적이라는 건 인맥도 기술도 없는 일반인이 도전한다고 성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니 미리암이 어떻게 이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는지, 투지를 잃지 않을 수 있었는지 더더욱 모르겠다. 

  감정을 자극하는 문장들이 없는데도 괜히 눈물이 난다. 본인에게는 눈물 한 방울 흘릴 시간도 허용하지 않고 범인들을 쫓고, 법률을 공부해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심지어는 범인의 가족들까지 도울 때는 '이렇게 많은 일을 하면서, 왜 본인에게는 한 치의 여유를 주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죽을만큼 아플텐데 대체 언제 울려고 이렇게 버티고 또 버틴 것인가. 범인들을 다 잡을 때까지 눌러뒀던 것이겠지만, 결국 그런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마음이 괴롭다.

살인 사건의 약 98퍼센트가 미결이라는 공포의 인용은 2019년 기준이지만, 10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이 문제들이 극적으로 개선되었으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결과를 확인하는 게 무서워서 검색도 포기했다. 그래도 미리암과 파이사, 투서를 보냈던 익명의 주민 같은 사람들의 행동이 계속 변화를 만드는 중이기를, 평범한 사람들이 이유 따윈 없이 끌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끼지 않고 출근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맞서 싸운다고 두려움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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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 그믐밤에 우리는...
[그믐밤] 47. 달밤에 낭독, 입센 1탄 <인형의 집>[그믐밤] 46. 달밤에 낭독, 체호프 4탄 <벚꽃 동산> [그믐밤] 45. 달밤에 낭독, 체호프 3탄 <바냐 아저씨>
동구권 SF 읽어보신 적 있나요?
[함께 읽는 SF소설] 12.신이 되기는 어렵다 - 스트루가츠키 형제[함께 읽는 SF소설] 11.노변의 피크닉 - 스트루가츠키 형제[함께 읽는 SF소설] 10.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 스타니스와프 렘[함께 읽는 SF소설] 09.우주 순양함 무적호 - 스타니스와프 렘
같이 연극 보실 분들, 구합니다.
[그믐연뮤번개] 3. [독서x관극x모임지기 토크] 우리 몸에 살고 있는 까라마조프를 만나다[그믐연뮤번개] 2. [독서x관극x번역가 토크] 인간 내면을 파헤치는 『지킬앤하이드』[그믐연뮤번개] 1. [책 읽고 연극 보실 분] 오래도록 기억될 삶의 궤적, 『뼈의 기록』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우리 입말에 딱 붙는 한국 희곡 낭독해요!
<플.플.땡> 4. 우리는 농담이 (아니)야<플.플.땡> 3 당신이 잃어버린 것 2부<플.플.땡> 2. 당신이 잃어버린 것플레이플레이땡땡땡
하이틴에게 필요한 건 우정? 사랑?
[책증정-선착순 10명] 청선고로 모여라!『열여덟의 페이스오프』작가와 함께 읽기[청소년 문학 함께 읽기] 『스파클』, 최현진, 창비, 2025[문학세계사 독서모임] 염기원 작가와 함께 읽는 『여고생 챔프 아서왕』[북다] 《위도와 경도》 함윤이 작가와 함께하는 라이브 채팅! (4/9)[북다/라이브 채팅] 《정원에 대하여(달달북다08)》 백온유 작가와 함께하는 라이브 채팅!
소설로 읽는 기후 위기
[소설로 읽는 기후위기·인류세] 2회차 『로빈슨 크루소』(다니엘 디포, 1719)[소설로 읽는 기후위기・인류세 - 우리는 왜·어떤 다른 세상을 꿈꾸는가?] 1회차-마션[소설로 기후위기/인류세 읽기] 『야성의 부름』 잭 런던, 1903.[소설로 읽는 기후위기·인류세] - (3) 프랑켄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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