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 인생의 베일
2025-09-13 22:59:11
"네. 죽음은 모든 걸 무서우리만치 시시하게 만들어 버려요. 저이는 인간 같지가 않군요. 그를 보세요. 살아 숨쉰 적이 있다고는 믿기지 않아요. 한때는 그도 언덕을 달려 내려오며 연을 날리던 어린 소년이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기 힘들군요."(155쪽)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를 경멸하도록 만드는, 인간의 가슴에 존재하는 그것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174쪽)
고통으로 가득찬 세상에 잠깐 머물렀다 가는 신세로도 모자라 자신을 고문하다니 인간은 얼마나 딱한 존재인가?(238쪽)
"난 이런 의문이 듭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한갓 환영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그들의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역겨움 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는 유일한 것은 인간이 이따금씩 혼돈 속에서 창조한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들이 그린 그림, 그들이 지은 음악, 그들이 쓴 책, 그들이 엮은 삶. 이 모든 아름다움 중에서 가장 다채로운 것은 아름다운 삶이죠. 그건 완벽한 예술 작품입니다."(266쪽)
"의무를 이행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하지만 그게 당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걸 명심하세요. 그리고 손이 더러워지면 반드시 씻는 것보다 더 기특한 일은 없다는 것도요. 단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의무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과 의무가 하나이면 은총이 당신 안에 머물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행복을 맛볼 겁니다."(278쪽)
어느 날 아침 아직 어두운데 가마에 오른 것하며 동이 터 올 때 숨 막힐 듯한 아름다움을 눈이 아닌 온몸으로 체감하면서 순식간에 가슴속의 고통이 사그라졌던 기억이. 모든 인간의 번뇌가 하찮게 쪼그라들었던 그때. 태양이 안개를 헤치며 떠올랐고 구불구불한 길이 논 평원 사이를 뜷고 작은 강을 가로질러서 시야가 닿는 곳까지 쭉 펼쳐진 장면이 그녀의 눈에 선했다. 굽이치는 자연을 뚫고 지나간 그 길은 그들이 가야 할 길이었다.(329쪽)
나도 엄마의 퇴근 시간을 간절히 기다리며, 친구들과 한껏 뛰어놀던 아이였다. 그때는 한 번도 피곤하고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부모에 대한 사랑과 언젠가는 찾아올 미래에 대한 희망이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인생이 짧다고 느끼는 요즘, 나는 헛되고 무가치한 것들을 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아졌다. 밤 하늘을 바라볼 때면 이 우주에서 나 같은 인간이 남보다 더 얻으려고 애쓰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생각한다. 언젠가는 썩어질 몸이지만 그럼에도 무엇인지 모를 의미를 찾으려고 남은 시간이 보내는 것만이 인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