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뤼겔님의 블로그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135-136쪽.
언어를 배울 때는 완벽주의자보다 목적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실제로 완벽주의 성향과 언어 불안은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Gregersen & Horwitz, 2002). 자신이 세워놓은 기준이 너무 높으면 오히려 그 기준이 자신을 옥죈다. 아무 말 대잔치를 하는 것도 나이고, 어느 날 운이 좋아 유창하게 말하는 것도 나이다. 내 말의 하찮음을 견디는 만큼 내 말그릇이 넓어진다.
143쪽.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를 하나하나 더해가는 것보다, 언어 같의 경계를 넘어서 상대와 협력하며 목적을 달성하는 게 더 중요하다. 언어는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다. 하나의 언어를 배운다고 단지 하나의 언어만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갖고 있던 다른 언어 및 의사소통 자원과 엮어 더 많은 걸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을 '초언어하기(translanguagin)'라고 부른다.
수단이 아닌, 이해의 방법으로서의 언어에 대하여.


○78쪽
완전히 잊어버린 바스크어이지만 거기에 까먹은 시간이 쓸데없었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외국어는 그저 조금 맛보는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 계기를 만들어 주기 마련이다.
○194쪽
언어학에서 중요한 것은 넓은 시야로 언어를 바라보는 것이다. 일본어와 영어가 중심이고 거기에 겨우 구미나 아시아의 언어가 두세 개 추가될 뿐인데, 그것만으로 세상사를 헤아린다는 것은 처음부터 틀려먹은 일이다. 그럴 때 코사어를 들으면 좋다. 언어를 바라보며 겸허해질 수 있다.
○212쪽
튀르키예어를 공부하고 싶다면 훌륭한 책이 있다. 만화가 다카하시 유카리가 지은 <터키에서 나도 생각했다>. 이 만화는 튀르키예를 여행하는 동안 그 매력에 사로잡혀 마침내 튀르키예인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 저자 자신의 이야기다. 읽다 보면 '메르하바' 앞에 펼쳐진 세계가 보인다.
○248쪽
성경 언어에 갇혀 버렸던 히브리어는 엘리에제르 벤예후다라는 초인에 의해 20세기에 다시 생명을 부여받는다. 그는 극도로 가난한 와중에도 모든 능력을 히브리어 부활에 쏟았다. 많은 사람의 몰이해에도 물러서지 않고 마침내 현대어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런 사례는 달리 들어 본 적이 없다.
○269쪽(옮긴이의 말-'외국어 건드리기'의 쓸모)
이 책에서는 언어가 100가지나 소개된다. 웬만해서는 언어 이름을 열 개 남짓 대기도 벅찰 텐데, 당연히 저자가 그 수많은 언어를 구사하지는 못한다. 순전한 호기심으로 그 많은 언어에 손댄 것뿐이다. 외국어를 건드리기만 하는 것은 참으로 쓸모없어 보이기도 하는데 그런 쓸모없음이 우리의 삶을 아기자기하게 만든다. 오로지 쓸모만 좇는 삶이란 너무 퍽퍽하다. 바로 그렇기에 쓸모없음의 쓸모가 있는 것이다. 고작 인사말 몇 마디나 하나, 둘, 셋 정도만 알지라도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의 소소한 소통에서 작게나마 윤활유가 되니 그것도 쓸모가 없지 않다. 누구나 대문호나 달변가가 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들 제멋에 맞게 언어를 써먹으며 다채로운 세상을 만들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