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엣: 옮긴이의 말
2025-10-31 16:43:43
『블루엣』을 비춘 내 얼음·거울·조각들
한 송이만 따로 놓고 보면 특별할 게 없어서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꽃은 군집을 이루고 고지대 초원을 점령해 라일락빛 꽃들을 서리처럼 흩뿌린다.... 시골사람들은 수레국화를 퀘이커레이디스Quakerladies나 이노슨스Innocence라고 부른다. 2센티도 못되는 크기에 십자가처럼 네 장의 파란 꽃잎이 달려 있는데, 중앙의 꽃술은 황금빛이다. ...이 야생화의 학명은 Houstonia caeru lea이고 커피나무나 친초나 나무와 친척인데, 터무니없는 소리, 저 순진한 꽃에 카페인이나 키니네의 흔적이 있을 리 없지 않나...
「잊을 수 없는 블루엣Unforgettable bluets」, 뉴욕타임스 1972년 5월 21일자
『블루엣』을 검색하다 1972년 뉴욕타임스에 익명으로 실린 단상을 읽었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수레국화밭 풍경에 대한 이 짧은 단상은 사실 모순과 반전으로 가득하다. 순진한 별명들을 지닌 소박한 야생화는 고지대의 평원을 식민지화하고 나비 떼를 유혹해 불러들인다. 작고 여리고 파란 십자가 모양 꽃들은 갓 태어난 봄날의 녹음을 미세하게 조각난 얼음으로 시리게 덮는다. 십자. 순수. 카페인. 키니네. 독극물이자 치유제인 파르마콘. 매기 넬슨이 이 책의 제목을 따온 안 미첼이 파란 연작 회화로 다룬 꽃. 자료조사를 하다 매기 넬슨도 분명 이 글을 읽었을 것이다 .
학식과 관능, 시와 철학, 지성과 육체를 한몸에 담은 『블루엣』은 매기 넬슨이 세상의 봄날에 글로 흩뿌린 서리, 만발한 수레국화 꽃밭이다. 난 증거도 댈 수 있다. 이를테면 『십자가의 꿈』의 이름모를 저자가 꿈에서 본 황금색을 떠올리는 #112로부터 꿈 속에서 본 작고 파란 꽃을 찾는 데 인생을 바치는 노발리스의 미완소설 『파란 꽃』이 나오는 #113 사이의 여백은 어떤가. 정말이지 “누가 이 세상에 핀 꽃 한 송이에 이토록 마음을 빼앗긴단 말인가? 그리고 꽃과 사랑에 빠지는 사람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여기 매기 넬슨이 있다, 그 꽃, 그 색과 사랑에 빠진 사람. “이번에는 블루다.” 넬슨의 글쓰기 모델은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다. 롤랑 바르트가 사랑을 조각내 글로 흩뿌리며 뒤쫓았듯 넬슨도 사랑하는 것들을 조각내 글로 흩뿌리고 추적한다. 바르트의 텍스트가 그러했듯, 넬슨의 블루엣도 의미의 근원, 블루를 지시하지만 닿지 못한다. 세상의 파란 것들은 “유일한 주체를 나타내는 은밀한 암호”이고 “우주가 담긴 지도의 X자 표시”고 “신의 지문”이다. 아니, 오히려 산재된 이 “색깔들이 더해져 신이 된다” 무수한 조각으로 바스라지고 흩어진 블루엣들이 군집을 이루어 넬슨의 글쓰기, 넬슨의 신영神影을 이룬다. 그러니까 넬슨의 책은 『블루』가 아니고, 꽃이름의 올바른 발음인 블뤼에도 아니고 『블루엣』이다.
블루는 빛일까 색일까 관념일까 은유일까 감각일까 아니면 마음의 상태일까. 이 책에서 블루는 그 모든 것이다. 광학적 착시. 항성의 빛에 조명된 우주의 어둠. 선물이자 상실, 고통과 슬픔과 죽음. 불가지론의 형이상학. 여자들만 느끼는 깊디깊은 우울. 비에 젖은 파란 방수포처럼 흔들리는 우리 삶. 슬프고 아프고 외로운 변두리의 신. 파란 신의 조각들이 독자의 피부를 물들이고 심장을 파고든다. 베고 에이고 적시고 스민다. 그리하여 넬슨의 블루는 고통의 공감각, 눈과 심장에 박힌 거울조각이다. 사고로 신체가 마비된 친구의 영영 쓸 수 없는 발은 보드랍고 매끄럽고 “파리해진다.” 공감각은 광학이나 자연철학이나 형이상학만큼이나 중요한 블루의 앎이다. 철학과 과학의 앎만큼이나 중요한 문학과 예술의 앎이다. 텍스트로 전달되는 타자의 아픔을 느끼는 감각이 또한 파란 신의 흔적이다. 얼핏 “의미가 없어” 보이는 거트루드 스타인의 시 “텐더 버튼스”를 강의하다가 넬슨은 학생들에게 말한다. “스타인은 상처받은 색들을 걱정하는 거예요”라고.
하늘과 가장 가까운 호수 티티카카의 물빛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매기 넬슨의 블루를 알았다. 그 물의 빛깔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해발 4000미터 고원에 위치한 그 호수의 블루는 충격적으로 깊었다. 그 어디에서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깊디깊은 블루였다. ”항성의 빛”을 만난 “텅 빈 우주의 어둠”을 담은 색, “허공과 불이 만들어내는 황홀한 우연”이고 삶에 죽음을 투영하는 고통, 봄날에 흩뿌려진 서리 같은 야생화, 신의 지문이었다.
*
이 책을 처음 번역했던 2019년, 그땐 몰랐지만 나는 매기 넬슨만큼이나 블루에 푹 젖어 있었다. 신경다양인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버틴 탓에, 서서히 금간 일상의 방벽을 뚫고 누수된 우울과 슬픔이 차오르고 있었다. 번아웃으로 난독 증세도 시작되어서, 한 문장 한 문장을 그야말로 허덕허덕 깔딱고개처럼 넘어가야 했다. 불안해서 퇴고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하나 신경다양인 특유의 공감각으로 넬슨의 문장이 품은 통증만큼은 베이듯 오롯이 느꼈다. 넬슨의 파란 문장을 파르마콘처럼 힘겹게 숨쉬며 투아레그인처럼 피부가 파랗게 물드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나는 안다. (신경)다양성/우울증 특유의 기억, 고감도이고 고해상도이지만 철저히 파편화된 기억의 형태를 넬슨이 그대로 모사해 기술하고 있음을.
한때는 심장에 박힌 얼음·거울·조각들처럼 매기 넬슨의 파란 문장들을 지니고 다녔고 그 문장들은 수시로 욱신거렸다. 하지만 이제 외피가 더 단단해진 나는 이 침윤하는 텍스트와 보다 건강하고 바람직한 거리를 둘 줄 안다. 다시 읽는 과정에서, 그때보다 지금의 내가 매기 넬슨의 철학적 사유를 훨씬 더 구조적으로 명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느꼈다. 하지만 경계를 잃고 푹 잠겨 허우적거리던 그때의 나였기에 비로소 가능했던 어떤 절박하고 애틋한 진심은 여전히 남아있다. 오히려 넬슨의 무경계적 글쓰기에는 잘 어울리는 듯도 하다. 나는 이 책을 “사적으로” 사랑하고, 이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려져 새로운 독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한없이 기쁘다. 다만 넬슨의 블루에 침잠한 채로 삶의 한 시기를 보낸 나의 조각들은 어쩔 도리 없이 이 문장들에 흩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