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의 말

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옮긴이의 말

by 설원2025-10-31 16:46:25
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죽고 또 사는 해리 오거스트의 끝내주는 희망  



작가들은 모두 변검의 삶을 살고 있지만, 영국작가 캐서린 웹만큼 다중의 가면을 쓰고 사는 이도 흔치 않다. 1986년생으로 아직도 젊은 이 작가이야말로 헤르미온느의 환생이라 해도 믿길 정도로, 경이로울 정도로 다채로운 경력을 자랑한다. LSE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RADA(영국 왕립 연극학교)로 진학해 연극, 뮤지컬, 현재는 라이브공연의 무대조명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14세에 ‘천재 작가’로 문단에 데뷔했고, 캐서린 웹이라는 본명으로 8편의 청소년소설을 써서 데일리텔레그래프로부터 ‘10대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20대에 들어서며 케이트 그리핀이라는 필명으로 6편의 판타지 소설을 썼으며, 좀더 문학적이고 사변적인 소설을 쓰게 되면서 클레어 노스라는 필명으로 12편의 SF 장편소설을 출간했는데, 그 결과 카네기 메달에 두 번 후보로 올랐고, BSFA상과 아서 C. 클라크상 후보로 올랐으며 존 W. 캠벨 메모리얼 어워드(<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월드판타지어워드(<돌연 희망이 등장하다>), 필립 K. 딕 어워드 특별상(<84K>)을 휩쓸었다. 더욱이 남자들 가운데 유일한 여성으로서 수십년 간 필리핀 무술 ‘에스크리마’를 수련해 달인의 경지에서 여성 호신술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니, 이 정도면 이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평범한 이들과는 다른 게 분명하다. 


<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은 2014년 클레어 노스로서 내놓은 첫 작품이고 입소문으로만 수백만 부가 팔린 이른바 ‘슬리퍼’ 히트작이며, 바로 이 ‘시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작가의 경력을 볼 때 남다르게 경험하는 시간의 문제를 다룬 이 작품이 불후의 대표작이 된 것은 아무래도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이 소설을 처음 착상한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는데, 바로 어떤 절대적인 고립감과 외로움의 찰나다. 이 책은 셰익스피어의 출생지인 스트래트어폰에이번 로열내셔널씨어터에서 유달리 힘겹게 몰입했던 연극의 조명 작업을 하던 가운데 시작되었다. 죽도록 일만 하다가 마티네 쇼를 마친 어느 뜨거운 여름날 갑자기 아무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는 채 길거리로 나섰는데, 문득 “다리는 쑤시고 팔은 멍들고 태양은 작열하고 관광객들은 행복하고 나는 외로웠다”고 작가는 쓴다. 바로 그 순간 어떤 강렬한 강박에 사로잡혀 그는 가장 가까운 카페로 달려갔다. 그 자리에서 기분이 좋아지려고 1919년 태어나 죽고 또다시 이전 삶의 모든 기억을 지니고 성장하고 늙고 또다시 죽고 또 태어나는 단편을 썼다. 1만 단어를 내리 쓰고, 2만 단어에 다다랐을 때, 단편이 아니라 장편이라는 걸 깨닫고 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형언하기 어려운 이 소설의 묘한 매력은 바로 이 순간의 독특한 애상적 정서가 독특하게 기발한 설정으로 완벽하게 전환된 데 기인한다. 환생자 혹은 불멸자의 개념은 SF나 판타지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해리 오거스트와 같은 칼라차크라는 한 가지 결정적인 제약을 지니고 있다. 불멸자들은 무한한 미지의 미래를 경험하고 환생자들은 환생을 통해 전생에 못 다한 목적을 이룬 후 대체로 진짜 죽음을 맞지만, 칼라차크라들은 죽고 또 태어나면서 영원히 살면서도 결코 자기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들은 반드시 정해진 수명이 끝나면 죽어야 하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한 번 환생하는 게 아니라 끝없이 꼬리를 물고 같은 일이 반복되는 생애를 살아가야 한다. 커커스리뷰에서 “레드불을 들이킨 <사랑의 블랙홀>”라고 명명한 이 설정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폐소에 감금된 수인의 존재처럼 근본적으로 서글프다. 이 세계에서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고 아무것도 신기하지 않고 아무것도 새롭지 않게 되는 어느 순간 그들은 반드시 지독한 권태, 삶의 무의미, 절대적인 고립감에 맞닥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칼라차크라들은 외롭고 권태로우며, 자기 시대 안에서는 세속적 욕망을 모두 성취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지만 몸과 마음은 여전히 부서지고 멍들고 병들고 다친다. 삶을 인고할 뿐, 죽음으로 탈출할 수도 없는 존재는 어디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할까. 


소속감과 이타주의. 사랑과 증오. 자신과 같은 다른 이들과 부딪혀야만 비로소 생겨나는 심리적 동기들. 빤하지만 결코 빤하지 않은 그 감정들이 인간의 삶에 의미를 주듯 칼라차크라의 삶에 의미를 주고 이 소설에 뜨거운 심장을 심어준다. 해리 오거스트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며, 그 사실이 바로 그의 유일무이한 구원이다. 시간을 거스르는 칼라차크라들의 연대인 크로노스클럽은 독특한 방식으로 서로 소통한다. 미래의 메시지는 이전 삶의 기억을 지닌 아이들로부터 전해진다. 아이는 죽어가는 노인에게 찾아가서 미래로부터 온 메시지를 전한다. 알고 보면 그들마저 죽을 수 있고, 그들의 세계마저 파괴될 수 있다는 메시지. 어느 해 평소와 다름없이 죽어가던 노인 해리 오거스트에게 찾아온 어린 소녀가 전한 메시지. ‘하지만 세계의 종말이 더 빨라지고 있답니다’라는 이 한 마디가 그들 또한 친구를 잃고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 날카로운 경종을 울린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이 메시지를 통해 해리 오거스트는 처음으로 진짜 삶을 시작한다. 죽음을 무릅쓴 영웅적 사투라는 삶다운 삶을. 그러니 칼라차크라에게마저, 삶의 의미는 죽음의 현전에서 온다. 모든 이야기가 반드시 언젠가는 끝난다는 데서 의미를 찾게 되듯이. 


이 소설에서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그래서 소설은 무섭게 빠르게 읽힌다. 사건의 시간과 독서의 시간이 모두 어마어마하게 빠르게 흘러간다. 엄청나게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난 사건들 — 15번의 생애이므로 거의 천이삼백년에 달하는 시간 — 을 아우르면서도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다. 그야말로 눈 깜박 하고 나니 어느새 열다섯 번 다시 살았더라는, 해리 오거스트가 체감하는 그대로의 시간감각이 독자에게도 생생하게 전해진다. 이 엄청난 몰입감 때문에 나는 원고를 그 어느 때보다 여러 번 읽고 또 다시 읽어야 했다. 원고를 검토하려 읽다 보면 디테일을 느리고 찬찬히 살펴야 하는 나의 책무를 번번이 까맣게 잊고 이야기에 몰입해 그만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 새 몇십 장을 후루룩 넘겨버리고 만 터였기 때문이다. 독자의 멱살을 움켜쥐고 이야기 속으로 끌어당기는 이 흡입력은 우리 시대 소설에서 흔히 찾기 어려운, 진짜로 귀한 미덕이다. 하지만 이 흡입력은 또한 어마어마한 정보값과 맞물려 있어서, 1차대전과 양자물리학, 무너져가는 영국 귀족 가문, 트로마의 심리, 러시아와 미국의 냉전, 수백 페이지를 빽빽이 채운 무수한 디테일들이 스위스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려 한 치의 오류 없이 작동한다. 그래서 나는 원고를 읽고 또 읽으면서 또 넋을 놓고 수십 페이지를 후루룩 넘겨버리는 일을 해리 오거스트의 삶만큼이나 반복한 것 같다. 


사실 이 소설의 한국어 제목에는 낱말 하나가 빠져 있다. 원제는 <The First Fifteen Lives of Harry August>로, 말하자면 <해리 오거스트의 처음 열다섯 번의 생애>다. 하지만 그의 열다섯 번째 삶이야말로 또한 그의 유일한 삶이라 할 수 있기에 <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이라는 제목을 이번에도 그대로 두기로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난 이것이 해리 오거스트의 ‘첫’ 열다섯 번의 생애라는 게 문득 슬퍼졌다. 이토록 치열하게 삶의 의미를 산화한 그는 앞으로 어디서 새로운 의미를 찾고 또 어떤 존재로 진화해 갈까. 그 사이에 얼마나 권태롭고 무의미한 시간들이 한없이 흘러갈까. 그러다 금세 조금 다른 결론에 이르렀다. 곰곰 다시 생각해 보면 그는 슬프지 않다. 앞으로도 슬프지는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이 결코 비관적이지 않은, 아주 근사한 이유가 하나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인공 해리 오거스트가 평범한 칼라차크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해리 오거스트에게는 완벽한 기억력 말고 또 하나의 초능력이 숨겨져 있는데, 그건 바로 마르지 않는 학구열이다. 나는 알고자 하는 자의 기쁨이야말로 이 소설의 숨겨진 진짜 주제라고 생각한다. 해리 오거스트는 영원히 새로운 지식 앞에서 흥분하는 천생의 학자고, 지식만큼은 영원히 메마르지 않는다. 무한한 시간을 들인다 해도 또다시 배워야 할 기술, 배워야 할 언어, 배워야 할 학문이 있다. 해리 오거스트는 끝없는 생을 반복하며 끝없이 배우고 또 공부한다. 불과 백여 년이 못 되는 세계이지만 여전히 그 세계의 어느 부분은 맹점으로 남아 있다. 또한 매 생애 아주 조금씩 세상이 변화하기에 그 변화가 또한 맹점을 낳는다. 이 맹점이 해리 오거스트를 움직이게 한다. 아무리 무한한 시간을 들여도 세계의 일부가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을 거라는 사실이, 그래서 여전히 배울 것이 남아있으리라는 사실이, 죽음이 없는 존재를 추동하는 삶의 동기라는 건, 정말이지 멋지지 않은가. 



(편집을 거치지 않은 옮긴이의 말 초고를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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