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본 랑베르양의 초상
2025-03-23 11:08:11
by 밥심 2025.3.4. @그믐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인 호엔베르크의 여공작 조피가 암살당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한달 뒤인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앙리 마티스는 내일 빈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갈 예정이다. 지난 세 달간 머물렀던 하숙집 이층 방의 창문 앞 의자에 앉아 방 청소를 하는 아가씨가 조금 전에 건네 준 신문을 펼쳤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 간의 전쟁이 임박했다는 메인 기사가 보였다. 오스트리아어에 익숙하지 않은 그는 글보다 사진 위주로 기사를 훑다가 낯익은 여인의 얼굴을 발견했다.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는 않은 옷차림과 머리 장식을 한 여인이 정면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마티스는 이 여자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이본 랑베르양! 바로 그 여자였다. 약 한 달 전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았는지 무작정 찾아와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던 그 여자가 사진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일층으로 뛰어 내려가 하숙집 주인을 찾았다. 주인은 도대체 무슨 일인데 호들갑이냐고 물었다. 신문을 들이대며 이 여인이 누구냐고 되물었다. 사진을 본 주인이 탄식하며 그녀가 얼마 전에 사라예보에 갔다가 황태자와 함께 암살당한 황태자비라고 대답했다. 이 사건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가 곧 전쟁을 할 판이라고 덧붙였다. 마티스는 그럴 리가 없다고 소리쳤다. 여자의 이름은 이본 랑베르로서 본인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고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은 잘 못 들었을 거라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잠시 혼란에 빠져있던 마티스는 다시 이층으로 올라와 서성거리다가 이본 랑베르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사실은 이 나라의 황태자비라는 그녀가 찾아가지 않은 초상화가 방구석에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덮어놓았던 얇고 하얀 천을 걷어내자 그림이 드러났다. 흰색과 검은색으로만 그린 생기하나 없는 여자의 휑한 눈이 그를 쳐다보고 있다. 마티스는 그녀를 본 날을 떠올렸다.
완성된 그림을 보여주자 기대감에 들떠 있던 이본 랑베르양과 그녀를 모시고 온 시종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림을 주시하던 랑베르양이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고 시종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눈알만 떼굴떼굴 굴렸다.
“믿을 수 없게도 초상화에 온통 흰색과 검은색뿐이네요. 게다가 나를 하나도 닮지 않았잖아요. 안 그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랑베르양이 묻자 시종이 네, 하고 조용히 답했다. 이젤 앞에 서있던 마티스가 뒤로 물러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랑베르양, 초상화를 의뢰할 때 뭐라고 그랬습니까. 벌써 잊으셨나요? 느끼는 대로 그려달라고 했고 난 그렇게 그렸을 뿐입니다.”
“화가들은 어쩌면 하나같이 배려심이 없을까요. 그래요, 다 좋아요. 그런데 계란형 얼굴에다가 텅 비어버린 눈에 핏기 하나 없는 피부를 가진 이 여자가 정말 나와 비슷해보이나요?”
“생김새와 똑같은 그림을 원하면 사진을 찍으세요. 그것도 싫으면 다른 화가에게 가보십시오. 빈에도 훌륭한 화가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클림트도 있고 최근 떠오르고 있는 젊은 화가 실레도 있죠.”
“클림트? 수많은 여자들에게 초상화를 남발하는 그 바람둥이? 그런데 그거 아세요? 그 여자들 중 클림트가 그려준 초상화를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요. 세레나도 아델레도 그리고 심지어 클림트가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소문이 자자한 옷 장수 에밀리 플뢰게 조차도 그가 그린 초상화를 보기 싫어한다더군요. 그런데도 왜 빈의 고귀하신 사교계 여인네들이 클림트에게 돈과 몸까지 받쳐가며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하는 줄 아세요? 클림트니까요. 에곤 실레는 또 어떻고요. 그 어린애는 미친놈이에요. 내가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했더니 누드 초상화라면 그리겠다고 하더군요. 아, 정말 아쉬워요, 몇 년 전 게르스틀이 죽지만 않았어도 우아한 초상화를 얻을 수 있었을텐데.”
마티스는 이본 랑베르양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가끔씩 고개를 끄덕였고 클림트와 실레의 이야기가 나올 때는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랑베르양은 내일 외국으로 여행을 가야해서 준비할 것이 많아 바로 가봐야 한다며 약 보름 뒤에 다시 올 테니 그때까지 초상화를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마티스는 딱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티격태격해봤자 피곤하기만 할 것 같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랑베르양은 시종과 함께 방을 떠났고 그 후 다시 오지 않았다.
랑베르양이 진짜 황태자비였다면 그토록 내면이 피폐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마티스는 궁금했다. 자신은 분명 그녀에게서 불안, 좌절, 체념과 같은 감정만을 느꼈고 그것을 화폭에 담았을 뿐이다. 창밖으로 눈을 돌리자 밖으로 나갔던 하숙집 주인이 자루 하나를 들고 다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티스는 일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이보시오, 아까 그 이야기 조금만 더 해주시오. 황태자비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집 주인은 별걸 다 물어보네 하는 듯 귀찮은 표정을 내비치더니 입을 열었다. 황태자비는 비록 귀족 집안의 여인이긴 하나 황족의 일원이 되기에는 격이 모자란 가문의 딸이라고 했다. 그로 인해 결혼하기 전부터 황가에서는 반대를 했지만 고집이 센 황태자는 밀어 붙였고 결혼하는데 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황태자비에 대한 멸시와 무시가 계속 되었고 그녀는 자괴감과 모멸감에 시달렸다. 점차 말수가 줄어들고 대외 활동이 위축되어 가는 황태자비를 걱정한 황태자는 이번 세르비아 왕국 방문에 그녀를 대동함으로써 황태자비로서의 위치를 대외적으로 굳건히 해주려했는데 그만 부부가 함께 암살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이다. 방으로 올라와 자신이 그린 초상화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마티스는 이미 꾸려놓은 짐을 풀고 화구를 꺼내 이젤 앞에 가지런히 놓았다. 다 죽어가는 그녀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될까,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한참을 눈을 감고 있던 그가 살며시 눈을 뜨고 창가에 놓여있는 화분을 보았다. 한 여름의 더위도 아랑곳 않고 반짝반짝 윤기가 나는 가느다란 유선형 잎이 쫙쫙 뻗어있는, 멀리 중국에서 가져왔다고 주인장이 자랑하던 동양난이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마티스는 나이프에 흰색을 듬뿍 찍었다. 그리고 이마에서부터 어깨까지 거침없이 선을 그어 내렸다. 계속해서 정수리, 눈썹, 가슴 그리고 등 뒤에서 날렵한 선이 뻗어 나왔다. 마티스는 그녀에게 날개라도 달아주려는 듯이 쉬지 않고 선을 그어댔다.
주) 이 글은 <마티스X스릴러> 수록작 <좀비 여인의 초상(정명섭 작)>이 선택한 마티스 그림 <이본 랑베르양의 초상>에 대한 개인적 감상을 아주 짧은 소설로 작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