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읽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by 메롱이2026-01-02 10:30:35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고양이가 림프종에 걸렸다. 원발 부위는 불명확이지만 원발암은 장 부근이었고 소장의 앞부분인 십이지장 정도로 추정된다. 


평소 만성 신부전증이 있었고 구토와 요독증으로 인한 장염은 일상이었다. 설사로 인해 2주 정도 동네 동물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항염과 소화 효소 관련 처방을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원장 몰래 연락해온 간호사였다. 그녀는 "심각해 보인다"며 2차 병원을 권했다. 


2차 병원에서 암이 간을 비롯한 신장과 다른 여러 장기에 전이가 되었음을 확인했다. 만성 신부전 상태의 신장을 가진 고양이라 항암제의 강도를 높이면 신장이 견디질 못했고 항암제의 강도를 낮추면 치료가 불가능했다. 절충안으로 스테로이드와 세포 독성 항암제, 클로람부실을 처방받았다. 


클로람부실은 1차 세계 대전 당시 머스터드 가스의 구조를 개선해서 만든 항암제였다. 대규모 살상 무기를 누군가가 치료제로 만들었고 그걸 물과 함께 삼키는 방식으로 75년째 연명을 위한 암 치료제로 사용되어왔다. 


고양이에게 남은 시간은 진단 후 72시간에서 4주 사이. 클로람부실과 스테로이드 조합은 초기에는 잘 듣지만 암세포는 4주가 지나면 내성을 갖기 시작한다. 이후 암세포는 폭증하지만 신장 문제로 더 독한 2차 항암제를 쓸 여지는 없다. 어떻게 72시간을 넘겼지만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으로 위장 출혈이 발생하면서 빈혈이 시작되었다. 사흘쯤 울었더니 나는 감자 튀김을 먹었는데도 마운자로 없이 2kg이 빠졌다. 그동안 고양이 체중은 1/3이 사라졌다.


밤에 앤드류 포터의 단편 <코요테>를 찾아 읽었다. 지속 가능하지 않은 재능을 가졌던 영화 감독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소설은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호평을 받았던 첫 영화 시사회가 끝나고 어머니와 함께 찍은 스틸 컷 묘사로 끝난다.  


"아버지는 슈트 차림으로, 어머니는 긴 이브닝 드레스 차림으로. 둘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본 내 기억 속 유일한 때다. 그들은, 그 둘은, 바람 불어오는 쪽으로 몸을 살짝 숙이고, 자신들이 아직 보지 못하는 무언가에 맞서 서로를 감싸안은 모습으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시절엔 몰랐겠지만 아버지는 이때가 그 생의 가장 절정의 순간이었다. 병원 대기실에서 약 조제를 기다렸다. 간호사가 실수로 스테로이드를 캡슐이 아닌 가루약으로 조제했다. 셀카의 시대가 끝나고 나를 피사체로 삼는 일은 없었는데 사진을 찍었다. 어쩐지 이것이 가장 절정의 순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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