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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검29. 도덕의 계보

서문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도덕관념을 해체하는 책이다. 우리가 당연시 하는 것, 상식에 전복이다.

동정은, 자기희생은, 자기부정과 같은 비이기적 가치는 무가치하다. 경멸스럽다. 이런 도덕에는 가치가 없다. 선한 사람이 퇴보를 가져오고 악한사람이 진보와 복지를 가져온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어쩌겠나? 선이라고 말하는게 삶을 더 저열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선과 악, 좋음과 나쁨

1. 설령 진리가 반그리스도교적이고 불쾌하더라도 진리를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라.

2.비이기성을 선한것으로 보는 긍지는 마땅히 꺾여야 한다. 무엇이 좋음인가는 호의를 받은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은 탁월한 사람들에 의해 비롯된다. 저급한 자가 자신의 행위를 좋은 것으로서 최상으로느끼고 평가하는것이 이전의 도덕이다. 허나 좋은 것은 고귀한 자로부터 강한 자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그들은 탁월한 존재가 되고싶어하는 의지가 있다. 더 높은 지배종족이 하층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속적이면서 지배적인 감정이 탁월함과 저열함이라는 대립의 기원이다.

오히려 이기적 비이기적이라는 대립이 인간의 양심을 짓누르고 가치판단을 몰락시킨다. 이것이 현대 유럽에 정신이상처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3.좋음의 기원에는 역사적 근거가 없을뿐더러 심리적 모순도 있다. 비이기성 행위의 공리성이 그 행위에 대한 찬양의 근원이고 그 근원은 망각되었다지만, 실은 공리성은 모든 시대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던 것이다. 망각되기는 커녕 의식에 새겨진 것이다. 이를테면 선이라는 개념 자체가 공리적이고 합목적적인것으로서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공리성에 의해 증명되었다.

4.현대 민주주의적 선입견이 기원에 대한 물음까지도 영향을 끼쳤다. 진리를 왜곡하고야 만 것이다. 현대 정신의 평민주의가 과학을 왜곡하는 꼴을 보라

5.존재하는자, 귀족계급의 지칭이다. 참된자로도 의미가 변환되어 거짓말을 잘하는 평민과 구별되는 말이 되었다. 평민을 가리키는 단어는 저열했고. 그는 단어의 기원으로부터 계층의 우월함과 저열함을 구분하려 했다. 신은 구트 고트와 어원이 비슷한게 아닌가 추리하면서. 하나의 편견이라고 생각하지만. 

6. 과거의 긍지에서 강하고 용감함이 추앙된것은 정복자가 지배계급이 되었기 때문이다. 피지배계급은 굴복하는 것을 선으로 삼았지만 이는 역시 정복자의 입장에 있어 긍지없는 추악함이다. 

성직자적 귀족주의는 자신들의 자유정신에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만들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이들의 처방은 완전한 오진이다. 금욕 단식같은 황야로의 도피가 그러하다. 사람들의 감각을 적대시하는 자기최면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오만 복수 명민함 방종 사랑 지배욕 덕을 비롯한 모든 것을 위험한 것으로 만들었다. 두 영혼을 비교하라. 기사는 자신을 패배시킨 자에게 인정하며 경의와 존경을 바치기도 하지만 성직자는 교활하고 위선적이다. 억압하는 자를 악한이로 단죄하면서 자신은 민중을 사랑한다고 자처한다. 실은 이기적이고 권력을 갖고 싶어 발버둥치는 위선자들이! 신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거짓말을 저지르며 귀족으로부터 권력을 빼앗는다. 그리고 자신이 지배자가 된다. 민주주의자도 마찬가지다. 만민은 동등하다고 지껄이면서 그들의 지지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을 뿐이다. 

7.도덕에서의 노예반란임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2000년 전부터 이미 그러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에게 전쟁은 불리하다. 따라서 그들은 가장 정신적인 복수로 승리를 거두었다.비참한 자가 선하고 가난하고 무력하며 비천한 자가 섡하다고, 고통과 가난 추함이 신의 축복이며 행복이라고 도덕적인 반란 공세를 이어왔다. 현실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8. 그들이 2000년의 승리를 이루기 위해 저지른 짓은 유례없는 숭고한 증오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사랑. 가장 깊고 숭고한 사랑을 자라나게 했다. 증오의 뿌리로부터 가장 탐욕스럽게 피어난 사랑 그것이 예수다. 

예수의 진정한 정신은 제도화된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다르다. 그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라 보았고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악에도 저항하지 말고 모든 싸움을 관두길 바란다. 그 결과 만들어지는 완전한 행복을 발견하라고 말한다. 완전한 행복은 천국이 아닌 우리 마음속에 있다. 그는 내적 실재만을 실재, 진리로 간주한다. 천국과 같은 것도 공간적인 차원이나 죽음 후에 오는 시간적인 차원이 아니다. 그는 마음의 완성을 바랬다. 총체적으로 변함이 없는 행복의 마음상태. 영원과 완성의 느낌이다.

그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다. 중상과 탄압에 저항하지 않고 분노하지도 권리를 변호하지도 않았고 죽이려는 자들을 사랑했다. 그가 인류에 남긴 것은 이런 삶의 모습이다.

바울은 반대다. 그는 증오와 환상의 논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예수를 이용해버렸다. 지배층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혀 믿지 않는 자를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교리를 만들어낸다. 이후 부활을 날조하고 피안세계로 도피처를 만들어 놓는다. 

그는 힘을 가지고 싶어했으며 영혼의 불멸과 최후의 심판같은 수단만큼 쓸만한 것도 없었다. 그는 신의 권력을 위탁받았으니 성직자의 지배에 복종하는 시대를 만들었다.

뭐, 예수의 이념도 사랑의 복음이다. 강력한 자들에 대한 원한을 사랑으로 승화시켰을 뿐.

보이지 않는가? 타락과 악취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린다는 그 잔인성이!

9.민중, 천민이 이긴시대에서 니체의 주인도덕은 시대착오적이 되어버렸다. 이 천민 도덕의 승리는 멈출 수 없을 것으로 보이며 이제와서 교회 없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라. 오히려 교회는 민중의 승리를 방해하는것이니 도움이 되는것 아닌가 묻는 가짜 자유자가 말한다. 허나 니체는 이 가짜 자유자가 외치는 민주주의 같은 것이 그리스도교에 근본을 두고 있다는 것에 진정한 자유 정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10.원한 자체를 창조하고 가치를 만들어내면서 도덕의 노예반란이 시작된다. 상상의 복수를 하는 것으로 손해를 보상하고자 하는 원한. 고귀한 도덕은 자신의 의기양양한 긍정에서 자라지만 노예도덕은 외부적인 것, 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한다. 이런 부정이야말로 창조적 행위다. 노예도덕이 발생하려면 적대적인 외부세계가 필요하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필요한 것이다. 근본적인 반작용인 셈이다. 고귀한 도덕은 스스로 행동하고 성장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기 위한 대립물을 찾을 뿐이다. 

때에 따라 고귀한 가치 평가가 잘못 파악되면서 왜곡되면 평민과 하층민 영역 자체를 거부해야 하는 것으로 오인한다. 저급함으로 지정할 부분은 그쪽이 아닌, 저급함과 범속함 저열함인데 말이다. 

고귀한 자는 행복으로부터 행동을 분리할 필요가 없지만 원한을 가진 이들은 솔직하지도 순진하지도 않고 곁눈질한다. 자신을 왜소한 존재로 만들어 생존 조건을 중시한다. 

자신의 적 재난 비행자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원한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면 마음을 파고든 벌레도 한 번에 털어버린다. 이런 고귀한 인간은 적에 대해 얼마나 외경심을 가지고 있나! 이것이야말로 사랑에 이르는 가교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적을 만든다. 경멸할 점이 없고 존경스러운 자만을 적으로 삼는다! 원한에 찬 사람은 사악한 적을 만들어내는 것과 대조적이지 않나.

11.고귀한 인간은 좋음이라는 개념을 자발적으로 생각해내고 나쁨을 만들지만 노예도덕에서는 악함을 만들어내고 좋음을 뒤에 만들어낸다. 원형이 나쁨이고 노예도덕을 구상할 때의 본래적인 행위이다. 그럼 여기서 바라보는 나쁜 자는 본래 누구인가? 고귀한 자 강력한자 아닌가. 이들은 원한에 차서 변색된 눈으로 왜곡해 그들을 악으로 단정지었다. 그들에게 방화와 능욕 고문을 자행한 뒤 의기양양하게 귀환하는 괴물이다.

황금시대 크로노스가 우주 지배 풍요롭고 근심 없는 삶

은의 시대 제우스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는 어린이같이 순진하고 우매, 무모한 자들

청동 시대 전쟁만을 일삼았다.

영웅시대 영웅들의 시대로 덕이 높았지만 전쟁이 벌어짐

철의시대 불안한 삶을 산다. 우정과 신뢰가 없다. 사악한 자를 칭송한다. 수치도 없고 거짓 맹세를 하며 불행을 보고 즐거워한다. 

인간이라는 맹수를 가축으로 길들이는 것이 문화의 의미라면 고귀한 종족은 치욕스러운 것이고 반작용과 원한은 참된 도구로 봐야할 것이다. 이러한 문화의 도구는 인류의 치욕이며 발전을 저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닌, 고통받고 있기에 인간에 혐오감을 느낀다. 

길들여진 인간을 목표이자 정점으로 자부하며 더 높은 인간으로 삼았기에 인간을 혐오한다. 범용한자는 자신을 비교적 삶에 성공한 자, 견뎌낼 수 있는 자, 삶을 긍정하는 자로 느끼기에 우리는 그러한 인간을 혐오한다. 그들은 실패했고 병들고 피로한 자들이다.

12. 그리스도교적이 되어간다는 사실에 우리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잃어버렸다. 동시에 사랑도 인간을 향한 의지도 상실한 채 피로한 모습만 남아있다. 이것은 니힐리즘이다! 인간이 무게와 존엄성을 상실했다. 다름아닌 너희가 악으로 규정한 고귀함 때문에!

13.우리는 언어의 유혹에 사로잡혀 주체라는 위조된 기형아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무언가 발생한 현상에 대해 주체가 무조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원인이 말이다. 복수심과 증오도 그렇다. 지배자에 대해 존재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지게하는 권리를 획득해버린다. 선한 인간이 되어 강함을 요구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떨떠름한 진실은 이것이 화폐위조과 같은 자기기만이자 체념이라는 것이다. 약한자의 본질이다. 그걸 도덕으로 미화했을 뿐. 거짓을 신성한 것으로 만드는 자기보존과 자기 긍정의 본능에 사로잡혀있다. 약함자체를 자유롭게 선택한 것으로 해석하고 공적으로 해석하는 자기기만은 주체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확고해진 것이다.

14.노예도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거짓말과 사탕발림이다. 약함에서 비롯되는 것을 공적이라는 식으로 거짓말을 한다. 보복하지 못하는 무력함이 선량함으로 바뀌고 겁에찬 비굴은 겸손이 된다. 증오하는 자에 대한 복종은 순종으로 바뀐다. 비겁하다! 비공격성! 그것이 인내라는 미명에 덕으로 불린다. 복수 할 수 없음이 복수하고 싶어하지 않음, 용서라고까지 불린다. 원수를 사랑하라면서 땀을 뻘뻘 흘린다.

그 비참함이 신이 내린 영예이고 시련 훈련이라 생각하며 음침한 날조를 의심조차 안한다. 그러고는 언젠가 황금이 되어 돌아오길 바라며 축복이라 부른다. 기분나쁜 공기다. 이상이 만들어지는 거짓의 악취다.

그렇게 증오와 복수를 가슴에 품고 자신들을 선하며 정의롭다 말한다. 그들이 갈망하는 것은 보복이 아닌 정의의 승리다. 그들은 불의와 신에 대한 부정을 증오한다 믿으며 신을 부정하는 자로부터 승리하려한다. 그것은 정의로운 신의 승리다. 지상에서 사랑해야할 것으로 남은 것은 사랑하는 형제들이다. 그들은 환상을 신앙 사랑 희망 속에서 신의 나라의 도래라고 부른다.

15.신의 나라. 그것은 그들이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는 나라이다. 그러면서도 신이 지배한다고 부르는 겸손을 보라. 천국에 있는 자들은 저주받는 자들의 벌을 보면서 자신의 축복을 기쁘게 여기리라. 신앙에 의해서.

16. 로마인들은 유대인을 증오의 죄를 지은 자로 간주했다. 이에 반해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해 복수심의 폭발을 기록했다. 오늘날은 유대의 승리다. 르네상스에 잠깐 로마의 승리가 올 뻔 했으나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부흥하고 프랑스 혁명과 함께 더 결정적이고 깊은 의미의 승리가 거두어졌다. 

프랑스의 고귀함은 민중의 원한 본능 아래 붕괴된다. 다수의 권리라는 원한에 찬 허위적 구호는 인간을 저하시키고 비천하게, 평균화하며 몰락시켰다. 이에 대해 소수의 특권이라는 가공할만한 반대구호가 훨씬 더 강력하게 퍼져나갔다. 나폴레옹이 나온것이다. 그에게서 고귀한 이상 자체가 육화된 문제로서 살아났다.

17.도덕이 무엇을 위해서 가치 있는가를 보자. 타인을 위함인가 나 자신을 위함인가를 명확히 하는 것이 도덕의 목적이다.

죄 양심의 가책 및 기타

1.생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억보다는 망각이다. 망각해야 특정한 것에 의식을 집중하고 건강해질 수 있다. 기억은 오히려 건강을 방해한다.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동물을 기른다는 것이야말로 역설적인 과제 아닐까.망각할 수 있기에 과거에 짓눌리지 않고 현재를 즐기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기억이란 잊지 않으려는 능동적인 의욕이고 의지의 본래적인 기억이다. 미래를 자신의 뜻대로 형성하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예측될 수 있고 규칙적이며 필연적인 존재가 되어야한다. 그래야 약속하는 인간이 그러듯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거다.

2.약속을 지키는 자유로운 의지의 소유자는 책임을 지지못하는 자보다 탁월하다. 신뢰 공포 경외를 받을만 하다. 그는 자신의 가치척도를 가지고 타인을 존경하기도 경멸하기도 한다. 약속지키는 사람은 존경하고 지키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허약한 이들은 걷어차리라. 책임이라는 특권에 대한 자랑스러운 인식은 그에게 가장 밑바닥까지 침투한 본능이다. 운명을 지배하는 이것을 양심이라 부를 것이다.

3. 양심이란 자신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것. 뒤늦게 성숙하는 후천적인 자질이다. 고통을 주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라는 낙인식의 기억술. 공포가 오래되어서도 각인되어있는 이유다. 금욕주의도 마찬가지다. 잊혀서는 안될 고정적인 것이 되려면 고통을 새겨야했다. 고문과 형벌을 통해 하지 않겠다는 인식을 기억에 새긴 것이다. 그렇게 이성에 이르렀다. 이 좋은 것을 위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렀는가!

4. 양심의 가책이란 어떻게 나왔는가. 형벌은 의지의 자유와 부자유에 어떤 상관 없이 보복으로서 발전해왔다. 정의감은 그 후에 나온거다.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었기에 처벌을 받아야한다는 것은 후발적으로 탄생된 명분이다. 과거에는 책임을 져야한다는 이유로 형벌을 받지 않았으며 그저 가해자의 분노를 풀기 위해 가해진 것이다. 손해와 고통의 등가라는 것은 채권 채무자 사이의 계약 관계에 의한 것이다. 매매 교환 통상 교역이라는 근본 형식 말이다.

5. 이 계약관계에서 기억을 신는 것이 문제가 된다. 약속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의무나 책임으로서 양심에 새기기 위해서 소유하고 있는 다른 것을 저당잡는 계약을 한다. 그것은 가족이나 신체, 자유, 생명등이 될 것이다. 채권자는 재무자에게 모욕과 고문을 가한다. 그러면서 형벌로 손해에 대한 일종의 배상이나 보상의 쾌감이 된 것이다. 일종의 지배권에 참여하는 것이다. 채무자가 경멸당하고 학대받는 것을 보는 우월감. 배상이라는 것은 처벌을 지시하고 요구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서 성립한다.

6.따라서 죄 양심 의무 의무의 신성함은 채무법에서 생겼다. 피로물든 근본이 보이지 않는가? 그 정언명령조차도 동기를 따지는 것에 이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선한 의도에서 행위를 따지는 것은 잔인함의 철학이다. 고통을 가하는 것은 진정한 축제이다. 복수를 한다는 것은 쾌감을 느끼는 데에 본질이 되지 않는다. 

기쁨을 주는 것은 잔인함이었고 사심 없는 악의가 정상적인 속성이다. 지금도 잔인함에서 가장 근본적인 기쁨을 느끼고 있다. 사형집행과 고문 이단자의 화형 없이는 축제를 상상도 못하는! 타인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는 건 유쾌한 일이다. 고통을 가하는 것은 더욱더 유쾌하다. 형벌의 축제성을 보라.

7.인류의 잔인성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던 시대가 염세주의자들의 시대보다 명량하다. 사람들은 남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을 없애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매력과 유혹을 발견했다. 허나 이것은 세련되게 승화되었다. 비극적 동정이라던가 예수에 대한 동정이 그 예다. 사람들이 고통에 격분을 느낄 때 대상이 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닌 의미 없는 고통이다. 죄지은 자에게 고통을 내리는 것은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순직한 이들에게 의미없는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고통을 제거하고 부정하는 방법이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덕행이란 것은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구도 보지 않는 재난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신과 같은 관찰자를 발명해낼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잔인함의 즐거움은 신을 기쁘게 만들어주었다. 

지상의 무대에서 형벌과 같은 고통의 축제는 사라져서는 안될 것이다.

8. 죄의식과 의무의식은 채권 채무에서 비롯되었고 인간의 원초적인 사유 자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인간이란 가치를 재고 평가하는 존재.그렇게 감정의 맹아는 권력을 측정하고 계산하여 법적 권리라는 원시적인 사회복합체로 옮겨졌다. 모든 것은 변상될 수 있다.는 명제에 도달하며 정의와 관련짓고 힘이 열등한 자들에대해 상호간에 조정을 강제하는 선한 의지로 합의되었다.

9. 사람들은 공동체 내에서 편익을 누린다. 공동체 밖의 인간의 적대적인 행위를 누가 걱정하나? 비참이란 본래 망명이나 추방이다. 공동체에 대한 서약이 파기될 경우 일어나는 것은 최대의 변상을 받아내는 것이다. 범죄자는 상실하고서야 이러한 혜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기억하게 된다. 쫓겨나서 야만적이고 무법적인 형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10. 공동체가 힘이 세질수록 위법행위는 그리 심각해지지 않는다. 채권자가 부유해져서 인간적이 된거다. 그리고서 고통을 관대하게 넘어가는 것을 정의인양 자비라고 부른다. 자비가 강자의 특권이란것에 적절하다. 법을 넘어 존재하는 방식이다.

11.반대로 원한이란 복수를 정의의 이름으로 신성화한다. 정의의 근본부터 피해감정에 발전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이처럼 반동적 감정의 명예를 회복시키려는 시도가 일어날 것이다. 증오 질투 시기 불신 숙원 복수를 원한의 정신에서 발생했다는 과학적 공정성은 이 반동적 감정보다 높은 생물학적 가치가 있다.

정의의 정신이 정복한 최후의 영역이 반동적 감정의 영역이다. 

최고의 원숙함이란 자신에게 해를 가한 자에 대해서도 공정한 태도를 지니고 객관적인 심판을 하는 것. 능동적이고 지배적인 인간은 반동적 인간보다 정의에 가깝다. 양심의 가책을 누가 찾았겠는가. 

법이 제정되고나서야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이 존재한다. 법과 불법에대해 그 자체로 이야기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삶이란 그 근본기능에서 파괴를 기능하고 그 자체로는 불법이 아니다. 법은 생명의지를 부분적으로 제약하는 것이라는걸 인정해라. 인간의 미래를 암살하고 삶의 절대적인 원리를 파괴 해체하는 것이다. 그렇게 비개인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훈련된다.

12. 도덕계보학자들은 형벌에서 복수나 위협같은 목적을 찾아내고 그것을 형벌의 출발점으로 간주한 뒤 문제가 끝난줄 안다. 허나 법의 목적이란것은 맨 마지막에 고려되어야 한다. 유용성에 그대로 목적이 있다고 믿는게 사람이지만 모든 유용성과 목적은 힘에의 의지가 더 약한 자를 지배하여 기능의 성질을 각인시켰다는 증표일 뿐이다. 발전이란 것도 목적을 향한 진보가 아니며 독립적인 채로 힘에의 의지가 제압한 결과에 불과하다. 

니체는 진보를 더 강한 인간 종족의 번영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특이체질인 지배자 혐오주의는 자신을 정신적인 것으로 위장하여 겉보기에 객관적인 과학까지 침투하고 있다. 이것은 능동성의 거세다.

뭐, 이런건 받아들여지지 않고 모든 사건의 절대적 우연성과 기계론적인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려 하지만.

13.형벌에서도 마찬가지다. 형벌은 지속적이것이 있고 유동적인 것이 있다. 형벌을 목적으로하여 고안된 것으로 생각했지만 의미에 대해서 말하자면 여러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종합적이다. 정의할 수 없는 통일체다.

14. 형벌의 효용성을 인정한 것은 사실이다.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양심의 가책이나 회한같이 정신적인 반응도 일으키는 실질적인 도구다. 라고 보았지만! 니체는 다르게 생각한다. 형벌은 사람을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들고 냉혹하게, 저항력을 강하게 한다. 양심의 가책이란 수형자들에게 극히 드물게 생긴다. 오히려 죄책감의 발달을 저지했다. 재판관들도 범죄행위를 그 자체로서 비난하거나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형벌이 머리 위에 떨어져도 범죄자는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저 끔찍한 자연사건에 불과하다.

15.선과 악은 인간의 상상력에 비롯되었으며 양심의 가책이란 기쁨에 대립되는 것. 슬픔이다. 범죄자들도 어떤 것이 예상치 못하게 잘 안되었다고 느낀 것이지 그런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라고 느끼지 않는다. 숙명론적인 태도로 형벌을 받은 것이다. 형벌의 효과는 인간을 영리하게 만들고 기억을 연장시키는 것이다. 형벌은 인간을 길들이기는 하지만 더 선한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교활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겠다.

16.양심의 가책은 변화의 압력에 걸린 병이다. 그 변화란 인간이 사회적인 평화의 벽에 갇혀 있음을 깨달았을 때 일어난 변화다. 간단한 일조차 버겁게 느껴진 바다거북의 육지생활과도 같은 거다. 통제본능을 상실한 상황에서 빈약한 기관인 의식에 의존하게 되었고 짓눌리는 불쾌감, 비참함이 도래한다.

그릭고 이 본능들은 내면을 향하며 만족을 추구했다. 영혼이라고까지 부르면서!

양심의 가책이란 거칠고 자유롭고 방황하는 인간의 적의 잔인함 박해가 내면화된 것이다. 소유자를 부수는 것! 스스로를 고문대에 올리는 자기학대다. 이건 질병이다. 폭력으로부터 떨어진 인간의 결과다. 새로운 생존 조건에 빠졌을 때 느껴야하는 쾌감과 공포의 결과다. 인간이란 존재는 목표가 아닌, 하나의 길, 우발적인 사건과 다리 등 세계목적이 없는 주사위 놀이에 있다.

17. 국가는 가공할 폭정으로서 출현하여 작업을 계속 진행한 결과 형태를 이루었다. 말이 국가지 국민에게 발톱을 들이대는 전투조직이다. 이런 국가의 지배자이자 명령하는 폭군에게 계약으로 비롯되었다는 몽상은 가당치도 않다. 이 본능적 예술가들에게는 계약이 의미 없다. 형식을 창조하고 새기는 무서운 이기주의가 있다. 어머니가 아이에 의해 정당화되듯이 자신의 작품에 의해 모든 행위가 정당화 된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억압으로부터 양심의 가책이라는 추악한 식물이 발아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발산되고 폭발하는 이 자유의 본능이!

18. 추악하고 고통스럽지만 경시할 필요는 없다. 능동적인 양심의 가책이야말로 이상적이고 공상적인 사건의 모태로 아름다움과 긍정을 출현시켰다. 스스로에게 추하다고 하는, 모순된 것을 의식하는 것으로부터 아름다움이 만들어진다. 아름다움의 암시가 되었다. 그 덕에 희생하는 자가 느끼는 쾌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잔인함이었다. 양심의 가책이야말로, 자신의 학대의지야말로 비이기적인 것의 기원이 되었다.

19.양심은 임신과 같은 종류의 병이다. 그 결과 내면성에 입각한 서양문화가 태동했다.

종족은 조상의 희생과 업적의 덕택에 존속되었고 이 업적에 대해 갚을 확신이 있다. 조상은 복종을 만들었다. 법령과 명령으로. 조상에 빚을 지고 있다는 의식은 조상의 힘에 대한 공포, 종족이 강해질수록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신으로까지 변형된다.공포의 기원일 것이다. 결국 고귀한 종족은 자신에게 나타난 속성, 즉 고귀한 속성을 이자까지 붙여서 조상 내지는 신들의 귀족화와 고귀화까지 이루어내었다.

20. 신성에 대한 채무는 혈연의 가문 공동체가 몰락한 이후에도 남아있다. 세습귀족과 마찬가지로 종족신과 부족신 등 빚의 부담과 상환의 열망이 유산으로 이어져왔다. 지상에서 신 개념과 감정이 성장하며 채무도 성장한다. 인종간의 투쟁으로 세계제국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보편적인 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으며 전제정치는 일신교의 추종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반대였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부채의식도 쇠퇴했을 것인데. 무신론의 완전한 승리는 이러한 부채의식의 해방으로부터 이루어질 것이다. 부채의식도 죄의식도 없는. 

21.양심의 가책을 신과 연루시키는 도덕화는 존재한다. 빚과 의무라는 개념의 도덕화와 함께 빚을 변제할 가능성도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이런 채무는 누구를 향하는가? 채무자는 빚을 상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속죄는 불가능하다는 사상이 싹튼다. 인간의 1원인인 인류의 시조에게 악의 원리가 투입된다. 선악과와같이 자연의 악마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이 인간의 죄 때문에 희생한다. 채권자가 자신의 채무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믿어야할까?

22.내면으로 향해 칩거하게 된 동물적 인간은 국가 안에 감금되어 자학하는 잔인성이 생겨난다. 남에게 고통을 분출할 자연스러운 출구가 막혀 양심의 가책을 개발했다. 신에 대한 죄라는 생각이 고문의 도구가 되었고 신을 떨쳐버릴 수 없는 궁극적 대립물로 보게 된다. 정신적인 잔인성을 가진 의지착란은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의지다. 자신이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떠한 벌도 자신이 죄를 보상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의지다.신성한 신을 세워 자신의 절대적 무가치함을 확인하려는 의지다. 이 고문과 부조리에 얼마나 사랑의 외침이 울렸는지 안다면 견딜 수 없어 고개를 돌리고자 할 것이다. 세상이 정신병원이다!

23.그리스 신은 고귀하고 자주적인 인간의 모습이 있다. 자해하지 않았고 양심의 가책을 멀리했다. 신들은 재앙의 원인으로 어리석음 무분별을 인정했지 그것 자체가 죄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이 신들은 더 고귀한 일을 했다. 죄를 떠맡은 것이다. 신이 기만했다는 식으로 정당화에도 이용된 것이다.

24. 니체의 이상을 세우기 위해서는 현대의 성전을 부숴야한다. 이 시도에는 당연히 적을 만들게된다. 선량한 이들과 적대한다. 준엄하고 고매하게 스스로를 대하는지 드러내는 것보다 더 사람들을 모욕하며 환멸을 느끼게 하는게 있을까? 허나 위대한 건강을 위해서는 숭고한 악의도 필요하고 위대한 건강이 필요하다. 훨씬 강한 시대가 오면 위대한 사랑과 경멸의 구원자가 찾아올 것이다. 현실에 뿌리내린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다. 안티크리스트이자 반허무주의자. 신과무를 초극한 그는 온다.

25.이것은 무신론자인 초인, 미래를 짊어질 더 강한자가 할 일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1.철학자에게 금욕은 높은 정신성을 성립시킬 직감이나 본능이다. 여성에게는 매력을 증진시킬 장식물이다. 도태인간들에게는 선한인간으로 보이게 하려는 핑계거리이고 이들은 성스러움을 가장한다. 성직자들에게는 권력을 위한 도구. 성자에게는 영예에 대한 욕망이자 광기의 형식이다. 공허에 대한 공포로 말미암아 인간의 의지는 목표를 필요로한다.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신이나 열반같은 무를 의욕하는 것이다.

2.금욕주의적 이상이란? 정결과 관능의 대립으로 인한 삶의 불균형과 모순이야말로 사람들을 살도록 유혹한다. 한편 도태인간들이 자신의 대립물만을 보면서 정결을 숭배하는 것은 비극적이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정결을 숭상하나? 여기에 무엇을 위함이 없다. 바그너에게는 삶을 살도록하는, 정결과 관능 두 가치의 찬양에 의한 삶의 의지가 있지만 돼지들에게는 없다!

3.바그너의 정결주의에 홀린 바보들은 어떤가? 파르시팔이라는 바그너의 작품에는 금욕주의적임 바보 주인공이 나온다. 바그너는 말년에 이런 금욕주의적 이상에 빠져서는 그리스도교가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는 한때 신은 인간의 상상물이며 사랑과 이성등 자신에게 존재하는 위대함을 투영시킨 존재라고 말했었는데 말이다. 

4. 예술가란 자신의 작품을 위한 토양에 불과하며 작품을 즐기기 위해서는 잊어버려야하는 존재이다. 예술가를 작품과 동일한 것인양 혼동하지 마라. 예술가가 진정으로 그런 존재였다면 그런 것을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그너도 아마 현실적인 것에 손을 뻗었고 그러한 시도는 무기력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니체같은 친구를 잃었다고 말한다. 그래도 그는 천성적으로 금욕주의와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5. 예술가에게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종교기관이나 철학자의 권위에 예속되어 그 요구에 따라 금욕주의적 이상을 표현할 뿐이지 천성적으로 이러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성직자는 진지하게 추구하지만 예술가는 아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 역시 금욕주의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조건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바그너도 마찬가지.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사물의 본질을 보여주기에 음악의 가치도 높다고 말했으므로 바그너도 그 엄청난 가치 상승에 의해 금욕주의적 이상을 설파하게 된 것이다. 

3~5가 다 이런 이야기 별로 안중요

6. 칸트는 미에 대한 인식이 욕망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니체는 인식과 욕망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예술은 성적 욕망의 승화이다. 미의 영역에서 관람자는 개인적인 사실로 존재하고 개인적 경험을 가진다. 따라서 체험과 욕망 경이와 황홀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피그말리온만 보아도 예술의 동력은 성욕이다. 그럼에도 칸트가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여성을 무심하게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비웃어주어도 좋다. 쇼펜하우어는 성적인 관심을 억제하고 의지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미적 상태의 장점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 의지로부터 구원은, 욕망으로부터의 구원은 심미적 관조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사상에 근거한다. 그에게도 미는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기에,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관심을 충족시키기에 우리를 즐겁게 한다고.

철학자가 금욕주의적 이상을 신봉한다면 그것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다. 

7.고통이란 말을 들었다고 해서 우울해지지마라. 고통을 상쇄시킬 것들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성욕을 적으로 간주하여 좋은기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지 못했더라면 염세주의자가 되었겠지. 분노가 그를 세상에 생존하도록 유혹했다.

관능에 적의를 보이는 철학자들에게 있어 금욕주의는 성직자와 같은 이상적인 덕이 아니라 철학자로 생존할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에게 관능에대한 적개심이나 금욕에 대한 호의적인 편견이 없다면 사이비다. 

결혼한 철학자란 희극에 지나지 않는다.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철학자에게 있어 자신의 생존만을 긍정하는 태도이다. 세상이 망하더라도 철학은 살고 자신도 살아남으리라하는 소망을 긍정하는 것이다.

8.철학자는 성자가 아닌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다. 그들의 금욕은 피안과 미래 사후까지 바라보고 있다. 생 위로 날아다니는 동물의 유쾌한 금욕주의다. 청빈 겸손 정결. 이것이 그들에게 발견되겠지만 그들이 이룩한 덕이 아니다. 덕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가장 잘 생존하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기 위해 필요한 조건에 불과하다. 이들은 정신이 결여되어 있으면서도 있는체 연기한다. 잡다한 지식만 있지 체화된 정신, 신념이 없다. 그런 이들에게 사막으로 향하는 의지를 몸과 마음으로 견지하는건 어려운 일이다.

사막이란 독립심있는 정신이 물러나 고독하게 머물고 있는 곳. 지극히 고독한 곳이다. 정적과 냉정함 고귀함과 아울러 과거의 것을 흠모한다. 큰소리로 말하지 않고서도 말할 수 있는 것을 흠모한다. 

선동가의 음색을 지닌 정신이 있다. 광신자들이다. 확신을 가지고 제약된 관점으로 대중에게 감명을 주는 광인들. 인류는 근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저들의 몸짓을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 선동가들은 말로 사유하는 자이지 사상가로서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자기 신념이 없으며 여유없이 오늘 말한다. 

자기 확신을 가진 철학자는 현란하고 요란한 것을 피하고 너무 밝은 대낮을 싫어한다.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진리에 은밀한 사랑을 보내어 스스로를 덜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통해 소유당하는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 이것은 자족과 소박함을 지향하는 훌륭한 의지가 아니다. 그는 한가지 일만을 염두에 두면서 한 가지를 위해 전력을 다한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 고난을 겪는다. 

철학자들의 정결은 금욕주의적 가책이나 관능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되는게 아니다. 중대한 것을 일으키기 위해 활력을 지키는 모성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관능은 소멸되는것이 아니라 변형될 뿐이다.

9.금욕이 정신성의 성장에 유리한 조건에 속한다. 철학과도 유대가 높다는걸 인정했다. 철학자에게는 스스로를 의식하게 되는데, 금단을 추구하는 욕망의 화신이라며 스스로를 경계토록 만들었다.

현대인은 무신론과 교만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신에 대하는 태도에서 교만하게 걸리지 않는다는 태도로 나타나고, 스스로에게도 유쾌하게 해부하려드니 말이다. 원죄에서 원덕이 생겨났다. 가혹함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과거에는 온순함이 부끄러웠다. 우리가 오늘날 얻은 약간의 이성과 자유의 감정은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얻어진 것이다.

10.명상적 삶의 유래. 야만적인 시대에는 개인이 힘을 느낄 경우 염세적인 판단으로 살인과 사냥등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실행에 옮긴다. 그런 이가 좀 약해지면 말과 생각으로 표출되고 예언가처럼 미신을 지어내 적들을 비웃는다. 근데 이게 자신의 상태를 반영하여 공포와 피로의 증대, 향락에 대한 경멸 등을 반영하고 악의적인 판단이 지배한다. 주술사나 사제 사상가 이런 놈들은 행동적인게 아니었기에 쫓아내고 싶었겠지만 미지의 힘을 갖고 있다고 믿어 쫓아낼 수 없었다. 두려움만큼 경멸을 받고 약하면서 두려운, 수치스러운 기원이 명상적 종족의 정체다.

철학적 정신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성직자 마술사 예언가 등의 종교인으로 자신을 가장해야했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그런 철학자가 취한 존재의 전제로 기능한다. 또한 믿어야했다. 이런 금욕주의가 없었으면 세상에 존재조차 못했으리라. 자, 이제 철학자는 종교인의 옷을 벗고 나올만큼 의지의 자유가 존재하는가?

11.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인가. 그 진지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우리의 삶을 피안과 같은 다른 존재와 관련짓는다. 

우리의 삶이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한 다른 종류에 대립하고 배제한다. 그럼 금욕주의적 삶은 생존을 위한 다리로 간주된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모든 계층에서 자라난다. 성직자들은 독신으로 사는 것을 본능적으로 택한다. 이들에겐 일종의 본능이다. 그들은 힘의 원천을 봉쇄하려는 시도를 한다. 자신들이 지배자가 되려는 삶의 가장 깊고 강한 근본적인 조건을 만든다. 미나 기쁨은 질시와 악의에 찬 눈총을 보내고 희생 자학 자기희생은 호의적으로 추구한다. 금욕주의적 이상에서 십자가 같은 환희와 고통의 이미지가 미화된다. 고통 속에서 자신을 즐긴다.

12.모순과 반자연을 향한 의지에 철학이 시작되었다고 가정한다면 그 의지는 실재적인 것으로 자의를 표출할 것이다. 삶의 본능이 무조건적인 진리라 보는 것에서 오류를 찾아낸다. 육체를 환영으로 고통과 다수성도 주관과 객관이라는 개념도 격하시켜 오류라고만 하며 자신의 자아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실재성조차 부정하리라. 이건 이성에 대한 잔인한 폭력이자 승리이다. 이성으로부터 근거한 금욕주의적 경멸과 조소가 이성을 진리로부터 쫓아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근데 이렇게 다르게 보려고 한다는 것은 자신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훈련이며 준비이다. 객관성은 지성의 찬반을 통제하면서 의견을 만들어내는 능력으로 이해해야한다. 

하나의 눈만을, 치우쳐서는 안되는 눈을 가질것을 요구하는 개념적 허구를 주의하라. 오직 관점적인 인식만이 존재한다. 하나의 사태에 더 많은 정념과 눈을 동원할수록 그 실체가 보일 것이다. 의지와 정념을 배제하고 보는 객관성은 지성의 거세이다. 

13.삶에 반하는 삶을 주창하는 금욕주의자의 자기모순은 생리학적으로도 우매하다. 단지 외관상의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금욕은 퇴화하는 삶의 방어본능과 구원본능에서 생겨난 것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삶을 보존하기 위한 기교에 불과하다. 그들은 피안을 갈망한다는 점에서 삶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 삶에의 부정도 아니다. 삶을 보존하고자 하는 힘에의 의지에 속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삶에 대해서 말하는 부정은 더 충만한 긍정을 드러낸다. 이 파괴의 대가가 자신에게 상처입히더라도 상처가 그대를 살게 하는 식으로 강요한다.

그러니 금욕주의자가 가장 병든 존재라고 말했지만 나는 반대한다. 현대 과학에서 도파민이 발견되었거든, 중추신경계의 피로도 그렇고. 금욕은 확실히 두뇌의 창조적 활동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과학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자신의 창작욕이 성욕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면 성욕쯤은 참아도 되지 않을까?

14. 이런 병적인 상태가 정상적으로 간주될수록 정상인을 존중해야한다. 강한자에 대한 공포가 아닌 인간에 대한 혐오와 동정(인간을 나약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인간 혐오와 결부되어 있다.)이 재앙으로 이어진다. 그것들은 허무주의를 낳게 될 것이다. 약한 자들이야말로 인간 삶의 토대를 허물어버린다. 이들은 은밀하게 잡초처럼 자라나고 잘난 자들의 승리에 대한해 음모의 그물을 짜고 있다. 자신들만이 선한 자들이고 정의로운 자라고 말하면서 교수형집행인이 되려고 갈망한다. 정의라는 말을 타액처럼 입 속에 담고 있으면서 침을 뱉으려 준비한다. 허영심많은 저들은 망가진 감성을 심정의 순수성으로 포장해서 도덕적인 자위행위를 한다. 

그들은 어느날 행복조차도 부끄러운 일이라 떠들 것이다. 세상에 너무나도 많은 비참함이 존재한다. 라고. 행복을 불행이라고 울부짖는 것만큼 불행한 오해는 없을 것이다.

혐오와 동정이 끔찍한 전염병이다.

동정하지마! 그건 경멸이야!

15.이들은 병든 자들이고 성직자는 병든 의사와 간호사다.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지배가 이루어지는 곳이 그 왕국이다. 성직자들은 지배하는 것으로 기쁨을 느낀다. 증오하는 것보다 경멸하는 것을 더 잘하는 녀석들. 이 의사들은 죄책감을 주고 그 고통을 진정시키면서 독을 뿌린다. 원한을 내면에 축적시키고 그 방향을 전환하는게 성직자다. 감정을 배출시키는 것이야말로 고통을 완화시키는 방법이고 이것이 고통을 누그러뜨리는 마취제다. 고통을 마비시키려는 갈망만이 원한과 복수심의 생리적 원인인 것이다. 

불쾌함을 느끼는 것에서 외부에 책임을 제기하는 것이 참된 불쾌함의 원인을 은폐한다. 

성직자란 사람들 내면에 죄책감을 주고 그 원한을 이용해 원하는 방향으로 분출시키는 녀석들.

16. 죄성이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사실에 대한 불쾌함의 해석이다. 책임이나 죄를 느낀다고 해서 느끼는대로 옳다는 것이 증명된건 아니잖나. 건강하다고 느끼기에 건강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마녀사냥도 이에 마찬가지. 자신이 마녀라고 믿더라도 마녀는 없었는데.

17.성직자들은 고통의 원인이나 병에 싸우는게 아니라 고통과 불쾌감만 줄여줄 뿐이다. 아편같네. 위로하는 자라는 과제를 얼마나 창의적으로 수행하는지 보고 경탄하라.

사람들이 느끼는 생리적 장애의 감정은 현실의 어려움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로부터 불쾌감과의 투쟁이 일어난다.

첫째로 사람들은 생명력을 최저점으로 끌어내려 자신들을 지배하는 불쾌감과 투쟁한다. 탈아, 신성화와 같이 일종의 겨울잠을 취한다. 의욕도 소망도 가지지 말라는 것처럼. 그런 것으로 생리적 우울증으로부터는 해방된다. 근데 이게 정신병으로 이르는 방법이다. 그들은 선과 악을 넘어선 것이 구원이자 진리라고 말하며 표현될 수 없는 비밀로 간주한다. 그들에게 있어 고통의 부재가 최고의 선이다. 따라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18. 위와같은 최면술로 고통을 약화시키는 것보다 흔히 보이는 방법은 기계적 활동이다. 이는 반복되는 하나의 활동만 의식에 집어넣어 고통이 설 여지가 없게 되도록 만든다. 생각없이 행해지는 복종과 같이 자기망각과 비인격성의 훈련이 행해진다. 그들에게 일상적인 작은 기쁨을 처방한다. 이웃사랑과 같이 삶을 긍정하는 충동. 힘에의 의지를 자극하는 치료제다. 무리를 형성해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와 사적인 불쾌감을 극복한다. 성직자는 이를 장려하고 약한자는 뭉치는데서 쾌감을 느낀다. 강자들은 주인의 의지에 의해 조직에 자신이 도발당한다고 느끼는 것과 반대로 말이다.

19. 금욕주의자 성직자들은 활력의 약화, 기계적활동, 이웃 사랑의 기쁨, 무리조직, 공동체의 권력감정 일깨우기 등 불쾌감과의 투쟁같은 순진한 수단을 동원했다. 이와 달리 순진하지 않은 수단도 있는데 그것은 무절제한 감정 상태를 이용한다. 무엇을 통해서 무절제의 감정 상태를 조성하는가? 열광을 이용했다. 그 도덕주의적인 기만을 보라. 그 속에 깃들어있는 순진함은 우리를 구토하게 만든다. 자신을 이상주의라고 부르면서 선량한 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참으로 정직한 거짓말이 그들에게는 너무 강력하다. 스스로를 선량하다고 생각하는 자만큼 거짓말을 터무니없이 하는 자도 없을 것이다. 충실하고 고결하게 퍼부어지는 거짓말. 인간에 대한 진실을 견뎌낼 수 있나? 선량해서 진실을 불태우는 자들이다.

20. 성직자들은 종교적 해석이나 정당화를 통해 전체를 거리낌 없이 이용해왔다. 잠깐 비참함과 고통을 쫓아내는 것은 언젠가 대가를 치르게 된다. 실제로 병자는 더욱더 병들고 만다. 그는 죄책감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죄에서 찾아야하고 고통을 벌로 이해해야 했다. 고통을 왜곡되게 해석하려는 의지가 삶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병자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결국 고통에 불평하지 않게 되었고 고통을 갈망한다. 모든 것이 이용되었고 금욕주의적 이상이 승리하는데 사용된다.

21. 죄책감을 조장하는 치료법에 효과를 보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인간을 개선했다는 말에 사용한다면 이의는 없지만 그 개선이란것이 약화되었다. 거세되었다의 의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병든자를 더 병들게 만들었다!

22.성직자는 영혼의 파괴를 일삼았다. 결과적으로 예술과 문학의 취미조차 파괴했다. 그들은 성서를 들고서는 그리스인의 고전이 필요하지 않다고도 한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좋은 취미를 길러주지도 않고 좋은 예법에 대한 원수라고도 할 수 있다. 

23.금욕주의적 이상은 건강과 취미를 망치고 모든 것들을 망쳤다. 이러한 목적은 무엇인가? 금욕주의적 이상이라는 유일한 해석 기준에 따라 해석한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믿으며 모든 힘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고 믿는다. 이에 대립되는 것은? 다른 유일한 목표는? 

현대 학문이 그렇다. 자신만을 믿으며 자신에 대한 용기와 자기 자신이 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신도 피안도 없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

24.실증주의자들은 금욕주의적 이상의 적대자가 된다. 인식하는 자들은 모든 종류의 신앙인을 믿을 수 없다. 신앙이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는다. 입증하는걸 부정하는게 행복하게 되는 방법이니까. 하지만 진리가 아닌 기만일 가능성이 크다. 신앙을 부정하는 영웅적인 지적 양심의 소유자들은 금욕주의적 이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믿지만 어떤식으로든 진리라는 신앙에 구속되어 있긴 하다. 자유정신에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허용된다. 라는 자유와 해방에는 낯설어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진리를 향한 무조건적인 의지야말로 금욕주의적 이상에 대한 신앙이다.

이는 진리 자체를 의문시하는게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을 부정하면 진리의 가치에 대한 문제가 대두된다. 진리의 가치를 한번 문제삼아보자.

25.과학을 금욕주의적 이상의 천적으로 가져오지 마라. 과학은 자립적이지 않다. 가치를 창조하는 힘에 봉사함으로써 과학은 믿을 수 있게 된다. 그 자체로는 가치를 찾아내지 못한다. 사실 둘 다 진리에 뿌리를 둔다는 점에서 동맹관계에 있다. 

차라리 거짓을 신성시하고 기만에의 의지를 양심으로 가지는 예술이야말로 금욕주의적 이상에 대립한다. 과학은 금욕주의적 이상을 정복한게 아니라 더 강력하게 만들었다. 니체는 아무래도 본능에 의한 진리를 추구하는 모양인가. 혹은 무진리주의.

신학적 천문학의 패배가 인간의 존재를 더욱 임의적이고 쓸모없게 만든 것 아닐까? 인간의 왜소화를 만들어내었다고 보는군. 인간의 존엄성과 유일성이 사라지고 동물로 만들었다. 인간 자신에 품은 존경심까지 기묘한 자만에 불과하다고 설득하려한다.

그의 목표는 인간 자체의 초인화. 힘에의 의지를 쟁탈하는 것. 정신병을 허물고 진실을 세우는 것. 허나 과학도 신학도 인간의 왜소화를 만들어내는 것에 동참하고 있다.

심지어 불가지론자들은 신비한 것을 이제 의문부호 자체로 경배한다.

인식하는 모든 것이 피안과 신을 채워줄 수 없어 공포를 불러 일으킬 때 그 책임을 소망이 아닌 인식에서 찾아버린다. 인식은 존재하지 않으니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같은 금욕주의적 이상의 승리이다.

26.역사 기술에서 가장 고귀한 특징은 목적론을 거부하는 것이다.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재판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긍정도 부정도 않고 기술할 뿐이다. 금욕을 넘어 허무주의적이기까지 하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는다. 니체는 이 관조적인 것을 부정하고 차라리 반역사적인것을 추구한다. 그 자신의 객관적인 것이 어디에 결함이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인생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위선자다. 차라리 금욕주의적 이상이 정직한 한에서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니체는 지혜에 휘말려들어 객관적으로 관조하는 지친자들을 싫어한다. 근데 역사는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이제 주관적으로 독자들이 해석하면 되는 거 아닌가? 무엇이 잘못이라는거지? 어떤 방향성을 역사학자가 준다면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작업을 한번 더 거쳐야하지 않나. 차라리 저런 목적론을 거부한 태도가 객관적이다.

27. 금욕주의적 이상의 의미. 니체는 진리를 향한 의지를 제외하고는 금욕주의적 이상이 필요 없다고 본다. 따라서 무조건적으로 성실한 무신론은 금욕주의의 발전 국면 중 하나이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향한 훈련은 결국 신에 대한 신앙이란 허위를 금한다.

차라리 그리스도교의 신에 대해 승리를 거둔 것은 그 자신이다. 교의로서의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도덕에 몰락했다. 바로, 가장 강력한 결론. 진리를 향한 모든 의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우리 안에 진리를 향한 의지 자체가 문제로 의식되는 것이 의미가 없다면 우리의 존재 전체도 의미가 없어진다.

진리를 향한 의지가 자신을 의식할때 도덕은 몰락한다.

28. 인간이라는 동물에는 무엇을 위해 생존하는가에 대한 답이 없다. 목적성의 결여는 무서운 공허와도 같다. 인간은 자신을 정당화하고 긍정하는 법을 모른 채 삶의 의미라는 문제로 괴로워했다. 근본적인 고통부터가 무엇을 위해서 괴로워하는가? 라는 답이 결여되어있는 것이다. 고통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의미와 목적이 없다. 이제는 그 무의미성이 저주가된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필요악이었을지도 모른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죄라는 관점에서 고통을 해석해주었다. 이제 인간은 무엇을 의식할 수 있다. 의지 자체가 구원된 것이다. 이는 무를 위한 의지이지만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이를 원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야기하는 바는 선악의 저편과 다를 게 없다.

노예 도덕을 부수고 명료한 세상을 만들어보자.

니체가 말하는 걸 그대로 행할 건 없다고 본다.


그의 의지를 교훈삼아서 개개인이 자신의 도덕을 관철해야한다는 점이 그의 요점.



후반부에 나온 금욕에 대한 부정이 팽배해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도파민을 억제해야 일에 집중할 수 있거든.

다른 뜻이 없다면 그의 말대로 마음껏 정욕을 발산하며 살아도 되는데 자위로 인한 도파민, 중추신경계의 무리... 이런거 어쩔건데?


1800년대 중후반에는 그런거 몰랐으니 니체는 종교적인 이유만으로 금욕을 행하는 것에 비판했지만 이 정보를 알고서도 같은 태도를 취하진 않았을거다.


나 역시도 본인의 의지가 아닌 종교적인 관습에 눌려서 금욕을 행하는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본다.


굳이 금욕을 하지 말라는 건 아니고, 하고 싶으면 해도 되는거지.

안 할 이유같은건 없다.


하지만 무언가를 이루겠다면 금욕을 해야하지 않을까.

내가 아인슈타인으로 태어난게 아니잖아?

도덕의 계보
도덕의 계보
논검28. 거인의 노트

기록학자

기록을 생산 분류 기술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학문

왜 기록하는가? 나를 성장시킨다. 내 삶의 주도권을 갖게 한다.

사람은 바뀐다. 6~7년의 막대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성장 메커니즘 만들기

목표가 무엇인가? 도덕적 세계정복

일상이 어떤가? 7시 기상 12시 취침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취미는 만화와 미궁게임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는가? 자위를 끊고 규칙적인 운동을 한다. 명상도.

의식적으로 연습해라.

생각과 경험을 기록하고, 난 하고 있고.

기록을 보고 다른 방식 생각하고 시도. 이또한 하고 있고

그것을 다시 기록. 역시 하고 있다.

뇌의 용량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기록해라.

기록하고 되뇌이고 말해라. 그래야 기억에 남는다.

썼던거 다시보는거 하자.

자기화의 과정을 거쳐라. 자신이 볼것만 기억해서 맞춤형 기록을 하면 된다.

자기식으로 받아들이고 기록하고 다시 꺼내어내기.

생각하는 힘 기르는 법

1.반복적으로 되뇌기. 복기와도 같다. 후루요니 같은거. 그거였구나.

2.생각을 이어가기. 분류해서 주제 나누고 구체적으로 생각. 순서대로 생각.

3.글로 쓰기

집중하는 일상 정돈법

1.공간 구분. 공부할 곳에는 공부만.

2.집중시간 휴식시간 구분. 40분 집중이 사람의 한계다. 집중하고 쉬는거 해라.

3.삶의 중심이되는 일을 계속 생각해라. 자투리 시간에도 내 본업을 생각.

나의 진짜 욕망은?

1.내가 바라는 것을 적어라. 나는 나의 신념을 대행해줄 사람을 원한다. 그게 배우자가 되었든 충성할 사람이 되었든 이 마음의 짐을 누군가가 대신 해주고 난 자유를 누렸으면 한다. 의무로부터의 해방을 바라고 있다. 그것이 구원이다. 하지만 가능할까?

2.가면판단. 사람은 자신의 역할에 몰두한다. 근데 그 역할이 자신이 만든 것인지 사회가 만든 것인지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남들이 되길 바라는 내가 되기 위한 것인지. 내가 진짜 바라는 게 무엇인지. 올바르게 봐라. 한계를 넘어선 자유를 위해 기록을 해라.

일이 즐겁지 않을 때

1.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를 기록해봐라. 세계정복의 첫걸음. 작품의 완성을 위해.

2.작은 욕망을 실행하라. 억눌린 욕망을 분출해라. 먹고싶은거 먹고 보고 싶은거 봐라. 그래도 금딸은 해야겠지만

3.내가 지향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것등을 구체적인 행위와 연결하라. 

4.병행전략을 써라. 이건 작가가 거짓말했네. 사실 책임의 소지를 따지지 않고 말하자면 하던거 때려치우고 하고싶은 일을 해야지.

미래가 불안할 때

과거의 경험을 기록해라. 그것이 무의식으로 남아 네 발을 걸고 넘어지는 것이다. 무엇이 그 무의식의 근원인지 기록으로 파악할 수 있다.

부정적인 무의식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꿀 권리는 나에게 있다.

인생의 본질은 자유를 찾는 과정이다. 

자유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한계를 두지 마라.

욕망을 타인과 나누어라.

나를 알아가는 것.

자기 역사를 써보기.

기록 잘알 특) 요약 잘한다. 평가와 선별을 거쳐 자기화한다. 기록을 통해 집중한다.

핵심만 남기고 다 버려라.

이해가 안된거면 네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화 한 것만 이해할 수 있다.

책을 자기화하는 방법?

책 전부 다 이해하려고 하지말고 자기화를 통해 얻고 싶은 지식만 메모. 나만의 논리로. 오독 두려워하지 말고.

기록하고 반복하고 지속하라.

기록을 통해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만들어낸다.

어려운책은 조금씩 읽어라.

대화도 지혜가 된다.

상대의 말을 이해하고 내 말을 얹기. 상대도 거기에 말을 얹는 것이 새로운 지평을 연다.

대화의 맥락을 잡아라. 어느 방향성으로 향하는지.

생각을 기록해라.

고민될때, 생각에 논리를 잡고 고민에 관련된 생각만 뽑아 분류 기록하면 문제 해결.

천재는 기록으로 이루어진다.

아이디어를 기록해야 닥친 문제의 핵심을 꿰뚫고 반영할 수 있다.

작은 이야기, 감정, 감각을 기록해보아라.

그것이 콘텐츠가 된다.

현실의 일을 요약하고 분류해보아라. 그럼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거인의 노트 - 인생에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거인의 노트 - 인생에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논검27. 브레이킹 배드


넷플에서 엘 카미노와 베러 콜 사울까지 보게 만든 명작.

주인공인 월터 화이트는 애정 결핍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

정에 비이성적일 정도로 휘둘리는게 나약한 자존감을 드러낸다.

제시에게 약하고 가족에게 휘둘린다.

처제의 남편이 뭐라고?

남이다.

죽어봤자 응 죽었네 하고 넘겨도 될 만한 인물을 이웃처럼 지냈다고 가족으로까지 여기다니 한심하기 짝이없다.

제시도 마찬가지.

같이 약 좀 만들었을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한 때 제자였다고 하지만 불량학생이었고 좋은 인연으로 시작한 것도 아냐.

개처럼 충성해준다는 점에서 고맙긴 하지만 그런 인물에게 존중심이 생기나?

고생 조금 같이 했다고 버릴 사람을 버리지 못한 무능함.

매몰 비용에 발을 빼지 못하는 투자자의 모습 같다.

자신을 인정해줄 타인이 그렇게 필요했는가.

이 사람의 근본적인 욕구는 돈보다는 가족과 주변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인드다.

헛된 자존심이라 해도 좋다.

거스와 대적해 생고생을 사서 하게 된 것도 다 이놈의 자존심 때문이다.

애초에 충성같은거 못하는 인물이야.

대등한 관계조차도 인정하지 못해.

오로지 아랫사람만을 받아들일 수 있지.

월터의 완고한 고집만 아니었더라면 작중 주연급의 인물들은 행복한 삶을 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월터처럼 하는게 맞다고 본다.

차이가 있다면 내가 맞다고 하는 이유가 자존심에 근거하지 않는다는거?

행동은 같더라도 원리는 다르다.

자존심이 뭐라고.

그딴 것 때문에 움직이는건 어리석다.

거스를 배신할 이유에는 하나면 충분하다.

내가 보스가 아니니까.

가족의 안위라던가 자존감에 스크래치가 나서, 돈을 더 벌고 싶어서의 문제로는 받아들일게 아니다.

단순히 고집불통에 에고가 세서 적대하는 것도 아니다.

가족들을 부양하고 돈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위치가 되었더라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기분 좀 상했다고 거스와 적대하고 대가리 먹으려는건 어떻게 되어먹은 역치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존재의의가 걸린 문제로 생각한다면 거스를 배신할만 하다.

자신의 삶에 있어서, 자신의 세상에 있어서 최고가 되고자 했을 뿐이다.

제정신으로 할 짓으로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게 사실인걸 어쩌겠나.

어떻게 살아도 좋은게 인생이기에 거스를 배신한다.

참으로 모험적이고 자유로운 행동력 아닌가.

너 하나 때문에 망쳤다는 소리쯤은 거슬리지도 않아.

인생을 걸어서 도전해볼만 하다.

제시 핑크맨은 믿음직한 패.

먹을 걸 잘 주고 어깨에 힘을 실어주는 한 등에 칼을 꼽지 않는다.

월터에게 충성했던 제시를 똑바로 파악했으니 거스도 그를 채용하려 했지.

약쟁이기는 하지만 약을 떼어놓고 보면 주인한테 안 짖는 개거든.

동네에서 어린애 꼬드겨서 약팔이하는 잔챙이들도 아마 충성심만큼은 있었을거야.

거스의 입장에서 개네들이 꼬맹이를 쏴죽이든 말든 신경 쓸 것도 아니지.

으흠 그런데 걔들을 월터가 죽였다.

제시를 구하려고 죽였다는 점에서 더욱 점수가 떨어졌다.

부하를 죽인 것 자체가 문제된게 아니다.

고작 제시를 구하겠다고, 그런 시시한 정 때문에 자신을 배신했거든.

차라리 제시가 죽였으면 해프닝으로 넘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을!

월터는 이런 원리로 언제든 자신을 배신할 수 있는 사람임을 입증했다.

함께 식사를 나누고도 배신했다는 점에서 특히나 위험하지.

그 이유로 내가 죽을 수도 있어.

월터의 배신에는 그만한 무게가 있었다.

조직을 위해서 쳐내지 않을 수 없잖아?

불화의 시작은 부하를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부하를 죽인 이유 때문이다.

반면 부하를 죽이려고 했던 제시를 볼까.

월터가 끈 떨어진 신세가 되고도 그의 편이 되어줬다.

처지를 생각하면 배신할만도 했는데.

늘 그랬지.

월터가 약쟁이에 불과한 제시를 파트너로 삼았던 것도 충실하게 편이 되어줬기 때문이야.

마침 월터만큼 약을 잘 만들기도 하고.

월터는 사소한 정 때문에 자신을 배신했지만 제시는 충성으로 범죄에 가담했을 뿐이다.

둘은 공범이었을지라도 거스에겐 다르게 보일 수 밖에 없다.

실제 다르거든.

그러니 제시에게 올바른 충성의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거다. 

나는 널 섭섭하지 않게 대해줄 수 있으니 나를 돕는 것으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월터에게는 똑같은 대접을 해줬어도 배신으로 돌아왔지만 ㅋㅋㅋㅋ.

마약으로 세계 정복을 앞두고 있었는데 참 안타깝게 되었군.

거스 죽었거든.

사람 똑바로 보던 녀석이 살라만카에 감정적인 약점이 있어가지고.

친구 좀 죽인게 뭐 대수라고 직접 거길 찾아간거람?

몇 십년 지났으면 이름도 까먹을만 하지 않나?

세계를 정복할 뻔한 마약 사업은 다시 발품팔이 수공업 시절로 돌아가.

빡칠만하지.

거스 죽일거면 사업체 장악할 준비라도 마치고 죽이던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죽여버리면 어쩌자고?

망가진 사업에 대해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이후 월터는 거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게 되지.

거스가 해결사 부하를 죽였던 이유같은 것도 다시금 되새겨보게 되고.

쫌생이마냥 경고 좀 주겠다고 죽였겠냐고?

초딩이야?

그 자식이 하던 행동 원리가 문제였다.

자리를 넘보려는 행동을 거스에게 보였으니 참을 수 없었지.

월터의 자리를 넘봤지? 그래. 했다고 쳐보자.

그 다음은? 내 자리를 넘봐도 되겠네? ㅋㅋㅋㅋ

그러니까 죽여야했어.

덴마에서도 나왔지만 두 문제를 하나로 엮어서 해결한다는건 어디 전략 서적에 써있기라도 한 건가?

어찌보면 정치의 기본인가.

마지막 장에서는 하이젠버그인게 들통나고 마는데 월터의 약점이 그대로 폭로되는 부분이지.

행크를 가족으로 생각해서 안 죽이려고 발버둥치는거 뭔데?

정작 본인은 하이젠버그 조지겠다고 길길이 날뛰고 있는데 뭐 어쩌자고?

누가 봐도 행크 죽이는게 해결책인데 멍청하게 손이나 빨다가 돈 털렸어.

거스 죽일때 했던 노력의 반만이라도 들여라!

하기야 그런거 할 수 있었으면 거스를 죽이지도 않았지.

논리없는 도덕을 머리에 담은 자는 결국 자신의 발에 걸려 넘어지는거다.

세상도 월터가 마약 제조업자인걸 알게 되고 악마라 낙인찍어.

아무튼 드라마니까 인과응보.

본인의 악행에 대한 책임은 져야지.

자신 돈 털어간 놈들 조지고 제시 구하는 걸로 주인공다운 마무리는 해줬다.

죽일 사람만 안 거르고 잘라냈으면 승자로 엔딩을 맞이했을 텐데.

아, 그럼 드라마가 재미없어지나.

불완전함이 인물들을 매력있게 만들긴 했다.

브레이킹 배드 무비: 엘 카미노
브레이킹 배드 무비: 엘 카미노
논검26. 직장으로 간 사이코패스

1.독사가 멋진 정장을 입을까?

멋진 평가를 받는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이 책임지는 일에서 성과가 떨어짐.

부하의 능력을 비웃고 조롱함.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면을 보이고 자신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깎아 떨어뜨림. 협박과 아첨을 적절히 사용.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만 새로 고용. 반대자 몰아내. 선정기준이 유능함이 아니라 동의해주느냐야. 자신만이 돋보이도록 회의를 연출. 결속력 붕괴. 자신의 부와 권위를 과시하고 다님.

사무실 자주 비우고 불법 자행. 장부조작과 사기. 실적은 부풀려졌고 보고서는 구라 ㅋㅋㅋㅋ.

>이건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무능한 사기꾼 새끼잖아 ㅋㅋㅋㅋ 인사과는 무능한 것도 못거른 책임이 크다.

2.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양심 없고 동정심이나 죄의식 못느낌. 자기만 위함. >근데 이러면 유능한 범죄자가 못 되는데?

정상적으로 보이나 매력으로 후리고 타인을 조종함. 거짓말 자주함. 책임감 없음.

3.눈에 보이는게 모두 진실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고 이용가치 판단. 호불호와 강약점 파악. 

말솜씨 뛰어남.

사람의 감정과 인상 조작의 달인. 상대에 따라 자신을 바꿈.

존경에 대한 과도한 욕구와 우월감이 나타남. 극적이고 감정적임.

평가-속이고 조종-단물 빠지면 버림.

사이코패스 대다수는 남의 노력에 기생해서 살아감.

동정심, 양심, 죄의식 없어. 그러면서 우월감은 있음 ㅋㅋㅋㅋ 남의 희생은 오히려 나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함. 책임 피하려고 함. 비난의 화살을 타인에게 돌림. 피해자의 불운은 피해자 탓.

영원히 함께할 거라고 해놓고 단기적으로 떠남. 장기적 직업과 삶의 목표가 없음.

4.사패조종술

사적 인격-내부에서 경험하는 나.

공적 인격-다른사람이 봐주었으면 하는 나

추정적 인격-평판. 다른 사람이 규정하는 나

상대가 자신을 드러내도록 적극적으로 부추긴다.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 좋다는 것으로 힘과 재능을 높이 평가해준다.

내가 너와 똑같다고 말하며 경계를 푼다. 그럼 가면을 벗고 드러내도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겠지.

당신의 비밀을 나에게 털어놓아도 안전하다. 안전욕구 충족해준다.

심리적인 유대감으로 나는 당신에게 완벽한 친구, 동업자다라고 인식시킨다.

근데 이 모든게 가짜라는거지 ㅋㅋㅋㅋ.

5.사패, 무대 왼편에서 등장

자신이 가진 믿음을 위장해서 사기를 침. 믿음 있으면 받아들이는 종교인들이니까 표적 찾기 쉽지.

관료제에 끼어들기 힘들것으로 보이는 이유가 있지만 실존하잖아? 공식적 행동규범 인식한 상태에서 은밀하게 박혀있다.

학력위조나 추천장 이력서 상장 등등 다 구라야.

6.인질, 후원자 봉:사패드라마의 등장인물들

서로신뢰하는 환경은 설치기 좋지. 의심 안 받으니까. 

잘 어울리는 특성을 위장해 상냥하고 우호적인 접근이 가능.

공정한 게임 규칙에 집착 안함.

지위, 전문성, 정보, 자원동력 등 파악하고-지지기반 구축하고, 뭐 말로는 충성이나 협조 이런걸 세워서. 인질을 마련.-속이고 조종.

사춘기 중학생처럼 이간질. 자신밖에 모르고 거만한데다 책임감도 없으니 혐오스럽지.

근데 이런 지배를 무너뜨리지 못하면 권력의 상층부까지 올라감. 단물을 빨고 성공을 누리지 ㅋㅋㅋㅋ

후원자도 단물만 다빨고 버려져.

7.어둠과 혼돈:사패의 친구들

사패는 변이적인 조직에도 들어간다. 개인적으로 변화 자체가 자극적이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매력적 자유를 기업 조직에서 발견하니까. 

상황이 급변하는 혼돈의 환경은 사패를 자극하고 행위도 덮어줄 수 있음.

8.사패 아니고 그렇게 행동만 할 뿐.

배려 안하고 양심 낮은건 사패 아니어도 보이는 증상.

이런것 만으로 구분할 수 없다. 

>걍 내가 좆같으면 사패 ㅋㅋㅋㅋ 터놓고 말하자고. 이거 사람 성격의 하나에 불과해. 질병도 뭣도 아냐. 도벽 있어서 남의 물건에 손 대는 놈이 있는가 하면 무능한 주제에 남 뒤통수 까먹고 사기치는게 천성인 새끼들도 있어. 이 스펙트럼은 연속적으로 보일정도로 수많은 인간 군상의 하나에 불과해. 사패의 구분법은 범죄도 뭣도 아니고 그냥 내가 좆같으면 사패야 ㅇㅇ. 어차피 심리 검사 따위는 진술과 체크하는게 본인에게 달렸는데 이것도 못 속일게 뭐냐고? 이게 불연속적인, 아주 극소수만 이런 특이한 병에 걸린 것처럼 따지려고 들어서는 안되지. 세상 어디에나 있는 좆같은 인간군상일 뿐이니까. 그걸 욕설처럼 사패라고 규정하는거지 사패여서 그 사람들이 사패인게 아니다. 

장기적인 목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특정 순간에 흥미를 느끼는 즉각적 기회 포착. 새로운 재미가 나타나면 그쪽에 눈 돌림. 

동정심도 없이 냉혹하게 사람들 지배하는게 사패.

감정이 없어 이것들은.

똑같이 자아도취와 냉혹함을 보이더라도 도덕적일 수 있거든? 이건 사패아님 ㅋㅋㅋㅋ 왜? 마음에 드니까.

위험 무릅쓰는 용기나 실천력 충동성 등등도 카이사르처럼 능력으로 보여진단 말이지? 마찬가지로 마음에 드니까 사패아냐 ㅇㅇ. 기준 ㅈㄴ 허술하네

리더십과 사패 행동은 구분 안된다고 함. >왜냐고? 칭찬받을만 하면 리더십이고 욕먹을 정도로 ㅈ같으면 사패니까. 위에서 말한것처럼 수많은 인간 스펙트럼의 일부가 사패에 속하거나 걸쳐있다. 겉으로 리더십있고 감정적인척 연기도 할 수 있지. 사실 사패라서 사패인게 아니라 분류를 후천적으로 붙인거라는걸 잊지 말라고. 이딴거 따지기 싫으면 그냥 ㅈ같으면 사패로 분류해 ㅇㅇ 그게 제일 편함. 진리와는 조금 거리가 있겠지만 알 바임?

9.문앞까지 들이닥친 적

첫 방어선은 선발과 채용. 기초 지식, 기술, 능력, 태도, 직무 관련 목표, 측정기준 등등 철저하게 걸러서 부적격자 추려야 해. 이력서에 자질과 재능을 허위로 기재하는건 비일비재하거든. 이거 귀찮다고 확인 안하면 ㅈ되는거임. 전화면접으로는 거의 못가려낸다고 봐라. 사이코패스는 정신 장애가 아닌 인격 씹창난 놈들을 분류한거니 면접으로 가리기 힘들긴 함.

많은 관리자들은 준비를 안하고 심사기술도 훈련 안 받음.

지원자의 모순 내용에 의문 제기해서 해결하면 편하다.

면접 심사의 주도권 뺏기지 마라.

이중적인 면을 파악하고 메모하기, 혼자 면접 하지 말기.

거짓말 알아내는건 어려우니 걍 객관적 사실로 증거를 확보하고 출발하라.

어지간하면 추천인이나 이런저런 객관적 정보로부터 진실 뽑아내는게 가능하다. 구라친거면 걸러.

사패는 팀을 형성 못한다. 자아도취가 심해서 리더나 관리자가 되기 힘들지. 선의의 경쟁? 그딴 거 없어. 팀 와해나 시키겠지.

나눌줄 모르고 사람 차별해. 찐따들이네 ㅋㅋㅋㅋ

진실을 말할 줄 몰라.

겸손을 모르고 비난을 받아들이지 못해.

예상 밖의 행동을 해버린다.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공격적인 행동.

>이래서 인턴 기간으로 거르는거.

10.감정의 자동 입력 장치와 약점

좆같은 새끼들 거르는 법. 스스로에 대해 메타 인지를 해야하고 사패의 모든걸 알아라. 아무한테나 사패 딱지 붙이지 말고. 상대가 너에게 바라는게 무엇인지 따져봐라.

자동입력장치와 약점이 무엇인지 알아두어라.

사패가 사람을 어떻게 조종하고 속이는지 숙지.

첫인상은 구라일 가능성이 높으니 유혹 피해라.

유대감 따위에 엮이지 마라. 

가스라이팅 당하는거 놀아나지말고 빠져나와.

현실을 현실로 직시해.

사기당했다는거 알았으면 수치심 털고 분노와 복수심을 다스려라.

11.제5열, 숨어 있는 사패들

접근 예방법

사패는 너의 능력과 충성심을 해치고자 할거다. 너의 평판을 조작하고 이간질해서 무능하고 충성심도 없는 것처럼 비치도록 하겠지. 평판은 어디까지나 인상에 달려있다는걸 잊지 말라고. 실제 무능해도 인상만으로 유능하게 대접 받을 수 있는게 세상이다.

네 인상도 관리를 해야 사패를 견제할 수 있어. 불평분자로 찍히지 말고 회사의 지침에 대해 파악하라.

사패 상사 있으면 일 잘하는 직원이라는 평가를 보여야 한다. 기록을 남겨서 긍정부정적인 모든 사건을 메모해두는 것 잊지 마라. 

업무평가 최대한 활용.

대결을 피해라. 대결에 직면하면 단호함으로 대처해라. 최선을 다한다는걸 보여주고 상대가 폭력적 언행을 분출한다는 것을 주변에 인지시킬 수 있도록 하라.

>기본적인 대처원리는 상대가 네 충성심과 능력 평판 깎아먹는거 당하지 않도록 조치하고 주변과 관계를 돈독히 지탱시켜놓아라. 사패가 이간질해도 무너뜨릴 수 없도록. 그런데 이런 조치로도 사패를 대응하지 못했다? 그럼 회사 떠나고 새출발 하는게 정신 건강에 좋다. 사패에게 무너지지 않고 네가 유능하고 충성스럽다는 것을 보일 수 있으면 문제 없는거야. 네가 그 새끼를 쫓아낼 수 있다면 쫓아내는게 최선.

직장으로 간 사이코패스
직장으로 간 사이코패스
논검25. 배트맨 다크나이트 라이즈

배트맨 다크나이트 라이즈

보면서 많이 좆같았던 영화.

하비덴트 특별법으로 범죄자를 가두는 것 만으로 평화가 되찾아졌다고 나오는 설정.

무슨 힘만으로 세상의 범죄를 어찌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인가.

이것부터 일단 마음에 안드는 설정이지만 뭐 그렇다치고.

범죄자를 풀어준 뒤 가진자를 끌어내고 사람들에게 돈을 돌려줬습니다 정도의 무정부상태.

조커의 하위호환작품.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의 구조였지 않나. 

웨인가의 그 독점적인 부 부터 미국 사회를 병들게 한 원인이었을텐데?

감독이 공부를 좀 게을리하고 영화를 만든게 아닌가 싶음.

가난한 사람들은 베인이 만들어준 세상에 조금 감사하고는 하지만 그게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는 명확히 제시하지 못했다고 생각함.

부자들 얼음 아래 빠트려 죽이는거?

흠…

상류층의 입장에서는 빈민의 투쟁이 저런 무질서로밖에 해석되지 않는걸까.

프랑스 혁명처럼 가진 사람들 다 죽이고 빼앗는 것이 그들의 질서로 보이나?

입장이 그렇게 보인다.

하층민의 욕구가 상류층을 끌어내려 빼앗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작품을 썼다.

저 야만적인 하층민들을 보십시오. 상류층인 우리는 그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사회 질서를 바르게 유지해야합니다. 처럼 들려.

유치해.

뭐 그런 문제는 되었고 폭탄은 왜 터트리는데?

사용하지 않을 때 가장 강하지 않나.

배트맨의 정당성을 위해 만든 편의적인 설정이라고 생각.

왜 베인과 맞서야 하는지도 근본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고 악당이니까 맞서 싸워야지. 가 전부잖아.

실망쓰.

총 들고 있으면서 패싸움 하는 것도 짜쳤고 이것저것 다 엉망.

전편 엔딩도 맘에 안 들더니만 어휴.

비판을 할 때마다 느끼는거지만 비판을 하는 사람은 비판을 받을 각오를 해야한다.

언젠가 내가 조금만 실수하고 흠집이나도 비난이 오겠지.

흠 근데 이건 좀 아니야. 내가 어지간하면 좋게 봐주고 싶은데 이건 아냐.

나중에 내가 실수해서 까이더라도 그 실수에 응당하게 까이고말지 이걸 호평할 방법은 없어.

처음부터 끝까지 어쩌라는건지가 남았다고.

취향이 너무 안맞았어.

다크 나이트 라이즈
다크 나이트 라이즈
논검24. 황해

황해

가난한 택시운전수. 

마작과 빚쟁이가 찾아와주는 아침, 깨진 결혼사진이 이 사람이 어떤지 설명해준다.

뒤 없는 인생이다 뭐 이거지.

아내는 한국가서 돈 안부치고 바람난듯.

살인 청부를 받게된다.

마작판에서 깽판친걸로 눈에 들었어.

인생 바닥난 놈인거 알아봤으니 그런 일 시키는거지.

죽어도 뒤탈 없겠다. 이딴 일 아니면 일어나지도 못하니 동의하겠다. 인질로 쓸 가족도 있다. 좋은 버림패다.

아내를 ㅈㄴ 좋아했나봐요. 뭔 틈만나면 떡신을 회상하고 있어.

추운 겨울에 밀입국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어떠한 살인 계획도 안해줘서 표적이 언제 들어오는지, 살인의 설계등등 혼자서 다 해야 했어.

한국 지내면서 아내 행방도 간간히 찾아보고 찾아냈으!

그런데 찾아간 아내의 집이 열려있다? 

자신의 방을 연상시킬 정도로 엉망이 되어있어.

분노로 찾아갔던 가슴이 불안으로 가득했겠지.

살인은 운 좋게 운전사가 배신때리는걸로 해결됨. 럭키? 글쎄, 아내가 목격해버리고 경찰도 들이닥치고 여간 귀찮아진게 아녀.

운빨봐라. 저걸 놓쳐? ㅋㅋㅋㅋㅋㅋㅋ 경찰의 수준이?

표적 죽이고 버려짐. 그럴거 같더라. 경찰한테는 쫓기고.

윗사람의 사정에 걸려 애꿏은 조선족들만 정리당함.

그리고 뉴스에서 듣는 토막시체 살인사건, 아마 아내일 것으로 보이는데…

결국 죽은게 자기 아내인걸 알게 되고 자신을 배신한 것도 아니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죽은 아내를 찾겠다는 미련을 완전히 떨치진 못했지만 남은 가족인 딸에게 돌아가야지?

밀항을 다시 결심하지만!

조선족 조직에게 쫓기게 된다.

운도 좋았지만 질긴 깡과 운전실력으로 빠져나가는데 성공.

김씨와 면씨는 서로 싸우고 주인공은 중국에 돌아가는걸 포기한 뒤 이 일을 맺은 뒤 죽고자 함.

서로 싸우고 죽이려들고 개판이야.

죄다 쓰레기같군.

서로를 죽여댄 면,김은 물론이고 마지막에 자신을 죽이라고 청부했던 사람도 김승현 아내라는걸 알게 되었으니.

주인공은 최후에 황해에 빠져 죽는다. 유골과 함께.

황해를 제목으로 삼은 것은 이 세상이 황해다. 라는걸 말하고 싶었던걸까.

그런데 마지막에 아내 살아있었네? 아내 얼굴 확인한게 좀 엉성한 떡밥을 남겼으니까 살아있다고 봐야겠지?

뭔가 이것저것 엉키는 느낌.

김정환이 정확히 무슨역할인지 모르겠는데 불안해 했던거 보면 아예 무관은 아닌거겠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김승현 아내와 불륜이었나.

애초에 김승현이 불륜을 피워서 이 사단이 났으니 반대쪽에서는 저런 살인이 이뤄져도 이상할 게 없지.

한 쪽이 배신하면 다른 쪽도 배신하는 명분을 주는 거라고.

일단 줄거리와 상황은 저러하고 주인공의 입장에서 다시 볼까.

인생이 ㅈ되었다. 사랑하는 아내는 도망간거 같고 빚에 쫓겨서 개털이다.

끝까지 몰렸으니 살인청부를 받았다.

사람을 죽인다는 ㅈ같은 일을 위해 한겨울에 황해를 건너서 왔다.

살인을 준비하는 일도 춥고 ㅈ같은 일.

그런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표적을 죽여버렸고 나는 범인으로 찍혀 경찰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쫓기고 배신당하고 ㅈ같은 꼴이란 꼴은 다 봤는다.

아무래도 살아서 돌아가긴 글렀지.

그럼 이런 난장판 속에서 내가 그나마 옳다고 생각하는 짓을 하고 죽으련다.

나를 이 좆같은 꼴로 만든 녀석만을 끝내고 가겠다고, 피해자의 아내에게 약속했다.

연루된 사람의 사정을 들으면서 피해자조차도 남의 여자를 건드는 개새끼였음을 알게 되고,

자신을 죽이라 사주한 흑막도 만나게 된다.

근데 그 흑막이 내가 복수를 약속했던, 그나마 이 혼돈밖에 없던 관계에서 유일한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날 죽이라고 사주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세상이란 황해. 혼돈밖에 없고 내려다보면 무엇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이 사건에 대해 대부분의 것을 파악한 주인공은 최후에는 황해에 가라앉는다.

집어삼켜지듯이.

경찰에게 모든 사정을 알리지 못하는건 세상이 더럽다는걸 혼자 알고 죽으라는건가. 

엉망인 세상.

그나마 마지막에 아내가 살아있다는 암시를 준 것에는 혼돈 속에도 희망 하나가 있다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상케 한다.

아무튼! 감독의 전개 의도를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황해다. 감독은 세상에 근본이란 없고 혼돈만 있다는 사상. 무규칙만이 규칙인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그럼 그런 혼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감독은 거기에 대체 무슨 단서를 남겼는가? 내 편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황해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애초에 마작에서 손을 떼고 살았더라면, 살인 청부를 받지 않았더라면, 주인공은 세상이 황해라는 것을 마주할 필요도 없었고 ㅈ같은 세상에 불평이라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랬다면 아내를 만날 수 있었겠지. 그걸 면사장을 탓하든 김사장을 탓하든 할 게 아니라 본인부터 썩어있음을 바라봐라. 네가 흐트러지지 않았으면 살인 청부를 맡겼겠나? 성실하게 택시운전수로 일하면서 가족을 보살피는 방법도 있었잖아. 스스로가 황해로 기어들어가면서 세상이 황해임을 불평하는건 정신병처럼 보일 지경이다.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세상이 그러길 바라다니. 유감스럽지만 넌 황해에 빠져 죽어도 변명 하나 뱉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감독도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던건지는 모르겠다.

황해
황해
논검23. 불평등의 대가

1장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드러나는 중이다. 부유한 사람은 더 큰 부자가되고 나머지는 곤경에 처하는 중. 상위 1퍼센트가 20퍼센트의 소득을 쥐고 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모든 계층의 소득이 늘어났고 목숨을 건 국가적 투쟁 속에서 새로운 일체감을 형성했다. 근데 하위는 영락의 길로 밀려나고 있다.

이 원인은 불평등을 야기하는 정부 정책. 해결하려면 불평등 야기하는 정책 폐기하고 불평등 완화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

불평등은 시장에 불이익을 가져오고 있다.

낙수경제 이론은 효과를 못내는 반면 분수경제 이론은 효과를 낸다.

양극화 심해지고 대침체로 하위계층 삶 더 어려워짐

노동시장에 안전망이 없다.

빈곤문제는 장기적으로 파급효과에 시달릴 것이다.

동기부여를 하던 신념이 사라지고 소외감이 자리잡는다.

화합대신 분열이.

소득계층간 이동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2장

불평등이 일어난건 필연. 만들어진 결과다.

유산의 분배, 부자에게 과세, 효과적인 기업지배구조법률 등을 수행하면 되는데 그러지 못함.

부자가 되는 비결은 부를 창출하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빼앗거나.

사업가들의 관심사는 사회의 행복증진이 아닌 자신의 수익 증가다. 경제의 효율은 떨어지고 불평등은 심화된다. 

 경쟁이 높아지면 이윤이 줄어드니까 시장의 투명성을 줄이고자 한다. 파생상품사업으로.

경제실적 낮아지고 효율성 유지 안됨.

상위 계층의 돈벌이법은 자신의 시장과 권력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소득 늘리기. 정보의 불균형, 과도한 위험 무릅쓰기, 연준에서 낮은 금리로 대출.

자본주의에서 승리하려면 상당한 지능과 법률 우회하는 능력, 부정한 행위를 주저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 정정당당은 중요하지 않고 이기느냐 지느냐만이 중요. 

정부가 이런 불평등을 잡아야 하는데 못하는 중. 지대 추구가 일어남.

부자가 되는 법은 대폭적인 생산성 증대가 아닌, 더 많은 몫을 뽑아내는 실력이 향상되고 용인되었기 때문이다.

독점적 관행이 이루어지지만 이걸 처벌할 법률이 있어도 집행을 안함. 선거자금도 그렇고 재계의 위축도 그렇고 이것저것 엮여있으니 못건드는거야. 이게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3장

노동자의 임금은 정체, 감소하고 금융업자의 임금은 상승.

법률은 분배를 정할때 특정 집단에 혜택을 제공하면서 다른 집단을 희생시킨다. 

교역의 세계화와 자본 시장의 세계화는 불평등의 심화에 기여해옴.

세계화는 풍요로워질 가능성만 있으며 반드시 그렇지 않다. 패자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면 국가 경쟁력이 떨어지므로 승자가 패자에게 보상하는게 줄어듬. 

세계적 경쟁도는 극히 올라가지만 결국 사회 복지 예산과 누진세가 감축되므로 불평등을 심화시킴.

기업 지배구조에서 경영진들은 막대한 몫을 자신에게 배당시키면서 공정성의 기준을 잡음.

취약한 노동조합은 뭐, 노동자 약하면 대량해고로 기업 이윤 오름 ㅋㅋ.

>도덕적 양심 신경 안 쓰고 이윤 추구하는걸 비판하는데 대체 시장에서 이윤 말고 따져야 할게 있다고 말을 하는건가? 그런거 수치적으로도 나타낼 수 없고 그나마 법으로 밖에 표면화 할 수 없는건데 그 소송도 지면 도덕적이지 않은 것도 아니잖아? 이긴 사람을 범법자라고 하진 않겠지. 개인의 입장에서 지대추구를 이용한 몫의 약탈은 지극히 정상적인 행위다. 이건 개인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거야. 하지만 사회에서는 불편하지. 이거 불평등 극심해지면 문제거든. 그럼 사회에서 그 개인을 통제해야겠지? 그거 못하는게 문제이므로 사회의 문제다. 그 개인을 탓해본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구멍난 조세회피통로를 이용해 세금 안냄. 소득 감춤. 조세 정책을 잘 만들고 집행해야 불평등을 줄일 수 있다. 사회복지제도는 저점 높여주고 ㅇㅇ.

불평등의 주요 원천은 거시경제정책의 실패.

4장

불평등 지속되고 사회 무너지면 부자들도 손해야. 발전도 더뎌지고. 경제 효율성과 생산력 낮아져. 공공투자 축소, 공교육 축소로 잠재력 발휘 수단 차단되고 노동자 의욕도 감소시킴.

성과유인 보수체계는 협력을 강요하지만 실상은 불평등 심화시킴.

나라의 정체성으로 기회균등과 공정성, 공동체의식이 훼손된다고 말하지만 실제 통계자료는 불평등 그 자체다.

실상으로 말해볼까? 정체성은 원래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고 행동으로 보이는것만 믿어라. 그게 진짜 정체성이다.

>그러니까 이 불평등은 무형적인 신분제다. 노동자/중산층/부르주아로 삼분한다고 할까. 미국은 일부러 이러한 사회 구조를 층으로 나누고 있다고 본다. 사회적 계층 이동은 부와 교육으로 이미 고정화 되어있고 합법적인 구조로 맞물려서 단단한 층을 이루고 있음. 부를 얻는 이는 자신의 몫을 비상식적으로 많이 배정하는데 언젠가 이거 한계 올 거다. 근데 이거 읽고나니가 샌델이 더 개새끼같은데? 이런 문제 직시해놓고 지껄인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동선? 장난해!

5장

1인 1표가 아닌 1달러 1표의 원칙. 정치게임은 상위 1퍼센트에 의해 결정된다. 

개인의 1표는 결과를 가르지 못한다. 이걸 그저 국민의 의무라는 것으로 강요하기에 의문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 의무 제쳐놓고 이루어지는 것만 보면 엉망이야. 의사결정을 쪼개놓은 거라고.

실제 1표를 움직이는건 시민이 아닌 달러다. 상위계층의 언론지배는 불신과 환멸을 낳고 정치 경제 시스템의 공정하다는 신뢰는 무너졌다.

재계의 실력자들은 시스템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움직이게 할 수 있고 자원도 있다.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해 있음.

미국은 세계적인 권위를 잃고 있으며 이것은 미국의 가치관과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 조커가 자꾸 생각나네. 조커 폭동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아. 이거 완화 못하면 뭐 조지는거라고.

6장

상위 1퍼센트가 신념에 영향을 미치는 전략들

사람의 구조를 조작할 수 있고 인식과 행동 조작가능. 

사람은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만 새기고 신념을 강화하며 불필요한건 무시한다. 

관념과 인식을 사회적 구성물로 파악하면 신념은 빠르게 변할 수 있다는걸 알 수 있다.

사람의 신념은 타인에게 확인받아서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스스로 그것을 가꾸어내지 못함. 자신의 신념이 바뀌려면 다른 사람의 신념 변화가 충분히 이루어져야만 개인이 변한다. 

결국 대다수의 신념이란건 사회적 환경에서 태어나는 것. 

교육 역시 신념에 영향을 미침. 

설득과 구조화로 관념이 결정된다.

정책도 결국 인식전쟁. 구조화를 잘 해라.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같은 이야기를 해도 달라진다.

그런 원칙을 사용해서 상류층에 유리한 쪽으로 논의가 구조화된다.

7장

법치주의는 미국 내에서 실제로 이행되지 않는다. 불평등을 유지시키는 쪽으로 가고 있다.

힘을 행사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면서 신념을 이익에 맞춰 왜곡한다. 자신이 원하는 바가 공익에 부합한다고 믿는데, 이는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

약탈적인 대출, 파산법, 담보 주택 압류 절차로 이런 결정을 해버린다.

미국사회는 약자를 보호하는 법치주의가 아니라 막강한 권력을 쥔 은행들에게 더 큰 권력을 넘겨주는 방향으로 법률 시스템을 운용. 

각각 법률은 어떤 집단에게 유리하게 되어있고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건 반대쪽이다. 대체로 상위계층의 이익을 더 반영하는 쪽이다. 경제적 여력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정의인가.

8장

재정 적자가 야기된 원인을 무시하고 있다.

국방부는 매 년 막대한 지출을 지출중. 여러 보조금 정책은 미국 경제와 정치를 왜곡중.

가난은 실업자의 게으름 탓으로 돌리려한다. 예산긴축은 경제 번영에 도움되는 해결책이 아니다.

9장

통화 정책, 거시경제정책, 연중의 행동은 미국 불평등 심화를 악화시킴. 가진자들에게 발언권이 주어져있고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만 신경쓰지 분배에는 신경안씀.

누군가 이익을 보면 누군가는 손해를 본다. 위험비용은 노동자, 납세자에게 떠넘기고 편익은 은행에 몰아줌. 

모든 사람에게 최선의 혜택을 베푸는 정책은 없다. 금융업자에게 포획된 사고로 운영되는 통화시스템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보면 볼 수록 일부러 이런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걸로 보이는데. 대다수에게 나은 생활을 보장해주는데에 별 관심이 없어. 약소국 ㅈ되든 말든 상관 안하는 것처럼 사회적 약자들 ㅈ되는 것도 알 바 아닌거지. 일부러 상위에 편익을 몰아주고 부의 계급화를 이뤄낸거라고. 그 사람들만 잘 살면 되는거야. 미국이란 나라는. 못사는 사람? 관심 없음. 니들이랑 상류층이랑 물 안 섞으려고 일부러 이렇게 만든거라니까? 꼬우면 조커 혁명이라도 일으켜야할듯 ㅋㅋㅋㅋ.

10장

위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경제 개혁 방법을 다루고 있음. 대체로 악용되는 법들 고치고 중하위 계층에 지원하라. 교육, 서민저축, 의료보장, 사회보호 프로그램, 완전고용 경제 등등.

하위99가 상위1에게 놀아난다는 것을 깨트리고 싶어함. 뭐 내가 쓸만한 내용은 없으니 스킵.

>나는 이런 불평등 문제에 있어서 부에 대한 인식을 먼저 바꾸어야 하지 않나 생각을 해봄.

돈을 위대한 가치로 받들기에 불평등이 태연히 일어나는거야. 돈이 실제 힘이기도 하고. 그런 이상 자신의 힘을 남들에게 내어주는건 실정이라고. 가지고 남에게 주지 않으려 하는게 당연해. 하지만 교육을 통 해 이 인식을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 힘은 곧 책임. 부를 가진 사람은 언제든 그 책임을 져서 무너지는 자리에 올랐다는걸 인식시킨다면. 그것이 누구에게나 퍼져있는 사상이기에 부의 불평등을 이루고자 하지 않는다면?

돈이 있다고 그 사람이 고귀해지는게 아니잖아. 어느정도 필요는 하지. 그런데 못난 찌질이가 하루 아침에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우리가 고개를 숙여야 하는가? 돈의 권력을 개인의 행복에만 한정시켜야 할거 같아. 아무리 네가 돈이 많아도 그게 다른 개인보다 더 낫다는 가치는 될 수 없다고. 좋은 옷 입고 맛있는거 먹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행복이잖아. 다른 사람에겐 알 바 아니라는 식의 인식. 사람으로서는 대등하다는 인식이 자리잡는거지. 진정으로 존경해야 할 가치는 자신의 힘, 일에 책임을 지고 있는가. 야비하게 자기 잘못에서 도망가고 사기치는걸로 이룬 성공을 존경해서는 안되겠지. 이걸 사회에 실현시키려면 도대체 교육부터 시작해서 제도까지… 얼마나 뜯어고쳐야 한담? 나 살아있을 때는 가능할까?

나도 철학자 나부랭이들의 궤변을 일삼는건가. 

불평등의 대가 - 분열된 사회는 왜 위험한가
불평등의 대가 - 분열된 사회는 왜 위험한가
논검22. 나이트런-네가 있는 마을


필력 최고점이 아닐까 싶은 에피소드.

배경이 되는 환경은 푸른꽃이 떨어지고 황폐화 된 행성 토발.

대륙단위로 난민이 발생하고 적국은 존재조차 않는다.

제한된 영토에 난민은 몰려들고 물자의 부족은 물론이거니와 시민과 난민간 갈등도 발생했다.

난민선에게 포구를 들이밀며 꺼지라 하는 것과 군대가 난민들을 쓸어버리려고 하는 것은 배경을 잘 나타낸다.

시민들의 입장은 어떨까.

난민들 때문에 자신들이 피해보는게 싫지. 꺼지라고 해야해.

당시 대통령이던 빌리도 이런 입장을 고수하는 쪽.

이 사람의 최대 실정은 전대 독재자였던 아버지처럼 기사단에 충성한다는 거.

기사단은 별 도움을 줄 거 같지도 않은데 체제를 버리지 못하고 기사단에 매달려.

당장 난민 문제를 해결할 방책도 외부의 원조인데 기사단은 뭘 해줬냐고?

원조 없으니까. 난민 수용 못하니까 몰아내고 총구 들이미는거잖아.

이건 주객이 전도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

이전 기사단의 위상을 생각하면,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기사단의 후원이었음을 생각하면 그 근본을 떨쳐냈을 때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될 지 뻔히 보여.

넬슨이 가만히 봐주리라고 믿는건 어리석지. 

할 수만 있다면 먼저 쳐서 자신의 정적을 줄이는게 좋았어.

근데 넬슨도 독이 바짝 오른듯이 준비를 하고 있던거야.

앞선 군사기술과 ae의 원조, 그리고 난민 수용하겠다는 정치적인 어필까지.

언론을 이용해서 빌리의 이미지를 박살내고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이 돼.

ae의 군사력을 빌리지 않고 선거로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매우 고평가.

거기에 더 앞서 나가 제로그라운드를 빼앗을 명분, 행성민 단일화를 위한 기사단의 적대화, 지금 정부가 유능하다는 어필을 할 무대가 시온 사냥이었다.

어차피 죽을 병쟁이. 

마지막까지 토발을 위해 희생하라는 넬슨의 단호함을 보라.

지도자로서는 적절한 판단이었다.

단순한 정에 치우치지 않고 올바르다고 생각한 것을 실행했다.

행성민 단위의 운명과 정향이 걸린 일에서 시온이라는 개인은 희생을 해도 좋은 패.

이보다 더 나은 수는 없다고 해도 좋았다.

이런 어른들의 사정에 끼어있던게 반과 시온이다.

반은 시온이라는 사람에게 경애를 품게된다.

이성에 대한 애욕도 없진 않았겠지.

하지만 그 시온이라는 사람이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이라고, 자신의 우상으로 동경해버리게 된다.

레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순진무구하게 정의!를 외치는 이상주의자. 

시온으로부터 레아를 보아버린 이상, 어머니를 한 번 잃었던 반은 맞서기로 결정한다.

모순적이게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시온이 한 발자국이라도 걸치고는 있지만…

여기서 시온을 놓쳐버리면 평생을 후회할 것이라 생각했겠지.

아무리 평온한 일상이 뒤이어진다 하더라도 떨쳐내기 힘들거라고.

어머니를 두 번이나 잃는 그 상실감을 꼬맹이가 버틸 수 없는 거다.

거기에 시온을 구하겠다는 다른 어른들의 사정에 끼여 테러리스트가 된다.

자신이 구하고 싶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죽인다.

그 테러의 침입으로 발생한 일순의 틈.

괴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강하한다.

이런 스토리인건 대강 알지?

토발로부터 괴수 취급받는 시온이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것이 자신을 영웅으로 받아주는, 구원을 받았던 사람을 보여줌으로써 무의미하지 않다는걸 보여줬다거나.

원한과 원한이 돌고 돌아서 반도 원한의 부메랑으로 총을 맞는다거나.

서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걸 택하면서 버렸던 것들이 모여 난장판을 일으켰다거나.

그런건 뻔하니 여기선 스킵.

이 인물들을 붕괴시킨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레아의 죽음이 모든걸 망쳤다고 본다.

레아의 죽음이 넬슨가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봐라.

난 넬슨이 시온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 이유를 단순히 정치적 계산만으로 따질 수는 없을거라 본다.

그건 복수였다.

레아가 죽을 때 가족 누구도 그녀와 같이 있어주지 못했고 반만이 아니라 레이, 로버트까지도 그녀의 빈차리를 체감한다.

시온은 토발의 구원자였다.

그걸 잘 알고 전우로도 지냈던 넬슨이 시온의 명예와 마지막 남은 시간마저 박살내고 희생양으로 삼았다.

정치적 구실은 좋지.

그런데 그게 단순한 계산과 이해득실만으로 따져서 내린 결론인가는 의심이 간다.

시온을 두고 레이가 말한다.

가족을 죽인 년이라고.

원한을 담아서 말했을거다.

어머니를 죽게 만든 괴물따위 죽으라지 식으로 미워했을거다.

그런 시온을 구하려드는 동생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다.

로버트 넬슨이라고 달랐을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레아를 죽인게 시온이라고, 클린트가 매도했던 것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어렴풋이라도 그랬겠지.

반조차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온을 꺼렸다.

넬슨도 그러한 원한에 잡혀있다. 

행성의 책임자가 되어서도 강박적으로 일을 손에 잡는다.

슬픔을 떨치지 못한 사람의 행동이지 않나.

레아의 죽음이 이 모든 원흉의 시작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지만 그 희생양을 자처했던 시온의 행동이 이런 나비효과를 불러 일으킨 것이다.

시온을 괴물로 사냥하거나, 반이 테러리스트가 되거나 했던 모든 실정과 같이 시온도 그런 실정을 저질렀다.

마지막에 행복하게 지내보겠답시고 토발로 내려온 것부터 실정이었다.

자신이 자처해서 만든 악당 기사 이미지는 어쩌고 그 곳에 내려갔는가.

그거 좀 행복해서 뭐하자고?

감정 떼고 보자면 존재 자체로 민폐다.

의도와 무관하게 이 모든 비극이 자신의 얄팍한 이기심 때문에 일어났다는걸 부정하진 못하겠지.

그래도 작가는 시온을 편하게 보내줬다.

소원대로 남친과 바닷가를 갔어.

잘 죽었고 다시는 보지 말자 ㅇㅇ.

나름 배울 교훈이 있다면 사람은 현실만 직시하면서 살 수 없다는 거.

레아라는 이상을 버려가면서까지 빡빡하게 살기는 어렵다는거다.

지극히 동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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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검21. 덴마-파나마의 개

덴마 파나마의 개

난 이 작가의 그림이 좋다.

그림체만큼은 최애라고 해도 되겠지.

왜 다른 작가들은 양영순의 그림체로 그림을 그리지 않는걸까.

저 단순해 보이면서도 갖출 것을 다 표현하고 있다.

선이 예쁘고 원근감이 잘 받아들여지고 있어.

아, 예술이다.

다시 작품의 리뷰로 돌아간다.

주인공인 덴마가 기계개한테 쫓기는 것으로 작품이 시작되었다.

어린애의 몸에 갇힌건 독자가 청소년, 남성임을 감안했기 때문일테고.

1화만에 주인공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사정으로 이 꼬마가 되었는지, 그리고 이 세계관에 어떤 힘이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자연스럽게 시대상이 어떤지도 독자가 짐작하게 되었지.

질량등가치환이라는 힘을 지닌 소년 덴마에 대한 이야기는 이번 부에서는 별로 중요한게 아니고.

개 옆에 남겨진 해골의 사정이 메인디쉬다.

해골은 한 가정의 아버지였다.

용병이었던 그는 목숨을 걸고 전선에 나가 싸운 수 년만에 돌아왔다.

그런데 가족들은 일상을 보내었지.

자신의 귀환이 별 대단한 이벤트도 아니라는 듯이 연락을 하라고 하질 않나.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겠다지 않나.

참 뻔뻔하지 않나?

그동안 당신들이 먹고 살 수 있었던건 용병으로 목숨걸고 싸운 목숨값이었는데.

그런 아버지를 반겨주는건 애완견 한 마리.

그 외로움과 부당한 대우 속에 급료조차 지연되고 있어.

가정내 불화는 당연했지.

가족들이 어떤 일상을 보냈든 전쟁터에서 지낸 자신보다 더 험했겠냐고?

그걸 반이라도 이해는 하면서 가족을 맞이해준 거야?

다들 자기 밖에 몰라.

소통의 부재가 과연 아버지의 몫이었을지 다시금 생각해봐야 한다.

하지만 가정 내 정치도 그런거라고.

옳고 그름따위는 중요하지 않지.

손해를 더 봤더라도 그걸 묵인하면서 상대를 대해줘야 했어.

당신들의 부당함을 떠들어본들 아버지의 입장같은거 남이거든.

그가 해야했던건 가정의 결속을 위한 가정내의 정치.

정치를 못했으니 전쟁이 되는 거야.

그들 스스로 자신의 어려움을 깨닫도록 만들어야 했다고.

급료의 미지급에 역병까지 돌고 엄마는 죽고말아.

아버지는 유일하게 자신을 반겨주던 개 한마리를 구하는데 막대한 돈을 써버리지.

아들은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떠났지만 그 이주비도 아버지의 것 ㅋㅋㅋㅋ.

아버지의 목숨값으로 살아난 아들은 살아서 아버지를 증오하는가.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감성에 뇌가 미쳐버린 결과다.

본인이 저질렀던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눈을 돌려버려.

뒤늦게 후회해봤자 죽은건 죽은거고.

아버지란게 참 힘들구만.

행성 통치위의 정치는 지극히 적절했다.

용병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역병으로도 불만이 고조되었을 상황에서 역병의 문제를 용병의 탓으로 돌렸으니까.

물론 간접적인 소문으로.

본래라면 둘의 문제를 혼자서 감당해야했지만 이를 엮어서 한꺼번에 처리했어.

역병의 불만은 용병에게 쏟아지고 시민들이 연합해 정부에 대항하는걸 막아냈다.

시민들을 분열시키는 성과는 말할 것도 없지.

이게 두 문제를 하나로 엮어서 해결하기다.

덴마 Denma 1
덴마 Denma 1
논검20. 나이트런-프레이


단행본으로 사서 봐도 가독성은 좀 구리다.

처음 봤을 때는 잘 그렸다는 인식이 별로 없었는데 이후를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잘 그린 편이지.

그림은 볼만하다.

행성을 넘어 성계단위로 넘나들며 괴수와 적대한다는 설정.

주인공 앤 마이어는 퇴물 기사 전술 어드바이저.

전장에서 괴수와 맞서는 것으로 시대의 참혹함을 표현해주었다.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모두가 살아간다는 편의적인 해피해피가 없다.

이제야 전선 좀 안정되고 은퇴하나 생각하며 돌아가려는데 아린과의 연락두절.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괴수의 침입에 질의 동생이 죽는 것으로 독자는 음 좆 되고 있군.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쪽만이 아니라 영식이 출몰하고 그 강하다는 기사님들이 허수아비마냥 썰려나간다.

앞으로 맞설 적에 대한 에피타이저로는 적절했다.

누가 주연급으로 강한지도 알려줬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진다.

앤은 이 사건이 어떻게 된 건지 알게 되었다.

자신의 절친 프레이가 괴수와 함께 거니는 모습을.

프레이가 이 모든 죽음의 원흉이라는 것이다.

드라이가 취한 조치는 앤을 가두는 것.

좋아하는 여자 지킨다는 생각도 있겠지만 그녀의 돌발 행동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것도 있었을테지.

프레이와 친했잖아.

프레이랑 붙어버리면 인류는 어떻게 하라고?

그렇지만 반대편에서는 앤을 믿어주는 녀석들이 있었어.

그녀에게 이 문제를 해결을 기대하는거지.

직접적으로 말은 안했지만 프레이를 죽여주길 바랬을거야.

겉으로 어떻게 포장하든 인류를 위해 네 친구를 죽이라고 지지한거지.

앤은 그 지지에 힘입어 아린으로 향할 수 있었고.

물론 거기에 자신의 의지는 있어.

앤을 어떻게 믿느냐의 차이가 문제가 된다.

내면을 서술해줘서 얘가 막으러 간다는걸 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3자의 입장에서 앤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었을까.

프레이를 죽이지 않고 함께한다는 선택지가 불가능한 것도 아닐텐데.

그녀의 광적인 박애주의에 휘말려서 동조한거지.

사실 엄청 위험한 행위이다.

한 인류의 운명을 결정지을지도 모르는 짓을 개인적인 감상과 정에 치우쳐 결정해버렸어.

작가가 좀 변태적인 기질이 있는거 같다.

아린에 도착하기 전에 친구를 희생해야 했고 거기에 기도하는 어머니라니.

뭘 좀 아는군.

앤이 아린에 도착한 뒤에도 사람들의 희생은 계속된다.

사람들이 다치고 죽고 희망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가닥 희망이라고 남은건 퇴물기사 앤 마이어.

그녀 혼자서 대중의 모든 기대를 받으며 프레이와 싸우러 간다.

막상 이렇게 쓰면서 보니까 스토리가 뭐 없긴 하네.

만화는 전투씬으로 떼울 수 있어서 다행이지.

소설에서 그러면 재미 없는거 같다.

그림 작가 구해서 그리는게 독자 입장에서도 고맙겠지.

실제로 누가 쎄고 누가 대단하고 그런게 뭐가 중요하담?

아무튼 전투씬 잘 봤구요.

앤은 희생을 발판삼아 프레이의 앞에 도착하게 된다.

여기서도 ㅈㄴ 죽었어요.

이름 아는 기사들을 언급하며 앤은 프레이를 죽여야 할 당위성을 찾으려 한다.

품에 안긴 그 순간에도 얼마나 망설였을지는 본인만이 알겠지.

마침내 그녀에게 검을 겨누며 사람들이 죽었다고 말한다.

그게 널 죽여야 할 이유라고.

스스로 그걸 납득했는지는 모르겠다.

프레이를 베어넘긴 뒤에 속죄하듯이 자살을 선택했던건 무슨 의도였을까?

스스로 알고 있는 거다.

프레이가 수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지라도 자신은 프레이를 죽여야 한다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자신의 신념처럼 오기를 부렸지만 프레이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고.

프레이에 대한 사죄로 죽음을 택한다는건 설득력 있는 해석이 아니다.

어느정도 있더라도 주된 이유는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레이를 죽인 자신이 잘못되었다.라고.

개인적으로는 이때 뒤지는게 좋았는데 살아나버렸다.

살아난 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그래서 이뤄진 일이 뭔지 봐라.

앤이 인류를 구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봤을때는?

사람들의 호의와 기대에 떠밀려서 어머니이자 친구인 자를 죽였다.

스스로를 원망하고 죽지 못했다면 그 원망은 어디로 향하는 것이 자연스러울지 모르겠는가.

이후 앤의 행보에 대해 나는 이걸 염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내심 인간을 증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박애주의적인 행동을 보라고?

사람을 구하겠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 모순이 느껴지지 않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데에 박애주의적인 명분이 필요했을 뿐인거 아닐지.

더 적은 수를 죽여서 많은 수를 구한다 이딴 공리적 논리가 중요한게 아니다.

왜 죽어야 하고 왜 살아야 하는가를 정의하라.

숫자가 선악이나 옳고 그름을 정하는게 아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도덕에 논리를 갖추어야 한다.

편의적인 주관으로 누굴 살리고 죽일지를 결정할 권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앤이 프레이를 떠올릴 때마다 어떤 원한을 떠올릴지가 궁금하다.

자신이 프레이에 맞서도록 부추긴 이들을 긍정해줄까.

자신과 똑같은 공범으로 증오하지 않을까.

끝없이 고민할 과제겠지.

내적 갈등을 겪다가 내릴 결말이 궁금하다.

아무튼 그녀는 괴수의 딸이다.

벗어나있든 아니든 사람을 죽여야 할 이유를 만들어 가졌을지도 모르지.

궤가 시켜서 하는게 아닌 본인의 의지로.

지가 가겠다고 해놓고 이제와서 사람 탓하는게 웃기지만 ㅋㅋㅋㅋ

그런 아이러니가 악역의 매력이다.

감성으로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녀석은 감성으로 사람을 미워해도 어쩔 수 없는거라고.

나이트런 프레이 오리진 1~7 세트 - 전7권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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