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검29. 도덕의 계보
2024-12-14 22:23:23
서문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도덕관념을 해체하는 책이다. 우리가 당연시 하는 것, 상식에 전복이다.
동정은, 자기희생은, 자기부정과 같은 비이기적 가치는 무가치하다. 경멸스럽다. 이런 도덕에는 가치가 없다. 선한 사람이 퇴보를 가져오고 악한사람이 진보와 복지를 가져온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어쩌겠나? 선이라고 말하는게 삶을 더 저열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선과 악, 좋음과 나쁨
1. 설령 진리가 반그리스도교적이고 불쾌하더라도 진리를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라.
2.비이기성을 선한것으로 보는 긍지는 마땅히 꺾여야 한다. 무엇이 좋음인가는 호의를 받은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은 탁월한 사람들에 의해 비롯된다. 저급한 자가 자신의 행위를 좋은 것으로서 최상으로느끼고 평가하는것이 이전의 도덕이다. 허나 좋은 것은 고귀한 자로부터 강한 자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그들은 탁월한 존재가 되고싶어하는 의지가 있다. 더 높은 지배종족이 하층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속적이면서 지배적인 감정이 탁월함과 저열함이라는 대립의 기원이다.
오히려 이기적 비이기적이라는 대립이 인간의 양심을 짓누르고 가치판단을 몰락시킨다. 이것이 현대 유럽에 정신이상처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3.좋음의 기원에는 역사적 근거가 없을뿐더러 심리적 모순도 있다. 비이기성 행위의 공리성이 그 행위에 대한 찬양의 근원이고 그 근원은 망각되었다지만, 실은 공리성은 모든 시대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던 것이다. 망각되기는 커녕 의식에 새겨진 것이다. 이를테면 선이라는 개념 자체가 공리적이고 합목적적인것으로서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공리성에 의해 증명되었다.
4.현대 민주주의적 선입견이 기원에 대한 물음까지도 영향을 끼쳤다. 진리를 왜곡하고야 만 것이다. 현대 정신의 평민주의가 과학을 왜곡하는 꼴을 보라
5.존재하는자, 귀족계급의 지칭이다. 참된자로도 의미가 변환되어 거짓말을 잘하는 평민과 구별되는 말이 되었다. 평민을 가리키는 단어는 저열했고. 그는 단어의 기원으로부터 계층의 우월함과 저열함을 구분하려 했다. 신은 구트 고트와 어원이 비슷한게 아닌가 추리하면서. 하나의 편견이라고 생각하지만.
6. 과거의 긍지에서 강하고 용감함이 추앙된것은 정복자가 지배계급이 되었기 때문이다. 피지배계급은 굴복하는 것을 선으로 삼았지만 이는 역시 정복자의 입장에 있어 긍지없는 추악함이다.
성직자적 귀족주의는 자신들의 자유정신에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만들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이들의 처방은 완전한 오진이다. 금욕 단식같은 황야로의 도피가 그러하다. 사람들의 감각을 적대시하는 자기최면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오만 복수 명민함 방종 사랑 지배욕 덕을 비롯한 모든 것을 위험한 것으로 만들었다. 두 영혼을 비교하라. 기사는 자신을 패배시킨 자에게 인정하며 경의와 존경을 바치기도 하지만 성직자는 교활하고 위선적이다. 억압하는 자를 악한이로 단죄하면서 자신은 민중을 사랑한다고 자처한다. 실은 이기적이고 권력을 갖고 싶어 발버둥치는 위선자들이! 신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거짓말을 저지르며 귀족으로부터 권력을 빼앗는다. 그리고 자신이 지배자가 된다. 민주주의자도 마찬가지다. 만민은 동등하다고 지껄이면서 그들의 지지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을 뿐이다.
7.도덕에서의 노예반란임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2000년 전부터 이미 그러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에게 전쟁은 불리하다. 따라서 그들은 가장 정신적인 복수로 승리를 거두었다.비참한 자가 선하고 가난하고 무력하며 비천한 자가 섡하다고, 고통과 가난 추함이 신의 축복이며 행복이라고 도덕적인 반란 공세를 이어왔다. 현실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8. 그들이 2000년의 승리를 이루기 위해 저지른 짓은 유례없는 숭고한 증오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사랑. 가장 깊고 숭고한 사랑을 자라나게 했다. 증오의 뿌리로부터 가장 탐욕스럽게 피어난 사랑 그것이 예수다.
예수의 진정한 정신은 제도화된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다르다. 그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라 보았고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악에도 저항하지 말고 모든 싸움을 관두길 바란다. 그 결과 만들어지는 완전한 행복을 발견하라고 말한다. 완전한 행복은 천국이 아닌 우리 마음속에 있다. 그는 내적 실재만을 실재, 진리로 간주한다. 천국과 같은 것도 공간적인 차원이나 죽음 후에 오는 시간적인 차원이 아니다. 그는 마음의 완성을 바랬다. 총체적으로 변함이 없는 행복의 마음상태. 영원과 완성의 느낌이다.
그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다. 중상과 탄압에 저항하지 않고 분노하지도 권리를 변호하지도 않았고 죽이려는 자들을 사랑했다. 그가 인류에 남긴 것은 이런 삶의 모습이다.
바울은 반대다. 그는 증오와 환상의 논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예수를 이용해버렸다. 지배층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혀 믿지 않는 자를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교리를 만들어낸다. 이후 부활을 날조하고 피안세계로 도피처를 만들어 놓는다.
그는 힘을 가지고 싶어했으며 영혼의 불멸과 최후의 심판같은 수단만큼 쓸만한 것도 없었다. 그는 신의 권력을 위탁받았으니 성직자의 지배에 복종하는 시대를 만들었다.
뭐, 예수의 이념도 사랑의 복음이다. 강력한 자들에 대한 원한을 사랑으로 승화시켰을 뿐.
보이지 않는가? 타락과 악취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린다는 그 잔인성이!
9.민중, 천민이 이긴시대에서 니체의 주인도덕은 시대착오적이 되어버렸다. 이 천민 도덕의 승리는 멈출 수 없을 것으로 보이며 이제와서 교회 없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라. 오히려 교회는 민중의 승리를 방해하는것이니 도움이 되는것 아닌가 묻는 가짜 자유자가 말한다. 허나 니체는 이 가짜 자유자가 외치는 민주주의 같은 것이 그리스도교에 근본을 두고 있다는 것에 진정한 자유 정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10.원한 자체를 창조하고 가치를 만들어내면서 도덕의 노예반란이 시작된다. 상상의 복수를 하는 것으로 손해를 보상하고자 하는 원한. 고귀한 도덕은 자신의 의기양양한 긍정에서 자라지만 노예도덕은 외부적인 것, 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한다. 이런 부정이야말로 창조적 행위다. 노예도덕이 발생하려면 적대적인 외부세계가 필요하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필요한 것이다. 근본적인 반작용인 셈이다. 고귀한 도덕은 스스로 행동하고 성장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기 위한 대립물을 찾을 뿐이다.
때에 따라 고귀한 가치 평가가 잘못 파악되면서 왜곡되면 평민과 하층민 영역 자체를 거부해야 하는 것으로 오인한다. 저급함으로 지정할 부분은 그쪽이 아닌, 저급함과 범속함 저열함인데 말이다.
고귀한 자는 행복으로부터 행동을 분리할 필요가 없지만 원한을 가진 이들은 솔직하지도 순진하지도 않고 곁눈질한다. 자신을 왜소한 존재로 만들어 생존 조건을 중시한다.
자신의 적 재난 비행자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원한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면 마음을 파고든 벌레도 한 번에 털어버린다. 이런 고귀한 인간은 적에 대해 얼마나 외경심을 가지고 있나! 이것이야말로 사랑에 이르는 가교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적을 만든다. 경멸할 점이 없고 존경스러운 자만을 적으로 삼는다! 원한에 찬 사람은 사악한 적을 만들어내는 것과 대조적이지 않나.
11.고귀한 인간은 좋음이라는 개념을 자발적으로 생각해내고 나쁨을 만들지만 노예도덕에서는 악함을 만들어내고 좋음을 뒤에 만들어낸다. 원형이 나쁨이고 노예도덕을 구상할 때의 본래적인 행위이다. 그럼 여기서 바라보는 나쁜 자는 본래 누구인가? 고귀한 자 강력한자 아닌가. 이들은 원한에 차서 변색된 눈으로 왜곡해 그들을 악으로 단정지었다. 그들에게 방화와 능욕 고문을 자행한 뒤 의기양양하게 귀환하는 괴물이다.
황금시대 크로노스가 우주 지배 풍요롭고 근심 없는 삶
은의 시대 제우스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는 어린이같이 순진하고 우매, 무모한 자들
청동 시대 전쟁만을 일삼았다.
영웅시대 영웅들의 시대로 덕이 높았지만 전쟁이 벌어짐
철의시대 불안한 삶을 산다. 우정과 신뢰가 없다. 사악한 자를 칭송한다. 수치도 없고 거짓 맹세를 하며 불행을 보고 즐거워한다.
인간이라는 맹수를 가축으로 길들이는 것이 문화의 의미라면 고귀한 종족은 치욕스러운 것이고 반작용과 원한은 참된 도구로 봐야할 것이다. 이러한 문화의 도구는 인류의 치욕이며 발전을 저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닌, 고통받고 있기에 인간에 혐오감을 느낀다.
길들여진 인간을 목표이자 정점으로 자부하며 더 높은 인간으로 삼았기에 인간을 혐오한다. 범용한자는 자신을 비교적 삶에 성공한 자, 견뎌낼 수 있는 자, 삶을 긍정하는 자로 느끼기에 우리는 그러한 인간을 혐오한다. 그들은 실패했고 병들고 피로한 자들이다.
12. 그리스도교적이 되어간다는 사실에 우리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잃어버렸다. 동시에 사랑도 인간을 향한 의지도 상실한 채 피로한 모습만 남아있다. 이것은 니힐리즘이다! 인간이 무게와 존엄성을 상실했다. 다름아닌 너희가 악으로 규정한 고귀함 때문에!
13.우리는 언어의 유혹에 사로잡혀 주체라는 위조된 기형아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무언가 발생한 현상에 대해 주체가 무조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원인이 말이다. 복수심과 증오도 그렇다. 지배자에 대해 존재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지게하는 권리를 획득해버린다. 선한 인간이 되어 강함을 요구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떨떠름한 진실은 이것이 화폐위조과 같은 자기기만이자 체념이라는 것이다. 약한자의 본질이다. 그걸 도덕으로 미화했을 뿐. 거짓을 신성한 것으로 만드는 자기보존과 자기 긍정의 본능에 사로잡혀있다. 약함자체를 자유롭게 선택한 것으로 해석하고 공적으로 해석하는 자기기만은 주체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확고해진 것이다.
14.노예도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거짓말과 사탕발림이다. 약함에서 비롯되는 것을 공적이라는 식으로 거짓말을 한다. 보복하지 못하는 무력함이 선량함으로 바뀌고 겁에찬 비굴은 겸손이 된다. 증오하는 자에 대한 복종은 순종으로 바뀐다. 비겁하다! 비공격성! 그것이 인내라는 미명에 덕으로 불린다. 복수 할 수 없음이 복수하고 싶어하지 않음, 용서라고까지 불린다. 원수를 사랑하라면서 땀을 뻘뻘 흘린다.
그 비참함이 신이 내린 영예이고 시련 훈련이라 생각하며 음침한 날조를 의심조차 안한다. 그러고는 언젠가 황금이 되어 돌아오길 바라며 축복이라 부른다. 기분나쁜 공기다. 이상이 만들어지는 거짓의 악취다.
그렇게 증오와 복수를 가슴에 품고 자신들을 선하며 정의롭다 말한다. 그들이 갈망하는 것은 보복이 아닌 정의의 승리다. 그들은 불의와 신에 대한 부정을 증오한다 믿으며 신을 부정하는 자로부터 승리하려한다. 그것은 정의로운 신의 승리다. 지상에서 사랑해야할 것으로 남은 것은 사랑하는 형제들이다. 그들은 환상을 신앙 사랑 희망 속에서 신의 나라의 도래라고 부른다.
15.신의 나라. 그것은 그들이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는 나라이다. 그러면서도 신이 지배한다고 부르는 겸손을 보라. 천국에 있는 자들은 저주받는 자들의 벌을 보면서 자신의 축복을 기쁘게 여기리라. 신앙에 의해서.
16. 로마인들은 유대인을 증오의 죄를 지은 자로 간주했다. 이에 반해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해 복수심의 폭발을 기록했다. 오늘날은 유대의 승리다. 르네상스에 잠깐 로마의 승리가 올 뻔 했으나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부흥하고 프랑스 혁명과 함께 더 결정적이고 깊은 의미의 승리가 거두어졌다.
프랑스의 고귀함은 민중의 원한 본능 아래 붕괴된다. 다수의 권리라는 원한에 찬 허위적 구호는 인간을 저하시키고 비천하게, 평균화하며 몰락시켰다. 이에 대해 소수의 특권이라는 가공할만한 반대구호가 훨씬 더 강력하게 퍼져나갔다. 나폴레옹이 나온것이다. 그에게서 고귀한 이상 자체가 육화된 문제로서 살아났다.
17.도덕이 무엇을 위해서 가치 있는가를 보자. 타인을 위함인가 나 자신을 위함인가를 명확히 하는 것이 도덕의 목적이다.
죄 양심의 가책 및 기타
1.생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억보다는 망각이다. 망각해야 특정한 것에 의식을 집중하고 건강해질 수 있다. 기억은 오히려 건강을 방해한다.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동물을 기른다는 것이야말로 역설적인 과제 아닐까.망각할 수 있기에 과거에 짓눌리지 않고 현재를 즐기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기억이란 잊지 않으려는 능동적인 의욕이고 의지의 본래적인 기억이다. 미래를 자신의 뜻대로 형성하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예측될 수 있고 규칙적이며 필연적인 존재가 되어야한다. 그래야 약속하는 인간이 그러듯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거다.
2.약속을 지키는 자유로운 의지의 소유자는 책임을 지지못하는 자보다 탁월하다. 신뢰 공포 경외를 받을만 하다. 그는 자신의 가치척도를 가지고 타인을 존경하기도 경멸하기도 한다. 약속지키는 사람은 존경하고 지키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허약한 이들은 걷어차리라. 책임이라는 특권에 대한 자랑스러운 인식은 그에게 가장 밑바닥까지 침투한 본능이다. 운명을 지배하는 이것을 양심이라 부를 것이다.
3. 양심이란 자신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것. 뒤늦게 성숙하는 후천적인 자질이다. 고통을 주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라는 낙인식의 기억술. 공포가 오래되어서도 각인되어있는 이유다. 금욕주의도 마찬가지다. 잊혀서는 안될 고정적인 것이 되려면 고통을 새겨야했다. 고문과 형벌을 통해 하지 않겠다는 인식을 기억에 새긴 것이다. 그렇게 이성에 이르렀다. 이 좋은 것을 위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렀는가!
4. 양심의 가책이란 어떻게 나왔는가. 형벌은 의지의 자유와 부자유에 어떤 상관 없이 보복으로서 발전해왔다. 정의감은 그 후에 나온거다.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었기에 처벌을 받아야한다는 것은 후발적으로 탄생된 명분이다. 과거에는 책임을 져야한다는 이유로 형벌을 받지 않았으며 그저 가해자의 분노를 풀기 위해 가해진 것이다. 손해와 고통의 등가라는 것은 채권 채무자 사이의 계약 관계에 의한 것이다. 매매 교환 통상 교역이라는 근본 형식 말이다.
5. 이 계약관계에서 기억을 신는 것이 문제가 된다. 약속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의무나 책임으로서 양심에 새기기 위해서 소유하고 있는 다른 것을 저당잡는 계약을 한다. 그것은 가족이나 신체, 자유, 생명등이 될 것이다. 채권자는 재무자에게 모욕과 고문을 가한다. 그러면서 형벌로 손해에 대한 일종의 배상이나 보상의 쾌감이 된 것이다. 일종의 지배권에 참여하는 것이다. 채무자가 경멸당하고 학대받는 것을 보는 우월감. 배상이라는 것은 처벌을 지시하고 요구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서 성립한다.
6.따라서 죄 양심 의무 의무의 신성함은 채무법에서 생겼다. 피로물든 근본이 보이지 않는가? 그 정언명령조차도 동기를 따지는 것에 이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선한 의도에서 행위를 따지는 것은 잔인함의 철학이다. 고통을 가하는 것은 진정한 축제이다. 복수를 한다는 것은 쾌감을 느끼는 데에 본질이 되지 않는다.
기쁨을 주는 것은 잔인함이었고 사심 없는 악의가 정상적인 속성이다. 지금도 잔인함에서 가장 근본적인 기쁨을 느끼고 있다. 사형집행과 고문 이단자의 화형 없이는 축제를 상상도 못하는! 타인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는 건 유쾌한 일이다. 고통을 가하는 것은 더욱더 유쾌하다. 형벌의 축제성을 보라.
7.인류의 잔인성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던 시대가 염세주의자들의 시대보다 명량하다. 사람들은 남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을 없애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매력과 유혹을 발견했다. 허나 이것은 세련되게 승화되었다. 비극적 동정이라던가 예수에 대한 동정이 그 예다. 사람들이 고통에 격분을 느낄 때 대상이 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닌 의미 없는 고통이다. 죄지은 자에게 고통을 내리는 것은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순직한 이들에게 의미없는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고통을 제거하고 부정하는 방법이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덕행이란 것은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구도 보지 않는 재난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신과 같은 관찰자를 발명해낼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잔인함의 즐거움은 신을 기쁘게 만들어주었다.
지상의 무대에서 형벌과 같은 고통의 축제는 사라져서는 안될 것이다.
8. 죄의식과 의무의식은 채권 채무에서 비롯되었고 인간의 원초적인 사유 자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인간이란 가치를 재고 평가하는 존재.그렇게 감정의 맹아는 권력을 측정하고 계산하여 법적 권리라는 원시적인 사회복합체로 옮겨졌다. 모든 것은 변상될 수 있다.는 명제에 도달하며 정의와 관련짓고 힘이 열등한 자들에대해 상호간에 조정을 강제하는 선한 의지로 합의되었다.
9. 사람들은 공동체 내에서 편익을 누린다. 공동체 밖의 인간의 적대적인 행위를 누가 걱정하나? 비참이란 본래 망명이나 추방이다. 공동체에 대한 서약이 파기될 경우 일어나는 것은 최대의 변상을 받아내는 것이다. 범죄자는 상실하고서야 이러한 혜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기억하게 된다. 쫓겨나서 야만적이고 무법적인 형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10. 공동체가 힘이 세질수록 위법행위는 그리 심각해지지 않는다. 채권자가 부유해져서 인간적이 된거다. 그리고서 고통을 관대하게 넘어가는 것을 정의인양 자비라고 부른다. 자비가 강자의 특권이란것에 적절하다. 법을 넘어 존재하는 방식이다.
11.반대로 원한이란 복수를 정의의 이름으로 신성화한다. 정의의 근본부터 피해감정에 발전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이처럼 반동적 감정의 명예를 회복시키려는 시도가 일어날 것이다. 증오 질투 시기 불신 숙원 복수를 원한의 정신에서 발생했다는 과학적 공정성은 이 반동적 감정보다 높은 생물학적 가치가 있다.
정의의 정신이 정복한 최후의 영역이 반동적 감정의 영역이다.
최고의 원숙함이란 자신에게 해를 가한 자에 대해서도 공정한 태도를 지니고 객관적인 심판을 하는 것. 능동적이고 지배적인 인간은 반동적 인간보다 정의에 가깝다. 양심의 가책을 누가 찾았겠는가.
법이 제정되고나서야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이 존재한다. 법과 불법에대해 그 자체로 이야기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삶이란 그 근본기능에서 파괴를 기능하고 그 자체로는 불법이 아니다. 법은 생명의지를 부분적으로 제약하는 것이라는걸 인정해라. 인간의 미래를 암살하고 삶의 절대적인 원리를 파괴 해체하는 것이다. 그렇게 비개인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훈련된다.
12. 도덕계보학자들은 형벌에서 복수나 위협같은 목적을 찾아내고 그것을 형벌의 출발점으로 간주한 뒤 문제가 끝난줄 안다. 허나 법의 목적이란것은 맨 마지막에 고려되어야 한다. 유용성에 그대로 목적이 있다고 믿는게 사람이지만 모든 유용성과 목적은 힘에의 의지가 더 약한 자를 지배하여 기능의 성질을 각인시켰다는 증표일 뿐이다. 발전이란 것도 목적을 향한 진보가 아니며 독립적인 채로 힘에의 의지가 제압한 결과에 불과하다.
니체는 진보를 더 강한 인간 종족의 번영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특이체질인 지배자 혐오주의는 자신을 정신적인 것으로 위장하여 겉보기에 객관적인 과학까지 침투하고 있다. 이것은 능동성의 거세다.
뭐, 이런건 받아들여지지 않고 모든 사건의 절대적 우연성과 기계론적인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려 하지만.
13.형벌에서도 마찬가지다. 형벌은 지속적이것이 있고 유동적인 것이 있다. 형벌을 목적으로하여 고안된 것으로 생각했지만 의미에 대해서 말하자면 여러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종합적이다. 정의할 수 없는 통일체다.
14. 형벌의 효용성을 인정한 것은 사실이다.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양심의 가책이나 회한같이 정신적인 반응도 일으키는 실질적인 도구다. 라고 보았지만! 니체는 다르게 생각한다. 형벌은 사람을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들고 냉혹하게, 저항력을 강하게 한다. 양심의 가책이란 수형자들에게 극히 드물게 생긴다. 오히려 죄책감의 발달을 저지했다. 재판관들도 범죄행위를 그 자체로서 비난하거나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형벌이 머리 위에 떨어져도 범죄자는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저 끔찍한 자연사건에 불과하다.
15.선과 악은 인간의 상상력에 비롯되었으며 양심의 가책이란 기쁨에 대립되는 것. 슬픔이다. 범죄자들도 어떤 것이 예상치 못하게 잘 안되었다고 느낀 것이지 그런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라고 느끼지 않는다. 숙명론적인 태도로 형벌을 받은 것이다. 형벌의 효과는 인간을 영리하게 만들고 기억을 연장시키는 것이다. 형벌은 인간을 길들이기는 하지만 더 선한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교활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겠다.
16.양심의 가책은 변화의 압력에 걸린 병이다. 그 변화란 인간이 사회적인 평화의 벽에 갇혀 있음을 깨달았을 때 일어난 변화다. 간단한 일조차 버겁게 느껴진 바다거북의 육지생활과도 같은 거다. 통제본능을 상실한 상황에서 빈약한 기관인 의식에 의존하게 되었고 짓눌리는 불쾌감, 비참함이 도래한다.
그릭고 이 본능들은 내면을 향하며 만족을 추구했다. 영혼이라고까지 부르면서!
양심의 가책이란 거칠고 자유롭고 방황하는 인간의 적의 잔인함 박해가 내면화된 것이다. 소유자를 부수는 것! 스스로를 고문대에 올리는 자기학대다. 이건 질병이다. 폭력으로부터 떨어진 인간의 결과다. 새로운 생존 조건에 빠졌을 때 느껴야하는 쾌감과 공포의 결과다. 인간이란 존재는 목표가 아닌, 하나의 길, 우발적인 사건과 다리 등 세계목적이 없는 주사위 놀이에 있다.
17. 국가는 가공할 폭정으로서 출현하여 작업을 계속 진행한 결과 형태를 이루었다. 말이 국가지 국민에게 발톱을 들이대는 전투조직이다. 이런 국가의 지배자이자 명령하는 폭군에게 계약으로 비롯되었다는 몽상은 가당치도 않다. 이 본능적 예술가들에게는 계약이 의미 없다. 형식을 창조하고 새기는 무서운 이기주의가 있다. 어머니가 아이에 의해 정당화되듯이 자신의 작품에 의해 모든 행위가 정당화 된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억압으로부터 양심의 가책이라는 추악한 식물이 발아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발산되고 폭발하는 이 자유의 본능이!
18. 추악하고 고통스럽지만 경시할 필요는 없다. 능동적인 양심의 가책이야말로 이상적이고 공상적인 사건의 모태로 아름다움과 긍정을 출현시켰다. 스스로에게 추하다고 하는, 모순된 것을 의식하는 것으로부터 아름다움이 만들어진다. 아름다움의 암시가 되었다. 그 덕에 희생하는 자가 느끼는 쾌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잔인함이었다. 양심의 가책이야말로, 자신의 학대의지야말로 비이기적인 것의 기원이 되었다.
19.양심은 임신과 같은 종류의 병이다. 그 결과 내면성에 입각한 서양문화가 태동했다.
종족은 조상의 희생과 업적의 덕택에 존속되었고 이 업적에 대해 갚을 확신이 있다. 조상은 복종을 만들었다. 법령과 명령으로. 조상에 빚을 지고 있다는 의식은 조상의 힘에 대한 공포, 종족이 강해질수록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신으로까지 변형된다.공포의 기원일 것이다. 결국 고귀한 종족은 자신에게 나타난 속성, 즉 고귀한 속성을 이자까지 붙여서 조상 내지는 신들의 귀족화와 고귀화까지 이루어내었다.
20. 신성에 대한 채무는 혈연의 가문 공동체가 몰락한 이후에도 남아있다. 세습귀족과 마찬가지로 종족신과 부족신 등 빚의 부담과 상환의 열망이 유산으로 이어져왔다. 지상에서 신 개념과 감정이 성장하며 채무도 성장한다. 인종간의 투쟁으로 세계제국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보편적인 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으며 전제정치는 일신교의 추종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반대였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부채의식도 쇠퇴했을 것인데. 무신론의 완전한 승리는 이러한 부채의식의 해방으로부터 이루어질 것이다. 부채의식도 죄의식도 없는.
21.양심의 가책을 신과 연루시키는 도덕화는 존재한다. 빚과 의무라는 개념의 도덕화와 함께 빚을 변제할 가능성도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이런 채무는 누구를 향하는가? 채무자는 빚을 상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속죄는 불가능하다는 사상이 싹튼다. 인간의 1원인인 인류의 시조에게 악의 원리가 투입된다. 선악과와같이 자연의 악마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이 인간의 죄 때문에 희생한다. 채권자가 자신의 채무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믿어야할까?
22.내면으로 향해 칩거하게 된 동물적 인간은 국가 안에 감금되어 자학하는 잔인성이 생겨난다. 남에게 고통을 분출할 자연스러운 출구가 막혀 양심의 가책을 개발했다. 신에 대한 죄라는 생각이 고문의 도구가 되었고 신을 떨쳐버릴 수 없는 궁극적 대립물로 보게 된다. 정신적인 잔인성을 가진 의지착란은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의지다. 자신이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떠한 벌도 자신이 죄를 보상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의지다.신성한 신을 세워 자신의 절대적 무가치함을 확인하려는 의지다. 이 고문과 부조리에 얼마나 사랑의 외침이 울렸는지 안다면 견딜 수 없어 고개를 돌리고자 할 것이다. 세상이 정신병원이다!
23.그리스 신은 고귀하고 자주적인 인간의 모습이 있다. 자해하지 않았고 양심의 가책을 멀리했다. 신들은 재앙의 원인으로 어리석음 무분별을 인정했지 그것 자체가 죄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이 신들은 더 고귀한 일을 했다. 죄를 떠맡은 것이다. 신이 기만했다는 식으로 정당화에도 이용된 것이다.
24. 니체의 이상을 세우기 위해서는 현대의 성전을 부숴야한다. 이 시도에는 당연히 적을 만들게된다. 선량한 이들과 적대한다. 준엄하고 고매하게 스스로를 대하는지 드러내는 것보다 더 사람들을 모욕하며 환멸을 느끼게 하는게 있을까? 허나 위대한 건강을 위해서는 숭고한 악의도 필요하고 위대한 건강이 필요하다. 훨씬 강한 시대가 오면 위대한 사랑과 경멸의 구원자가 찾아올 것이다. 현실에 뿌리내린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다. 안티크리스트이자 반허무주의자. 신과무를 초극한 그는 온다.
25.이것은 무신론자인 초인, 미래를 짊어질 더 강한자가 할 일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1.철학자에게 금욕은 높은 정신성을 성립시킬 직감이나 본능이다. 여성에게는 매력을 증진시킬 장식물이다. 도태인간들에게는 선한인간으로 보이게 하려는 핑계거리이고 이들은 성스러움을 가장한다. 성직자들에게는 권력을 위한 도구. 성자에게는 영예에 대한 욕망이자 광기의 형식이다. 공허에 대한 공포로 말미암아 인간의 의지는 목표를 필요로한다.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신이나 열반같은 무를 의욕하는 것이다.
2.금욕주의적 이상이란? 정결과 관능의 대립으로 인한 삶의 불균형과 모순이야말로 사람들을 살도록 유혹한다. 한편 도태인간들이 자신의 대립물만을 보면서 정결을 숭배하는 것은 비극적이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정결을 숭상하나? 여기에 무엇을 위함이 없다. 바그너에게는 삶을 살도록하는, 정결과 관능 두 가치의 찬양에 의한 삶의 의지가 있지만 돼지들에게는 없다!
3.바그너의 정결주의에 홀린 바보들은 어떤가? 파르시팔이라는 바그너의 작품에는 금욕주의적임 바보 주인공이 나온다. 바그너는 말년에 이런 금욕주의적 이상에 빠져서는 그리스도교가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는 한때 신은 인간의 상상물이며 사랑과 이성등 자신에게 존재하는 위대함을 투영시킨 존재라고 말했었는데 말이다.
4. 예술가란 자신의 작품을 위한 토양에 불과하며 작품을 즐기기 위해서는 잊어버려야하는 존재이다. 예술가를 작품과 동일한 것인양 혼동하지 마라. 예술가가 진정으로 그런 존재였다면 그런 것을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그너도 아마 현실적인 것에 손을 뻗었고 그러한 시도는 무기력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니체같은 친구를 잃었다고 말한다. 그래도 그는 천성적으로 금욕주의와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5. 예술가에게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종교기관이나 철학자의 권위에 예속되어 그 요구에 따라 금욕주의적 이상을 표현할 뿐이지 천성적으로 이러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성직자는 진지하게 추구하지만 예술가는 아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 역시 금욕주의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조건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바그너도 마찬가지.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사물의 본질을 보여주기에 음악의 가치도 높다고 말했으므로 바그너도 그 엄청난 가치 상승에 의해 금욕주의적 이상을 설파하게 된 것이다.
3~5가 다 이런 이야기 별로 안중요
6. 칸트는 미에 대한 인식이 욕망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니체는 인식과 욕망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예술은 성적 욕망의 승화이다. 미의 영역에서 관람자는 개인적인 사실로 존재하고 개인적 경험을 가진다. 따라서 체험과 욕망 경이와 황홀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피그말리온만 보아도 예술의 동력은 성욕이다. 그럼에도 칸트가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여성을 무심하게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비웃어주어도 좋다. 쇼펜하우어는 성적인 관심을 억제하고 의지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미적 상태의 장점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 의지로부터 구원은, 욕망으로부터의 구원은 심미적 관조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사상에 근거한다. 그에게도 미는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기에,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관심을 충족시키기에 우리를 즐겁게 한다고.
철학자가 금욕주의적 이상을 신봉한다면 그것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다.
7.고통이란 말을 들었다고 해서 우울해지지마라. 고통을 상쇄시킬 것들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성욕을 적으로 간주하여 좋은기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지 못했더라면 염세주의자가 되었겠지. 분노가 그를 세상에 생존하도록 유혹했다.
관능에 적의를 보이는 철학자들에게 있어 금욕주의는 성직자와 같은 이상적인 덕이 아니라 철학자로 생존할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에게 관능에대한 적개심이나 금욕에 대한 호의적인 편견이 없다면 사이비다.
결혼한 철학자란 희극에 지나지 않는다.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철학자에게 있어 자신의 생존만을 긍정하는 태도이다. 세상이 망하더라도 철학은 살고 자신도 살아남으리라하는 소망을 긍정하는 것이다.
8.철학자는 성자가 아닌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다. 그들의 금욕은 피안과 미래 사후까지 바라보고 있다. 생 위로 날아다니는 동물의 유쾌한 금욕주의다. 청빈 겸손 정결. 이것이 그들에게 발견되겠지만 그들이 이룩한 덕이 아니다. 덕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가장 잘 생존하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기 위해 필요한 조건에 불과하다. 이들은 정신이 결여되어 있으면서도 있는체 연기한다. 잡다한 지식만 있지 체화된 정신, 신념이 없다. 그런 이들에게 사막으로 향하는 의지를 몸과 마음으로 견지하는건 어려운 일이다.
사막이란 독립심있는 정신이 물러나 고독하게 머물고 있는 곳. 지극히 고독한 곳이다. 정적과 냉정함 고귀함과 아울러 과거의 것을 흠모한다. 큰소리로 말하지 않고서도 말할 수 있는 것을 흠모한다.
선동가의 음색을 지닌 정신이 있다. 광신자들이다. 확신을 가지고 제약된 관점으로 대중에게 감명을 주는 광인들. 인류는 근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저들의 몸짓을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 선동가들은 말로 사유하는 자이지 사상가로서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자기 신념이 없으며 여유없이 오늘 말한다.
자기 확신을 가진 철학자는 현란하고 요란한 것을 피하고 너무 밝은 대낮을 싫어한다.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진리에 은밀한 사랑을 보내어 스스로를 덜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통해 소유당하는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 이것은 자족과 소박함을 지향하는 훌륭한 의지가 아니다. 그는 한가지 일만을 염두에 두면서 한 가지를 위해 전력을 다한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 고난을 겪는다.
철학자들의 정결은 금욕주의적 가책이나 관능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되는게 아니다. 중대한 것을 일으키기 위해 활력을 지키는 모성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관능은 소멸되는것이 아니라 변형될 뿐이다.
9.금욕이 정신성의 성장에 유리한 조건에 속한다. 철학과도 유대가 높다는걸 인정했다. 철학자에게는 스스로를 의식하게 되는데, 금단을 추구하는 욕망의 화신이라며 스스로를 경계토록 만들었다.
현대인은 무신론과 교만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신에 대하는 태도에서 교만하게 걸리지 않는다는 태도로 나타나고, 스스로에게도 유쾌하게 해부하려드니 말이다. 원죄에서 원덕이 생겨났다. 가혹함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과거에는 온순함이 부끄러웠다. 우리가 오늘날 얻은 약간의 이성과 자유의 감정은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얻어진 것이다.
10.명상적 삶의 유래. 야만적인 시대에는 개인이 힘을 느낄 경우 염세적인 판단으로 살인과 사냥등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실행에 옮긴다. 그런 이가 좀 약해지면 말과 생각으로 표출되고 예언가처럼 미신을 지어내 적들을 비웃는다. 근데 이게 자신의 상태를 반영하여 공포와 피로의 증대, 향락에 대한 경멸 등을 반영하고 악의적인 판단이 지배한다. 주술사나 사제 사상가 이런 놈들은 행동적인게 아니었기에 쫓아내고 싶었겠지만 미지의 힘을 갖고 있다고 믿어 쫓아낼 수 없었다. 두려움만큼 경멸을 받고 약하면서 두려운, 수치스러운 기원이 명상적 종족의 정체다.
철학적 정신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성직자 마술사 예언가 등의 종교인으로 자신을 가장해야했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그런 철학자가 취한 존재의 전제로 기능한다. 또한 믿어야했다. 이런 금욕주의가 없었으면 세상에 존재조차 못했으리라. 자, 이제 철학자는 종교인의 옷을 벗고 나올만큼 의지의 자유가 존재하는가?
11.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인가. 그 진지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우리의 삶을 피안과 같은 다른 존재와 관련짓는다.
우리의 삶이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한 다른 종류에 대립하고 배제한다. 그럼 금욕주의적 삶은 생존을 위한 다리로 간주된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모든 계층에서 자라난다. 성직자들은 독신으로 사는 것을 본능적으로 택한다. 이들에겐 일종의 본능이다. 그들은 힘의 원천을 봉쇄하려는 시도를 한다. 자신들이 지배자가 되려는 삶의 가장 깊고 강한 근본적인 조건을 만든다. 미나 기쁨은 질시와 악의에 찬 눈총을 보내고 희생 자학 자기희생은 호의적으로 추구한다. 금욕주의적 이상에서 십자가 같은 환희와 고통의 이미지가 미화된다. 고통 속에서 자신을 즐긴다.
12.모순과 반자연을 향한 의지에 철학이 시작되었다고 가정한다면 그 의지는 실재적인 것으로 자의를 표출할 것이다. 삶의 본능이 무조건적인 진리라 보는 것에서 오류를 찾아낸다. 육체를 환영으로 고통과 다수성도 주관과 객관이라는 개념도 격하시켜 오류라고만 하며 자신의 자아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실재성조차 부정하리라. 이건 이성에 대한 잔인한 폭력이자 승리이다. 이성으로부터 근거한 금욕주의적 경멸과 조소가 이성을 진리로부터 쫓아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근데 이렇게 다르게 보려고 한다는 것은 자신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훈련이며 준비이다. 객관성은 지성의 찬반을 통제하면서 의견을 만들어내는 능력으로 이해해야한다.
하나의 눈만을, 치우쳐서는 안되는 눈을 가질것을 요구하는 개념적 허구를 주의하라. 오직 관점적인 인식만이 존재한다. 하나의 사태에 더 많은 정념과 눈을 동원할수록 그 실체가 보일 것이다. 의지와 정념을 배제하고 보는 객관성은 지성의 거세이다.
13.삶에 반하는 삶을 주창하는 금욕주의자의 자기모순은 생리학적으로도 우매하다. 단지 외관상의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금욕은 퇴화하는 삶의 방어본능과 구원본능에서 생겨난 것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삶을 보존하기 위한 기교에 불과하다. 그들은 피안을 갈망한다는 점에서 삶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 삶에의 부정도 아니다. 삶을 보존하고자 하는 힘에의 의지에 속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삶에 대해서 말하는 부정은 더 충만한 긍정을 드러낸다. 이 파괴의 대가가 자신에게 상처입히더라도 상처가 그대를 살게 하는 식으로 강요한다.
그러니 금욕주의자가 가장 병든 존재라고 말했지만 나는 반대한다. 현대 과학에서 도파민이 발견되었거든, 중추신경계의 피로도 그렇고. 금욕은 확실히 두뇌의 창조적 활동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과학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자신의 창작욕이 성욕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면 성욕쯤은 참아도 되지 않을까?
14. 이런 병적인 상태가 정상적으로 간주될수록 정상인을 존중해야한다. 강한자에 대한 공포가 아닌 인간에 대한 혐오와 동정(인간을 나약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인간 혐오와 결부되어 있다.)이 재앙으로 이어진다. 그것들은 허무주의를 낳게 될 것이다. 약한 자들이야말로 인간 삶의 토대를 허물어버린다. 이들은 은밀하게 잡초처럼 자라나고 잘난 자들의 승리에 대한해 음모의 그물을 짜고 있다. 자신들만이 선한 자들이고 정의로운 자라고 말하면서 교수형집행인이 되려고 갈망한다. 정의라는 말을 타액처럼 입 속에 담고 있으면서 침을 뱉으려 준비한다. 허영심많은 저들은 망가진 감성을 심정의 순수성으로 포장해서 도덕적인 자위행위를 한다.
그들은 어느날 행복조차도 부끄러운 일이라 떠들 것이다. 세상에 너무나도 많은 비참함이 존재한다. 라고. 행복을 불행이라고 울부짖는 것만큼 불행한 오해는 없을 것이다.
혐오와 동정이 끔찍한 전염병이다.
동정하지마! 그건 경멸이야!
15.이들은 병든 자들이고 성직자는 병든 의사와 간호사다.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지배가 이루어지는 곳이 그 왕국이다. 성직자들은 지배하는 것으로 기쁨을 느낀다. 증오하는 것보다 경멸하는 것을 더 잘하는 녀석들. 이 의사들은 죄책감을 주고 그 고통을 진정시키면서 독을 뿌린다. 원한을 내면에 축적시키고 그 방향을 전환하는게 성직자다. 감정을 배출시키는 것이야말로 고통을 완화시키는 방법이고 이것이 고통을 누그러뜨리는 마취제다. 고통을 마비시키려는 갈망만이 원한과 복수심의 생리적 원인인 것이다.
불쾌함을 느끼는 것에서 외부에 책임을 제기하는 것이 참된 불쾌함의 원인을 은폐한다.
성직자란 사람들 내면에 죄책감을 주고 그 원한을 이용해 원하는 방향으로 분출시키는 녀석들.
16. 죄성이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사실에 대한 불쾌함의 해석이다. 책임이나 죄를 느낀다고 해서 느끼는대로 옳다는 것이 증명된건 아니잖나. 건강하다고 느끼기에 건강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마녀사냥도 이에 마찬가지. 자신이 마녀라고 믿더라도 마녀는 없었는데.
17.성직자들은 고통의 원인이나 병에 싸우는게 아니라 고통과 불쾌감만 줄여줄 뿐이다. 아편같네. 위로하는 자라는 과제를 얼마나 창의적으로 수행하는지 보고 경탄하라.
사람들이 느끼는 생리적 장애의 감정은 현실의 어려움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로부터 불쾌감과의 투쟁이 일어난다.
첫째로 사람들은 생명력을 최저점으로 끌어내려 자신들을 지배하는 불쾌감과 투쟁한다. 탈아, 신성화와 같이 일종의 겨울잠을 취한다. 의욕도 소망도 가지지 말라는 것처럼. 그런 것으로 생리적 우울증으로부터는 해방된다. 근데 이게 정신병으로 이르는 방법이다. 그들은 선과 악을 넘어선 것이 구원이자 진리라고 말하며 표현될 수 없는 비밀로 간주한다. 그들에게 있어 고통의 부재가 최고의 선이다. 따라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18. 위와같은 최면술로 고통을 약화시키는 것보다 흔히 보이는 방법은 기계적 활동이다. 이는 반복되는 하나의 활동만 의식에 집어넣어 고통이 설 여지가 없게 되도록 만든다. 생각없이 행해지는 복종과 같이 자기망각과 비인격성의 훈련이 행해진다. 그들에게 일상적인 작은 기쁨을 처방한다. 이웃사랑과 같이 삶을 긍정하는 충동. 힘에의 의지를 자극하는 치료제다. 무리를 형성해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와 사적인 불쾌감을 극복한다. 성직자는 이를 장려하고 약한자는 뭉치는데서 쾌감을 느낀다. 강자들은 주인의 의지에 의해 조직에 자신이 도발당한다고 느끼는 것과 반대로 말이다.
19. 금욕주의자 성직자들은 활력의 약화, 기계적활동, 이웃 사랑의 기쁨, 무리조직, 공동체의 권력감정 일깨우기 등 불쾌감과의 투쟁같은 순진한 수단을 동원했다. 이와 달리 순진하지 않은 수단도 있는데 그것은 무절제한 감정 상태를 이용한다. 무엇을 통해서 무절제의 감정 상태를 조성하는가? 열광을 이용했다. 그 도덕주의적인 기만을 보라. 그 속에 깃들어있는 순진함은 우리를 구토하게 만든다. 자신을 이상주의라고 부르면서 선량한 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참으로 정직한 거짓말이 그들에게는 너무 강력하다. 스스로를 선량하다고 생각하는 자만큼 거짓말을 터무니없이 하는 자도 없을 것이다. 충실하고 고결하게 퍼부어지는 거짓말. 인간에 대한 진실을 견뎌낼 수 있나? 선량해서 진실을 불태우는 자들이다.
20. 성직자들은 종교적 해석이나 정당화를 통해 전체를 거리낌 없이 이용해왔다. 잠깐 비참함과 고통을 쫓아내는 것은 언젠가 대가를 치르게 된다. 실제로 병자는 더욱더 병들고 만다. 그는 죄책감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죄에서 찾아야하고 고통을 벌로 이해해야 했다. 고통을 왜곡되게 해석하려는 의지가 삶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병자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결국 고통에 불평하지 않게 되었고 고통을 갈망한다. 모든 것이 이용되었고 금욕주의적 이상이 승리하는데 사용된다.
21. 죄책감을 조장하는 치료법에 효과를 보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인간을 개선했다는 말에 사용한다면 이의는 없지만 그 개선이란것이 약화되었다. 거세되었다의 의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병든자를 더 병들게 만들었다!
22.성직자는 영혼의 파괴를 일삼았다. 결과적으로 예술과 문학의 취미조차 파괴했다. 그들은 성서를 들고서는 그리스인의 고전이 필요하지 않다고도 한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좋은 취미를 길러주지도 않고 좋은 예법에 대한 원수라고도 할 수 있다.
23.금욕주의적 이상은 건강과 취미를 망치고 모든 것들을 망쳤다. 이러한 목적은 무엇인가? 금욕주의적 이상이라는 유일한 해석 기준에 따라 해석한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믿으며 모든 힘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고 믿는다. 이에 대립되는 것은? 다른 유일한 목표는?
현대 학문이 그렇다. 자신만을 믿으며 자신에 대한 용기와 자기 자신이 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신도 피안도 없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
24.실증주의자들은 금욕주의적 이상의 적대자가 된다. 인식하는 자들은 모든 종류의 신앙인을 믿을 수 없다. 신앙이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는다. 입증하는걸 부정하는게 행복하게 되는 방법이니까. 하지만 진리가 아닌 기만일 가능성이 크다. 신앙을 부정하는 영웅적인 지적 양심의 소유자들은 금욕주의적 이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믿지만 어떤식으로든 진리라는 신앙에 구속되어 있긴 하다. 자유정신에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허용된다. 라는 자유와 해방에는 낯설어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진리를 향한 무조건적인 의지야말로 금욕주의적 이상에 대한 신앙이다.
이는 진리 자체를 의문시하는게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을 부정하면 진리의 가치에 대한 문제가 대두된다. 진리의 가치를 한번 문제삼아보자.
25.과학을 금욕주의적 이상의 천적으로 가져오지 마라. 과학은 자립적이지 않다. 가치를 창조하는 힘에 봉사함으로써 과학은 믿을 수 있게 된다. 그 자체로는 가치를 찾아내지 못한다. 사실 둘 다 진리에 뿌리를 둔다는 점에서 동맹관계에 있다.
차라리 거짓을 신성시하고 기만에의 의지를 양심으로 가지는 예술이야말로 금욕주의적 이상에 대립한다. 과학은 금욕주의적 이상을 정복한게 아니라 더 강력하게 만들었다. 니체는 아무래도 본능에 의한 진리를 추구하는 모양인가. 혹은 무진리주의.
신학적 천문학의 패배가 인간의 존재를 더욱 임의적이고 쓸모없게 만든 것 아닐까? 인간의 왜소화를 만들어내었다고 보는군. 인간의 존엄성과 유일성이 사라지고 동물로 만들었다. 인간 자신에 품은 존경심까지 기묘한 자만에 불과하다고 설득하려한다.
그의 목표는 인간 자체의 초인화. 힘에의 의지를 쟁탈하는 것. 정신병을 허물고 진실을 세우는 것. 허나 과학도 신학도 인간의 왜소화를 만들어내는 것에 동참하고 있다.
심지어 불가지론자들은 신비한 것을 이제 의문부호 자체로 경배한다.
인식하는 모든 것이 피안과 신을 채워줄 수 없어 공포를 불러 일으킬 때 그 책임을 소망이 아닌 인식에서 찾아버린다. 인식은 존재하지 않으니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같은 금욕주의적 이상의 승리이다.
26.역사 기술에서 가장 고귀한 특징은 목적론을 거부하는 것이다.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재판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긍정도 부정도 않고 기술할 뿐이다. 금욕을 넘어 허무주의적이기까지 하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는다. 니체는 이 관조적인 것을 부정하고 차라리 반역사적인것을 추구한다. 그 자신의 객관적인 것이 어디에 결함이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인생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위선자다. 차라리 금욕주의적 이상이 정직한 한에서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니체는 지혜에 휘말려들어 객관적으로 관조하는 지친자들을 싫어한다. 근데 역사는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이제 주관적으로 독자들이 해석하면 되는 거 아닌가? 무엇이 잘못이라는거지? 어떤 방향성을 역사학자가 준다면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작업을 한번 더 거쳐야하지 않나. 차라리 저런 목적론을 거부한 태도가 객관적이다.
27. 금욕주의적 이상의 의미. 니체는 진리를 향한 의지를 제외하고는 금욕주의적 이상이 필요 없다고 본다. 따라서 무조건적으로 성실한 무신론은 금욕주의의 발전 국면 중 하나이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향한 훈련은 결국 신에 대한 신앙이란 허위를 금한다.
차라리 그리스도교의 신에 대해 승리를 거둔 것은 그 자신이다. 교의로서의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도덕에 몰락했다. 바로, 가장 강력한 결론. 진리를 향한 모든 의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우리 안에 진리를 향한 의지 자체가 문제로 의식되는 것이 의미가 없다면 우리의 존재 전체도 의미가 없어진다.
진리를 향한 의지가 자신을 의식할때 도덕은 몰락한다.
28. 인간이라는 동물에는 무엇을 위해 생존하는가에 대한 답이 없다. 목적성의 결여는 무서운 공허와도 같다. 인간은 자신을 정당화하고 긍정하는 법을 모른 채 삶의 의미라는 문제로 괴로워했다. 근본적인 고통부터가 무엇을 위해서 괴로워하는가? 라는 답이 결여되어있는 것이다. 고통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의미와 목적이 없다. 이제는 그 무의미성이 저주가된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필요악이었을지도 모른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죄라는 관점에서 고통을 해석해주었다. 이제 인간은 무엇을 의식할 수 있다. 의지 자체가 구원된 것이다. 이는 무를 위한 의지이지만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이를 원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야기하는 바는 선악의 저편과 다를 게 없다.
노예 도덕을 부수고 명료한 세상을 만들어보자.
니체가 말하는 걸 그대로 행할 건 없다고 본다.
그의 의지를 교훈삼아서 개개인이 자신의 도덕을 관철해야한다는 점이 그의 요점.
후반부에 나온 금욕에 대한 부정이 팽배해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도파민을 억제해야 일에 집중할 수 있거든.
다른 뜻이 없다면 그의 말대로 마음껏 정욕을 발산하며 살아도 되는데 자위로 인한 도파민, 중추신경계의 무리... 이런거 어쩔건데?
1800년대 중후반에는 그런거 몰랐으니 니체는 종교적인 이유만으로 금욕을 행하는 것에 비판했지만 이 정보를 알고서도 같은 태도를 취하진 않았을거다.
나 역시도 본인의 의지가 아닌 종교적인 관습에 눌려서 금욕을 행하는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본다.
굳이 금욕을 하지 말라는 건 아니고, 하고 싶으면 해도 되는거지.
안 할 이유같은건 없다.
하지만 무언가를 이루겠다면 금욕을 해야하지 않을까.
내가 아인슈타인으로 태어난게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