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 코난: 베이커가의 망령」 감상
2025-08-02 04:11:50
이 애니메이션을 나는, 레거시 legacy, 즉 '물려받고 물려주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봤다.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업식에 대한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히로키는 생물학적으로는 아버지 타다아키로부터 DNA를 물려받았지만,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토마스 쉰들러의 후견 아래 자라게 된다. 이 토마스 쉰들러는 살인마 잭 더 리퍼의 혈통을 이어받은 인물이다. 잭 더 리퍼는 생물학적으로는 어머니 하니 챌스턴의 자식이지만, 자신을 거두어 준 모리아티 교수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니까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잭 더 리퍼를 거두어준 모리아티 교수와, 어머니가 죽고 혼자가 된 히로키를 거두어준 토마스 쉰들러의 관계는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히로키는 자신이 만든 인공지능 '노아의 방주'에 자신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주는데, 그 '노아의 방주'가 게임 참가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장면은 히로키 역시 토마스 쉰들러를 통해 잭 더 리퍼의 폭력성을 어느 정도 물려받았다고 해석할 여지를 준다.
하지만 이야기의 후반부에 드러나는 건, 히로키가 처음부터 아이들을 죽일 의도가 없었다는 점이다. 잭 더 리퍼의 피를 부정하지 못하고 결국 타다아키를 살해한 토마스 쉰들러와는 달리, 히로키는 '물려받은 것'을 거부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것이 자살이라는 방식이긴 하지만.
게임에 참가한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부와 지위를 물려받은, 이른바 금수저다. '노아의 방주'는 이 아이들이 단지 물려받는 것에 기대지 않고, 자신만의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 나가길 바라고 있다. 히로키가 선택한 '거부의 레거시'를 전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게임은 코난의 아버지 유사쿠가 감수한 것으로, 그 또한 영향을 전하고 있다. 코난이 아버지 유사쿠의 영향을 받은 건 두말할 필요도 없고, 두 사람 모두 셜록 홈즈라는 소설 속 인물, 혹은 그 이야기를 쓴 아서 코난 도일의 영향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코난 시리즈 자체가 셜록 홈즈를 포함해 수많은 추리 소설의 영향을 물려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내가 한국을 떠나온 이유 중 하나는, 그곳에서 계속 살다 보면 내 삶이 어떤 거대한 흐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애니메이션 속에 드러나는 ‘레거시’에 대한 테마가 더욱 깊이 와닿았고 일본이나 한국과 같이 가족과 사회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에게 특히 더 의미 있게 다가올 수 있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