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추적자님의 블로그
글로 남기는 나만의 기록장에마뉘엘 보브 ㅡ 나의 친구들.
전쟁부상으로 은퇴하여 딱히 일도 구하지 못한 채 택도 없는 금액의 연금이나 받으며 남은 인생 그저 하루하루 살고만 있을 뿐인 한 외로운 청년의 이야기.
제목은 나의 친구들이지만, 읽어보면 그냥 잠시 스쳐지나간 사람들 뿐이고 절대 친구가 아니다.
주인공은 너무나 고독하고,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를 원하지만 만나는 사람들마다 서로의 인간불신, 사회적 위치, 자격지심, 소심함, 가난, 속물근성, 서투른 감정으로 인한 급발진 때문에 조금 잘 될 것 같다가도 항상 틀어진다.
이놈의 주인공이 친구라고 하는 그 조건도 꽤 까다로와서 엄청 이것저것 재 보다가 말아먹질 않나, 어떨 땐 주인공이 너무 다가와서 도망가버리고, 어떨 땐 상대가 너무 다가와서 주인공이 도망간다. 주인공이 상대방의 호의를 이용하기도 하고, 상대방이 주인공의 외로움을 이용하기도 한다. 불분명한 신뢰 때문에 서로 마음을 열지도 닫지도 못하는 도시사람들의 고독의 딜레마가 잘 쓰여있다.
주인공 캐릭터가 좀 극단적이라 좀 빡치는..아니, 답답한면이 있지만, 나 라고 주인공의 면모가 없는 것은 아니기에…욕하면서도 몇몇 상황에서는 뭔가 공감하며 읽게 되는 매력이 있다.
특유의 암울하고 고독한 도시의 삶, 단절된 인간관계를 잘 보여주는 책, 한 사람이 독립하고 정착해서 친구를 만들어 서로의 인생을 다독이며 살아가는것은 어떤 이에겐 너무나 힘든일이다. 인연은 타이밍이라,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도 모르는 친구들도 있는데, 그들의 존재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확실히 나이를 먹을수록 새 친구를 만드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과거의 친구들은 일 등 여러가지 이유로 점점 시들해지고 멀어져간다. 섣불리 친해지다가 잘못하면 비즈니스로 얽혀서 곤란해질때도 있다. 함부로 마음을 열었다가 상대의 정색에 상처만 받을때도 있다.
결론은 역시 반려동물이 최고?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똑똑한 괴짜 소년의 시선으로 시작되는 엉뚱한 상상들 때문에, 영화 아멜리에나 미셸공드리의 영화들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나, 페이지를 넘기면서 이 소년과 집안의 비극이 서서히 드러나자 너무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읽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뛰어난 지능과 엉뚱한 상상력을 가진 소년이었던 오스카는, 막상 감정의 처리 방법에 대해선 아직 미숙해서, 아버지의 죽음을 대체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하고, 그 슬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방법을 찾지 못했고, 시설에 입원하기 직전까지 엉뚱해져 간다. 아마도 오스카의 MBTI 는 INTP 로 추정된다.
끔찍한 비극이었고, 잘못하면 뻔한 신파극이 될 수도 있을 이 소재를, 주인공 소년의 엉뚱한 시선과, 탐정 추리물 같은 전개 방식으로 독특하게 풀어나간 점이 매력이었다. 만약 한국적 신파극으로 쓰였다면….
“오스카, 거기있니..?” / “아버지!어디계세요!” / “아들아…그 동안 내가 잘 해주지 못한 것이 많아 미안하구나, 행복하게 살거라!” / “아버지? 그게 무슨 소린가요!?” / “사랑한…콰쾅-” “아버지!!!” (슬픈 음악이 흐른다)
이런 전개 였을 텐데 말이다.
등장하는 캐릭터 들도 어딘가 조금 신기한 습성을 가진 사람들이라, 오스카와의 상호작용이 너무 재미있었고, 그렇기에 그들이 가끔씩 표현하는 슬픔의 감정들이 더더욱 크게 강조되어 다가왔다.
우리 인생에서 비극은 언제 어디서 나타날 지 모른다. 사랑했던 사람들은 다들 언제 사라질 지 모른다. 오스카와 오스카의 가족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아버지를 잃은 오스카의 PTSD, 사고 공포증, 시신도 찾지 못해 항상 아빠가 어떻게 죽었을지 다양하게 상상해버리고 계속 고통받는 모습을 통해, 사고 희생자의 유족들이 어떤 고통을 받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이 고통은 개개인에게 각자 다른 고통이 되는지라, 해결하는 방법도 조금씩 다르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의도치 않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주는 모습도 자세하게 나오고 있다. 희생자 가족들은 항상 처참하게 파멸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오스카의 가족들은 현명하게, 혹은 운이 좋게 어느 정도 아픔을 극복한 것 같다.
작품 속에는 상실의 아픔에 시달리는 사람과, 아픔에 극복하지 못하고 마음의 상자에 갇혀버린 사람들이 나온다. 오스카가 우연히 발견한 정체불명의 금고 상자 열쇠는, 의도치 않게 마음의 상자에 갇혀버린 여러 사람들을 열어주게 된다.
오스카의 주변에서 띄엄 띄엄 흘려졌던 이상한 단서들이 가족들의 개인적인 편지를 통해 조금씩 밝혀지고 합쳐지면서, 마침내 그 이유들을 알아나가게 되는 과정들이 내가 이 책을 읽어나가는 추진력이 된 것 같다.
오스카는 끊임없이 ‘왜?’ 를 질문하는 총명한 소년이다. 그러나 세상엔 “왜?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하는 일이 많이 발생한다. 아버지가 마지막에 보여주었던 아무 단서 없는 ‘탐사 놀이’ 처럼, 결국 우리는 알아서 ”왜“에 대한 물음에 스스로 이유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아니라면 자기 만의 탐사 놀이 방법 이라도.
오스카가 결국 해답을 완벽히 얻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조금 더 버틸 힘이 생긴 것 같다.
오스카의 할머니는 나름의 해답을 완성했다. 드레스덴의 비극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절대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아들이 생겼고, 그 비극으로 인한 기적이 또 오스카를 남겨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는 것.
도시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오스카의 모험을 통해 우리가 신경쓰지 않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각자 나름대로 신비하게 반짝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잃었을 때 항상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사랑하자고 할머니의 편지를 통해 말하고 있다. 그게 알 수 없는 운명과 사람의 관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뭐 마음껏 소홀히 대하고 강한 의지로 절대 후회하지 않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실제로 갑작스런 상실을 겪는다면 그건 쉽지 않을 것이다.
정확한 해답을 주장하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수많은 인생의 별들과 집안의 역사가 빛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기발하고 담담하게 볼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초상화가 정중원님의 에세이 ㅡ 얼굴을 그리다.
작가 정중원씨가
사진과 이미지생성ai까지 나온 이 시대에
어쩌다가 초상화에 흥미를 느껴버리고 초상화가의 길을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몹시 자세하게 쓴 에세이.
요약하자면 정중원씨의 초상화 작업은 그냥 대상을 붓으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자아,정체성 이런것들에 관하여 진지하게 의문을 던지고 탐구 하는 과정이다.
우선 어떤 렌즈로 보느냐에 따라 인물의 모습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우리의 안구 또한 렌즈이기 때문에, 주변사람과 자신이 느끼는 본인의 모습은 엄청난 차이가 있고, 게다가 그 이미지를 각자의 뇌가 어떻게 처리하고 판단할지도 모두 다르다.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한 이미지나 그에 따라 만들어지는 정체성마저도 , 결국 나의 뇌가 내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 받은 나에 대한 정보를 재처리해서 판단한 것이라서, 개인이 느끼는 자기자신 이라는 정체성은 철학적,과학적으로 허상이고, 따라서 완벽하게 나를 안다는 것, 또는 누군가의 진정한 모습을 완벽히 재현한다는 것 또한 무의미.
잘못하면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확실한 자신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기에 오히려 나 자신에 대한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고, 그 가능성 가운데에 자기가 생각하는 매력적인 자기 이미지가 있을 수 있고, 그래서 셀카필터질이 결코 잘못된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능성을 탐구해 나가는 멋진 과정이라는 감동적인 메세지! (중간중간 더 많은 훌륭한 설명들이 있었는데 내맘대로 요약하자면그렇다….)
그리고 셰익스피어 덕후인 작가 본인이 직접 연극 공연을 해보며 맡은 역에 따라 자신의 느낌이 미묘하게 변하는 느낌을 체험하는 등, 끊임없이 자아, 정체성 이라는 것에 대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중이신 듯 하다.
이 책을 읽으며 머리로는 아주 잘 이해가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가 나 자신에게 내리는 가혹한 판단과 실망, 그에따른 절망적인 기분의 무한피드백 과정은 쉽사리 끊어지지 않는다. 언제쯤 나를 벗어날 수 있을까, 아직 갈 길이 멀구만!


안 노란책 리뷰.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ㅡ 줄리언 반스
열심히 토니의 혼란스러움과 죄책감의 감정선을 따라 읽어 내려갔다가, 마지막 반전을 보고 다시 거꾸로 읽어 올라가야 했다. 오, 다시 보니 토니는 근 60년간 자기 멋대로 해석한 인생을 살아 오고 있었다. 안개처럼 희미한 그의 과거에서 비롯된 토니의 믿음, 토니의 배신감, 토니의 후회와 죄책감이 모두 한순간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주인공 토니는 나만큼이나 사람에 대해 눈치가 없다.
말없이 먼산을 쳐다보는 여자친구 앞에서, 자신이 무슨잘못을 어떻게 했는지 알아서 찾아내서 적절히 사과해야하는 남자친구의 심정으로, 나름대로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내서 베로니카의 사정을 추리해보려고 했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나의 모든 예상은 빗나가버렸다.
100쪽 정도 전에서 베로니카가 메일로 몇 가지 핵심적인 사실을 토니에게 정확히 써서 보내기만 했다면, 책이 많이많이 얇아졌을텐데… 라는 섭섭함이 있었지만, 이 아침드라마같은 사연들을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베로니카의 심정도 너무 이해가 갔다.
그런데 베로니카는 왜 40년 후 에서야, 너무나 불편하기 짝이 없는 마음을 참고 토니에게 다가갔던걸까? 내심, 이 사건에 제일 가까웠던 토니가 자신의 복잡한 인생을 이해해주기를 바래서였을까?
하지만 토니도, 독자인 나도 베로니카의 사연에 대해 전혀 이해 못했고.. 베로니카는 토니가 그 동안 자신의 ’뇌피셜‘만으로 잘만 살아 왔다는 사실에 어처구니 없고 진절머리나서 다시 떠나버린 듯 하다.
책을 읽고 나서 내 인간관계에 있어 크나큰 의구심이 찾아왔다.
어.. 걔가 연락이 서서히 끊긴 이유가.. 쟤가 나한테 자주 바쁘다고 한 이유가.. 내 개인적인 여러가지 사연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또한 그 반대도 마찬지가지로, 내가 왜 그녀석을 멀리 했는지, 왜 연락을 줄였는지 그 자식은. 평생. 절대. 눈치 못 채고! 반성없이! 잘 먹고 잘 살거라는 사실도! 나를 괴롭게 했다.
과연 모두가 눈치를 풀가동 해도 오해 없이 살 수 있을까? 없다고 본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에 대한 판단은 빗나가고. 왜곡될것이다. 그럼 그 오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반성을 하는 것이, 대체 어디까지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고 오해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며 얼굴에 철판깔고 내 맘대로 막 살아도 되는 걸까? (그럼 나 자신은 정말 행복하게 잘 살 것 같지만..)
사람에 대한 판단과 진실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엇나가버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 주변 인간관계 사이에서 느꼈다고 생각했던 사랑과 분노, 죄책감 등의 감정들이, 사실 인간관계랑은 별 특별한 상관관계가 없는 게 아닐까 라는 무력감과 절망감이 찾아왔다. 어떤 대상에 대한 감정과 판단은, 그냥 철학적으로 자명하게, 뇌피셜이다. 그런건가? 어쩌면 나는, 그 옛날 학생시절, ’쟨 그냥 싫은 애야‘ 라며 이유없이 다른 친구들을 괴롭혔던 무리들과 별 차이가 없었던 걸까?
우리 인간들 인생의 상당부분인 ’인간관계‘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이 전부 뇌피셜이고, 관계의 실제에 다다르는 것이 정말 불가능하다면. 최대한 긍정적으로 사람들을 보는 것이 확률적으로 ’윤리적 안전빵‘ 일 지도 모른다. 모두를 좋게 보았으니, 싫어한다고 오해해서 생기는 죄, 잘못 등이 그나마 줄어들지 않을까. 그런데, 내가 싫어하는 사람 빼고 나만 이걸 실천하면 좀 억울한 느낌이 드는 건 비정상인걸까?
우리 인생은 전부 뇌피셜이라는 교훈은 뒤로 하고,
아직 내가 눈치가 없어서 잘 파악하지 못한 소설의 의문점이 하나 있다. 베로니카의 가족들은 대체 뭐였을까? 왜 엄마의 일탈을 음침하게 시험하고만 있었던 걸까?
베로니카 시점에서의 인생은 어땠을까?
베로니카 엄마 시점 에서의 인생은 또 어땠을까?


노란책 리뷰
프리즌 서클ㅡ사카가미 가오리
표지가 노란색인 이유는, 시마네 아사히 교도소의 제소자 갱생 프로그램 교실의 인테리어 색깔 겸, 죄수들의 죄수복 색깔 이기도 해서 사용한 듯 하다. 뭔가 희망을 주는 프로그램에 대한 상징같기도 하고.
가정폭력의 피해자였고, (동생에게는)가해자이기도 했으며, 학교폭력도 겪었고, 성장 후 결국 범죄자가 된 동생을 두고, 자신도 길이 조금만 어긋났더라면, 영상 작업이라는 것을 접하여 무엇인가를 표현하지 않았더라면 범죄자로 살았을 것 같다는 다큐멘터리 작가 사카가미 씨.
그가 20여년 가까이 촬영한 다큐 <프리즌 서클>의 제작비화.
범죄자가 된 것은 분명히 본인의 선택이고,잘못된 일이지만, 그 잘못된 선택을 하게되기까지 제소자들이 어떤 과거에서 살아왔는지, 성장하면서 어떤게 부족했는지, 형기를 마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제대로 살아갈 수는 있는지 등등을 자세히 인터뷰해서 적어놓았다.
시마네 아사히 교도소에서는 다른 교도소와는 달리 꽤 혁명적인 갱생 프로그램을 시험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소규모 범죄자 그룹을 모아 1ㅡ2년간 진솔한 대화를 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위로하고 반성하는 자리.
이야기를 나누고 교류하는 것 자체가 교도소에서 가질 수 있는 크나큰 특권이라, 모범수의 모범수를 걸러 참여시켰음에도, 그들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과거는 그야말로 엉망진창.
기본적으로 가정폭력에, 학교폭력의 정도는 그 이상이었고, 그 과정에서 도움의 손길은 없었고, 마지막 발악으로 경찰에도 신고해보지만 별 효과는 없어서 모든걸 포기해버리는 로테이션이 일상.
그 상태에서 성장하다 보니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것에 굉장히 취약했다. 대화방법부터 차근차근 가르쳐야 할 지경.
잃어버린 감정부터 천천히 되살려서 그것을 팀원들 앞에서 발표를 하면서 기본적인 인간성을 다시 교육받는 프로그램 인 것 같다. 그 과정에서 프로그램에 참여한 같은 제소자끼리 서로 진솔한 대화를 하면서 또 하나의 기초적인 공동체가 형성되고(아마도 그들에게는 인생최초.) 출소 후에도 가끔씩 모이며 마지막 버팀목이 되어 준다고.
놀랍게도 제소자 대부분은 죄책감의 감정이 희박했다. ’어, 다들 제가 잘못했다고 하니까, 아, 그런가보다‘정도. 절도와 스토킹 쪽은 특히 죄책감이 전혀 없어서, 글쓴이 스스로도 이건 어찌 해야 하나 고민. 물론 믿을사람 하나 없이 망가지면서 자라온 환경을 보면 죄책감이라는게 형성이 되어질리 만무할것같지만. 이렇게까지 없다는 것에 조금 충격.
어쨌든 차츰차츰 감정이나 인간성 등을 되찾고, 미약하게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출소 후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갈등하는 과정도 담겨 있다. 죄책감을 안고 잘 살 수 있을지, 형기가 끝났으니 훌훌 털고 새 삶을 사는 게 옳은 것인지 등.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사실 일본의 전과자들은 출소해도 자립하는 것이 쉽지 않다. 꼬리표가 항상 붙어다니며, 집을 구하는 일도 사실상 불가능. 그래도 고군분투 하는 출소자들의 인터뷰도 짤막하게 담겨 있다.
결론은 사회의 돌봄은 한계가 있고, 결국 범죄자는 영원히 생산된다… 그래도 이 글쓴이처럼 어디선가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대단하다. 그리고 역시 가장 무서운 건 인간.


노란책 리뷰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 ㅡ계속되는 무
오…. 너무나 바람직하게 노란 책이라 사버릴 수 밖에 없었다.
표지부터 속지, 끈까지 노랑색.
왜 표지가 노란색일까 그 이유를 찾아본 결과. 당시 책을 디자인한 스튜디오에서 말하길, 별 이유는 없지만 일단은 책 내용의 분위기와 어울리게 색을 맞추었다고 한다.
역시 그 말대로 책 내용은 유쾌함과 난해함이 뒤죽박죽 뒤섞인 총체적 난국이었다.
저자는 그 시절 핫했다던 문학적 사실주의에 반대하는 작가들 중 그 정점, 최전선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보니 정말로 아무 말 대잔치.
덕분에 오히려 읽기 편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사람의 이야기에서 논리나 구조를 찾는 게 의미가 없기 때문에.
게다가 아무리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쓰더라도, 그게 과연 사실인가? 글로 얼마나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고 그렇게들 고집을 부리는가?ㅡ 라는 지적부터, 그리고 그놈의 ’사실‘이라는게 과연 정말 존재하는가?ㅡ라는 철학적 질문까지 담아버린 덕분에, 저자의 글은 더더욱 거의 자동기술에 가깝게 마음가는대로 뒤죽박죽 쓰여있다.
그런데 ’잘‘ 뒤죽박죽 썼다.
잭슨폴록의 그림마냥, 아무런 연관없는 개념들이나 문장들을 마구잡이로 연결하고 끼얹어버렸는데, 신기하게도 독자들은 본능적으로 이야기라고 인식하면서 머릿속으로 그 비논리적이고 모순된 장면들을 진지하게 상상해 버린다. (Ex. 놓쳐버린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그 때 느껴지는 괴상함? 머리 한 구석이 간질간질한 느낌? 혹은 의식과 개념의 확장? 등을 저자는 몹시 즐긴 것 같다.
존재나 사실 등이 대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실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철학적으로 흘러갈수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중간 쯤 읽다가 문득 이 사람, 혹시 쓰고 싶은 글이나 주제가 딱히 없어서 고민하다 이런 글이 나온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글을 쓰는 게 먼저냐, 주제가 먼저냐? 라는 선택지가 있다면, 저자는 일단 주제고민 보다는 글이 써지는 즐거움에 더 심취했던 것 같다.
큼직한 주제라면 사실주의에 반대한다 정도? (아, 그래서 제목이 '없음'에 관한건가?)
그림작가들 또한 붓질이 먼저일지, 주제가 먼저일지 고민할 때가 있는데, 그 때 느끼는 백지공포증? 에 대한 해답이 될지도!
근데 물론, '잘' 뒤죽박죽 썼다는 것이 포인트로,
절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을 억지로 짜 맞춘 기묘함, 특유의 유머, 정중하게 웃으며 비아냥거리는 말투, 나름 친절하게 스스로 주석을 잔뜩 달아놓았지만 더 미궁속으로 빠져드는 설명 등이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아무말 대잔치의 극에 달한 자로서의 내공이 느껴진다.
지금 태어났다면 훌륭한 만화가나, 트위터리안이 되거나, 둘 다 되었을 듯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