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책방을 지켜도 손님 한 명 오지 않을 때 기진은 한때 자신이 동경하고 사랑했던 문장에 기대 하루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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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2025-12-23 09:16:13안녕이라 그랬어



그동안 여러 어려운 일을 겪어왔지만 가끔 이런 자연 속을 거닐 때 나는 내가 다른 존재가 됨을 느낀다. 고통이 나를 압도할 때 나는 일부러 집밖으로 나가 수백 년 된 나무들 사이를 걷는다. 갓 걸음마를 뗀 아기가 엄마 아빠의 가랑이 사이를 통과하듯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선 공원을 지나간다. 마치 거길 다 통과하면 내가 더 자라나기라도 할 것처럼. 그런 뒤 집으로 돌아와 세상에 고통을 해결해주는 자연 따위는 없음을 깨닫는다. 그러곤 이미 아는 걸 한번 더 깨달으려 다음날 다시 같은 장소로 나간다. 내 고통에 무심한 자연 앞에서 이상하게 안도한다.

엄마와 헤어지고 나니 별로 한 일도 없는데 비로소 큰 숙제를 마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안타까움과 미안함, 짜증과 홀가분함, 연민과 죄책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단편소설 중 '레몬케이크' .. 여운이 남는 소설.

기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맛을 음미하며 지금 이 순간 홀로 집에 가고 있을 엄마를 떠올렸다. 나의 오늘과 당신의 오늘이 다르다는 자명함이, 엄마의 하루와 자신의 하루의 속도와 우선순위, 색감과 기대가 늘 달랐다는 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게 문득 뼈아프게 다가왔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자신은 이 감정을 평생 느낄 거라는 점도.

헌수는 내게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다 엉뚱하게도 우리가 <러브 허츠>를 들은 날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 "만약 지금 너를 다시 만난다면 네가 틀렸다고, 이건 '안녕'이 아니라 '암 영'이라고 고쳐주는 대신 그래, 가만 들어보니 그렇게도 들리는 것 같다고, 콘크리트 보도에 핀 민들레마냥 팝송 안에 작게 박힌 한국어, 단순하고 오래된 '안녕'이란 말이 참 예쁘고 서글프다 해줄 텐데"라며 작게 훌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