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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네오빠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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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의 '명심보감(청주판)', 안대회 번역. 그리고 향후 개인 활동에 대하여

민음사의 '명심보감(청주판)', 안대회 번역. 그리고 향후 개인 활동에 대하여


2025년 말부터 2026년 연초까지

명심보감 초략본과 청주판을 나란히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명심보감의 “태공왈(太公曰)”의 ‘태공’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강태공이 

아닐 수 있다는 점입니다.


민음사의 책 소개글에서 

발췌하여 복붙하면 이렇습니다.


---

완역된 『명심보감』의 774개조 중 34개조는 “태공왈(太公曰)”로 시작한다. 대부분의 책에서는 “태공이 말했다”로 번역하는데, ‘태공’은 ‘강태공’이라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이곤 한다.

역자 안대회는 이 부분의 태공을 기원전 11세기 무렵의 인물인 강태공으로 볼 근거가 없다고 지적한 다음에 34개조의 출처가 당나라 중엽에 만들어진 아동교육서 『태공가교』라고 밝히고, 여기서 태공은 우리의 서당 훈장과 유사한, 당나라 때 향촌의 교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


초략본에서는 강태공으로 소개되어 있었기에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강태공이냐, 당나라 서당 훈장이냐보다

문장에 담긴 메시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주판은 초략본보다 세 배 이상 분량이 많습니다.

초략본은 청주판이 간행된 이후 약 100년이 지나 등장했습니다.


'분량이 3배 더 많다. 그럼 얼마나 좋은 게 많을까.'


이런 호기심에 청주판을 읽었지만,

읽고 난 뒤 오히려 초략본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에,

.두 판본을 나란히 읽으며 제가 느낀 결정적인 차이,

그리고 왜 결국 초략본을 선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을

브런치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제 브런치 주소

https://brunch.co.kr/@sonthewriter


명심보감 초략본과 청주판 소감 글 브런치 주소

https://brunch.co.kr/@sonthewriter/5



※ 그믐 활동을 통해 알게 된 것들


작년 하반기에 그믐을 알게 되어 활동하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독서와 커뮤니티 활동에 있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체감하게 되었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독서 습관에도 임계점이 있다


독서량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굳이 새로운 책을 계속 찾아 읽기보다는

이미 읽었던 양서를 반복해서 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해 브런치에

「왜 나는 더 이상 새로운 책을 읽지 않게 되었을까」라는 

글을 올려 두었습니다.

관련 글 브런치 주소

https://brunch.co.kr/@sonthewriter/3



2. 독서 모임에 대한 욕망과 실제 참여는 다르다


저는 독서 모임 체질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시간 혼자 읽고 사유해 온 사람으로서,

결국 그믐에서도 ‘혼자서도 잘 놀아요’를 

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3. 자유롭게 글을 쓸 거점이 필요했다

그믐 활동을 하면서 점점 '독서에 얽매이지 않고 

관심 분야에서 자유롭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말연시 동안 티스토리, 네이버, 브런치를 비교해 본 뒤

브런치를 선택했습니다.

세 가지 중에서 제게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향후 개인 활동


앞으로 그믐에서는 ‘n회차 독서 기록’을 중심으로 공유하고,

보다 정리된 사유와 자유로운 주제의 글은 브런치에 남기려 합니다.


그믐의 n회차 독서 기록은

주기적으로 올리기보다는

여유가 날 때마다 기록하는 방식으로 이어가겠습니다.


이제 그믐에서는 ‘엠마네오빠’로,

브런치에서는 ‘Son the writer’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게 되네요.


제 글이 더 궁금하신 분들은

브런치에서 이어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나날 되세요.


2026년 2월 14일

엠마네오빠 (aka Son the writer)

츠츠미 미카의 "주식회사 빈곤대국 아메리카", 로비와 민영화가 완성한 '자본의 천국, 시민의 지옥'인 미국 이야기

츠츠미 미카의 "주식회사 빈곤대국 아메리카", 로비와 민영화가 완성한 '자본의 천국, 시민의 지옥'인 미국 이야기


저자인 츠츠미 미카는 

노무라 증권 미국 지사에서 근무 중 

9.11 테러를 목격하고 

저널리스트 활동에 전념하게 됩니다.


1. SNAP으로 시작하는 미국 애그리비즈니스 고발


최근 '미 의회 셧다운'이 43일간 유지되어, 

최장기간을 갱신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양당이 정치 기싸움을 벌이는 동안, 

빈곤선의 저소득층은 생존 위기에 빠졌습니다.


미국인 8명 중 1명 꼴로

미정부의 영양지원 프로그램인 

SNAP에 의존하고 있었거든요.


그럼, 4천만명 이상인 SNAP 이용자들은

미정부의 의도대로 

영양 균형을 갖춘 식사를 하게 되었느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 저소득층은

SNAP이 끊기면 생존 위기에 몰리고,

SNAP을 이용하면 영양 불균형과 고도 비만에 시달립니다.


왜 그럴까요?


SNAP 지원금으로 저소득층은

가장 저렴하고 조리가 간편하며,

열량이 높은 가공식품에 의존합니다.


그들의 소비덕분에 

거대 식품 대기업들은

막대한 SNAP 지원금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미 정부는 이 현실을 인식하고 

빈곤층의 영양 불균형과 비만 문제를 

개선하려고 했죠.

그럴 때마다 거대 식품 기업들은 로비를 걸었고,

매번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츠츠미 미카 저자는

이렇게 SNAP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저소득층이 의존하는 가공 식품 원료를 만드는

미국의 대규모 공장식 목축과 농업 실태를 고발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자사의 캠벨 수프 통조림을 비하했던 임원이

해고됐다는 며칠 전 뉴스가 있었습니다.


문제의 자사 제품 비하 발언으로 해고된 

부사장 마틴 밸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우리 쓰레기를 사겠냐.

우리는 빌어먹을 빈곤층들을 위해 

고도로 가공된 식품을 만든다.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알고 나니 

건강에 안 좋더라.

나는 캠벨 수프를 거의 사지 않는다.

생체공학(GM) 고기, 

3D 프린터에서 나온 닭고기 조각은 

먹고 싶지 않다."


밸리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여부는 차치하고,

그의 발언은 식품안전에 의혹을 키우기에 충분했죠.


그럼 쓰레기 음식 즉, 

정크푸드의 원료는 '어디(Where)'에서 오는 것일까요.


츠츠미 미카는 대규모 공장식 목축과 

GM작물을 키우는 농장을 파고 들어갑니다.


미국의 거대한 농업 비즈니스는

대규모 자금과 거대한 생산성, 

정치 로비 수혜까지 입어가면서 

자영농을 파산시키고,

프랜차이즈를 착취하면서

성장을 합니다. 


우선 축산과 작물 농업 

두 분류로 살펴보겠습니다.


거대기업의 공장식 축산은

자연 생명체인 동물을 

비좁고 비위생적인 공간에 밀집시켜놓고 

항생제, 성장촉진제, GM 옥수수와 콩 사료로 

신속한 성장과 도축 가공 효율성에 올인합니다.


또한 거대기업의 농업은

대규모 단일 경작에 최적화된

유전자 변형 작물(GMO)과 제초제 패키지로

작물 생산을 합니다.

이들 패키지는 특허로 무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자국 내에서만 그러고 놀면 상관없는데,

전세계에 미국 거대 기업 농업 시스템 방식을

적용하려고 듭니다.


이런 불량한 과정을 거쳐 생산된 원료로

온갖 화학물질로 맛 보정을 하고 

비자연적인 기나긴 유통기한을 달성한 가공식품은

빈곤선의 저소득층 음식이 됩니다.


그 결과, 

저소득층은 고도비만과 온갖 질병에 시달리면서

미국 거대 가공식품과 농축산 기업의 

막대한 돈벌이가 됩니다.


한편, 이런 저소득층의 모습을 보고

'나와 내 가족은 건강을 꼭 챙겨야지 '

이렇게 다짐하는 계층이 있습니다.


바로 미국의 중산층과 상류층입니다.

그들은 질좋은 유기농을 찾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규모의 유기농 수요가 있으니,

미국판 자연드림인 '홀푸드'같은 식품매장이

생겨나게 됐죠.


그런데, 일은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많은 식품 대기업들이 이번엔

대규모 공장식으로 유기농을 재배하겠다고

달려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정계에 로비를 해서

USDA 유기농 인증 기준을 최소치로 완화시키고,

대규모 공장식 농업만을 인정하게끔 

제도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결과, 

미국 각 지역 자영농들의 유기농은

유기농 인증을 받지 못하게 되고,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지역 유기농 업체는 아예

식품 대기업에게 적대적 인수합병을 당해버립니다.


그럼 미국의 중산층과 상류층은

어떤 유기농을 먹게 될까요?


'위장된 유기농 식품'을 먹게 됩니다.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완화된 유기 축산 기준' 내용이 나옵니다.

기억으로 쓰려니 대강이지만, 내용은 일치합니다.


"한 마리의 닭이

가로 세로 30 제곱센티미터 공간을 차지하니까,

그 닭은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 유기농 축산이고, 유기농 닭고기가 된다."


이런 말도 안되는 궤변으로 

유기농의 탈을 쓰고 시장에 나온다는 거죠.



2. 완전 민영 자치를 꿈꿨던 샌디스프링스 이야기


2005년 애틀랜타 교외 중상류층 주민들은

자신이 내는 세금이 아까웠습니다.

시 정부는 비효율적이라고 여겼죠.

그래서 그들은 집단적으로 주도하여

자신들만의 완전 민영 자치 도시인

샌디스프링스를 설립합니다.


그들은 민간 기업에 

샌디스프링스의 도로 유지보수, 공원 관리,

쓰레기 수거, 일부 행정 업무 등을 위탁했습니다.

까다로운 경쟁 입찰로 뽑은 

민간 업체의 전문성과 

비용절감 효율성을 기대한 거죠.


물론 처음에는 잘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점점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죠.

민간 위탁 업체는 계약 범위 외 사고나

예기치 못한 재난 상황에서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계약 내용에 대해서도

점점 최소한의 서비스만을 제공하려고

안간힘을 썼죠.


그러던 와중에 2009년에 사달이 납니다.

초유의 자연재해로

도로와 인프라 마비가 난 겁니다.


당연히 민간 위탁 업체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계약 범위 외 사고이니까요.


이 거대한 재난 사건으로 인해, 

샌디스프링스 주민들은

완전 민영 자치의 문제점을 자각하게 만듭니다.


바로, 시 정부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죠.


재난 대비와 핵심 인프라 책임을

민간 위탁 업체따위가 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샌디스프링스는 

시 정부에게 공공 책임 영역을,

소소한 일상적 관린와 운영은 민영에 맡기는

하이브리드 운영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민영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현실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거죠.



3. 금권 정치는 사회를 병들게 한다


츠츠미 미카는

미국이 자본과 정치가 한 몸이 되어

민주주의를 대규모 정치쇼로 만들고 있음을 

고발합니다.


현재 미국은 

'대놓고 나쁜 놈(공화당) VS 은밀하게 나쁜 놈(민주당)'

이렇게 자본이 의도해서 만든

양당 정치 싸움 프레임만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3당이나 풀뿌리 정당의 발언은

아예 다루지 않고 있는데다,

미국민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과적으로 '나쁜 놈'을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선택의 자유는 없다'는 거죠.


..그렇게 그래왔는데

최근 이변이 일어났죠.

뉴욕에서 민주당원인 맘다니가 당선된 겁니다.

민주당원이지만, 맘다니는 노선 상 

양당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책에서 츠츠미 미카는 

풀뿌리 저항을 대안으로 맺음했는데,

요즘 미국인들 상당수는 드디어

금권정치에 대해 일상과 정치 영역에서

저항을 하기 시작한 듯 합니다.


맘다니를 당선시킨 미국인들이

향후 미국사회 변화를 일으킬지는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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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와 미국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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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츠미 미카의 책 내용과

매칭되는 요즘 내용을 함께 다루다 보니

목표 분량인 2500~3000자보다 훨씬 많아졌네요.


이번 책 저자인 츠츠미 미카 외에도

김광기(부자는 어떻게 가난을 만드는가), 

이민규(나는 뉴욕의 초보검사입니다) 등

여러 저자가 공통으로 언급한 내용들을 보면,

미국이란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하기엔

대단히 많이 모자라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미국의 실체는 '초강대국인 후진국'임을 

직시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제국 흥망 7단계에서 

5단계를 통과중인 나라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럼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쌍팔년도 마인드 그대로 

미국을 추앙하고 무지성으로 흉내내면

한국도 마찬가지로 

자멸 테크트리를 타게 될 것입니다.


한국과 미국은 다릅니다.


한국은 진정한 민주주의와 

창발적인 공존공생 가치로 

한국만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의 원래 천성에 맞는 길을 가자는 거죠.



PS.

술 안 마시는데,

연말이 다가오니 살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주말이 바쁜 건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빠르면 2~3주 후,

늦으면 내년 둘째 주 이후에 

그믐에 들를 것 같습니다.

그럼 미리 인사드립니다.

모두 좋은 연말연시 되세요~


- 2025년 11월 29일, 엠마네오빠


부자는 어떻게 가난을 만드는가 - 0.01%를 위한 나라, 미국 경제로 보는 한국 중산층의 미래
부자는 어떻게 가난을 만드는가 - 0.01%를 위한 나라, 미국 경제로 보는 한국 중산층의 미래
권리 언어의 맹독: 전장연 시위가 마주한 '변방 착취'의 역설.. 모두가 고통스러운 시대, 지하철 시위는 왜 '따뜻한 마음'을 파괴할까.

지난 주말 일요일에 김민철 저자의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1차 소감과

이번 주에 고병권 저자의 에세이들을 다루겠다고 했었는데요.


하아..

오늘 아침 출근 시간대에 

전장연이 또 지하철 시위를 재개했더군요.

지난 3년 반 동안 100번이나 그랬고,

관련 민원이 9,827건.

2022년부터 2023년 8월까지 400일 

연속 농성 시위를 했더군요.


고병권 저자의 '사람을 목격한 사람'은 특히

장애인의 고통과 비극, 전장연 시위에 

대한 지지 입장글들이 나옵니다.


예전에 작성했던 게시글에서

고병권 저자가 일반 시민들에게 물었던 질문인

'죄없는 시민은 죄가 없습니까?'에 대해

저는 그의 질문을 그대로 돌려줘서

'그럼 죄없는 장애인은 죄가 없습니까?'

이렇게 제 생각을 밝혔는데요.


고병권 저자는 존중하고 좋아하는 저자이지만,

그가 시민에게 이렇게 물은 발언에 대해서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는

장애인의 권리와 일반 시민의 권리가 충돌합니다.

(장애인도 시민이지만, 표기는 장애인으로 하겠습니다.)


저는 권리와 권리가 충돌날 때 

가장 중요한 언행은

'서로 자신만의 일방적인 권리 주장을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관한 한,

저는 타협할 생각 자체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목적에 편리한 도구이자 멋잇감'으로써

타자의 경계와 영역을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장애인이나 일반 시민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고병권 저자때문에 제 입장을 밝히면,

저는 장애인의 탈시설과 함께 살기를 지지합니다.


그런 연유로, 

저는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에 반대합니다.


가장 최우선의 이유 두 가지는 이미 말했습니다.


그리고,

전장연을 비롯한 중증 장애인들의 고통을

일반 시민들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애초에 일반 시민들도 

그들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모든 인간은 고립된 섬과 같습니다. 

각자는 살아가기 위해 삶 속에서

엄청난 전투와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모두 고통스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런 와중에,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는

일반 시민이 지닌 

'장애인에 대한 따뜻한 존중의 마음'을 

훼손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파괴합니다.


그런 연유로

수십년 시설에 갇혀 살고,

기본 인권 침해와 모욕, 불편을 당한

원통함과 분노, 원한은 이루 말할 수 없음에도,

지하철 시위는 해서는 안됩니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모두 고통스러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전장연이 일반 시민들을 볼모로

지하철 시위를 하면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 효과와

일반 시민들에게 이동권 제약의 고통을 가해서

장애인의 고통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일반 시민들이 장애인에 대하여

차가운 마음을 갖게 되고,

지속적인 지하철 시위를 겪을 때마다

그 감정이 강화되고 심화될 경우,

전장연은 필연으로 

'의도치 않은 결과'를 맞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일반시민들의 마음에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 연대 의식이 약화되면,

전장연은 탈시설 요구는 

오히려 시설 수용 강화라는 결과로

흘러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로 인해, 장애인과 일반 시민 

모두의 삶을 더욱 삭막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연 6조원대의 정부 장애인 복지 예산에 대하여

장애인 권리 예산 목적으로 재편하고 

추가 증액해 달라는

전장연의 요구에 대해서는 

그것은 당장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말해 줄 수 밖에 없습니다.


기득권 예산을 줄이고

신규 재원을 투입하는 일은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이 달려들어

상상을 초월하는 정치적 마찰을 빚습니다.

전장연은 그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정부는 하나인데 말이죠.


정부는 국정, 민생, 국방, 미래 복지 수요 대비 등의 

온갖 요구와 위협 속에 정부 예산을 운영합니다.


무엇보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복지와 권리는 아예 다른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복지도 문제이지만,

권리는 더 큰 문제와 폐단을 일으키기에

저는 그게 너무나 우려스럽습니다.


권리는 항상 변방에 대한 착취로 이뤄집니다.

이 변방은 바로 타자(타인, 주변, 환경)입니다.


전장연 장애인은 온전한 권리를 보장받으려 합니다.

네, 받으려 합니다.

그러면 '어디(Where)에서' 받을 것인가가 

엄청 중요해집니다.


그 어디가 '정부'라고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권리의 실현은 타인의 헌신과 희생을 동반합니다.


실제 현장으로 살펴봅시다.


전장연이 가장 중요하게 요구하는 

장애인 권리 예산 내용인

'활동지원 24시간 보장'은

장애인의 자립 생활을 위한 핵심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장애인 권리 예산 개념은 맹독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는 

이어지는 문장들을 유념히 살피고

잘 이해해야 합니다. 


현 자본주의 사회 체제 하에서

장애인을 위한 24시간 활동 지원은 복지일 뿐,

장애인의 권리로 치환될 수 없습니다.


그 점을 장애인들은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애인의 그런 권리를 인정할 경우, 

장애인의 그런 권리를 

현장에서 실현해주는 사람들은 

'활동지원사'입니다.

그들은 낮은 임금에 

중증 장애인의 생명과 직결된

고강도 노동을 수행합니다.


그런 그들이 24시간 지원 보장을 할 경우,

2교대이든 3교대이든 간에

활동지원사는 긴 노동시간에 시달립니다.


게다가 그 지원사들은

장애인들의 권리 실현을 위한 

도구로 간주되면서,

그들의 노동은 

장애인에게 당연히 제공되어야 하는 

서비스로 장애인들에게 인식되게 됩니다.


지원사의 노동에 대한 인정, 감사를 

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왜냐고요?

지원사의 서비스(노동)을 받는 것은

장애인의 당연한(?) 권리이니까요.


그건, 새로운 구조적 불의의 탄생입니다. 


저는 실제로 이미 그런 모습을 

오래 전 일상에서 봤습니다.


장애인증을 흔들면서 

"장애인을 모셔야지. 이게 무슨 짓이야!"

버스 기사에게 온갖 욕설과 갑질 진상을 떠는

고약한 인상의 장애인 할머니를 봤었죠.

버스 기사가 잘못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 장애인 할머니는

하차벨을 누르지 않았는데, 

버스가 이미 정거장을 떠난 뒤에 

뒤늦게 '내려달라!'고 고성을 질렀거든요.

버스 기사는 규정대로 운행했을 뿐이었습니다.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타인들은

불특정 다수의 출퇴근 시민들입니다.


전장연의 장애인 시위자는

시민에게 '함께 살고 싶다'고 말했었죠.


그런데..

함께 살려면요,

상호이해는 둘째 치고

공존공생이 가능한 마음과 태도가

먼저 상호간에 이뤄져야 합니다. 


그런데, 만만한 일반 시민들을 도구로 삼아

이런 지하철 시위를 지속적으로 벌이면요,


고병권 저자의 글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곳에서 400일 넘게 투쟁했다'는

문장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또 계속 지속적으로 투쟁하면,

미안하지만..

전장연은 아예 환영받지 못하는 수준을 넘어

적대적인 일반 시민들을 대다수로 늘리게 되어

결국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전장연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무사할 것 같습니까?


설령 정치적으로 어떻게 잘 되서 얻게 되더라도

일반 시민들은 더 이상 장애인들에 대해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을 원합니까?


저는 장애인의 탈시설과 함께 살기를 지지합니다.

그렇기에,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는 지지하지 않습니다. 


권리 언어로 세상과 타인에게 요구하면

환영받지 못합니다. 


자기만의 권리 언어를 내세우면서

타자의 권리를 침해하는데,

어떻게 환영이나 환대가 가능하겠습니까?


게다가, 세상과 타인은 

그런 권리 언어 주장을 외면할

권리가 있습니다.


권리와 권리는 충돌합니다.

그래서, 신중하고 지혜로운 접근이 필요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내의 마음과 지혜로운 요청으로

정부, 일반 시민, 장애인이 모여

서로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공존공생의 해법 모색의 장을 

수시로 계속 갖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원하는 결과를 훨씬 빨리 달성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PS.

저녁에 뉴스를 확인하고 

어이없고 안타까워서

이렇게 편지글 흔적을 남깁니다.

날짜도 상응하네요.

이번 주는 넘어가고,

다다음 주에 츠츠미 미카의

'주식회사 빈곤대국 아메리카'를 

다뤄볼까 합니다. 


- 2025년 11월 18일, 엠마네오빠

현대철학의 거장들
현대철학의 거장들
올해 가장 유익했던, 김민철 저자의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소감 이야기

올해 가장 유익했던, 김민철 저자의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소감 이야기


수능이 끝난 11월 중순이 되어도 

어설픈 단풍이 드는 요즘입니다.

제가 대입을 보았을 때는

폭설에 영하로 엄청 추웠던 게

지금도 기억납니다.


기후도 많은 변화가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예로, 도서관에 가면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을 봅니다.

문학과 실용, 주식, 경제 서적 코너는

책이 닳고 낡아져서(특히 소설) 

부숴지기 일보직전까지 책도 보는데,

역사나 사회분야 서적 코너는 

20년전 책도 

새 책처럼 깔끔한 모습을 본다는 거죠.


사회 분야는

사람들의 평소 관심 영역이 아님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현장은 없을 겁니다.


..평상시 우리는 사회 분야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게 원자화된 개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만,

정작 우리의 일상 모습을 결정짓고

우리 모두의 생로병사 생애주기를 통제하는 것은

'사회'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즉, 어떤 통치 체제 기반인가'는

우리 삶의 절대변수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로, 이런 상상을 해봅ㅂ시다.

신이 원판 다트 놀이를 해서 

출생을 결정한다고 가정하는 거에요.

이 다트 원판에서 

가장 넓은 파이 분할 영역을 

차지하는 나라는

중국과 인도이고,

전세계 200여개국 중에서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는

좋게 봐서 20여개국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 나라 대다수는

매우 좁은 파이 분할 영역이죠.


이렇게 생각해 보면,

좋은 나라에 태어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확률을 뚫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살기 좋은 나라는 대체 어떤 체제를 하고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다음처럼 잘 대답할 수 있습니다. 


"살기 좋은 나라는 모두 민주주의이다."


그런데, 살기 좋은 나라의 근간인 민주주의는 

왜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대다수 나라에서 거부되고 있을까요.


김민철 저자의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는

이 질문에 있어 근원적인 사유와 자각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왜 인류 역사의 지성인들 대다수가

민주정을 미워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저 역시,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근원적인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유는 '사람들'때문입니다.


민주주의에 대해 화나는 지점은

다른 게 아닙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고통을 받습니다. 


심지어 다수결도 확실한 다수결도 아니라,

양당정치의 극단적인 이분법 대립으로

51:49라는 간질간질 약올리는 모양새로 

사회에 유해한 선택을 한 사람들때문에

원하지도 않는 고통을 겪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엄청난 초인적인 인내력과 함께 

어리석은 사회와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다음과 같은 평정의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마음 비우자. 스트레스 받지 않으려면.

그렇지만 일상에 할 수 있는 선에서 

불의를 물리치고, 

좋은 활로를 모색하면서 실행하자."


별 다른 게 없더라는 거죠.


.. 모든 사람들은 편의상 

다양하게 구분될 수 있습니다.


예로, 

노자는 '지혜의 가르침 수용 수준'을 기준으로 

사람을 상중하 3개 등급으로 구분했습니다. 


(극소수인) 상등의 사람은

지혜의 가르침을 들으면 힘써 행하려 하고,

(대략 7할 비중인) 중등의 사람은

행하다가 말다가 팔랑귀처럼 처신하고,

(대략 3할 비중인) 하등의 사람은

지혜의 가르침을 비웃고 무시한다는 거죠.


즉, 하등의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지혜의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게 노자의 냉소입니다.


서구 지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원전 그리스와 로마부터 근대 이전까지

지성인과 엘리트 모두 민주주의를 경계했습니다.

인민이 주권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일념으로

총력을 기울여 

군주정, 귀족정, 과두정, 공화정에서

해법을 찾으려고 들었습니다. 


민주주의만 아니면 된다는 거였죠.


"우리 지성인과 엘리트들은

'무지한' 다수 인민의 통치를 거부한다!

다수의 폭정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군주정, 귀족정, 과두정, 공화정은

안정적이고 훌륭했느냐.


전혀 그러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만 하더라도,

자유와 민주는 양립불가 개념입니다.

소수와 다수 모두에게 자유를 보장하면,

힘있는 소수는 다수를 폭압할 것이고,

다수는 힘없는 소수를 폭압할 것이며,

힘없는 소수는 약자임을 무기로 다수를 폭압할 것이기에

모두 전혀 민주적이지 않습니다.

소수와 다수 모두 폭압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수인 인민은 잘 속고 어리석은 선택을 잘 합니다.

영악하고 탐욕적인 기득권 소수는

이런 다수를 지배하기 위한 온갖 술수와 폭압을

거리낌없이 행합니다.


그러면 어찌 될까요.

시간이 흐를수록 대립, 갈등, 분열 속에 균열이 나고,

균열은 붕괴를 야기해 결국 자멸하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모든 체제는 

사회구성원 모두의 상호존중 협력과 기여, 헌신, 

자정, 개선 노력이 없으면

'자멸 테크트리'를 타서결국엔 자멸하거나 

외침을 받아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나라는 결국 어느 시점에 

'반드시' 멸망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권력을 쥔 기득권은

체제 붕괴가 너무나 두렵지만,

체제 붕괴는 예정된 수순이고 

숙명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든 체제는 '반드시' 붕괴되는데 말이죠.


이 지점에서,

오늘날 한국사회가 놀랍게도

전세계에 엄청난 해법을 보여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치 차원에서, 

한국은 지구상에 사실상 유일한 '진짜 민주주의'를 

직접 실현하고 입증했기 떄문입니다.

그 주체도 다른 누구가 아닙니다.

한국 국민들이 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해방 이래로 한국 근현대사 민주화 요구 시위와

세계 각국의 민주화 요구 시위를 

비교해 살펴 보면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를 발견하고서

저는 온몸에 전율이 흘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아랍의 봄, 동남아 MZ 시위 등

이런 모든 민주화 요구 시위의 근원적인 계기는

'독재의 부정부패에 따른 먹고사니즘 차원의 분노'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민주화 요구 시위는

말 그대로  

'독재에 저항하고 물리칠 수 있는 국민 주권. 

즉,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요구'였습니다.


이것은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입니다. 


이는 다른 나라 국민들이 빠져 버린 

정치경제적 먹고사니즘을 넘어선,

자기 주권에 대한 정당한 천명과 요구였습니다.


사회와 국민에게 유해한 대통령이면

국민이 직접 물리쳐 쫓아내겠다는 거죠.

그것도 평화적인 방법으로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두 번이나 해냈습니다.


제3자적인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건 너무나 멋진 겁니다.


모든 체제는 '반드시' 붕괴하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제대로 된 분별력을 가진 국민들이 대다수이면,

대다수의 폭정은 없을 뿐만 아니라,

기득권 소수의 폭압도 없앨 수 있음을

입증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대로 된 분별력을 가진 국민들이 

대다수로 있는 나라는

체제 붕괴 위기가 일어날 때 

마찰을 최소화하면서 

체제를 전환하는 탈출 역시 

잘 해낼 수 있습니다.

'탈출은 지능순'이란 현대 속담은 

집단지성에도 적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 사회는 

정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일상 영역에서의 민주주의를 

'반드시' 실현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멋진 건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국뽕스러워도, 

정치 차원에서 

진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입증한 

대한민국의 국민들이니까요.



PS.

n회차 기록으로 하기엔

1회차 독서여서 편지로 흔적을 남겼습니다.

분량이 작지만, 저로서는 올해 건진

고품질 양서 중 하나였어요.

김민철 저자가 책 내용에서 언급한 

'해적선 민주주의'가 재미있었는데,

글 쓰다 보니 맥락상 생략했어요.

다음 주에는 고병권 저자의 

에세이들을 다뤄볼까 합니다.


썰렁함 방지로 선택한 책 표지는 예전에 읽었던

츠츠미 미카의 '빈곤대국 주식회사 아메리카'입니다.


- 2025년 11월 16일, 엠마네오빠


주식회사 빈곤대국 아메리카 - 검은 자본에 점령당한 미국의 몰락
주식회사 빈곤대국 아메리카 - 검은 자본에 점령당한 미국의 몰락
김규항 저자의 아포리즘 발췌와 명심보감 그리고 양서 하나 발견한 이야기

오랜만에 n회차 기록으로 돌아왔네요.

그동안 평어체였던 n회차 기록도

앞으로는 대화체를 기반으로 작성하고자 합니다.


대화체를 쓰니까 제가 좀 더 편하더군요.

진작 그러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럼 김규항 저자의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4회차 기록 발췌와 

명심보감의 킬러 문장 하나를 

발췌하는 구성으로 진행하겠습니다.


1. 김규항 아포리즘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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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성장과 삶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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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미래는

‘평범한 훌륭한 사람이 얼마나 많아지는가’에 달려 있다. (P. 17)


결핍은 흔히 생각하듯 지나치게 적은 상태뿐 아니라,

지나치게 많은 상태에서도 나타난다. (P. 18)


삶의 격식은 언제나 삶의 내용보다 넘치지 않는 게 좋다. (P. 21)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을 확신할 때 

우린 어지간히 고단한 삶속에도 행복하다. (P.23)


하지 않아야 할 일은 

반드시 하지 않는 게 좋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때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역시 마음의 평화를 위해. (P. 24)


아이를 보며 종종 되새겨야 한다.

‘나는 이 사람을 잘 모른다.’

아이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데서 

부모의 비극이 시작된다. (P.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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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비판과 대안의 첫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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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내!” 라고 쉽게 말하는 건, 

남의 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P. 64)


나쁜 구조 덕에 안락을 얻는 사람은 

그 구조와 분명히 마주서지 않는 한 

나쁜 사람이 되게 되어 있다. (P. 67)


억압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억압은 존재한다.

불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더 근본적인 힘은 

바로 인민의 비굴과 무기력이다. (P. 71)


현재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대안도 없다. 

현재에 대한 비판은 대안의 첫걸음이다. 

‘대안 없는 비판’이라는 비판은 

실은 어느 누구도 대안의 첫걸음도 

떼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살포되는 

체제의 주문呪文이다. (P. 78)



대안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경험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마냥 밝고 진취적일 수 있겠는가. 

대안 앞에서 우리는 오히려 두렵고 불안하다.

그러나 더는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기에, 

그 극단적 비현실성 너머로 발걸음을 떼는 것이다. (P. 101)


-> 예로, 저만 해도

리눅스 민트를 설치하기 전까지 엄청 고심했었어요.

2022년부터 고려만 했었지,

진짜 실행은 올해 10월 윈도우 10 종료가 되고 나서야 했거든요.

그렇게 느린 실행이었지만,

결국 '현제 문제점을 숙고하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생각이 먼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즉, 비판과 대안의 모색이 실행에 선행하는 것이죠.


.. 첫 걸음을 떼는 것은 사실 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미있는 사소한 첫 걸음을 내딛는 사람들은 

모두 매우 창조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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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과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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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이 없는 분노는 거대한 카타르시스일 뿐이다. (P. 105)


-> 요즘 시대는

전세계가 극단적인 어리석음으로 빠지는 모습입니다.

온라인에서는 갈라치기하는 콘텐츠들이 

주류의 인기마저 차지하는 모습을 봅니다. 

물론 악한 행동을 하는 타자들은 있습니다. 

그러나 성찰이란 사유가 빠지면,

악행의 근원 심리를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쉽고 간단하게 자기 합리화 거짓말을 하면서 

타자를 미워하고 배제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하나 하나가 모여 

역사는 전쟁과 몰락의 패턴을 보여줬습니다.

현 시점의 우리 인류는 그런 자멸의 패턴을 

제 때에 잘 졸업할 수 있을까요. 

매번 의문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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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싸움은 

절대선인 사람들과 절대악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자기성찰이 가능한 사람들과 

자기성찰이 불가능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P. 108)



대화란 서로의 생각을 합쳐서 더 나은 생각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P. 117)


사람이 어떤 삶의 방식을 좇는 건

그 삶이 옳아서만은 아니다.

그런 삶이 멋지게 느껴질 때 비로소

그 삶을 좇게 된다. (P. 119)


친절이 사라진 세상을 ‘상업적 친절’이 채워가고 있다.

그 덕에 정당한 수준의 친절은 불친절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P. 122)


공동체적 이상을 좇기 위해 우리는 개인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개인이 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공동체는 없다. 

이런저런 집단만이 있을 뿐. (P. 123)


한국은 개인이 없는 집단을 공동체라 믿는 

보수 아저씨들과

개인이 되지 못한 채 공동체주의자가 되어버린

진보 아저씨들이 망쳐버린 사회다.

필사적으로 (진정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P.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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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예술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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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넘어설 힘은

문제가 어디에서부터 오는가를 꿰뚫어보는 식견과

삶이란 무엇인가를 사유하는 철학에서 나온다.


사람이 철학을 갖는다는 게 뭘까. 

인간과 세계에 대해, 

삶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길 멈추지 않으며 

나름의 관점과 태도를 갖는 것 일 게다. 

그리고 현실이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더라도

그 관점과 태도에 기대어 

사람 꼴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일 게다. (P. 128)


예술이 제 본디 힘과 가치를 가지는 조건은 

쓸모가 아니라 ‘쓸모와의 거리’다. 

인문학의 힘은 인문학적 사유와 통찰로

최대한의 쓸모를 뽑아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제 정신적 고양을 쓸모에만 바치거나

그런 태도에 함락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예술이란 묘한 것이라서, 

쓸모없음의 상태에서 그 본디 힘과 가치가 드러난다. (P. 141)



예술은 ‘혁명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예술이 바로 혁명이다. (P. 144)



2. 명심보감에서 킬러 문장 하나

다음은 읽을 때마다 

저로서는 전율이 흐르는 문장 중 하나입니다.


강태공(여상)이 말하였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남을 천하게 여기지 말며, 

자신을 크다 여겨

남을 작게 업신여기지 말며, 

나의 용맹을 믿고 

적을 가벼이 여기지 말지니라."


-> 오늘날 문장으로 바꾸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가치를 과대평가하지 말고

타인 가치를 과소평가하지 말라.

자신의 능력과 권력에 도취되어

타인을 쉽게 여기지 말라.


여기에 세번째 메시지 디테일을 덧붙인다면,

패기만 높아서 경거망동하거나 

도발을 일삼는 짓은

더더욱 피하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중요해서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강태공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빠지는 자멸 테크트리 패턴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명심보감에 기록된 강태공의 말은

70년간 온갖 수모와 초인적인 인내 속에서

살아내고 때를 맞이하여 마침낸 해낸 자가 남긴 

실전 지혜의 정수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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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포리즘을 읽는 사람의 자세

격언, 금언, 경구는 간결합니다.

총론적이기까지 하죠.

'너 자신을 알라.'

'인의예지신을 지켜라.'

이런 식으로 간단하고 쉽습니다.

그냥 가볍게 읽고 지나갈 정도로요.

어릴 때엔 특히 우습게 여기는 마음도 들죠.

'누가 그런 말 할 줄 몰라? 나도 할 수 있어.'

그런데, 그런 말을 하신 분들도

점점 실전 경험이 쌓여갈수록

'쉬운 그 말은 더 이상 쉬운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아포리즘은 매력이 있습니다. 

짧지만, 그 의미의 깊이와 무게는 끝이 없습니다.

아포리즘은 쉬운 그 말 속에 담긴 진실을 

체득하라고 넌지시 알려줍니다.

그러다 보니 수십 수백번을 되살펴 보게 되죠.

조상님들이 왜 소학, 심경, 사서를 

평생 반복했는지 이해하게 되는 거죠.


결국 아포리즘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의 삶에 끊임없는 성찰을 요구하고,

그 성찰이 체득이나 실현이라는 

도약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힘이 됩니다.


PS.

요즘 새로 읽는 책으로 김민철 저자의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를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습니다.

2023년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도서이기도 한데,

분량이 적지만 내용이 매우 훌륭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한국사회와 한국인들이

정말 엄청난 것을 해냈고 

지금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재발견할 수 있었어요.

이를 다음 주에 다뤄볼까 합니다.


- 2025년 11월 8일, 엠마네오빠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 지성사로 보는 민주주의 혐오의 역사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 지성사로 보는 민주주의 혐오의 역사
김규항 저자의 키워드 '물신성'과 그것의 극복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

김규항 저자의 키워드 '물신성'과 그것의 극복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


김규항 저자의 '혁명노트'와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두 권을 지난 주에 읽었습니다.

주중에는 '명심보감'을 다시 읽고 있었고요.

그런데 책을 다시 펼치면서 n회차 기록을 하는 것보다

김규항 저자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인 

'물신성'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에 관련한 소식과 소감을

함께 엮어 얘기하는 게 편할 것 같더군요.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제 정신이 아닌' 이유를 

김규항 저자는 '물신성'에서 찾습니다.


그럼,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신(神)인 물신의 속성. 

즉, '물신성(物神性)'으로 시작하겠습니다.


1. 김규항이 물신성 극복을 '혁명의 첫걸음'으로 보는 이유


김규항은 사회 문제에 있어

계급투쟁보다는 물신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머릿속을

'물신'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물신의 이름은 '자본'입니다.


지배계급이든 피지배계급이든

모두 자본의 노예이며,

자본은 상품들의 생산 교환 관계만을 허용하기에

모든 인간관계를 상품 관계로 변질시킵니다.

예로, 

생수를 플라스틱병에 담아 상품으로 소비하고,

연애는 상품 소비 행위로 변합니다.

결혼은 아예 '결혼시장'이 되어버려 

서로를 상품으로 가치를 평가하려니 

모두 죽을 맛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물신에 지배당해

제 정신이 아니게 됩니다.


그런데 

죽지 않기에 

신과 마찬가지인 자본은

암세포처럼 증식하려고만 듭니다.


자본은 인간, 기계, 사회, 공동체에 기생하여

모든 것을 빨아들여 자기 증식만 합니다.


그 결과, 피케티 말대로

'자본 소득>노동 소득'이라는

아찔한 초과 기록을 매번 갱신합니다.


그런 자본이란 물신을 

전세계 사회가 추구하기에

대다수 인간은 자본의 도구이자 노예가 됩니다.


극소수의 저항이나 다른 선택이 있지만,

시스템 전체에는 전혀 타격이 없습니다.


아직까지는 말이죠.


월가에서 수억 연봉을 받던 사람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라다크같은 

오지로 가서 살아간다든지,

스콧-헬렌 니어링 부부처럼 

소박한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

한국에도 그런 극소수 사람들이 있죠.


그렇기에

김규항은 대다수 사람들이 상품과 물신성을 떠받드는 한,

자본주의 시스템은 지속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현 자본주의 사회를 전환하려면,

물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마인드가

먼저 바뀌어야만 가능합니다.


다른 선택을 하는 개인들이 

늘어나야 한다는 거죠.


김규항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혁명은 걷는 걸음처럼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선에서 하고,

다른 선택을 하는 개인들은

연대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2. 경주 APEC 트럼프와 런베뮤 산재에서 본 '물신의 얼굴'


경주 APEC에서, 

거대한 돈을 밝히는 영감탱이 트럼프가

명예욕에 엄청나게 굶주려 있다는 점을

잘 간파하여 현명하게 대응한 것은,

엄청난 외교 성과였습니다.

이런 의전을 기획하고 실행하기까지

담당자들의 노고는 상상초월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런베뮤의 산업재해 사례.


확인된 여러 사실들을 읽으면서

런베뮤 경영자들의 섬뜩한 물신 숭배 수준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 눈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불법, 위법, 착취 악행의 근원에는

'물신이 사람보다 소중하다'는 마인드가 있습니다. 

사람은 단지 자본 증식을 위한 도구일 뿐인 거죠.

그런 마인드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합니다.

타인이 피를 흘리든 죽든 알 바가 아닙니다.

단지 자본의 핏줄인 돈을 벌면

가장 똑똑한 경영을 한 것으로 여길 뿐입니다.


런베뮤만 그런 게 아닙니다.


물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인간 모습을 한 '어떤 것'이 되어갑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사물'이기에

그것이 상품이라면 구매는 할 수 있어도,

사랑할 가치는 없습니다.


사랑은 인간미와 존재감이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신뢰와 협력 속에 공존공생의 관계를 이룰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3. 물신 숭배의 '장난감 환상'에서 벗어나기: 덧없음과 자멸성


그럼 대체 물신은 왜 숭배할까요?


돈이 많으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돈으로 안되는 것은 없다는 믿음과

실제 경험때문입니다.


돈으로 모든 유무형의 상품을 구매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구매 후에 덧없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구매하기 전까지는 심신이 욕망과 환상 속에 달아오르지만, 

구매하고 나면 팍 식어버립니다.


어릴 적, 

김청기 감독의 일본 매크로스 짝퉁인

조립식 스페이스 간담 V가 4천원이었는데,

저는 그걸 용돈 100원씩 모아 

기어이 구매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조립한 완성물을 몇 번 변신시키고 나자,

제 마음은 희한하게도 모든 게 식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관심이 없는 거에요.

그와 함께 덧없고 허망함을 느꼈습니다.


정작 제가 재미있었던 것은

용돈 잔액 100원을 틈틈이 모으면서

'환상 속의 그대'인 스페이스 간담 V를

열망했을 때였거든요.


어린이였지만, 

그때 알았습니다.


욕망에 빠져 있는 것이 짜릿하고

욕망이 충족되고 나면 공허함 속에

냉정한 평정심이 찾아온다는 것을요.


그날 이후, 

저는 장난감을 끊어버렸습니다.


이런 식으로 

어릴 적 유혹을 졸업한 분들이 꽤 많으실 겁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더 거대한 유혹들'이 압박을 가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더 거대한 유혹들'은

모두 본질상 장난감 상품과 똑같습니다.


장난감 상품들은 자세히 보면

대다수가 플라스틱 쓰레기로 분류됩니다.


다른 상품들도 종착지는 결국 쓰레기입니다.

상품은 언젠가 쓰레기가 됩니다.


그것은 덧없고 자멸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런 쓰레기가 되는 상품을 구매하는데 쓰이는

죽지 않는 돈.


그 죽지 않는 돈들이 모여 

증식하기만 하려고 드는 자본이 되고,

자본은 죽지 않고 증식하려고 들기에

신과 암세포의 속성을 모두 갖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본의 신과 증식 속성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 결과, 자본의 암세포 속성을 잊습니다.


자본은 암세포 속성이기에

인간 공동체를 파괴하고,

원자화된 개인을 만들어 소외, 고립, 단절시켰습니다.

나아가 대지, 물, 공기를 파괴하여 

기후 파국을 일으키고 있으며,

인류 멸종 위기를 앞당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본을 신으로 모십니다.

돈이 계속 불어나길 욕망하고 탐욕하며,

그런 돈으로 온갖 유무형의 상품을 구매해서

쾌락을 느끼길 탐합니다.


그러나 쾌락의 이음동의어는 '고통'입니다.

그 고통의 상세는 

'네가 탐욕하여 즐긴 만큼 

너는 그에 상응하는 고통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된다'입니다.


지구 기온이 1.5도 상승만 해도

인류는 자멸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 대다수는 

그 벼랑 끝에서 자본을 탐욕합니다.

이대로 살면서 기후위기도 해결되고,

깨끗한 공기, 물, 자연을 누리길 원합니다.

이는 '무책임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로, 고도 비만과 당뇨를 얻은 사람이 

'나는 이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어. 

이대로 살면서 병이 나아야 해'라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의사는 당연히 

"당신은 이제라도 자기 건강관리를 해야 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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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 겸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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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 저자는 결국

우리가 물신성을 극복하는 데서부터

새로운 길이 열린다고 역설합니다.


저 역시 그의 총론에 대하여

동감이고 이의없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당장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실질적인 혁명의 걸음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저는 다음을 제안합니다.


물욕과 과잉 욕망을 졸업하기 위해서라도

'절제하는 삶'을 살아보라고 말이죠.


'절제'는 금욕이 아닙니다.

'소박한 선에서 선을 그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용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얘기죠.

그것부터가 시작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음 주에는 

김규항 저자의 잠언집 내용에 초점을 맞추거나

명심보감 내용을 곁들여 

n회차 기록을 해볼까 합니다.


- 2025년 11월 2일, 엠마네오빠



곁에 두고 보는 명심보감
곁에 두고 보는 명심보감
김규항 저자 소개와 주중에 있었던 개인적인 혁명(?) 체험 이야기

김규항 저자 소개와 주중에 있었던 개인적인 혁명(?) 체험 이야기


잘 지내셨는지요?

초겨울 날씨가 먼저 다가오는 요즘입니다.


이번 주는 김규항 저자의 '혁명노트'와 

그의 사유집이라 할 수 있는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이 두 책의 3회차 흔적과 

주중에 있었던 

개인적인 혁명(?)적인 체험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김규항 저자는 제가 존중하고 좋아하는 저자들 중 한 사람입니다.

여러해가 됐는데 제 경우, 

1년에 한두번은 그의 홈피 GYUHANG.NET에 가서 

그의 게시글들을 읽는 시간을 갖는 편입니다.


김규항 저자의 사유글은 어려운 말을 안쓰는데도

사유의 순도가 높고, 밀도와 깊이가 있습니다.


그럼 그의 책 두 권에서 일부만 발췌해서

3회차 흔적을 남기겠습니다.



1. 김규항의 '혁명노트' 발췌


한국이 세계 최고 자살률과 세계 최저 출산율을 기록하고, 

젊은 세대가 제 나라를 '지옥'이라고 부르게 된 건, 

한국이 이전보다 빈곤해져서는 아니다. 

경제 약극화 역시 전적인 이유는 아니다. 

원인은 한국인들이 

삶과 관련한 모든 것들(자기 자신을 포함하여)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상품화하며, 

유례없는 물신화 속도와 강도의 충격 속에서 

개인들이 제 나름의 삶의 의미를 

유지하거나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교육 현실은 그 모든 걸 압축해서 보여준다. 

..(중략)..한국은 공교육이 망가지고, 

모든 아이가 대학 입시라는 한 경로에 줄 세워져 

인생 등급이 매겨진다. 

그 결정적 조건은 진보와 보수를 떠난,

부모의 경제적 사회적 배경이다. 

교육 현실은 

한국 민주화가 협소한 의미에서 

정치적 민주주의에만 집중되고, 

결국 '물신적 전체주의 사회'로 귀결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2. 김규항의 '우리는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발췌


누구나 조금씩 괴물이지만,

괴물이 되어도 좋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인간의 세상을 끝장내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모든 사람을 오로지 나만 아는 인간으로 만들어

만인이 만일을 상대로 아귀다툼을 벌이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평범한 훌륭한 사람이 얼마나 많아지는가'

에 달려 있다.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공부는

'마음껏 놀기'이다.


제도 교육이 사람을 무지에서 벗어나게 해주진 않는다.

다만, 무지를 좀더 어려운 말로 표현할 수 있게는 해준다.


오늘 한국의 입시 장사가 부끄러운 장사인 건,

사람들의 불안감을 이용하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지성인으로 키운다는 건

슬퍼할 일에 슬퍼할 줄 알고

분노할 일에 분노할 줄 알며

양심을 거스르는 행동을 했을 때

잠 못 이루는 능력을 길러주는 일이다.

지식은 그 다음이다.


아이의 영혼은 느리고 의미 없는 시간에,

그윽하게 먼 산 보는 시간에 성장한다.

(교실에서 문득 창밖의 먼산을 바라보는 아이에게 

희망이 있는 건 그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교육이란 아이들의 영혼이 성장할 시간을

1분 1초도 허용하지 않는 노력을 뜻한다.


세상을 파악하는데 필요한 건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제대로 된 눈, 즉 교양이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능력을 가졌어도

자신을 들여다볼 줄 모르는 사람,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인 줄 아는 사람처럼

불쌍하고 초라한 사람은 없다.


교양이 문화적인 지식이나 감정표현의 절제,

우아한 말과 행동따위라는 생각은 봉건적이다.

교양이란 '사회적인 분별력'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 뜻과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 그게 교양이다.

그걸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교양 있는 사람'이다.



3. 주중에 있었던 개인적인 혁명(?) 체험 이야기

혁명이라고 하니까 뭔가 거창해보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혁명 체험이기에

사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소한 것이 사소한 것은 아니더군요.

저는 그 사소한 것 하나를 위해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발을 떼서 실행했거든요.


그것은 10년이 되어가는 거실의 낡은 컴퓨터를 두고, 

올해 내내 고심했던, 

윈도우 10 업데이트 지원 종료에 따른

제가 내린 최종적인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윈도우 10 업데이트 지원은 

지난 2025년 10월 14일에 종료였는데,

제 선택지는 이랬습니다.


1). 컴퓨터를 퇴역시킨다.

2). 오프라인 전용으로 사용한다

3). 새 컴퓨터를 사서 교체한다.

그리고 선택하기는 두려웠던

4). 리눅스를 설치한다.


..그랬는데,

제 마음 한켠에서 울컥하는 것이었어요.

낡았지만 10년 가까이 사용하고도 멀쩡한 컴이

단지 마소로 인해 구조조정을 당한다는 게

어이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1), 2), 3)의 선택지는 

제가 원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선택지의 한계까지 몰리자,

저는 결국 4)를 선택합니다.


구글링 검색 결과,

일반 사용자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소문난

리눅스 민트 시나몬 배포판이 있더군요.

그것을 다운로드해서

USB 부팅 디스크로 만들고,

거실컴에 클린 설치를 했습니다.

듀얼부팅하기엔 SSD 용량도 작고 해서요.

'새 술은 새 부대에'였던 거죠.


그렇게 두근두근 리눅스 민트를 설치하고 나서,

저와 엠마는 감탄하게 됩니다.

윈도우 설치 과정보다 훨씬 쉬웠고,

한글입력기 설정을 하고 나서 보니,

필요한 앱들은 모두 다 기본제공하더군요.

민트 시나몬 배포판의 GUI는 한글판에 매우 간결했고,

사용법은 지극히 단순했어요.

엄청 쉬웠던 겁니다. 

바로 사용할 수 있었어요.

인터넷, 오피스, 달력, 할일 관리, 이미지와 문서, 영상 뷰어 등 

설치 후 그냥 다 됩니다.


그 동안 저는 리눅스를 

전문적이고 까다로운 것으로 여기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설치와 사용이 쉬울 줄은 몰랐던 거죠.

터미널 사용은 나중에 익히면 되는 거였어요.

이제 보안과 업데이트 걱정은 사라진 것입니다.


리눅스 민트에서 놀라웠던 건,

오디오 음질과 화면 계조 개선이 됐고,

(엠마는 해상도가 올라갔다고 좋아함)

무선 네트워크를 더 안정적으로 잘 잡고,

(쿠팡 플레이에서 나솔 보는데 순간 화질저하 없음)

설치용량은 윈도우의 1/5 수준이었고,

사용감은 탄탄하고 빠릿했다는 거에요.

(반응 속도가 훨씬 신속해짐)


리눅스를 설치한 결과,

개인적인 혁명(?)이었던 거죠.

저는 XT 시절 이래로 한발짝을 못떼고 있었습니다.

PC에서는 마소의 도스와 윈도우만 사용해왔으니까요.


그런데, 

봉준호 감독이 1인치 자막의 벽을 넘으면,

그 말처럼 한발짝을 떼서 리눅스를 설치하니까 

신세계인 거에요.


더 이상 머리 한켠에 있는

'종료되는 업데이트 지원'이라는 

무언의 압박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과 자유에 기쁘기까지 하더군요.


물론 윈도우는 구매해서 사용하는 여러 상용툴들이 있어서,

새 컴이나 다른 컴들은 계속 윈도우 11 환경에서 사용하겠지만,

언젠가 그 컴들도 업데이트 지원이 종료되면

리눅스를 설치해서 사용하려고 해요.


이번 주중에 리눅스 설치는

엄청 신선한 혁명 체험을 안겨줬습니다.


저같은 사례에 해당하면

리눅스 민트나 기타 대중적인 배포판 설치를 추천드립니다.

엄청 쉬워요.


PS.

이번 주는,

리눅스 모색과 설치까지 

꽤 시간이 소요되어

책 읽을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이 줄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맞게 얇고 부담없는

김규항 저자의 두 책을 다시 꺼내 보았어요.

그가 말한 핵심 키워드가 있는데,

발췌로 소개한 김규항 저자의 두 책을

다음 주에 n회차 기록으로 

좀 더 다뤄볼까 합니다.


- 2025년 10월 25일, 엠마네오빠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 김규항 아포리즘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 김규항 아포리즘
그믐에 가입한 이유와 왜 혼자 놀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약식 독서 기록(n회차는 아님)

그믐에 가입한 이유와 왜 혼자 놀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약식 독서 기록(n회차는 아님)



지난 주말에는 

중간자적 지식인 유형을 말했었는데

이번 주는 그 동안의 그믐 활동 첫 소감과 

함께 이번주 약식 독서 기록 소감을 이야기할까 합니다.  


1. 그믐에 가입한 이유

가입 동기야 뭐..

'여기는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있으니,

그런 사람들과 사유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이거였어요.


그외에도,

'독서 한정으로 사람이 모이고 있구나.'

'인터페이스가 심플하구나.'

이런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2. 혼자 활동하는 이유

그런데 이런 처음 인상과는 달리

막상 가입하고 나니, 

독서모임 활동을 하기엔 

제 고유의 도서 습관과 

생활 리듬에 맞지 않은 거에요. 


제 독서습관은 이렇습니다.

저는 제가 의욕한 책들을 읽지만,

대체로는 각잡고 독서하지는 않습니다.

일상에 짬날 때 수시로 조금씩 읽어가면서 

어느 순간 다 읽는 부류입니다.

게다가 책을 두 세 권 병행해서 읽어가는데다,

이미 읽은 책들 중에 일부를 양서로 분류하면,

주기적으로 다시 읽습니다.


아울러 저는 책과 저자에 대해 이렇게 봅니다.

먼저. 책을 읽을 때는 항상, 

대단한 것을 읽는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책 내용은 한낱 인간의 사유 흔적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책내용에 대해서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해하지 못하면 다음 기회에 보자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읽은 책들 중에 일부를 양서로 분류하면 

그 책은 전체로든 부분으로든 여러번 반복하게 됩니다.


이런 연유로 저자와 저자가 말한 내용에 대해서

저는 항상 약간 마음의 거리를 두고 읽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책 내용의 품질 수준에 따라 

존중하고 좋아하는 저자도 생기긴 합니다.

예로, 박찬국, 고병권, 박민영, 권오성 같은 저자들이죠.

그외에도 여러 저자들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리를 두게 되는 저자들도 생기죠.

그런 저자들은 지난 주에 제가 말한 

유의해야 할 유형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반론은 필수여서, 

무조건 저자나 책내용을 긍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때문에 추종자들이 있는 경우,

저는 매우 불편한 사람이 됩니다.

추종자들과 대화하는 것은

저 역시 즐거운 게 아닙니다.


어쨌든 그믐엔 가입했는데,

독서모임을 만들거나 참여하기엔 여러모로 안맞고,

그러다 보니 그믐의 사적 영역인

'그믐 속 내 블로그'로 수렴되더군요.


그래서 

'내 편지나 독서 활동 기록차원의 흔적이나 남기자'

이렇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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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요약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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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하고 나서, 처음 의도대로 되지 않더라.

그럼에도 그믐은 

책읽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게 장점.

그러면 내 편지나 독서활동 흔적이나 남기자.

공개된 주간 기록이라고 생각하자.



3. 이번 주 독서 약식 기록

30여일에 걸쳐서 총 5권이 이번 주에 마무리됐습니다.

박찬국 저자의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고병권 저자의 '살아야겠다',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통신 닉네임으로는 '박가분'으로 알려져 있는

박원익 저자의 '공정하지 않다'. 

이렇게 해서 인문 철학 해설서 2권, 

사회 분야 3권을 읽었네요.


박원익 저자의 책만 도서관에서 빌려서 새로 읽었고,

나머지는 모두 소장 도서로 n회차 독서를 했습니다.


박원익 저자는 명철하게 글을 잘 썼다고 생각합니다.

술술 읽는 맛이 있더군요. 글맛이 좋았습니다.


읽었던 박원익 저자의 '공정하지 않다'를 

소감으로 말해보면 이렇습니다.


청년만 그런 게 아니라, 

남녀노소 대다수가 공정한 세상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공정은 각자의 입장과 서사에서 외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갈등 속에 분열합니다.

여기까지는 박원익 저자도 말한 내용입니다.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세상을 타파하려면,

'모두를 위한 공통가치'가 공유되어야 합니다.

대다수가 공유하고 납득하는 가치,

그것을 일단 '공동선'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공동선'이 무엇인지를 모두 알 수 있고,

모두가 그 '공동선'을 공유하고 지향하면서 

함께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건, 공동선에 대해 

각자의 입장과 서사에 빠진 인간들이

과연 서로 협력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을 뿐이죠.


예로, 프랑스가 국가부도 위기라고 합니다.

재정축소를 해야 한다고 하는데,

마크롱은 부자감세와 서민증세로 

재정축소와 함께 위기를 돌파하려고 했지만,

재정악화를 심화시켰죠.


프랑스 복지는 

정부와 시민의 사회적 약속(합의, 계약)으로 

프랑스 국민들은 정부로부터 은퇴 후 삶 보장을 약속받아, 

매월 소득의 1/4 이상(많으면 46% 이상)을 내면서 

헌신하고 희생해왔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로부터 배신 배반을 당한 것입니다.

당연히 프랑스 시민들은 들고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라 살림 잘못해놓고 책임은 국민이?

그 많은 돈을 냈는데?


프랑스 재계 순위를 보면,

1, 2, 3위를 비롯한 최상위군 대다수가 

사치품 사업체입니다.

첨단 제조 기술업체인 다쏘가 20위권이고요.

즉, 프랑스 최상위 재벌 대다수는

사치품으로 거대한 부를 이뤘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세금에 우호적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최상위 부자들일수록 '내가 왜?' 이럽니다. 

프랑스를 떠나겠다고 협박하고 실제로 그럽니다.


또한, 부자증세만으로는  

거대한 프랑스 재정위기가 당장에 해소되지 않습니다.

즉, 프랑스 시민들도 억울하지만,

복지를 지키기 위하여 협력해야 합니다.

네, 매우 억울하지만요.

대신,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모두 협력해야 합니다.

'프랑스 사회안전망'이라는 '공동선'을 위해서 말이죠.

즉, 모두 다 '공동선'을 위해 손해를 보라는 얘기입니다.



.. 공정한 세상은 누구나 다 원합니다.


그런데, 공정한 세상을 위해서

자신이 헌신이나 희생을 해야 한다면,

기꺼이 하시겠습니까?


박원익 저자에게도 묻고 싶네요.


싸울 대상이 과연 외부에만 있냐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라도 손해보기 싫어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90년대생 이후를 보면 그들 대다수는,

자신의 손해는 일말도 보지 않겠다고 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이기주의자들입니다.


너무나 터무니없고 어이없을 때가 많습니다.

요즘 젊은 세태에서는 

인류 태동 이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로, 이혼전문변호사가 말하는 

요즘 3040 부부들 흔한 이혼사례로,

'엑셀이혼' 즉, 반반치킨 결혼생활로 

온갖 졸렬한 갈등 속에 파탄나서

이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90년대생 이후 젊은 사람들은 흔히들

정부, 부모세대, 타인, 타자에게는 공정함을 요구하지만,

정작 자신은 어떤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선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면서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할아버지와 부모세대들은 

이미 청춘과 중장년의 기력을 다 써가며

인생 갈아넣었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해서,

오늘날의 불공평하고 못난 

마지막 선진국인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조부모님과 부모님께 들어보더라도

그 시절에도 대단히 불공정하고 불공평했습니다.

상상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얘기가 많습니다. 

그 대~단한 불공정과 불공평은

인류 태동 이래 있어왔습니다.


공정과 정의.

이게 하루 이틀짜리 일이라고 보십니까.

한 두 세대 갈아넣으면 될 거라고 보십니까.

패기만 하늘을 찌르는 것 아닙니까.


공동선을 위한 헌신이나 희생까지는 바라지도 않겠습니다.

최소한 상호 협력은 해야죠.

그런데, 그 상호 협력의 자세가 되어 있습니까?


진정한 적은 외부에만 있겠습니까?

정작 자기 자신은 어떻습니까?

박원익 저자와 저 그리고 

누구라도 예외를 두지 않고 보더라도 말이죠.


'공정의 혜택을 누리고는 싶어.

그러나, 공정을 위한 헌신은 싫어.

그건 남이 해야 할 일이고,

우리는 남에게 요구 투쟁만 하면 돼.'


'존경할 만 한 어른이 없어.

내가 그런 어른 밑에서 쉽게 쉽게 

혜택 보며 살고 싶은데 말이야.'


이러면 공정한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자신이 공정을 위한 협력을 하지 않으려고 든다면,

공정을 외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공정을 위해 기꺼이 손해보시겠습니까?

거기에 해법이 숨어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정한 결혼? 그것도 마찬가지이고요.


박원익 저자의 책을 재미있게 잘 읽었지만,

책을 읽고 나서 그런 소감이 들었습니다.



PS.

마침 박원익 저자의 책 소감글을 쓰고 나니

날짜도 상응해주네요.


앞으로도 이렇게 종종 

새로 읽은 책 이야기도 해볼까 합니다.


- 2025년 10월 18일, 엠마네오빠


공정하지 않다 - 90년대생들이 정말 원하는 것
공정하지 않다 - 90년대생들이 정말 원하는 것
시장 인문학의 중간자적 지식인과 ‘인문학의 마지노선’ 이야기

시장 인문학의 중간자적 지식인과 ‘인문학의 마지노선’ 이야기



지난 번 편지글에서

이어서,

오늘은 한국의 시장 인문학에서 

중간자적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의 기여와 한계, 제언 그리고

인문학의 마지노선을 다뤄보겠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중간자적 지식인들을

두 부류로 분류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두 부류를 나누는 기준은

'가르침과 메시지의 사회적 영향에 있어 

부작용 문제가 있느냐 또는 거의 없느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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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부류의 중간자적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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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제일 먼저

가르침에 있어 유익하고 

해석에 있어 부작용이 거의 없는 분들을 

먼저 간단히 짚겠습니다.


제가 지금껏 읽고 곰씹은 도서들과

시청했던 유튜브 영상 강의를 기준으로 하여,


- 술이부작(述而不作)에 충분히 충실한가

즉, 원전에 충실한 가르침을 하는가


-사람들에게 의욕과 스스로의 사유를 키우는가

즉, 읽거나 듣고 나면 의욕과 사유가 꽃피우는가


-겸허하고 본분을 지키는가  

즉, 가르치는 사람의 선을 잘 지키는가


이 세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한 사람들은,

제가 읽은 독서와 시청 영역에서 기반하여 추리면

박찬국, 김상봉, 이정우, 강준만, 박민영, 고병권

이런 저자나 강연자분들이 해당하더군요.


이런 저자나 강연자 분들의 특징은 

가르침과 해석이 원전과 공동선에 충실하고

독자나 청강생들에게 사유의 의욕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의 가르침과 해석은 매우 유익합니다.

그들은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이 

사회적으로 커다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들의 사유가 너무 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중은 

두 번째 유형의 중간자적 지식인들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말하는 

두 번째 유형의 중간자적 지식인들은 

여러모로 난감합니다.

한계와 부작용이 또렷하기 때문입니다.

실명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1. 술이부작(述而不作)을 위배합니다.

원전에 충실한 가르침보다는

자신만의 기발한 해석을 더 중시하고,

그것이 본질이라면서 사람들에게 내세웁니다.

해석은 각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만의 해석을 

본질을 꿰뚫은 통찰이라고 내세우면

읽거나 듣는 사람들의 사고를 고정시켜 버립니다.

이런 폐해를 끼치는 저자나 강연자들이 꽤 많습니다.



2. 엘리트적 오만을 직접이든 은연이든 보입니다.

세상엔 깊은 사유와 통찰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만,

그래도 모아놓고 보면 많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무지한 대중을 가르치는 선지자라는

기괴한 사고와 태도를 보입니다.


겸허함을 모르면,

언젠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3. 탈권위 이미지 메이킹이 지나칩니다.

소위 아웃사이더나 탈권위 이미지를 추구하는데,

그들의 실제 강연 현장을 보면

항상 매스컴 조명이 비추는 포근한 건물 안입니다.

그들 본인 입으로 거리의 철학자라고 자칭해도,

스포트라이트 범위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런 식으로, 말과 행동이 맞지 않습니다.


제가 오래 읽고 보면서 사유한 영역 내에서

직접 식별해낸 탈권위 지식인은 여럿 언급했지만,

그중에서도 '이 분은 진짜 거리의 철학자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박민영, 고병권, 김상봉 저자 정도로 손꼽습니다.

그 정도로 희소합니다.



4. 현실성 없는 위로나 선동을 합니다.

이는 값싼 정신적 마취이기에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걸 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그들은 현실비판까지는 타당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비판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결론이죠.

결론에서 값싼 위로나 선동을 하면

그건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런 글이나 영상을 보고 나면 저는 화가 납니다.

누구라도 말할 수 있는 비판과 값싼 결론까지

제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5. 사람들을 나약하고 취약하게 만듭니다.

가장 위험한 것인데, 이걸 그들이 합니다.

사실 가장 많은 부류입니다.

여기엔 또 두 부류로 나뉩니다.


1). 사람의 취약성을 무한긍정해주는 부류

매우 흔합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달콤하고 포근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라',

'자신의 욕망을 무한긍정하라' 또는,

온갖 기발한 감성의 값싼 위로가 난무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기만과 위선이 넘쳐납니다.

그 결과, 읽거나 보고 나면 남은 건 공허입니다.


2). 사람들에게 모자라다면서 '노오력'을 강요하는 부류

이는, 공허한 자기계발을 유통하는 

최악의 경우입니다.

말 중에 '너희는 모자라다, 미숙하다.

그러니 나를 추종하라.' 

이런 메시지를 은연 중에 계속 전파하면서

집요한 가스라이팅으로 타인을 조종하려고 드는

최악의 유형입니다.

특히, 도덕과 공부 수양의 탈을 씁니다.

그렇기에 언뜻 좋아 보이지만 

기이한 교조 체제의 덫에 물리는

컬트 즉, 유사 종교적인 관계 구조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부 수양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통제받을 내용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부정적인 유형 특징들은

모두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들입니다.


한편, 두 부류의 유형에 

부분 부분 해당되는 듯이 보여도

자신의 지식인 본분을 잘 지키고 

유익함이 더 있는 특이한 사례가 있는데,

김용옥이 그렇습니다.


예외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래 전에,

저는 김용옥 저자의 책 몇 권을 읽고 접었습니다.

저와는 안 맞더군요.


그건 뭐... 

사람마다 자연스러운 일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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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과 인문학의 마지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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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손꼽은 전자의 유형인

가장 유익하고 부작용이 거의 없는 분들은

저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분들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후자의 유형보다는

영향력이 적습니다.


반면에, 

낮은 것은 쉽기에 영향력이 큽니다.

먹방이나 자극적인 선동 같은 것들이 그렇죠.

그러나, 세상이 낮은 것들이 주류의 힘을 갖게 되면

사회는 점점 낮아져 극단적으로 어리석어지고

터무니없고 심지어 비참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탈권위를 가장한 반지성주의와 탈진실의 하류화, 

야만적 테러 행위가 만연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다 보니, 

인문학의 마지노선을 생각하게 됩니다.

즉, 인문학은 낮은 것의 마지노선을 높여줘야 합니다.


결국 인문학의 마지노선은

사람을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그 언어가 위로든 비판이든,

듣는 이를 스스로 의욕하여 사유하게 한다면

그것은 인문학의 마지노선 안에 있는 것이지만,


나약함과 취약성을 심화시키면서

교조적 카리스마에 의존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이미 넘지 말아야 할 마지노선을 넘은 것이기에

더 이상 인문학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유익한 가르침을 참고하여

스스로 의욕하여 사유하고 실천하는 삶이

필요할 뿐입니다.


인문학이 다시 존엄해지려면

지혜와 사랑, 그리고 존중의 사유로

인간의 존엄성을 세워

사람을 스스로 일으키게 하는 언어,

바로 그런 언어로

사람과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


그것이 인문학의 마지노선이자

좋은 변화의 시작점입니다.


PS.

요즘 박찬국 저자의 책들을 다시 읽고 있는데,

내용이 워낙 좋아서 

욕심껏 쓰기엔 분량이 많아질 것 같고,

(지난 번 펄벅 글 분량으로 데인 경험도 있고)

대강 쓰면 왠지 미안한데다 제가 글쓴 보람이 없고,

중용의 범위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믐 가입 후, 

'그냥 주말에 가벼운 쪽지 수준글로

흔적이나 남기자' 

이런 취지로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점점 진지해지고 해서,

아무래도 무게를 좀 줄이고 싶을 뿐입니다.


당분간은 편지글로 좀 가볍게 

대화체로 흔적을 남길까 합니다.


다음 편지글 주제는

'그믐에 왜 가입했고 왜 혼자 놀고 있는가'를

가볍게 이야기할까 합니다.


그리고,

날짜 숫자가 귀여워서 오늘 올립니다.


- 2025년 10월 10일, 엠마네오빠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 서울대 박찬국 교수의 하이데거 명강의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 서울대 박찬국 교수의 하이데거 명강의
한국사회의 시장 인문학 세태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배움과 사유의 가치에 대하여

한국사회의 시장 인문학 세태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배움과 사유의 가치에 대하여



요즘 대학에서 인문학은 인기가 없습니다.

사실상 몰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시장에서 인문학은 잘 팔리고 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유튜브나 유명 인사의 강연을 통해

인문학을 보고, 듣고, 소비합니다.


문제는, 시장 인문학이 팔릴수록

사람들의 생각이 점점 굳어지고

얕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한국에서 도올 김용옥, 강신주, 

고미숙, 김태형, 오은영, 법륜, 혜민 같은 

알려진 대중적인 강연자와 상담가들 

즉, 중간자적 지식인들과

훨씬 대중적인 인기가 있는

이기주, 하태완 같은 

SNS 감성 작가들의 활동이

나름 활발한데도 말이죠.


여기엔 여러 원인이 있음을 봅니다.

그것에 대한 상세한 얘기는 

다음 주말에 다루기로 하고요


다시 현세태 모습을 보면 이렇습니다.


시장 인문학은 르네상스인데,

정작 사회는 점점 더 하류화되고

반지성주의는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역설적인 풍경입니다.


날이 갈수록 이상합니다.


인문학은 더 이상 '질문'의 언어가 아니라

‘교양’과 ‘위로’의 언어로 소비되고 있어서일까요?


인문학이 개인의 탐구와 사유 활동이 아니라

인기 철학자가 내놓는 처방 소비가 되고,

고전 명언이 유튜브 영상 콘텐츠각이 되는 현실에서

우리는 대체 무엇을 놓친 것일까요?


1. 인문학의 시장화, ‘생각’이 아닌 ‘상품’으로 팔린다


오늘날의 한국사회 시장 인문학은

크게 세 가지 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속성 처방의 유행병.

고전은 ‘핵심 키워드 요약’ 수준으로 단순화되고,

철학은 ‘남이 주는 해석과 위로’로 

재단(裁斷)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직접 사유의 수고로움 대신,

즉각적인 단편 교양 축적과 

위로만을 교환받으려고만 듭니다.


둘째, 스타(?) 지식인 중심의 권력 구조.

현세태는 무명 혹은

현장의 깊은 지성인들보다는

미디어 노출이 잦은 

몇몇 중간자적 지식인들과 

SNS 감성 작가들이 훨씬 더 주목받습니다.


그중에는 한때 

시대의 사유를 이끌었던 인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시장의 요구에 맞춰

발언을 180도 바꾸는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이는 그들마저 

시장 논리와 타협할 정도로,

대중의 사고방식이 

이미 시장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팔리는 소수’의 해석과 위로에 의해

사유와 실천의 인문학은

뒷편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셋째, 자본과 제도에 적응만 하려는 경향.

제가 존중하고 좋아하는 

박민영 저자의 『반기업 인문학』에서도

줄기차게 비판하고 경고했던 내용입니다.

대기업 임원 대상 특강이나

공공기관 교양사업 등에 의해,

인문학은 체제 비판이 아니라

체제 적응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은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습니다.

한국의 시장 인문학 열풍은

스티브 잡스의 “인문과 기술의 교차점” 발언 이후 본격화되었지만,

정작 그 출발은 자발적 탐구의 발로가 아니었습니다.


시장에서 잘 팔려서,

'돈을 잘 벌 수 있게 해주는 근원'으로써

인문학이 조명을 받은 것 뿐이었습니다.


이 역시 '시장에 잘 적응하라'일 뿐,

“(읽고 스스로 잘) 생각하라”는

인문학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2. 위로의 인문학에서 사유의 인문학으로


요즘 10대, 20대, 30대, 심지어 40대, 50대 등

많은 사람들이 “위로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어딘가에서 위안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시장은 사회에서 지치고 다친 영혼들을

유혹하면서 위로를 판매합니다.


사람들에게 소확행이나 욜로, 

'취향입니다. 존중하시죠?'라는 인정투쟁,

책임없는 자기욕망 무한긍정을 

추구하도록 유혹하고,

유명 지식인들의 강연을 들으면서

인문학을 이해하고 위로받으라고 말이죠.


저는 위로를 죄악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인문학이 위로에 머물 때,

그건 이미 인문학의 본질과 역할을

포기한 것임을 직시합니다.


신채호, 안창호, 함석헌 같은 선지자들은

‘생각하는 백성, 철학하는 백성’,

즉 사유와 성찰을 하는 시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겠습니다.

사유와 성찰은 

결국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점입니다.

인간을 이해하려는 사랑의 마음,

세상을 이해하려는 사랑의 마음,

그 사랑의 마음이 

지적 호기심과 의욕의 

근원적인 동력이라는 거죠.

그런 사랑의 마음은 

수고로움과 고통을 감내합니다.


예로, 한국문화를 사랑해서 

한국어를 마스터한 외국인들을 보면 

놀라울 때가 있습니다.

정작 한국인인 저는 한국문화를 좋아하기는 해도,

그들처럼 물아일체 수준으로 사랑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순도 높은 사랑하는 마음은 

한계를 초월합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배우면서

직접 사유와 성찰의 수고로움을

일상에서 감내할 때,

사람은 비로소 좋은 어른,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반면에, 사람에게 위로를 파는 인문학은

쉽고 달콤하기에 빠르게 부패합니다.

사람을 그대로 주저앉히고 퇴행시킵니다.

심지어 악화를 심화하기까지 합니다.


예로, 위로를 주로 판매하는 인기 상담가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반지성적인 소비자로 전락시킵니다.

그 결과,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잘못은 항상 남에게 있다'고 여기면서 

책임전가와 보상 요구만 하는 

‘응석의 문화’를 확산시키고 맙니다.



3. 시장보다는 삶의 인문학, ‘교환’에서 ‘관계’로


시장의 문법은 ‘교환’입니다.

돈을 주고, 효용의 만족과 위로를 얻는다.

하지만 삶의 문법은 ‘관계’입니다.

자기 자신과 고독하게 대면하는 관계,

나와 타인, 더 나아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공존공생을 모색하고, 함께 성장합니다.


그 관계 과정이 인문학의 본래 자리입니다.


그런 관계 과정 속에 

인문학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고귀한 가치의 미적 아우라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고유의 자존과 존엄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4. 무쓸모의 고귀함을 지향하기


세상은 언제나 쓸모와 효용을 따집니다.

심지어 한국사회는 부모 자식 관계조차 

조건부 사랑 즉, 쓸모와 효용으로  

서로를 평가하는 가정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배우면서,

자신만의 사유와 창조를 추구하는

무쓸모의 고귀함 속에서

새로운 힘을 키워갑니다.


무쓸모는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쓸모가 없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쓸모가 없다고 여겨진 것이야말로,

역사적으로 늘 새로운 고귀한 가치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지금 당장의 무쓸모는

시대와 시장이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그것 자체가 

인문학의 시대불변 가치가 됩니다.


요즘도 출판사를 먹여 살리는

공자, 노자, 쇼펜하우어, 니체, 예수 등은

그들 시대의 무쓸모였습니다.

공자는 대놓고 ‘군자불기’를 말했습니다.

인문학의 가치는 무쓸모에서 비롯합니다.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무쓸모는 자신만의 사유로 

날마다 놀이하듯 무언가를 창조합니다.

수많은 비교와 남들의 평가 속에서

자신의 상대적 위치를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무쓸모는

쓸모에 질식되고 불안한 영혼들에게

자신이 지닌 본래의 힘을

되찾게 해주는 유일한 선택지입니다.

쓸모는 언젠가 소진되지만,

무쓸모의 아우라는 영원합니다.


그래서, 쓸모와 적응에만

매몰되어 질식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 삶의 지혜와 의욕이 넘치는 

살아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자신의 진정한 매력과 힘을 회복하며

새로운 가치를 실현하고 싶다면,

자신만의 사유로 

날마다 놀이하듯 

무언가를 배우고 창조하는

무쓸모인 사람이 되십시오.”


이상으로 주절주절

인문학 소감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P.S.

주중 금요일에 글을 작성하고

주말 내내 틈틈이 퇴고를 거듭하고도

올릴까 말까 고심을 하다가

이렇게 올립니다.


그믐은 책을 사랑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려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까요.


시장 인문학은 

박민영 저자가 다룬 주제이기도 했지만,

저 역시 난감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지식인, 작가, 강연가, 상담가들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태클을 건 것이니까요.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여러 군데를 

건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어찌 보면 총론적으로는

현세태에 찬물을 끼얹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사고를 고정시키거나,

인문학을 포장지 삼아 

공허한 자기계발을 유통하며,

위로 판매로 사유를 퇴행시키는 현실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분명한 건, 현세태를 졸업하는 게

한국사회와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유익하다는 사실입니다.


다음 주말엔 이어서, 시장 인문학 속

중간자적 지식인들의 기여와 한계,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제언,

그리고 인문학의 마지노선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그럼 모두, 좋은 명절 휴일 되세요.


- 2025년 10월 4일, 엠마네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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