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회차 독서 기록

[n회차 독서기록] 고병권, 『철학자와 하녀』

by 엠마네오빠2025-08-31 11:14:34
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n회차 독서기록] 고병권, 『철학자와 하녀』


대중 인문분야의 한국인 저자들 가운데 

나는 고 박민영과 고병권, 

이 두 사람을 손에 꼽는다.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이지만, 책을 읽고 나면 묘하게 그립다.  

그렇다고 그들의 모든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의견을 달리하고, 심지어 고개를 젓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을 좋아한다.  

글에서 느껴지는 진실성과 집요한 디테일의 깊이 때문일 것이다.


집에는 고병권의 책이 네 권쯤 꽂혀 있다.  

그중에는 『자본』 시리즈 합본도 있다.  

문제는 그게 내 도서 구매 이력 초유에 

최악의 “호구 쇼핑”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드커버에다 주요 참고 삽화 자료 생략,

무리한 수준으로 압축 저장하다 보니 깨알 같은 글씨.

노안이 시작된 내 눈에는 

한두 페이지를 읽기도 버겁다.  

가격은 동일한 강의형 원고와 물성 분량 수준인 

백승영의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의 세 배.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책을, 

가장 탐욕적인 자본주의 상술로 팔아먹은 거다.

책을 펼칠 때마다 ‘흑우 인증’ 당한 기분이 밀려온다.  

물론 저자의 잘못은 아니다. 출판사의 욕심일 뿐.  

온라인으로 구매한 내 잘못도 어느 정도 있다.

오프라인에서 책 실물을 봤으면, 나는 구매 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병권 저자의 글들은 내 사고를 넓혔다.  

이 가치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고병권의 자본을 읽다 눈피로로 잠시 덮으면서,

그의 다른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철학자와 하녀』를 펼쳤다.  

이 책은 읽은 사람마다 평가가 높은데, 

나 역시 그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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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스가 우물에 빠진 건 통쾌하다


책은 탈레스와 하녀의 일화로 시작한다.  

별을 보며 걷다 우물에 빠진 철학자.  

그 모습을 보고 깔깔대며 조롱한 하녀.  

“나리는 하늘만 보느라 발치 앞을 못 보네요” 하면서.


문득, 공자의 말씀이 떠올랐다.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그러면서, 마르크스의 선언도 떠올랐다.  

“철학자들은 지금껏 세계를 해석해왔다. 이제는 변혁해야 한다.”


철학은 추상과 초월만이 아니다.  

발치의 삶을 지탱하고, 

세상을 조금이라도 낫게 바꾸는 힘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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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지옥에서 행복한 보금자리를 짓는 일이다


고병권은 말한다.  

철학은 지옥에서도 살 만한 보금자리를 짓는 일이라고.


신이 보살핌을 거둔 자리에 생겨나는 삶의 터전.  

그것은 인간이 서로 건네는 희망과 배려로 이뤄진 공동체이다.


니체는 “얼음 덮인 산꼭대기”를 철학의 자리라 했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변방으로 추방된 것들을 

다시 발견하는 자리에서 철학은 시작된다.  

현실이 무너진 곳에서 

다른 새로운 현실을 잉태하고 빚어내는 

창조적인 작업이 철학이라는 것이다.


깨달음은 천국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천국은 극복의 필요가 없으니까.  

철학은 지옥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그곳을 삶의 조건으로 삼아  

새로운 길을 찾고 실현하려는 사람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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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있어줌


고려시대 불화, ‘수월관음도’.  

풍만한 몸매와 섬세한 장신구,  

깨달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존재.  

고병권 저자는 그 그림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동시에, 지장보살은 볼품없다고 느꼈단다.


그런데 고병권 저자의 꿈에 지장보살이 나왔단다.

지장보살은 남루한 가사에 지팡이를 든 초라한 모습으로 다가와

저자 자신의 머리를 지팡이로 툭 치더란다.


이 꿈에 대해, 스님이 고병권 저자에게 말했다.  

“관음 보살은 가진 걸 다 나눠주는 회장님 같은 분이지만,

지장 보살은 줄 게 없어도 곁에 있어주는 분입니다.”


그때 고병권 저자는 알았다고 한다.  

곁에 있어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선물이라는 것을.  

“있음”과 “줌”이 일치하는 자리.  

존재가 곧 선물이라는 뜻이다.


다만 나는 여기에 약간의 선을 긋고 싶다.  

애초에 붓다는 “벗을 가려 사귀라”고 했다.  

붓다 역시, 공존은 인정하되, 무차별적 공생에는 반대한 것이다.

삶의 방향이 다른 사람과 억지로 함께 살면 서로가 파괴된다.  

지장보살도 ‘공존’은 했지만, 

공생까지는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단지 곁에 있어준 것까지가 

최대한의 선의와 배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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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 이전의 배움


고병권 저자의 노들야학 20년은 

현실을 살아간 그의 기록이기도 하다.  

장애인 학생과 대학생 교사가 함께 꾸린 야학에서  

장애인들은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도, 

밤마다 울분과 희망이 교차했다.

체념과 무기력의 정서를 극복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건 

장애인이 밤에 피운 모닥불 체험이었다.  

“TV에서만 보던 장면을 '직접' 해봤다. 

별빛이 다가와 비추는 것 같았다.”  

그 체험과 자각으로 인해, 

체념과 무기력이 자신감으로 바뀐 것이다.


칸트가 계몽을 ‘지능’이 아니라 ‘용기’라 했듯,  

리영희가 사람들에게 ‘생각 자체’를 일깨웠듯,  

그런 주체의 체험을 통해,

노들 야학 장애인들은 

배움 이전에 지니고 있었던 

체념과 무기력의 정서를 

자신감의 정서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검정고시 합격자와 동시에  

장애인 사회운동가들이 태어나게 된다.


나는 고병권 저자의 또 다른 책 『살아가겠다』 속  

고(故) 김주영 여성 장애인 활동가를 떠올렸다.

이분의 삶과 비극적 죽음을 통해,

한국은 시설사회가 아닌, 

시민공동체여야 한다는 진실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의 소감과 반론, 제언도 있지만,

너무 길어질 수 있어서 

이쯤에서 수렴하고 다음 기회에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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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노동


고병권 저자가 홈에버 파업에서 만난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사측은 고객 불평이 들어오면, 새벽에라도 불러서  

‘다섯 가지 인사말’을 수십 번 반복하게 했다.  

심지어 어떤 30대 과장은  

50대 여성 노동자들에게 토끼뜀과 오리걸음을 시켰다.  

부당한 지시와 명령을 굴욕적으로 받아 수행한 것이다.


고병권 저자는 물었다. 

“그걸 그냥 참으셨어요?”  

여성 노동자들은 대답했다.  

“억울했지만, 과장 입장에서는 화가 날 만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녀들은 자신의 굴욕과 모멸을 감내하면서도,  

오히려 권력자의 눈으로 상황을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고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말한 ‘해석노동’이다.  

약자는 권력자의 시선을 먼저 해석하는 부담을 떠안는다.  

반대로 권력자는 아랫사람의 입장을 거의 상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인간관계는 

상호간의 해석노동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좋은 사회란 권력자도 해석노동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회다.  

동양의 고전도 말했다. “백성을 헤아려 선정을 베풀라.”  

고수와 하수는 여기서 갈린다.

그런 면에서, 한국 기업 대다수는 하수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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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가치


저항 없는 대화는 대화가 아니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 당시, 선장의 첫 방송은 “가만히 있으라”였다.  

교회 찬송가에도, 폭력의 명령어에도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는 부당한 지시 명령은 반복된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가만히 있으라”는 부당한 지시나 명령을 내리는 자는  

모두 범죄자이며 적이다.  

부모, 형제, 이웃, 동료, 정부일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모두 범죄자이고 적이다.


부당한 지시나 명령에 대한 

저항과 전복은 주체의 기본값이다.  

굴종은 노예의 운명일 뿐이다.  

우리는 주체인가, 노예인가.  


저항과 전복은 주체로서 우리의 DNA에 새겨진 권리다.

주체는 부당한 지시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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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


지금까지 극히 일부만 소감으로 밝혔을 뿐,

대다수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다.


고병권 저자의 『철학자와 하녀』는 

철학이 어떻게 발치와 하늘을 이어야 하는지를 

저자 자신의 삶 속의 체험 이야기와 함께 보여준다.

1. 지옥에서 행복한 보금자리를 상상하고 짓는 실천력,  

2. 곁에 머무는 존재가 주는 '존재 가치'의 선물,  

3. 배움 이전에 자신감과 용기의 자각 체험을 스스로 해내야 한다는 점,  

4. 권력자도 '반드시' 감당해야 할 해석노동,  

5. 저항과 전복이란 주체의 일상과 삶 영위.


이 다섯 갈래가 모일 때 

철학은 더 이상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일상 속의 살림이 된다는 것이다.


PS.

다음 책은, 고 박민영 저자의 

『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를 해볼까 한다.

학교는 개인, 가정, 사회의 온갖 병리 현상의 근원이다.

그런 학교를 다루거나 초월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려운 것도 아니다.

우리는 사실 이미, 

학교가 필요하지 않은 사회에 진입했다.

낡은 것은 우리의 타성과 관성일 뿐,

새로운 것은 이미 와 있고,

단지 배움 이전에 먼저 필요한 

자신감과 용기의 자각이

우리 역시 필요할 뿐이다.

장애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아직도 시설사회에 갇혀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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