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 김도현 저자와 함께 장애인을 읽고 우리를 읽다
2025-09-07 20:50:06![[큰글자도서] 사람을 목격한 사람 - 고병권 산문집](https://image.aladin.co.kr/product/33838/54/cover150/k912930993_1.jpg)
고병권, 김도현 저자와 함께 장애인을 읽고 우리를 읽다
이번 주 n회차 독서 기록은 다음 주로 미루려 합니다.
박민영 저자의『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를 다 읽었지만,
그의 책들 중에서도 무거운 주제여서,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대신, 요즘 틈날 때마다 관심을 갖고 탐구해온
주제를 짧게 나누려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장애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70~80년대만 해도 장애인들은
일상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눈에 띄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점이 늘 의아했습니다.
한국 인구의 약 5%,
대략 250만 명에 이르는 장애인들 중,
특히 중증 장애인들은 사회의 시선에서 감춰졌습니다.
통제뿐만이 아니라, 인권유린과 착취가 일어나는
밀폐된 시설에 갇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2023년 전장연의 과격했던 출근길 지하철 시위는
저 자신에게 본격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그들은 차라리 나쁜 사람이라는 욕을 먹더라도
저런 시위를 선택할까?”
그런 그들의 저항과 권리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장애인과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생태학적 시선으로 본다면, 이 말은 더 확장됩니다.
식물에게 일어난 일은 동물에게,
동물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에게 되돌아옵니다.
마찬가지로,
장애인에게 가해진 억압은
장애인에게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민 전체의 삶을 옥죄는 방식으로 되돌아옵니다.
장애인과 우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시설에 갇힌 장애인이 있듯,
제도의 시설 속에 갇힌 우리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점에서 도움이 된 책들이 있습니다.
노들야학에서 20년 넘게 장애인들과 함께해온 고병권 선생,
그리고 노들야학 교사 김도현 선생의 책들입니다.
저자 김도현은 사회복지학과 장애학을 분명히 구분합니다.
사회복지학은 니즈 → 지원 → 사회복지사(행위 주체)
장애학은 억압 → 저항 → 장애인 당사자(행위 주체)
사회복지는 당장의 고통을 덜어주는 지원에,
장애학은 구조를 바꾸려는 저항에 무게를 둡니다.
전장연 시위 역시 이 저항의 맥락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권리 언어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권리 언어는 저항에 꼭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사회의 온도를 차갑게 만듭니다.
요구는 있으되,
실현을 위한 구체적 방법은 부족하고,
때로는 현실의 제약을 외면하기도 합니다.
또한 ‘어디에서, 누가, 어떤 고생을 하고 있는가’를
돌아보지 않은 채 결과만을 요구할 때,
그런 요구의 누적은 결국,
그들 자신과 타자 사이의 연결 다리를 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저자 고병권은
『사람을 목격한 사람』에서
전장연 시위를 비난하는 시민들을 향해
이렇게 물었습니다.
“죄 없는 시민은 정말 죄가 없습니까?”
저 역시 이 질문을 바꾸어 되묻고 싶습니다.
“죄 없는 장애인은 정말 죄가 없습니까?”
장애인이든 시민이든,
'보편적인 대의명분' 없이
자기만의 권리 언어만을 내세운 저항만 하면,
대립과 분열을 강화시킬 뿐입니다.
설령 그런 방식으로 원하는 것을 얻는다 해도,
누군가의 고통과 소외가 축적된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 모두의 부담으로 돌아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권리 언어만의 저항이 아니라,
불의를 거부하면서도 대의명분을 세우고,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변화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사회의 구조와 관계를
새롭게 재배치하는 길입니다.
물론 사회도, 개인의 사정도 복잡다단합니다.
쉬운 해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경제나 기술적으로는
가능한 사회에 도달했으나,
상상력과 합의가 아직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을 뿐입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인간 사회의 집단적 사고가
너무나도 더디게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정지된 것처럼 보이죠.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온갖 고통이 있었지만,
우리 모두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의 성찰과 실천이 이어질 때,
사회는 점점 좋게 바뀔 수 있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시민과 시민 사이에 건너가는 다리 하나가 놓일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더 인도주의적이면서도
훌륭한 사회를 하나씩 하나씩 실현하게 될 것입니다.
PS.
사회적 차원에서 시설이 아닌 형태로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인도주의적이고 인간적인지는,
우리가 장애인과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 태도가 곧 우리 자신과 사회의 품격을 결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그만큼 좀 더 자유롭고 인간다운 사회를
함께 이루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 2025년 9월 7일, 엠마네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