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회차 독서기록] 박민영,『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인물과사상사
2025-09-14 19:40:23
[n회차 독서기록] 박민영,『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인물과사상사
한국사회의 교육열의 본질은 무엇일까
정부가 짜놓은 초중고 12년과
대학 4년은 무려 16년이라는 거대한 세월이다.
한국 사람들은 태어나 유아 연령에 이를 즈음부터,
엄청난 교육열의 압박 속에 성장한다.
시간, 에너지, 활력이 넘쳐나는 어린이~청소년 기간을
학교에서 소진한다.
아이들은 그렇게 학교라는 제도에 강제로 편입된다.
학교는 교육 기구라며, 의무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모두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이 소중한 기나긴 개인 인생 기간을 빼앗기는데도,
왜 교육이라는 이름의 장치에 속아넘어갈까.
실제로 사회에서 사람들은 초중고졸이나 퇴학자가
무시받고 차별받기 때문이다.
나아가 대졸도 인서울, 지거국, 지잡대로 나누고,
머릿속에 자기들만의 추상적인 계급도를 그려가며
서로를 차별하기 때문이다.
그런 게 두려워 학교에 다니게 된다.
그런데, 민주주의 사회는 부당한 차별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학교가 과연 민주주의 시민을 키워낸다고
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이 상호 존중과 대화, 토론,
협의, 협력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
학교는 정말 그런 시민을 길러낸 주체였던가.
학교는 교사, 학생, 부모 모두에게
불편하고 무거운 고통을 주는 '시설'이다.
그 시설 속에서 교사와 학생은 지쳐가고 타락하며,
부모는 자녀를 인질로 한 학교의 협박에 저항할 수 없다.
아무리 학교를 미화하려고 하더라도,
학교의 본질은 교사, 부모, 아이들을
옥죄는 거대한 근원 중 하나였다.
나의 경험
박민영 저자는 어린 시절 학교의 폭압 경험을 잊지 않았다.
성년이 된 후 그는 학교의 본질을 이 책에서 고발했다.
그의 고발을 읽는 것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읽으면서 나 역시 국민학교 시절 경험이 다시 떠올랐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가학적인 폭언과 폭력을 남용했던
4학년 남성 담임과 6학년 여성 담임,
이 둘은 지금 돌이켜 보아도
인간적인 존엄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강약약강의 비열함, 촌지를 밝히는 부정부패,
어린이에게 가혹한 폭력 행사, 특정 학생 편애,
일기 검열과 밝은 내용만 쓰라는 통제 등,
폭압의 그 기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반면 중고등학교 시절은
비교적 무난하게 졸업할 수 있었다.
공부에 충실한, 재미없는 생활의 반복이었기 때문이다.
부모의 뜻을 따랐지만,
그렇다고 마냥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학교는 정부의 사기’라며 자퇴하겠다고
수시로 수차례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부모님이 내 목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와 부모, 양쪽 모두의 인질이었다.
가출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질 못했다.
부모님 마음에 못질하기는 더욱 싫었기 때문이다.
결국 내 청춘은 학업과 함께 소진됐다.
웹툰 회귀물처럼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입학부터 거부할 것이다.
내가 강해지는 길은
학교가 아닌 곳에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의 기여는 무엇이었나
사람들은 학교가 글과 숫자, 학문을 가르쳐 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 경우, 유치원 시절에 필요한 것을 스스로 배웠다.
신문에 쓰인 한글과 숫자를 읽고 싶다는 호기심에
아버지를 졸라 한글과 천자문 교재를 받아 스스로 익혔고,
숫자는 어머니를 통해 해결했다.
그렇게 스스로 배움을 찾아 익히던 내게,
학교는 학습을 지리멸렬한 것으로 만들었다.
억지로 시켜서 하는 일과
스스로 호기심에 몰입하는 일은 전혀 다르다.
결국 내게 학교가 기여한 바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모교’라는 말을 거부한다.
어디서 어미를 자처한단 말인가.
폭력, 갈취, 착취, 차별, 배제를 하는 게
어찌 어미란 말인가.
예나 지금이나
정작 내게 평생 기여하고 있는 것은 독서, 운동, 취미다.
지적 성장과 교양의 축적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박민영 저자의 학교 고발 내용들
내용이 방대하기에 짧게 키워드 문장 중심으로 하겠다.
1. 교복은 통제를 위한 구속과 차별을 위한 수단이다.
나 역시 100% 동의한다.
교복은 청소년을 주체가 아닌 감시·통제 대상으로 만든다.
2. 학교라는 시설 속에서 청소년은 욕을 입에 달고 산다.
학교는 본질적으로 교도소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죄수나 갱처럼
서열 놀이를 하며 서로를 괴롭히게 된다.
이런 병리 관계 속에서 진정한 우정은 존재하기 어렵다.
3. 청소년의 ‘쿨 ㅋㅋㅋ’는 좌절의 다른 이름이다.
세월호 학생들은 침몰 와중에도 ㅋㅋ 문자를 보냈다.
이것은 백인 농장주의 가혹한 채찍질에도 신음하지 않고,
'꾹' 참았던 흑인 노예의 ‘쿨’과 닮아 있다.
여기서 내 국민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너무 힘들어도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쿨’ 때문은 아니었지만, 본질은 같았다.
위협 속에서 힘들어도 참아야만 했던 것이다.
4. 유학은 탈출구가 될 수 없다.
조기 유학은 해법이 될 수 없고,
대다수에게 가정 해체와 일탈을 가져올 뿐이다.
5. 미국 유학파는 양키 패치가 되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사회를 망친다.
이의 없다. 이건 100% 진실이다.
신자유주의와 PC, DEI에 세뇌되어 돌아온 자들이 많다.
6. 상문고, 충암고, 에바다, 인화학교 사건은
모두 사학재단과 시설의 폭력, 비리, 착취, 착복의
범죄 기록이다
비리가 가득한 사학재단은 명문고 타이틀에 집착한다.
그 명문고라는 방패로 그들 자신의 죄악을 감추고
심지어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7. 종교사학은 민주 사회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이의 없다. 이는 극단적인 파시즘과 다를 바 없다.
극우(極愚)는 종교와 정치가 근원이다.
8. 학교 성범죄는 학교의 위계 폭력과
학생들 사이의 서열 투쟁이 결합해 일어난다.
교육청은 사건사고가 발생한 학교에 벌점과 불이익을 준다.
그래서 학교는 사건을 은폐하기 급급하다.
특히 학폭·성폭력 사건은
오히려 학교가 가해자 측과 한통속이 되어
피해자를 처벌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왜냐면 피해자는 서열상 가장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짓밟고 사건을 숨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마법의 '취재가 시작되자 마자~'는 그래서 유효해진다.
맺음
박민영 저자의 이 책은 결코 편안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의 ‘학교’라는 시설을 정면으로 고발한 역작이다.
지난 주에 나는 장애인의 탈시설,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복원하는 것에 대한 소감을 썼다.
일반 시민도 다르지 않다.
우리 역시 '탈시설'이 필요하다.
이 탈시설의 다른 이름은 '탈학교'라고 할 수 있다.
현재는 고1에 대입수능을 목적으로 한 '탈학교'가 있지만,
조만간 초중고 전체에 있어 의미할만한 일부가
‘탈학교’라는 흐름을 보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학교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기업이 군주제인 것처럼,
학교는 독재, 차별, 배제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곳을 거쳐 민주주의 시민으로 성장한 사람들은
그 자체가 대단한 성취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학교에서 좋은 추억과
감사의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런 소감 역시 인정한다.
그런 사람이 어디 없겠는가.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학교는 스스로 좋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화는 시민이 만들어낼 때에야 가능하다.
학교가 죽을 지경에 이르러야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그 전까지 학교는 상대평가와 서열화 작업을
‘교육’이라 우기며 국민을 속일 뿐이다.
그것에 대해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것은 교육이 아니다.
그것은 사기일 뿐이다.
더구나 지금 우리는 정보가 차고 넘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학교는 이미 이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채, 한참 뒤처져 있다.
이미, 배우고자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엄청나게 쉽게 정보를 구해 배울 수 있는 시대다.
스스로 배우려는 의지와 호기심만 있다면,
학교가 아니더라도 지식과 기술은
얼마든지 자기 손에 들어온다.
이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는 학교의 권위에서 벗어나
새로운 배움의 길을 스스로 설계하고 실행할 수 있다.
PS.
다음 n회차 기록은
펄벅의『딸아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를 다뤄볼까 한다.
펄벅은 생후 3개월에 선교사 부모를 따라
청나라 말기 중국에서 성장했다.
중국인 유모에게 길러져 중국어가 유창했고,
중국을 자기 나라처럼 여겼었다.
그녀의 이 책은 주로
1950~60년대 미국 미혼 여성들의 서사와 함께,
동아시아적 가치를 체화한 펄벅이
여러 따뜻한 지혜의 조언을 전하는 내용이다.
가끔씩 여성 특유의 상상 서사가 섞여 있지만,
펄벅의 조언은 시대불변으로 유익하다.
- 2025년 9월 14일, 엠마네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