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회차 독서기록] 펄 벅, 『딸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도서출판 책비, 2011)
2025-09-20 21:50:06
[n회차 독서기록] 펄 벅, 『딸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도서출판 책비, 2011)
1. 개요
미국에서 1960년 에노비드(Enovid)라는
피임약이 첫 출시가 되고 나서, 성 혁명이 일어났다.
그렇게 피임약이 성의 자유를 열었을 때,
가장 먼저 사라진 건 책임이었다.
이 책에서 말한 펄 벅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먼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유가 커질수록 책임은 더 섬세해져야 한다.”
2. 시대 맥락
1950~60년대 미국.
해마다 수십만 명의 아기가 사생아(혼외자)로 태어났다.
절반은 입양되지 못해 매우 힘든 삶을 살았다.
펄 벅은 성 혁명 뒤의 무책임을 직시했다.
그녀가 세운 펄 벅 재단은 전쟁고아,
자국 내의 사생아들의 입양을 돕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업무를 하고 있다고 한다.
3. 펄 벅의 메시지들 일부 공감 발췌
“구태여 결혼을 하거나 결혼 관계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단다. 순결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김으로써 벌어지는 일들, 상처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이해할 수 있겠지? 섹스 문제를 비롯해 전 세대로부터 이어져오는 지식이나 전통을 하찮게 여기고 거부할 때, 어떤 곤란함과 위기를 맞게 되는지 일러주고 싶은 거야.
절대 변할 수 없는 법칙, 즉 자연의 윤리를 깨뜨리는 순간 우리는 그 재난의 대가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단다.”
“나는 선도 악도 사람에 따라, 사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궤변을 인정하지 않는다. 선악에 대한 구분은 세계 어디에서든 다를 바 없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혹은 여행을 하면서 거친 많은 나라들로부터 깨달은 점이 있다면, 어떤 나라에서 좋은 사람은 다른 나라에서도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남녀 간에 싸움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단다. 사랑하던 사람들이 싸운다면 그것만으로도 둘 다 이미 패배한 거나 다름없어. 승리는, 생사를 초월한 승리는 두 사람이 하나로 융화될 때 얻을 수 있는 거야.
그러니 네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기뻐하며 받아들이도록 하렴. 여성이라는 건 근사한 일이니까.”
마지막 문장은 오늘날 한국 미혼 남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이겨먹으려고만 드는 남녀는 반드시 패배할 것이고, 서로 도우려는 남녀는 반드시 승리한다. 이건 시대불변으로,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4. 공감 내용과 반론
1) 혼전임신과 책임
젊은 20대 초반 부유층 여성이 펄 벅을 찾아왔다. 그녀는 혼전임신 상태였고,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아이의 아빠는 그녀가 성적으로 매우 끌리던 남성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낳을지 말지, 낳으면 자기가 키울지 입양보내야 할지 고심 속에 고통스러워했다.
펄 벅은 물었다. 아이 아빠와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고.
그랬더니 이 여성의 답변은 이랬다.
“그는 남자로서 매력이 있지만, 결혼할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좋은 남편, 아빠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펄 벅은 결혼할 생각이 없는 아이 아빠에게 임신 사실을 말하지도 말고, 이제부터는 절연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지 말아야 할지를 물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워했고, 펄 벅은 미국(50~60년대)에 한 해 25만 명의 사생아가 태어나며, 입양되지 못하면 힘든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에 그녀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아이를 낳으면 입양 신청을 할 테니, 가장 좋은 부모를 찾아달라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이 이야기는 무책임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것인가에 대한 사유를 하게 만든다. 나는 이 여성이 말단의 책임을 진 것에 대해 나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이성적 끌림에 혹한 자의 실수와 고뇌를 보면서, 경종을 울릴 만한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2) 동일노동 동일임금
펄 벅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고, 동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엔 이의 없다. 그런데 이어서, “같은 일을 하고 있다면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대우, 동등한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여기에 ‘부분 동의, 부분 반론’을 말하겠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하면 누가 손해보는가.
자본가이신 고용주가 손해를 본다.
고용주는 노동자를 소비하는 입장에서
최대의 가성비를 추구한다.
그런데 노동은 사람 따라 결과가 다르다.
같은 일(노동)을 한다고 해서 같은 퍼포먼스와 성과, 같은 업무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동등한 대우와 동등한 보수는 남녀 노동자가 고용주에게서 ‘받는 것’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남녀 노동자 역시 고용주에게 ‘주는 것’의 영역에서 동등해야 한다.
그래야 타당하고 합당하다.
그런데 현실은 과연 그러한가?
남자 공무원(군인 포함), 교사들이 의원면직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직장에서 남자에게 쏠리는 과격한 업무 부담을 이유로 든다. 동일직장 동일직급 동일노동이 아닌 상황이라는 것이다.
예로, 커다란 산불이 났다. 모두 남자 공무원들만 출동해서 몇 날 며칠 씻지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고생했다는 경험담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걸 노동 일상으로 겪다 보면 현타 오고, 좌절감 와서 때려쳤다는 후기들이 온라인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여성운동계, 노동계에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고용주 입장에서는 동일노동 동일 퍼포먼스 동일임금이 타당하다. 그런데 여기서도 문제가 있다. 동일 퍼포먼스는 칼같이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평가는 항상 시비가 붙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렵다.
그러나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빠진 변수들로 인해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특히, 자본가이신 고용주님이 결코 동의해주지 않는다. 손해 보는 당사자이니까. 고용주까지 동의하려면, 동일노동 동일기여 동일임금으로 해야 그나마 납득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동일기여 평가는 결국, 모두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항상 문제는 평가가 늘 분쟁을 부른다는 사실이다.
또한, 제도적 평등이 곧 의식의 평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현실도 있다.
예컨대 동일직급의 남녀 공무원이라도, 여성은 이를 대단한 성취로 여기지만, 남성은 그런 동일직급 여성으로부터 그저 그런 평가를 받기 쉽다. 이건 제도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다. 이 의식의 문제는 제도가 해결해줄 수 없다.
3) 모계/부계 중심주의
펄 벅은 “모계중심주의를 비난하는 남성은 정신적으로 미숙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대로 되돌릴 수 있다. 그렇다면,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여성은 모두 미숙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럴 리 없다.
체제 비판이 곧 성별 비하로 흐르면,
결국 물귀신처럼 함께 심연에 빠질 뿐이다.
보편 윤리의 최소선은,
서로 바꿔도 성립하는 문장만 남기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 남자 중에 모계중심주의를 비난하는 남성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 남자는 내 평생 본 적이 없다. 책에서도 본 적이 없다. 아주 오래된 기원전 모계사회 내용을 말한 『자아 폭발』이란 책이 있지만, 거기에서도 비난은 없었다. 하여튼, 내 평생 본 적이 없다.
이런 유사 상상 발언 외에도, 펄 벅은 여러 상상 서사를 기술했는데, 이것까지 다루면 글은 엄청 길어진다. 생략하겠다. (할많하않)
4) 남성 부양론
펄 벅은 “남성이 부양 책임을 지지 않으면 사회는 여권제로 갈 것”이라 했다. 그러나 사회는 그렇게 선형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회는 언제나 ‘의도치 않은 결과의 법칙’이 작동한다.
예를 들어, 판교 지자체가 담장을 금지하자 사람들은 중정형 주택으로 대응했다. 이웃의 교류를 늘리려는 의도가, 오히려 요새화로 귀결된 것이다.
마찬가지다.
남성이 부양을 포기한다고 해서 사회가 자동적으로 여권제로 향하진 않는다. 오히려 개인주의적 남녀의 단절, 다극화된 가구 형태, 심지어 근미래엔 인간 수준의 AI 로봇 동반자 등 다양한 모습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미혼모 사유리 같은 여성 가장 가족이 주류가 되더라도, 여권 사회가 될 가능성은 없다는 얘기다.
5) 여성의 안이한 삶 비판
펄 벅은 여성들의 편안한 삶도 짚었다.
“여성은 오랫동안 안이하게 살아왔다.”
이 말에 여성들은 반발심이 들겠지만,
펄 벅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그녀는 집안일과 육아의 반복의 힘겨움을 말하면서도,
가장 무거운 짐, 즉 ‘책임’은 남성이 져왔다는 사실을 말한다.
펄 벅은 “남성이 여성을 대등한 인간 동료로 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에, 여성에게는 이제 집 안의 반복된 역할을 넘어, 성숙한 자아로 사회와 동반자가 되라는 요구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펄 벅은 여성은 세상의 모든 일에, 국가의 일에 여성도 조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의 없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회는 여성에게 봉사뿐만 아니라 사회 소득활동으로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예로 노르웨이,덴마크가 주부도 원하면 일할 수 있게 반나절 파트타임 일자리를 비교적 잘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건 모두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6) 가정과 질서
펄 벅은 가정의 청결은 단순한 청소가 아니라 정서적 안전의 인프라라고 말했다. 잘 정돈된 집은 단순히 보기 좋은 공간이 아니라, 가족에게 안정과 집중을 주는 기반이다. 아이들은 그 질서 속에서 좋은 삶의 습관을 배운다는 것이다. 이의 없다.
7) 용기에 대하여
펄 벅의 어머니는 선교사 부인으로서 펄 벅이 생후 3개월 때 남편과 함께 세 가족이 중국에 파견됐다. 그런데 어느 해 펄 벅이 살던 지역에 엄청난 흉년이 들었고, 굶주리고 기아에 시달리는 민심은 흉흉해졌다. 불길한 소문이 돌았다. “백인 여자 탓이다!” 분노한 사람들이 칼과 낫을 손에 들고 펄 벅 집을 향해 무리지어 다가오고 있었다.
펄 벅 어머니는 사람들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어떻게 했을까. 문을 활짝 열고 그들에게 차와 케이크, 과일을 대접했다. 사람들은 미소를 지으며 환대하는 친절한 그녀에 어리둥절했다. 그들은 당황했지만, 대접을 받고 조용히 물러났다.
나중에 장성한 펄 벅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절망했기 때문이야. 죽음을 눈앞에 둔 절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그런 용기는 나지 않았을 거야.”
이 실화는 내게도 강한 인상과 가르침을 줬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다. 절망의 극점에서도 환대로 분노를 풀어준 '지혜의 실행'이었다.
8) 집단과 자살 충동
펄 벅은 “레밍처럼 집단에 섞이면 결국 집단 자살로 간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은 똑같다. 그러므로 더 의식적으로 ‘탈대중’을 연습하고 실행해야 한다.
예수님도 그러지 않았던가. 좁은 길로 가라고. 그렇다고 산길 어디 좁은 길로 가라는 말은 아니다. 그래선 또 안 된다.
9) 맺음 – 성 혁명과 도덕률
펄 벅은 성 혁명 시대에 새롭지 않으나 새로운 도덕률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 새롭지 않으나 새로운 도덕률은 ‘책임’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일체의 모든 책임, 자기 자신 그리고 타인에게 미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이 그것이다. 펄 벅은 이 ‘책임’을 영원한 진리라고 말하며 책을 마친다.
나 역시 이의 없다.
PS 1. 좋은 사회적 합의가 절실하다.
동반자로서 남녀의 공존공생은 서로 다른 사고 의식의 조율과 기술, 제도 등 전방위에 걸친 사회적 합의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 그리고 우리가 만든 제도와 기술이 함께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 세탁기가 빨래를 책임져줬듯이, 기술은 삶의 모습을 바꾼다. 합의엔 기술도 들어가야 한다. 기술이 우리 삶을 지지해주니까.
지금까지 있어왔던 기술의 자본주의적 사용법은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붙인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병나고 탈진한다. 그러나 기술의 최적화를 이루면, 주 20시간 노동의 세계도 앞당길 수 있다. 현재 나온 기술만으로도 말이다. AI도 나왔는데 못할 것 같은가? 충분히 가능하다.
근대 이후, 자유는 이미 우리 손에 들어왔다.
문제는, 그 자유를 어떻게 책임으로 번역할 것인가이다.
PS 2. 다음 책
이번 펄 벅의 책은 쉬운 듯 쉽지 않았다. 원치 않았는데 역대급으로 길게 작성됐다. 공감과 반론이 모두 풍부했고, 내용에서 빼고 제외하고 줄이고 줄인 게 이랬다.
최근 너무 무거운 주제의 책만 다뤄서 여성 저자를 선택했는데 실수했다.
책이 얇다고 해서 착각한 것이다.
그래서 다음 책은 좀 쉽게 가고 싶다.
책꽂이 구석에 마트 서점에서 구매했던 손바닥 크기 문고판 명언책 2권이 있다. 『지혜의 명언』,『그대 괴로움에 위로가 되는 소중한 한 마디』. 이 작은 책 2권은 종종 형광펜 칠한 영역을 읽는다. 꽤 괜찮은 명언들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