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시장 인문학 세태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배움과 사유의 가치에 대하여
2025-10-05 21:37:17
한국사회의 시장 인문학 세태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배움과 사유의 가치에 대하여
요즘 대학에서 인문학은 인기가 없습니다.
사실상 몰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시장에서 인문학은 잘 팔리고 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유튜브나 유명 인사의 강연을 통해
인문학을 보고, 듣고, 소비합니다.
문제는, 시장 인문학이 팔릴수록
사람들의 생각이 점점 굳어지고
얕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한국에서 도올 김용옥, 강신주,
고미숙, 김태형, 오은영, 법륜, 혜민 같은
알려진 대중적인 강연자와 상담가들
즉, 중간자적 지식인들과
훨씬 대중적인 인기가 있는
이기주, 하태완 같은
SNS 감성 작가들의 활동이
나름 활발한데도 말이죠.
여기엔 여러 원인이 있음을 봅니다.
그것에 대한 상세한 얘기는
다음 주말에 다루기로 하고요
다시 현세태 모습을 보면 이렇습니다.
시장 인문학은 르네상스인데,
정작 사회는 점점 더 하류화되고
반지성주의는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역설적인 풍경입니다.
날이 갈수록 이상합니다.
인문학은 더 이상 '질문'의 언어가 아니라
‘교양’과 ‘위로’의 언어로 소비되고 있어서일까요?
인문학이 개인의 탐구와 사유 활동이 아니라
인기 철학자가 내놓는 처방 소비가 되고,
고전 명언이 유튜브 영상 콘텐츠각이 되는 현실에서
우리는 대체 무엇을 놓친 것일까요?
1. 인문학의 시장화, ‘생각’이 아닌 ‘상품’으로 팔린다
오늘날의 한국사회 시장 인문학은
크게 세 가지 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속성 처방의 유행병.
고전은 ‘핵심 키워드 요약’ 수준으로 단순화되고,
철학은 ‘남이 주는 해석과 위로’로
재단(裁斷)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직접 사유의 수고로움 대신,
즉각적인 단편 교양 축적과
위로만을 교환받으려고만 듭니다.
둘째, 스타(?) 지식인 중심의 권력 구조.
현세태는 무명 혹은
현장의 깊은 지성인들보다는
미디어 노출이 잦은
몇몇 중간자적 지식인들과
SNS 감성 작가들이 훨씬 더 주목받습니다.
그중에는 한때
시대의 사유를 이끌었던 인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시장의 요구에 맞춰
발언을 180도 바꾸는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이는 그들마저
시장 논리와 타협할 정도로,
대중의 사고방식이
이미 시장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팔리는 소수’의 해석과 위로에 의해
사유와 실천의 인문학은
뒷편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셋째, 자본과 제도에 적응만 하려는 경향.
제가 존중하고 좋아하는
박민영 저자의 『반기업 인문학』에서도
줄기차게 비판하고 경고했던 내용입니다.
대기업 임원 대상 특강이나
공공기관 교양사업 등에 의해,
인문학은 체제 비판이 아니라
체제 적응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은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습니다.
한국의 시장 인문학 열풍은
스티브 잡스의 “인문과 기술의 교차점” 발언 이후 본격화되었지만,
정작 그 출발은 자발적 탐구의 발로가 아니었습니다.
시장에서 잘 팔려서,
'돈을 잘 벌 수 있게 해주는 근원'으로써
인문학이 조명을 받은 것 뿐이었습니다.
이 역시 '시장에 잘 적응하라'일 뿐,
“(읽고 스스로 잘) 생각하라”는
인문학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2. 위로의 인문학에서 사유의 인문학으로
요즘 10대, 20대, 30대, 심지어 40대, 50대 등
많은 사람들이 “위로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어딘가에서 위안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시장은 사회에서 지치고 다친 영혼들을
유혹하면서 위로를 판매합니다.
사람들에게 소확행이나 욜로,
'취향입니다. 존중하시죠?'라는 인정투쟁,
책임없는 자기욕망 무한긍정을
추구하도록 유혹하고,
유명 지식인들의 강연을 들으면서
인문학을 이해하고 위로받으라고 말이죠.
저는 위로를 죄악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인문학이 위로에 머물 때,
그건 이미 인문학의 본질과 역할을
포기한 것임을 직시합니다.
신채호, 안창호, 함석헌 같은 선지자들은
‘생각하는 백성, 철학하는 백성’,
즉 사유와 성찰을 하는 시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겠습니다.
사유와 성찰은
결국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점입니다.
인간을 이해하려는 사랑의 마음,
세상을 이해하려는 사랑의 마음,
그 사랑의 마음이
지적 호기심과 의욕의
근원적인 동력이라는 거죠.
그런 사랑의 마음은
수고로움과 고통을 감내합니다.
예로, 한국문화를 사랑해서
한국어를 마스터한 외국인들을 보면
놀라울 때가 있습니다.
정작 한국인인 저는 한국문화를 좋아하기는 해도,
그들처럼 물아일체 수준으로 사랑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순도 높은 사랑하는 마음은
한계를 초월합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배우면서
직접 사유와 성찰의 수고로움을
일상에서 감내할 때,
사람은 비로소 좋은 어른,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반면에, 사람에게 위로를 파는 인문학은
쉽고 달콤하기에 빠르게 부패합니다.
사람을 그대로 주저앉히고 퇴행시킵니다.
심지어 악화를 심화하기까지 합니다.
예로, 위로를 주로 판매하는 인기 상담가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반지성적인 소비자로 전락시킵니다.
그 결과,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잘못은 항상 남에게 있다'고 여기면서
책임전가와 보상 요구만 하는
‘응석의 문화’를 확산시키고 맙니다.
3. 시장보다는 삶의 인문학, ‘교환’에서 ‘관계’로
시장의 문법은 ‘교환’입니다.
돈을 주고, 효용의 만족과 위로를 얻는다.
하지만 삶의 문법은 ‘관계’입니다.
자기 자신과 고독하게 대면하는 관계,
나와 타인, 더 나아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공존공생을 모색하고, 함께 성장합니다.
그 관계 과정이 인문학의 본래 자리입니다.
그런 관계 과정 속에
인문학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고귀한 가치의 미적 아우라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고유의 자존과 존엄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4. 무쓸모의 고귀함을 지향하기
세상은 언제나 쓸모와 효용을 따집니다.
심지어 한국사회는 부모 자식 관계조차
조건부 사랑 즉, 쓸모와 효용으로
서로를 평가하는 가정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배우면서,
자신만의 사유와 창조를 추구하는
무쓸모의 고귀함 속에서
새로운 힘을 키워갑니다.
무쓸모는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쓸모가 없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쓸모가 없다고 여겨진 것이야말로,
역사적으로 늘 새로운 고귀한 가치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지금 당장의 무쓸모는
시대와 시장이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그것 자체가
인문학의 시대불변 가치가 됩니다.
요즘도 출판사를 먹여 살리는
공자, 노자, 쇼펜하우어, 니체, 예수 등은
그들 시대의 무쓸모였습니다.
공자는 대놓고 ‘군자불기’를 말했습니다.
인문학의 가치는 무쓸모에서 비롯합니다.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무쓸모는 자신만의 사유로
날마다 놀이하듯 무언가를 창조합니다.
수많은 비교와 남들의 평가 속에서
자신의 상대적 위치를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무쓸모는
쓸모에 질식되고 불안한 영혼들에게
자신이 지닌 본래의 힘을
되찾게 해주는 유일한 선택지입니다.
쓸모는 언젠가 소진되지만,
무쓸모의 아우라는 영원합니다.
그래서, 쓸모와 적응에만
매몰되어 질식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 삶의 지혜와 의욕이 넘치는
살아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자신의 진정한 매력과 힘을 회복하며
새로운 가치를 실현하고 싶다면,
자신만의 사유로
날마다 놀이하듯
무언가를 배우고 창조하는
무쓸모인 사람이 되십시오.”
이상으로 주절주절
인문학 소감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P.S.
주중 금요일에 글을 작성하고
주말 내내 틈틈이 퇴고를 거듭하고도
올릴까 말까 고심을 하다가
이렇게 올립니다.
그믐은 책을 사랑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려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까요.
시장 인문학은
박민영 저자가 다룬 주제이기도 했지만,
저 역시 난감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지식인, 작가, 강연가, 상담가들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태클을 건 것이니까요.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여러 군데를
건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어찌 보면 총론적으로는
현세태에 찬물을 끼얹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사고를 고정시키거나,
인문학을 포장지 삼아
공허한 자기계발을 유통하며,
위로 판매로 사유를 퇴행시키는 현실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분명한 건, 현세태를 졸업하는 게
한국사회와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유익하다는 사실입니다.
다음 주말엔 이어서, 시장 인문학 속
중간자적 지식인들의 기여와 한계,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제언,
그리고 인문학의 마지노선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그럼 모두, 좋은 명절 휴일 되세요.
- 2025년 10월 4일, 엠마네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