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가장 유익했던, 김민철 저자의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소감 이야기
2025-11-16 21:20:47
올해 가장 유익했던, 김민철 저자의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소감 이야기
수능이 끝난 11월 중순이 되어도
어설픈 단풍이 드는 요즘입니다.
제가 대입을 보았을 때는
폭설에 영하로 엄청 추웠던 게
지금도 기억납니다.
기후도 많은 변화가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예로, 도서관에 가면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을 봅니다.
문학과 실용, 주식, 경제 서적 코너는
책이 닳고 낡아져서(특히 소설)
부숴지기 일보직전까지 책도 보는데,
역사나 사회분야 서적 코너는
20년전 책도
새 책처럼 깔끔한 모습을 본다는 거죠.
사회 분야는
사람들의 평소 관심 영역이 아님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현장은 없을 겁니다.
..평상시 우리는 사회 분야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게 원자화된 개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만,
정작 우리의 일상 모습을 결정짓고
우리 모두의 생로병사 생애주기를 통제하는 것은
'사회'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즉, 어떤 통치 체제 기반인가'는
우리 삶의 절대변수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로, 이런 상상을 해봅ㅂ시다.
신이 원판 다트 놀이를 해서
출생을 결정한다고 가정하는 거에요.
이 다트 원판에서
가장 넓은 파이 분할 영역을
차지하는 나라는
중국과 인도이고,
전세계 200여개국 중에서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는
좋게 봐서 20여개국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 나라 대다수는
매우 좁은 파이 분할 영역이죠.
이렇게 생각해 보면,
좋은 나라에 태어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확률을 뚫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살기 좋은 나라는 대체 어떤 체제를 하고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다음처럼 잘 대답할 수 있습니다.
"살기 좋은 나라는 모두 민주주의이다."
그런데, 살기 좋은 나라의 근간인 민주주의는
왜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대다수 나라에서 거부되고 있을까요.
김민철 저자의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는
이 질문에 있어 근원적인 사유와 자각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왜 인류 역사의 지성인들 대다수가
민주정을 미워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저 역시,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근원적인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유는 '사람들'때문입니다.
민주주의에 대해 화나는 지점은
다른 게 아닙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고통을 받습니다.
심지어 다수결도 확실한 다수결도 아니라,
양당정치의 극단적인 이분법 대립으로
51:49라는 간질간질 약올리는 모양새로
사회에 유해한 선택을 한 사람들때문에
원하지도 않는 고통을 겪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엄청난 초인적인 인내력과 함께
어리석은 사회와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다음과 같은 평정의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마음 비우자. 스트레스 받지 않으려면.
그렇지만 일상에 할 수 있는 선에서
불의를 물리치고,
좋은 활로를 모색하면서 실행하자."
별 다른 게 없더라는 거죠.
.. 모든 사람들은 편의상
다양하게 구분될 수 있습니다.
예로,
노자는 '지혜의 가르침 수용 수준'을 기준으로
사람을 상중하 3개 등급으로 구분했습니다.
(극소수인) 상등의 사람은
지혜의 가르침을 들으면 힘써 행하려 하고,
(대략 7할 비중인) 중등의 사람은
행하다가 말다가 팔랑귀처럼 처신하고,
(대략 3할 비중인) 하등의 사람은
지혜의 가르침을 비웃고 무시한다는 거죠.
즉, 하등의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지혜의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게 노자의 냉소입니다.
서구 지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원전 그리스와 로마부터 근대 이전까지
지성인과 엘리트 모두 민주주의를 경계했습니다.
인민이 주권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일념으로
총력을 기울여
군주정, 귀족정, 과두정, 공화정에서
해법을 찾으려고 들었습니다.
민주주의만 아니면 된다는 거였죠.
"우리 지성인과 엘리트들은
'무지한' 다수 인민의 통치를 거부한다!
다수의 폭정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군주정, 귀족정, 과두정, 공화정은
안정적이고 훌륭했느냐.
전혀 그러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만 하더라도,
자유와 민주는 양립불가 개념입니다.
소수와 다수 모두에게 자유를 보장하면,
힘있는 소수는 다수를 폭압할 것이고,
다수는 힘없는 소수를 폭압할 것이며,
힘없는 소수는 약자임을 무기로 다수를 폭압할 것이기에
모두 전혀 민주적이지 않습니다.
소수와 다수 모두 폭압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수인 인민은 잘 속고 어리석은 선택을 잘 합니다.
영악하고 탐욕적인 기득권 소수는
이런 다수를 지배하기 위한 온갖 술수와 폭압을
거리낌없이 행합니다.
그러면 어찌 될까요.
시간이 흐를수록 대립, 갈등, 분열 속에 균열이 나고,
균열은 붕괴를 야기해 결국 자멸하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모든 체제는
사회구성원 모두의 상호존중 협력과 기여, 헌신,
자정, 개선 노력이 없으면
'자멸 테크트리'를 타서결국엔 자멸하거나
외침을 받아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나라는 결국 어느 시점에
'반드시' 멸망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권력을 쥔 기득권은
체제 붕괴가 너무나 두렵지만,
체제 붕괴는 예정된 수순이고
숙명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든 체제는 '반드시' 붕괴되는데 말이죠.
이 지점에서,
오늘날 한국사회가 놀랍게도
전세계에 엄청난 해법을 보여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치 차원에서,
한국은 지구상에 사실상 유일한 '진짜 민주주의'를
직접 실현하고 입증했기 떄문입니다.
그 주체도 다른 누구가 아닙니다.
한국 국민들이 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해방 이래로 한국 근현대사 민주화 요구 시위와
세계 각국의 민주화 요구 시위를
비교해 살펴 보면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를 발견하고서
저는 온몸에 전율이 흘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아랍의 봄, 동남아 MZ 시위 등
이런 모든 민주화 요구 시위의 근원적인 계기는
'독재의 부정부패에 따른 먹고사니즘 차원의 분노'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민주화 요구 시위는
말 그대로
'독재에 저항하고 물리칠 수 있는 국민 주권.
즉,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요구'였습니다.
이것은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입니다.
이는 다른 나라 국민들이 빠져 버린
정치경제적 먹고사니즘을 넘어선,
자기 주권에 대한 정당한 천명과 요구였습니다.
사회와 국민에게 유해한 대통령이면
국민이 직접 물리쳐 쫓아내겠다는 거죠.
그것도 평화적인 방법으로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두 번이나 해냈습니다.
제3자적인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건 너무나 멋진 겁니다.
모든 체제는 '반드시' 붕괴하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제대로 된 분별력을 가진 국민들이 대다수이면,
대다수의 폭정은 없을 뿐만 아니라,
기득권 소수의 폭압도 없앨 수 있음을
입증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대로 된 분별력을 가진 국민들이
대다수로 있는 나라는
체제 붕괴 위기가 일어날 때
마찰을 최소화하면서
체제를 전환하는 탈출 역시
잘 해낼 수 있습니다.
'탈출은 지능순'이란 현대 속담은
집단지성에도 적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 사회는
정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일상 영역에서의 민주주의를
'반드시' 실현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멋진 건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국뽕스러워도,
정치 차원에서
진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입증한
대한민국의 국민들이니까요.
PS.
n회차 기록으로 하기엔
1회차 독서여서 편지로 흔적을 남겼습니다.
분량이 작지만, 저로서는 올해 건진
고품질 양서 중 하나였어요.
김민철 저자가 책 내용에서 언급한
'해적선 민주주의'가 재미있었는데,
글 쓰다 보니 맥락상 생략했어요.
다음 주에는 고병권 저자의
에세이들을 다뤄볼까 합니다.
썰렁함 방지로 선택한 책 표지는 예전에 읽었던
츠츠미 미카의 '빈곤대국 주식회사 아메리카'입니다.
- 2025년 11월 16일, 엠마네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