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네오빠의 블로그
고전 양서, 인문, 철학, 미학, 사회학을 주로 읽습니다[n회차 독서기록] 지혜의 명언,『지혜의 명언』(꿈과희망), 『그대 괴로움에 위로가 되는 소중한 한마디』(북앤북) 그리고 카카오톡 쉰스타 업데이트에 대처하는 자세
이번 n회차 독서기록은
대략 17년 전 마트 서점에서 구매한
『지혜의 명언』(도서출판 꿈과희망),
『그대 괴로움에 위로가 되는 소중한 한마디』(도서출판 북앤북)
이 두 권에서 발췌한 일부 명언들,
개인적으로는 킬러와 준 킬러 명언이라 여겨지는 것
몇 개만 뽑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글을 작성하는 이 순간에도
내 신경을 건드리고 있는,
이번 카카오톡 쉰스타 업데이트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에 대한
개인적인 소감, 조치, 제안을 하는 데
더 공을 들이겠다.
그럼 발췌한 킬러 명언 3개와
준 킬러 명언 3개에 대한 소감을 이어가겠다.
1. 킬러 명언 세 가지
결혼이란
주인과 여주인과,
두 사람의 노예로 이뤄지는
작은 공동사회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어봐도
인원은 두 사람뿐이다.
- 엠브로스 비어스
#소감
이 발언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결혼에 대한 그의 통찰에 공감한다.
서로 돕고 위해주는 남녀만이 결혼 생활을 감당할 수 있고 잘 해낼 수 있다는 진실, 이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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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감내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 유대 속담
#소감
우리 속담에도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에 대해 많은 어린이, 청소년,
심지어 2030 청년들마저 마음 깊이 거부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태어난 그들은
편안하게, 안락하게 살려고 든다.
그러나 기원전부터 전승된 이런 집단지성의 조언은
진실이자 진리이다. 이의없다.
좋은 청년, 좋은 부모, 좋은 시민 즉,
좋은 어른이 되려면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 고통의 이름은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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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원리는 간단하다.
불만에 자기가 속지 않으면 된다.
어떤 불만으로 해서
자기를 학대하지만 않는다면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
- 버트런드 러셀
#소감
동서양의 성현들이 같은 말을 했다.
새롭지 않다는 얘기다.
비교하고 불평불만에 빠지는 자는
불행해지고, 나약해지며, 결국 지혜도 잃는다.
한국인의 자존감이 낮다고
사방팔방에서 아우성인데, 왜 그러겠는가.
한국인은 원래 명랑하고 흥이 많은 민족이다.
그런데 오랜 역사에 걸쳐 억압받아 한의 정서가 생겼고,
근대에 들어 일제 폭압, 독재 폭압,
특히 성장기에 학교 공교육이라는 폭압으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병이 들었다.
그 진실을 직시하면, 누구라도 벗어날 수 있다.
그 능력을 사용하자.
무엇보다 버트런드 러셀의 말처럼
자신을 학대하지 말라.
자신은 사랑스런 존재이다.
남이 뭐라건, 자신이 증오에 휩싸이지 않고
행복과 사랑을 느끼고 베풀며 살아가면,
외모나 지위, 부, 권력, 명예 수준이 어떻든
그 자체로 고귀한 사람이다.
디오게네스가 고대 그리스 통틀어
심신 건강과 행복 1짱이었다는 사실을 살펴보라.
2. 준 킬러 명언
어떤 사람의 진면목은 재능이 시들어 갈 때,
즉 그가 더 이상 능력을 과시하지 못할 때 드러나기 시작한다.
재능은 일종의 장식이며 은폐인 것이다.
- 니체
#소감
세상엔, 짠 하고 나타나
온갖 화려한 척척 만능의 모습이나
화려하게 빛나는 환상을 보여주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해변가의 모래알들처럼 많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운
온갖 화려한 연출의 이면이 드러나면,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속절없이 추락하고 몰락한다.
이건 인간사회의 진리이다.
척척만능 사짜를 늘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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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는 장래 일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래에 서로 다시 만날 것을 확신한다.
두 연인은 어제나 장래 일을 얘기한다.
그러나 장래는 그 연인들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연애는 지키지도 않을 여러 가지 약속을 한다.
이와 반대로 우정은 하지 않은 약속도 지킨다.
- 보나르
#소감
여기서 친구는 벗의 의미에 가깝다.
서로 뜻이 맞고 위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연인은 벗인 경우가 매우 드물다.
특히, 처음부터 서로 뜻이 맞고 위해줄 남녀는
현실적으로 거의 없다.
정말 신기한 것은 연인이다.
서로 뜻이 맞고 위해줄 가능성이 매우 낮은데,
장래 일을 얘기한다는 사실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서로 뜻을 조율해서 맞추고 위해주는 실제 행동인데,
그것이 빠져 있다.
3. 이번 카카오톡 업데이트 소감, 조치, 제안
글을 작성하면서도 신경이 쓰일 정도로,
주중에 대국민 불쾌지수를 최고치로 찍은 사건이었다.
쉰스타로 업데이트한 모습은 스트레스 자체였는데,
카카오 측 입장은 이런 듯했다.
“너네들이 어쩔 건데?”
대단히 불쾌했다.
이번 카톡 업데이트 사태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로,
한국인 카톡 월 평균 사용시간이
대략 11시간 수준이라는 거다.
나는 내심 놀랐다. 그렇게나 많이?
용건만 간단히 하면
월 1시간 이내로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나는,
'카톡이 전화통화보다 편하다'는
요즘 세태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다음 발언 내용은 문제가 있다.
"사용자들을 카톡에 더욱 오래 체류하도록 하겠다."
이런 카카오측의 명시적인 발언때문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의
대응조치를 해야만 했다.
내 대응조치 내용은 이렇다.
평소 만들지도 않았던 멀티 아이디를
새로 하나 생성해서 친구들을 모두 그쪽으로 옮겼다.
이 새 멀티 프로필에는 내 이름_M1 이렇게 해서
모두에게 멀티 프로필임을 알 수 있게 했다.
그 다음으로, 이 새 멀티 프로필에는
그 어떤 사진이나 배경도 올리지 않았다.
이 상태로 쭉 사용할 것이다.
이는 카카오 측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답변 조치이다.
광고, 하트, 댓글 기능을 넣은 것에
정말 소스라치게 불쾌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카카오 측이 바라는 것을
결코 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카카오 사용시간을 월 20분 이내로 줄일 것이다.
나는 카톡 따위에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
용건을 더욱 더 간단히 할 것이고,
아무런 프로필과 배경 단장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좋은 대체 앱이 나오면 그쪽으로 옮겨갈 것이다.
PS.
새로 읽는 책들이 있어서
앞으로 1~2주는 n회차 독서기록을 잠시 쉬려 한다.
대신, '엠마네오빠의 편지'에서
관련 주제에 해당하는 읽었던 도서나
시청한 영상 강의 언급과 함께
인문 관련 담론을 다룰까 한다.
— 2025년 9월 27일, 엠마네오빠


[n회차 독서기록] 펄 벅, 『딸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도서출판 책비, 2011)
1. 개요
미국에서 1960년 에노비드(Enovid)라는
피임약이 첫 출시가 되고 나서, 성 혁명이 일어났다.
그렇게 피임약이 성의 자유를 열었을 때,
가장 먼저 사라진 건 책임이었다.
이 책에서 말한 펄 벅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먼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유가 커질수록 책임은 더 섬세해져야 한다.”
2. 시대 맥락
1950~60년대 미국.
해마다 수십만 명의 아기가 사생아(혼외자)로 태어났다.
절반은 입양되지 못해 매우 힘든 삶을 살았다.
펄 벅은 성 혁명 뒤의 무책임을 직시했다.
그녀가 세운 펄 벅 재단은 전쟁고아,
자국 내의 사생아들의 입양을 돕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업무를 하고 있다고 한다.
3. 펄 벅의 메시지들 일부 공감 발췌
“구태여 결혼을 하거나 결혼 관계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단다. 순결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김으로써 벌어지는 일들, 상처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이해할 수 있겠지? 섹스 문제를 비롯해 전 세대로부터 이어져오는 지식이나 전통을 하찮게 여기고 거부할 때, 어떤 곤란함과 위기를 맞게 되는지 일러주고 싶은 거야.
절대 변할 수 없는 법칙, 즉 자연의 윤리를 깨뜨리는 순간 우리는 그 재난의 대가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단다.”
“나는 선도 악도 사람에 따라, 사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궤변을 인정하지 않는다. 선악에 대한 구분은 세계 어디에서든 다를 바 없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혹은 여행을 하면서 거친 많은 나라들로부터 깨달은 점이 있다면, 어떤 나라에서 좋은 사람은 다른 나라에서도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남녀 간에 싸움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단다. 사랑하던 사람들이 싸운다면 그것만으로도 둘 다 이미 패배한 거나 다름없어. 승리는, 생사를 초월한 승리는 두 사람이 하나로 융화될 때 얻을 수 있는 거야.
그러니 네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기뻐하며 받아들이도록 하렴. 여성이라는 건 근사한 일이니까.”
마지막 문장은 오늘날 한국 미혼 남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이겨먹으려고만 드는 남녀는 반드시 패배할 것이고, 서로 도우려는 남녀는 반드시 승리한다. 이건 시대불변으로,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4. 공감 내용과 반론
1) 혼전임신과 책임
젊은 20대 초반 부유층 여성이 펄 벅을 찾아왔다. 그녀는 혼전임신 상태였고,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아이의 아빠는 그녀가 성적으로 매우 끌리던 남성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낳을지 말지, 낳으면 자기가 키울지 입양보내야 할지 고심 속에 고통스러워했다.
펄 벅은 물었다. 아이 아빠와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고.
그랬더니 이 여성의 답변은 이랬다.
“그는 남자로서 매력이 있지만, 결혼할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좋은 남편, 아빠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펄 벅은 결혼할 생각이 없는 아이 아빠에게 임신 사실을 말하지도 말고, 이제부터는 절연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지 말아야 할지를 물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워했고, 펄 벅은 미국(50~60년대)에 한 해 25만 명의 사생아가 태어나며, 입양되지 못하면 힘든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에 그녀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아이를 낳으면 입양 신청을 할 테니, 가장 좋은 부모를 찾아달라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이 이야기는 무책임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것인가에 대한 사유를 하게 만든다. 나는 이 여성이 말단의 책임을 진 것에 대해 나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이성적 끌림에 혹한 자의 실수와 고뇌를 보면서, 경종을 울릴 만한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2) 동일노동 동일임금
펄 벅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고, 동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엔 이의 없다. 그런데 이어서, “같은 일을 하고 있다면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대우, 동등한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여기에 ‘부분 동의, 부분 반론’을 말하겠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하면 누가 손해보는가.
자본가이신 고용주가 손해를 본다.
고용주는 노동자를 소비하는 입장에서
최대의 가성비를 추구한다.
그런데 노동은 사람 따라 결과가 다르다.
같은 일(노동)을 한다고 해서 같은 퍼포먼스와 성과, 같은 업무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동등한 대우와 동등한 보수는 남녀 노동자가 고용주에게서 ‘받는 것’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남녀 노동자 역시 고용주에게 ‘주는 것’의 영역에서 동등해야 한다.
그래야 타당하고 합당하다.
그런데 현실은 과연 그러한가?
남자 공무원(군인 포함), 교사들이 의원면직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직장에서 남자에게 쏠리는 과격한 업무 부담을 이유로 든다. 동일직장 동일직급 동일노동이 아닌 상황이라는 것이다.
예로, 커다란 산불이 났다. 모두 남자 공무원들만 출동해서 몇 날 며칠 씻지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고생했다는 경험담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걸 노동 일상으로 겪다 보면 현타 오고, 좌절감 와서 때려쳤다는 후기들이 온라인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여성운동계, 노동계에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고용주 입장에서는 동일노동 동일 퍼포먼스 동일임금이 타당하다. 그런데 여기서도 문제가 있다. 동일 퍼포먼스는 칼같이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평가는 항상 시비가 붙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렵다.
그러나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빠진 변수들로 인해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특히, 자본가이신 고용주님이 결코 동의해주지 않는다. 손해 보는 당사자이니까. 고용주까지 동의하려면, 동일노동 동일기여 동일임금으로 해야 그나마 납득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동일기여 평가는 결국, 모두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항상 문제는 평가가 늘 분쟁을 부른다는 사실이다.
또한, 제도적 평등이 곧 의식의 평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현실도 있다.
예컨대 동일직급의 남녀 공무원이라도, 여성은 이를 대단한 성취로 여기지만, 남성은 그런 동일직급 여성으로부터 그저 그런 평가를 받기 쉽다. 이건 제도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다. 이 의식의 문제는 제도가 해결해줄 수 없다.
3) 모계/부계 중심주의
펄 벅은 “모계중심주의를 비난하는 남성은 정신적으로 미숙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대로 되돌릴 수 있다. 그렇다면,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여성은 모두 미숙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럴 리 없다.
체제 비판이 곧 성별 비하로 흐르면,
결국 물귀신처럼 함께 심연에 빠질 뿐이다.
보편 윤리의 최소선은,
서로 바꿔도 성립하는 문장만 남기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 남자 중에 모계중심주의를 비난하는 남성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 남자는 내 평생 본 적이 없다. 책에서도 본 적이 없다. 아주 오래된 기원전 모계사회 내용을 말한 『자아 폭발』이란 책이 있지만, 거기에서도 비난은 없었다. 하여튼, 내 평생 본 적이 없다.
이런 유사 상상 발언 외에도, 펄 벅은 여러 상상 서사를 기술했는데, 이것까지 다루면 글은 엄청 길어진다. 생략하겠다. (할많하않)
4) 남성 부양론
펄 벅은 “남성이 부양 책임을 지지 않으면 사회는 여권제로 갈 것”이라 했다. 그러나 사회는 그렇게 선형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회는 언제나 ‘의도치 않은 결과의 법칙’이 작동한다.
예를 들어, 판교 지자체가 담장을 금지하자 사람들은 중정형 주택으로 대응했다. 이웃의 교류를 늘리려는 의도가, 오히려 요새화로 귀결된 것이다.
마찬가지다.
남성이 부양을 포기한다고 해서 사회가 자동적으로 여권제로 향하진 않는다. 오히려 개인주의적 남녀의 단절, 다극화된 가구 형태, 심지어 근미래엔 인간 수준의 AI 로봇 동반자 등 다양한 모습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미혼모 사유리 같은 여성 가장 가족이 주류가 되더라도, 여권 사회가 될 가능성은 없다는 얘기다.
5) 여성의 안이한 삶 비판
펄 벅은 여성들의 편안한 삶도 짚었다.
“여성은 오랫동안 안이하게 살아왔다.”
이 말에 여성들은 반발심이 들겠지만,
펄 벅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그녀는 집안일과 육아의 반복의 힘겨움을 말하면서도,
가장 무거운 짐, 즉 ‘책임’은 남성이 져왔다는 사실을 말한다.
펄 벅은 “남성이 여성을 대등한 인간 동료로 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에, 여성에게는 이제 집 안의 반복된 역할을 넘어, 성숙한 자아로 사회와 동반자가 되라는 요구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펄 벅은 여성은 세상의 모든 일에, 국가의 일에 여성도 조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의 없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회는 여성에게 봉사뿐만 아니라 사회 소득활동으로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예로 노르웨이,덴마크가 주부도 원하면 일할 수 있게 반나절 파트타임 일자리를 비교적 잘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건 모두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6) 가정과 질서
펄 벅은 가정의 청결은 단순한 청소가 아니라 정서적 안전의 인프라라고 말했다. 잘 정돈된 집은 단순히 보기 좋은 공간이 아니라, 가족에게 안정과 집중을 주는 기반이다. 아이들은 그 질서 속에서 좋은 삶의 습관을 배운다는 것이다. 이의 없다.
7) 용기에 대하여
펄 벅의 어머니는 선교사 부인으로서 펄 벅이 생후 3개월 때 남편과 함께 세 가족이 중국에 파견됐다. 그런데 어느 해 펄 벅이 살던 지역에 엄청난 흉년이 들었고, 굶주리고 기아에 시달리는 민심은 흉흉해졌다. 불길한 소문이 돌았다. “백인 여자 탓이다!” 분노한 사람들이 칼과 낫을 손에 들고 펄 벅 집을 향해 무리지어 다가오고 있었다.
펄 벅 어머니는 사람들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어떻게 했을까. 문을 활짝 열고 그들에게 차와 케이크, 과일을 대접했다. 사람들은 미소를 지으며 환대하는 친절한 그녀에 어리둥절했다. 그들은 당황했지만, 대접을 받고 조용히 물러났다.
나중에 장성한 펄 벅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절망했기 때문이야. 죽음을 눈앞에 둔 절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그런 용기는 나지 않았을 거야.”
이 실화는 내게도 강한 인상과 가르침을 줬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다. 절망의 극점에서도 환대로 분노를 풀어준 '지혜의 실행'이었다.
8) 집단과 자살 충동
펄 벅은 “레밍처럼 집단에 섞이면 결국 집단 자살로 간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은 똑같다. 그러므로 더 의식적으로 ‘탈대중’을 연습하고 실행해야 한다.
예수님도 그러지 않았던가. 좁은 길로 가라고. 그렇다고 산길 어디 좁은 길로 가라는 말은 아니다. 그래선 또 안 된다.
9) 맺음 – 성 혁명과 도덕률
펄 벅은 성 혁명 시대에 새롭지 않으나 새로운 도덕률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 새롭지 않으나 새로운 도덕률은 ‘책임’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일체의 모든 책임, 자기 자신 그리고 타인에게 미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이 그것이다. 펄 벅은 이 ‘책임’을 영원한 진리라고 말하며 책을 마친다.
나 역시 이의 없다.
PS 1. 좋은 사회적 합의가 절실하다.
동반자로서 남녀의 공존공생은 서로 다른 사고 의식의 조율과 기술, 제도 등 전방위에 걸친 사회적 합의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 그리고 우리가 만든 제도와 기술이 함께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 세탁기가 빨래를 책임져줬듯이, 기술은 삶의 모습을 바꾼다. 합의엔 기술도 들어가야 한다. 기술이 우리 삶을 지지해주니까.
지금까지 있어왔던 기술의 자본주의적 사용법은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붙인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병나고 탈진한다. 그러나 기술의 최적화를 이루면, 주 20시간 노동의 세계도 앞당길 수 있다. 현재 나온 기술만으로도 말이다. AI도 나왔는데 못할 것 같은가? 충분히 가능하다.
근대 이후, 자유는 이미 우리 손에 들어왔다.
문제는, 그 자유를 어떻게 책임으로 번역할 것인가이다.
PS 2. 다음 책
이번 펄 벅의 책은 쉬운 듯 쉽지 않았다. 원치 않았는데 역대급으로 길게 작성됐다. 공감과 반론이 모두 풍부했고, 내용에서 빼고 제외하고 줄이고 줄인 게 이랬다.
최근 너무 무거운 주제의 책만 다뤄서 여성 저자를 선택했는데 실수했다.
책이 얇다고 해서 착각한 것이다.
그래서 다음 책은 좀 쉽게 가고 싶다.
책꽂이 구석에 마트 서점에서 구매했던 손바닥 크기 문고판 명언책 2권이 있다. 『지혜의 명언』,『그대 괴로움에 위로가 되는 소중한 한 마디』. 이 작은 책 2권은 종종 형광펜 칠한 영역을 읽는다. 꽤 괜찮은 명언들이 있기 때문이다.
- 2025년 9월 20일, 엠마네오빠


[n회차 독서기록] 박민영,『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인물과사상사
한국사회의 교육열의 본질은 무엇일까
정부가 짜놓은 초중고 12년과
대학 4년은 무려 16년이라는 거대한 세월이다.
한국 사람들은 태어나 유아 연령에 이를 즈음부터,
엄청난 교육열의 압박 속에 성장한다.
시간, 에너지, 활력이 넘쳐나는 어린이~청소년 기간을
학교에서 소진한다.
아이들은 그렇게 학교라는 제도에 강제로 편입된다.
학교는 교육 기구라며, 의무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모두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이 소중한 기나긴 개인 인생 기간을 빼앗기는데도,
왜 교육이라는 이름의 장치에 속아넘어갈까.
실제로 사회에서 사람들은 초중고졸이나 퇴학자가
무시받고 차별받기 때문이다.
나아가 대졸도 인서울, 지거국, 지잡대로 나누고,
머릿속에 자기들만의 추상적인 계급도를 그려가며
서로를 차별하기 때문이다.
그런 게 두려워 학교에 다니게 된다.
그런데, 민주주의 사회는 부당한 차별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학교가 과연 민주주의 시민을 키워낸다고
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이 상호 존중과 대화, 토론,
협의, 협력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
학교는 정말 그런 시민을 길러낸 주체였던가.
학교는 교사, 학생, 부모 모두에게
불편하고 무거운 고통을 주는 '시설'이다.
그 시설 속에서 교사와 학생은 지쳐가고 타락하며,
부모는 자녀를 인질로 한 학교의 협박에 저항할 수 없다.
아무리 학교를 미화하려고 하더라도,
학교의 본질은 교사, 부모, 아이들을
옥죄는 거대한 근원 중 하나였다.
나의 경험
박민영 저자는 어린 시절 학교의 폭압 경험을 잊지 않았다.
성년이 된 후 그는 학교의 본질을 이 책에서 고발했다.
그의 고발을 읽는 것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읽으면서 나 역시 국민학교 시절 경험이 다시 떠올랐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가학적인 폭언과 폭력을 남용했던
4학년 남성 담임과 6학년 여성 담임,
이 둘은 지금 돌이켜 보아도
인간적인 존엄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강약약강의 비열함, 촌지를 밝히는 부정부패,
어린이에게 가혹한 폭력 행사, 특정 학생 편애,
일기 검열과 밝은 내용만 쓰라는 통제 등,
폭압의 그 기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반면 중고등학교 시절은
비교적 무난하게 졸업할 수 있었다.
공부에 충실한, 재미없는 생활의 반복이었기 때문이다.
부모의 뜻을 따랐지만,
그렇다고 마냥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학교는 정부의 사기’라며 자퇴하겠다고
수시로 수차례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부모님이 내 목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와 부모, 양쪽 모두의 인질이었다.
가출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질 못했다.
부모님 마음에 못질하기는 더욱 싫었기 때문이다.
결국 내 청춘은 학업과 함께 소진됐다.
웹툰 회귀물처럼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입학부터 거부할 것이다.
내가 강해지는 길은
학교가 아닌 곳에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의 기여는 무엇이었나
사람들은 학교가 글과 숫자, 학문을 가르쳐 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 경우, 유치원 시절에 필요한 것을 스스로 배웠다.
신문에 쓰인 한글과 숫자를 읽고 싶다는 호기심에
아버지를 졸라 한글과 천자문 교재를 받아 스스로 익혔고,
숫자는 어머니를 통해 해결했다.
그렇게 스스로 배움을 찾아 익히던 내게,
학교는 학습을 지리멸렬한 것으로 만들었다.
억지로 시켜서 하는 일과
스스로 호기심에 몰입하는 일은 전혀 다르다.
결국 내게 학교가 기여한 바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모교’라는 말을 거부한다.
어디서 어미를 자처한단 말인가.
폭력, 갈취, 착취, 차별, 배제를 하는 게
어찌 어미란 말인가.
예나 지금이나
정작 내게 평생 기여하고 있는 것은 독서, 운동, 취미다.
지적 성장과 교양의 축적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박민영 저자의 학교 고발 내용들
내용이 방대하기에 짧게 키워드 문장 중심으로 하겠다.
1. 교복은 통제를 위한 구속과 차별을 위한 수단이다.
나 역시 100% 동의한다.
교복은 청소년을 주체가 아닌 감시·통제 대상으로 만든다.
2. 학교라는 시설 속에서 청소년은 욕을 입에 달고 산다.
학교는 본질적으로 교도소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죄수나 갱처럼
서열 놀이를 하며 서로를 괴롭히게 된다.
이런 병리 관계 속에서 진정한 우정은 존재하기 어렵다.
3. 청소년의 ‘쿨 ㅋㅋㅋ’는 좌절의 다른 이름이다.
세월호 학생들은 침몰 와중에도 ㅋㅋ 문자를 보냈다.
이것은 백인 농장주의 가혹한 채찍질에도 신음하지 않고,
'꾹' 참았던 흑인 노예의 ‘쿨’과 닮아 있다.
여기서 내 국민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너무 힘들어도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쿨’ 때문은 아니었지만, 본질은 같았다.
위협 속에서 힘들어도 참아야만 했던 것이다.
4. 유학은 탈출구가 될 수 없다.
조기 유학은 해법이 될 수 없고,
대다수에게 가정 해체와 일탈을 가져올 뿐이다.
5. 미국 유학파는 양키 패치가 되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사회를 망친다.
이의 없다. 이건 100% 진실이다.
신자유주의와 PC, DEI에 세뇌되어 돌아온 자들이 많다.
6. 상문고, 충암고, 에바다, 인화학교 사건은
모두 사학재단과 시설의 폭력, 비리, 착취, 착복의
범죄 기록이다
비리가 가득한 사학재단은 명문고 타이틀에 집착한다.
그 명문고라는 방패로 그들 자신의 죄악을 감추고
심지어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7. 종교사학은 민주 사회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이의 없다. 이는 극단적인 파시즘과 다를 바 없다.
극우(極愚)는 종교와 정치가 근원이다.
8. 학교 성범죄는 학교의 위계 폭력과
학생들 사이의 서열 투쟁이 결합해 일어난다.
교육청은 사건사고가 발생한 학교에 벌점과 불이익을 준다.
그래서 학교는 사건을 은폐하기 급급하다.
특히 학폭·성폭력 사건은
오히려 학교가 가해자 측과 한통속이 되어
피해자를 처벌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왜냐면 피해자는 서열상 가장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짓밟고 사건을 숨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마법의 '취재가 시작되자 마자~'는 그래서 유효해진다.
맺음
박민영 저자의 이 책은 결코 편안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의 ‘학교’라는 시설을 정면으로 고발한 역작이다.
지난 주에 나는 장애인의 탈시설,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복원하는 것에 대한 소감을 썼다.
일반 시민도 다르지 않다.
우리 역시 '탈시설'이 필요하다.
이 탈시설의 다른 이름은 '탈학교'라고 할 수 있다.
현재는 고1에 대입수능을 목적으로 한 '탈학교'가 있지만,
조만간 초중고 전체에 있어 의미할만한 일부가
‘탈학교’라는 흐름을 보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학교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기업이 군주제인 것처럼,
학교는 독재, 차별, 배제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곳을 거쳐 민주주의 시민으로 성장한 사람들은
그 자체가 대단한 성취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학교에서 좋은 추억과
감사의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런 소감 역시 인정한다.
그런 사람이 어디 없겠는가.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학교는 스스로 좋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화는 시민이 만들어낼 때에야 가능하다.
학교가 죽을 지경에 이르러야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그 전까지 학교는 상대평가와 서열화 작업을
‘교육’이라 우기며 국민을 속일 뿐이다.
그것에 대해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것은 교육이 아니다.
그것은 사기일 뿐이다.
더구나 지금 우리는 정보가 차고 넘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학교는 이미 이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채, 한참 뒤처져 있다.
이미, 배우고자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엄청나게 쉽게 정보를 구해 배울 수 있는 시대다.
스스로 배우려는 의지와 호기심만 있다면,
학교가 아니더라도 지식과 기술은
얼마든지 자기 손에 들어온다.
이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는 학교의 권위에서 벗어나
새로운 배움의 길을 스스로 설계하고 실행할 수 있다.
PS.
다음 n회차 기록은
펄벅의『딸아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를 다뤄볼까 한다.
펄벅은 생후 3개월에 선교사 부모를 따라
청나라 말기 중국에서 성장했다.
중국인 유모에게 길러져 중국어가 유창했고,
중국을 자기 나라처럼 여겼었다.
그녀의 이 책은 주로
1950~60년대 미국 미혼 여성들의 서사와 함께,
동아시아적 가치를 체화한 펄벅이
여러 따뜻한 지혜의 조언을 전하는 내용이다.
가끔씩 여성 특유의 상상 서사가 섞여 있지만,
펄벅의 조언은 시대불변으로 유익하다.
- 2025년 9월 14일, 엠마네 오빠


고병권, 김도현 저자와 함께 장애인을 읽고 우리를 읽다
이번 주 n회차 독서 기록은 다음 주로 미루려 합니다.
박민영 저자의『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를 다 읽었지만,
그의 책들 중에서도 무거운 주제여서,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대신, 요즘 틈날 때마다 관심을 갖고 탐구해온
주제를 짧게 나누려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장애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70~80년대만 해도 장애인들은
일상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눈에 띄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점이 늘 의아했습니다.
한국 인구의 약 5%,
대략 250만 명에 이르는 장애인들 중,
특히 중증 장애인들은 사회의 시선에서 감춰졌습니다.
통제뿐만이 아니라, 인권유린과 착취가 일어나는
밀폐된 시설에 갇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2023년 전장연의 과격했던 출근길 지하철 시위는
저 자신에게 본격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그들은 차라리 나쁜 사람이라는 욕을 먹더라도
저런 시위를 선택할까?”
그런 그들의 저항과 권리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장애인과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생태학적 시선으로 본다면, 이 말은 더 확장됩니다.
식물에게 일어난 일은 동물에게,
동물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에게 되돌아옵니다.
마찬가지로,
장애인에게 가해진 억압은
장애인에게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민 전체의 삶을 옥죄는 방식으로 되돌아옵니다.
장애인과 우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시설에 갇힌 장애인이 있듯,
제도의 시설 속에 갇힌 우리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점에서 도움이 된 책들이 있습니다.
노들야학에서 20년 넘게 장애인들과 함께해온 고병권 선생,
그리고 노들야학 교사 김도현 선생의 책들입니다.
저자 김도현은 사회복지학과 장애학을 분명히 구분합니다.
사회복지학은 니즈 → 지원 → 사회복지사(행위 주체)
장애학은 억압 → 저항 → 장애인 당사자(행위 주체)
사회복지는 당장의 고통을 덜어주는 지원에,
장애학은 구조를 바꾸려는 저항에 무게를 둡니다.
전장연 시위 역시 이 저항의 맥락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권리 언어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권리 언어는 저항에 꼭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사회의 온도를 차갑게 만듭니다.
요구는 있으되,
실현을 위한 구체적 방법은 부족하고,
때로는 현실의 제약을 외면하기도 합니다.
또한 ‘어디에서, 누가, 어떤 고생을 하고 있는가’를
돌아보지 않은 채 결과만을 요구할 때,
그런 요구의 누적은 결국,
그들 자신과 타자 사이의 연결 다리를 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저자 고병권은
『사람을 목격한 사람』에서
전장연 시위를 비난하는 시민들을 향해
이렇게 물었습니다.
“죄 없는 시민은 정말 죄가 없습니까?”
저 역시 이 질문을 바꾸어 되묻고 싶습니다.
“죄 없는 장애인은 정말 죄가 없습니까?”
장애인이든 시민이든,
'보편적인 대의명분' 없이
자기만의 권리 언어만을 내세운 저항만 하면,
대립과 분열을 강화시킬 뿐입니다.
설령 그런 방식으로 원하는 것을 얻는다 해도,
누군가의 고통과 소외가 축적된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 모두의 부담으로 돌아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권리 언어만의 저항이 아니라,
불의를 거부하면서도 대의명분을 세우고,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변화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사회의 구조와 관계를
새롭게 재배치하는 길입니다.
물론 사회도, 개인의 사정도 복잡다단합니다.
쉬운 해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경제나 기술적으로는
가능한 사회에 도달했으나,
상상력과 합의가 아직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을 뿐입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인간 사회의 집단적 사고가
너무나도 더디게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정지된 것처럼 보이죠.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온갖 고통이 있었지만,
우리 모두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의 성찰과 실천이 이어질 때,
사회는 점점 좋게 바뀔 수 있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시민과 시민 사이에 건너가는 다리 하나가 놓일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더 인도주의적이면서도
훌륭한 사회를 하나씩 하나씩 실현하게 될 것입니다.
PS.
사회적 차원에서 시설이 아닌 형태로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인도주의적이고 인간적인지는,
우리가 장애인과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 태도가 곧 우리 자신과 사회의 품격을 결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그만큼 좀 더 자유롭고 인간다운 사회를
함께 이루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 2025년 9월 7일, 엠마네오빠
![[큰글자도서] 사람을 목격한 사람 - 고병권 산문집](https://image.aladin.co.kr/product/33838/54/cover150/k912930993_1.jpg)
![[큰글자도서] 사람을 목격한 사람 - 고병권 산문집](https://image.aladin.co.kr/product/33838/54/cover150/k912930993_1.jpg)
[n회차 독서기록] 고병권, 『철학자와 하녀』
대중 인문분야의 한국인 저자들 가운데
나는 고 박민영과 고병권,
이 두 사람을 손에 꼽는다.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이지만, 책을 읽고 나면 묘하게 그립다.
그렇다고 그들의 모든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의견을 달리하고, 심지어 고개를 젓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을 좋아한다.
글에서 느껴지는 진실성과 집요한 디테일의 깊이 때문일 것이다.
집에는 고병권의 책이 네 권쯤 꽂혀 있다.
그중에는 『자본』 시리즈 합본도 있다.
문제는 그게 내 도서 구매 이력 초유에
최악의 “호구 쇼핑”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드커버에다 주요 참고 삽화 자료 생략,
무리한 수준으로 압축 저장하다 보니 깨알 같은 글씨.
노안이 시작된 내 눈에는
한두 페이지를 읽기도 버겁다.
가격은 동일한 강의형 원고와 물성 분량 수준인
백승영의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의 세 배.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책을,
가장 탐욕적인 자본주의 상술로 팔아먹은 거다.
책을 펼칠 때마다 ‘흑우 인증’ 당한 기분이 밀려온다.
물론 저자의 잘못은 아니다. 출판사의 욕심일 뿐.
온라인으로 구매한 내 잘못도 어느 정도 있다.
오프라인에서 책 실물을 봤으면, 나는 구매 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병권 저자의 글들은 내 사고를 넓혔다.
이 가치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고병권의 자본을 읽다 눈피로로 잠시 덮으면서,
그의 다른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철학자와 하녀』를 펼쳤다.
이 책은 읽은 사람마다 평가가 높은데,
나 역시 그중 하나이다.
---
탈레스가 우물에 빠진 건 통쾌하다
책은 탈레스와 하녀의 일화로 시작한다.
별을 보며 걷다 우물에 빠진 철학자.
그 모습을 보고 깔깔대며 조롱한 하녀.
“나리는 하늘만 보느라 발치 앞을 못 보네요” 하면서.
문득, 공자의 말씀이 떠올랐다.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그러면서, 마르크스의 선언도 떠올랐다.
“철학자들은 지금껏 세계를 해석해왔다. 이제는 변혁해야 한다.”
철학은 추상과 초월만이 아니다.
발치의 삶을 지탱하고,
세상을 조금이라도 낫게 바꾸는 힘이어야 한다.
---
철학은 지옥에서 행복한 보금자리를 짓는 일이다
고병권은 말한다.
철학은 지옥에서도 살 만한 보금자리를 짓는 일이라고.
신이 보살핌을 거둔 자리에 생겨나는 삶의 터전.
그것은 인간이 서로 건네는 희망과 배려로 이뤄진 공동체이다.
니체는 “얼음 덮인 산꼭대기”를 철학의 자리라 했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변방으로 추방된 것들을
다시 발견하는 자리에서 철학은 시작된다.
현실이 무너진 곳에서
다른 새로운 현실을 잉태하고 빚어내는
창조적인 작업이 철학이라는 것이다.
깨달음은 천국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천국은 극복의 필요가 없으니까.
철학은 지옥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그곳을 삶의 조건으로 삼아
새로운 길을 찾고 실현하려는 사람의 것이다.
---
곁에 있어줌
고려시대 불화, ‘수월관음도’.
풍만한 몸매와 섬세한 장신구,
깨달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존재.
고병권 저자는 그 그림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동시에, 지장보살은 볼품없다고 느꼈단다.
그런데 고병권 저자의 꿈에 지장보살이 나왔단다.
지장보살은 남루한 가사에 지팡이를 든 초라한 모습으로 다가와
저자 자신의 머리를 지팡이로 툭 치더란다.
이 꿈에 대해, 스님이 고병권 저자에게 말했다.
“관음 보살은 가진 걸 다 나눠주는 회장님 같은 분이지만,
지장 보살은 줄 게 없어도 곁에 있어주는 분입니다.”
그때 고병권 저자는 알았다고 한다.
곁에 있어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선물이라는 것을.
“있음”과 “줌”이 일치하는 자리.
존재가 곧 선물이라는 뜻이다.
다만 나는 여기에 약간의 선을 긋고 싶다.
애초에 붓다는 “벗을 가려 사귀라”고 했다.
붓다 역시, 공존은 인정하되, 무차별적 공생에는 반대한 것이다.
삶의 방향이 다른 사람과 억지로 함께 살면 서로가 파괴된다.
지장보살도 ‘공존’은 했지만,
공생까지는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단지 곁에 있어준 것까지가
최대한의 선의와 배려라는 것이다.
---
배움 이전의 배움
고병권 저자의 노들야학 20년은
현실을 살아간 그의 기록이기도 하다.
장애인 학생과 대학생 교사가 함께 꾸린 야학에서
장애인들은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도,
밤마다 울분과 희망이 교차했다.
체념과 무기력의 정서를 극복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건
장애인이 밤에 피운 모닥불 체험이었다.
“TV에서만 보던 장면을 '직접' 해봤다.
별빛이 다가와 비추는 것 같았다.”
그 체험과 자각으로 인해,
체념과 무기력이 자신감으로 바뀐 것이다.
칸트가 계몽을 ‘지능’이 아니라 ‘용기’라 했듯,
리영희가 사람들에게 ‘생각 자체’를 일깨웠듯,
그런 주체의 체험을 통해,
노들 야학 장애인들은
배움 이전에 지니고 있었던
체념과 무기력의 정서를
자신감의 정서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검정고시 합격자와 동시에
장애인 사회운동가들이 태어나게 된다.
나는 고병권 저자의 또 다른 책 『살아가겠다』 속
고(故) 김주영 여성 장애인 활동가를 떠올렸다.
이분의 삶과 비극적 죽음을 통해,
한국은 시설사회가 아닌,
시민공동체여야 한다는 진실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의 소감과 반론, 제언도 있지만,
너무 길어질 수 있어서
이쯤에서 수렴하고 다음 기회에 하겠다.
---
해석노동
고병권 저자가 홈에버 파업에서 만난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사측은 고객 불평이 들어오면, 새벽에라도 불러서
‘다섯 가지 인사말’을 수십 번 반복하게 했다.
심지어 어떤 30대 과장은
50대 여성 노동자들에게 토끼뜀과 오리걸음을 시켰다.
부당한 지시와 명령을 굴욕적으로 받아 수행한 것이다.
고병권 저자는 물었다.
“그걸 그냥 참으셨어요?”
여성 노동자들은 대답했다.
“억울했지만, 과장 입장에서는 화가 날 만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녀들은 자신의 굴욕과 모멸을 감내하면서도,
오히려 권력자의 눈으로 상황을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고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말한 ‘해석노동’이다.
약자는 권력자의 시선을 먼저 해석하는 부담을 떠안는다.
반대로 권력자는 아랫사람의 입장을 거의 상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인간관계는
상호간의 해석노동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좋은 사회란 권력자도 해석노동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회다.
동양의 고전도 말했다. “백성을 헤아려 선정을 베풀라.”
고수와 하수는 여기서 갈린다.
그런 면에서, 한국 기업 대다수는 하수라고 나는 생각한다.
---
저항의 가치
저항 없는 대화는 대화가 아니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 당시, 선장의 첫 방송은 “가만히 있으라”였다.
교회 찬송가에도, 폭력의 명령어에도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는 부당한 지시 명령은 반복된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가만히 있으라”는 부당한 지시나 명령을 내리는 자는
모두 범죄자이며 적이다.
부모, 형제, 이웃, 동료, 정부일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모두 범죄자이고 적이다.
부당한 지시나 명령에 대한
저항과 전복은 주체의 기본값이다.
굴종은 노예의 운명일 뿐이다.
우리는 주체인가, 노예인가.
저항과 전복은 주체로서 우리의 DNA에 새겨진 권리다.
주체는 부당한 지시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
맺음
지금까지 극히 일부만 소감으로 밝혔을 뿐,
대다수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다.
고병권 저자의 『철학자와 하녀』는
철학이 어떻게 발치와 하늘을 이어야 하는지를
저자 자신의 삶 속의 체험 이야기와 함께 보여준다.
1. 지옥에서 행복한 보금자리를 상상하고 짓는 실천력,
2. 곁에 머무는 존재가 주는 '존재 가치'의 선물,
3. 배움 이전에 자신감과 용기의 자각 체험을 스스로 해내야 한다는 점,
4. 권력자도 '반드시' 감당해야 할 해석노동,
5. 저항과 전복이란 주체의 일상과 삶 영위.
이 다섯 갈래가 모일 때
철학은 더 이상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일상 속의 살림이 된다는 것이다.
PS.
다음 책은, 고 박민영 저자의
『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를 해볼까 한다.
학교는 개인, 가정, 사회의 온갖 병리 현상의 근원이다.
그런 학교를 다루거나 초월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려운 것도 아니다.
우리는 사실 이미,
학교가 필요하지 않은 사회에 진입했다.
낡은 것은 우리의 타성과 관성일 뿐,
새로운 것은 이미 와 있고,
단지 배움 이전에 먼저 필요한
자신감과 용기의 자각이
우리 역시 필요할 뿐이다.
장애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아직도 시설사회에 갇혀 살고 있기 때문이다.


[n회차 독서기록]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마루야마 겐지의 에세이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이 책을 보면서 시작됐다.
마루야마 겐지는 지금쯤 80대 중후반일 것이다.
아직 생존해 계신지는 잘 모르겠다.
이상하게 마음에 드는 일본 영감님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큰 주제는 이렇다.
1. 부모는 아무 생각 없는 존재다. 떠나라.
그는 부모를 신성시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부모는 별 생각 없이 결혼해
자식을 낳는다고 단언한다.
생각 없이 낳아놓고,
제대로 사랑은 주지 않으면서
간섭만 오지게 하는 존재가 부모라는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다른 자전적 에세이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고루하고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자식에게 강요한 인물이라고.
그래서 그는 아버지와
정서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완전히 선을 긋고 멀리했다.
다시 이 책으로 돌아와, 그는 말한다.
“자식은 언젠가 반드시 부모를 떠나야 한다.”
첫 번째 탄생은 부모로부터 했지만,
부모를 떠나는 순간이야말로 제2의 탄생이자
성인의 진짜 의식이라는 것이다.
말투는 독설에 가깝지만,
부모를 신성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배울 점이 있다.
무엇보다 부모와 자식 사이,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서부터는 집착일까.
부모 대다수가 자식을 잡아먹고,
자식 대다수도 부모를 잡아먹는다.
이런 기이한 한국 사회에서
부모와 자식은 어느 선에서 멈춰야 할까.
모두가 생각해 볼 일이다.
마루야마는 가족을 “일시적 결속”이라 말한다.
너무 오래 매달리면 서로 성장하지 못한 채
증오로 흐른다는 것이다.
2. 직장인은 노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까?
직장에 대해서도 그는 가차 없다.
“직장인은 노예다.”
그의 직장 비판은 나 역시 체험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직장생활은 노사 상호평등한 주체가
계약으로 등가교환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남이 시키는 온갖 일로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도둑맞는다.
월급과 연금에 자유를 맞바꾸는 순간,
인생의 9할을 남에게 내준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게 자유를 잃은 채 생존을 연명하다가,
어느 날 남이 나를 자른다.
왜 내 생명줄을 남에게 맡기는가.
자립하라!
이게 마루야마 겐지의 비판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약간의 반론을 달고 싶다.
그는 다른 에세이에서도 ‘자립’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하지만 그 역시 출판계라는 생태계 속에서 살았다.
편집자, 독자, 시장이 있었기에 그의 자립이 가능했다.
자립은 외딴 섬에서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다.
믿을 만한 타자와의 연결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직장인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다.
직장인이 노예 같은 삶을 사는 건 맞다.
하지만 사회 구조상 모두가
직장을 거부하고 살 수는 없다.
마루야마 본인도 3년 정도 직장 생활을 했고,
그 사이에 아쿠타가와 상을 받아 전업 작가로 도약했다.
게다가 같은 회사에서
자신을 도와준 여직원과 결혼까지 했다.
결국 그의 “탈출”에는 운과 계기,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건 아니다.
3. 국가는 국민의 적이다
국가에 대해서 그는 단호하다.
국가는 결코 국민의 것이었던 적이 없으며,
오히려 개인을 사지로 내모는 적이라고 본다.
일본은 “대동아 공영”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국민을 거대한 전쟁에 동원했다.
원폭을 두 방 맞고 패배할 때까지
“결사항전, 1억 국민 전원 옥쇄”를 외쳤던 역사가 있다. 마루야마가 일본 정부를 불신하는 건 당연하다.
현지 당사자의 불신은 우리 상상 이상일 것이다.
4. 종교는 악이다
그는 종교에 대해서도 신랄하다.
“신은 없다. 종교는 악이다.”
인간이 신에 기대는 순간,
자기 자신을 잃는다고 단언한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실이긴 하지만, 너무 몰아세우지는 말자.
사람들이 종교 안에 있든 아니든,
자신과 가족, 사회에 최소한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간다면 내버려두자.
다만 종교 조직 내부의 광기와
사회적 폐해는 엄단해야 한다.
우리 사회만 해도 사이비 컬트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5. 연애, 성욕을 포장한 놀이일 뿐인가?
연애에 대해서도 그는 독하다.
“패배자는 사랑을 하지 않고 연애 놀이만 할 뿐이다.”
마루야마 본인은 연애담 없이 곧장 결혼했다.
그가 같은 회사의 여직원과 결혼한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돕는 협력자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었겠는가.
방향성 없이 감정에 휘둘려
의식의 흐름대로 휩쓸린 삶은
인생의 자산이 되기 어렵다.
사랑이 성숙하려면
결국 협력과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마루야마는 자기 방식으로 말해준 셈이다.
6. 젊음은 평생 바칠 일을 찾아내야 한다
노년의 그는 청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젊음의 특권은 도전이다.
평생 바칠 만한 일을 찾아 투신하라.”
시대불변으로 옳은 말이지만,
오늘의 청년들은 상황이 다르다.
머릿속이 온갖 추상 개념으로 가득해
몸이 잘 움직이지 못하고,
자기 손익과 생존에 급급해 도전을 주저한다.
사회와 타인의 온갖 평가와 관점과,
또래들끼리 공유하는
온갖 엉터리 추상 개념에
시달리는 청년들에게,
도전은 사치가 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청년들은 머릿속을 비울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온갖 쓸데없는 추상 개념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한,
눈앞의 손익 계산에만 매달릴 뿐
감히 도전하지 못한다.
이건 청년만이 아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7. 동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 죽어라
책의 마지막엔 그의 대표적 메시지가 나온다.
“동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 죽어라.”
태어나는 건 숙명이지만,
죽음 앞에서는
자기 정신을 고양시킨 인간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함께 곱씹어볼 질문들
마루야마 겐지의 독설은
다분히 남성적이고, 공격적이며,
치부를 찌른다.
그래서 어떤 독자는 시원하다 하고(나 같은 부류),
다른 독자는 기겁하며 반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화된 껍질을 다 벗겨내고 본질로 승부한다.
그래서 이런 질문들을 던지게 된다.
- 부모와 자식 관계, 어디까지 독립해야 할까?
- 직장은 생존의 울타리인가,
아니면 자유를 빼앗는 노예제인가?
- 자립은 개인의 힘만으로 가능한가,
아니면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가?
-“동물로 태어나 인간으로 죽는다”는 말,
나는 어떻게 살다 떠날 수 있을까?
마루야마 겐지가 이 책을 관통하며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남에게 기대지 말고, 네 인생을 살아라.”
그러나 나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사람은 서로 기댈 수 있는 타자가 곁에 있을 때,
자립은 더 단단해진다.
직장에서 탈출하려면 우연이든 선택이든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누구나 같은 방식으로 걸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책은 정답을 주기보다,
“그대는 어떻게 살래?” 하고 다그쳐 묻는다.
그대와 나, 우리 모두의 삶에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불편한 독설이
결국은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PS.
다음 n회차 독서 기록은
고 박민영 저자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고병권 저자의『철학자와 하녀』를 다룰 예정이다.
이 두 저자는 내가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사고에는 배울 점이 많다.
가끔 이 생각도 한다.
이 분이 애초의 전공인 화학 분야에 투신했으면,
뭔가는 크게 해냈을 거라고 본다.
근데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는
엉뚱한 선택을 한다.
아니 대체 왜?
어쨌든 덕분에,
순수 문과 출신인
고 박민영 저자와 다른 결로,
그의 집요한 사유의 디테일은
배울 점이 꽤 있다.


독서할 때 흔히 빠지는 함정을 벗어나자
남의 생각과 내 생각, 독서와 사유 사이에서
여름 잘 보내시고 계신가요.
제 경우엔 지난 주에 마루야마 겐지 에세이
『인생따위 엿이나 먹어라』를
n회차 독서 기록으로 예고해놓고,
주중의 일상으로 인해 읽지 못했습니다.
이게 핑계라면 핑계이고요,
그러다 보니 할 게 없습니다.
주중에 읽고 있는 다른 책은 있지만,
흐름에 맞지 않고요.
그래서 이번엔 그믐 동호회에 맞는 주제를
개인 경험을 곁들인 이야기로 하여 대신할까 합니다.
이번 글의 주제는 간단합니다.
독서할 때 흔히 빠지는 함정을 피하고,
사유의 독립성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독서는 남의 생각을 읽는 과정이기에,
독서할 때 우리는 흔히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이런 생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내가 읽는 이 책 저자의 말은 대단하고 훌륭한 거야.'
저 역시 어렸을 적에 경험했습니다.
저 자신도 특정 저자에 매료된 적이 있었지만,
남들의 모습을 통해 그런 모습을 일찍 졸업할 수 있었어요.
대학 시절엔 온갖 철학이나 이념에 빠져서(심지어 다단계도)
그것을 대단한 것처럼 말하는 선후배들도 여럿 봤고요.
문학소녀 기질인 후배 여대생이 읽는 책 내용에 대해
단 한 줄 수준으로 반론을 제시했다가
그쪽이 급발진하는 모습도 보면서,
독서로 인한 '사유 없는 생각의 병리'를 보게 됩니다.
(이 경험으로 인해, 저는 문학소녀 기질이라고 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죠. 일단 거리를 둡니다.)
바로, 자기 생각 없이 저자를 추종하는 모습인 거죠.
자기가 읽은 책 저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그 저자 책 내용을 비판하면 적으로 여기는
컬트적이고 파시즘적인 사고와 태도는
그 시절부터 이미 있었습니다.
그런 체험을 하고 나서 느낌표를 찍은 게
"저자를 팬처럼 좋아하더라도,
꼬붕은 되지 말라."는 거였어요.
독서는 결국 남의 생각을 따라 읽는 일,
즉 1회차에서는 소비에 그치는 행위입니다.
소비가 된 글들은 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 자기 생각으로 충분한 되새김질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저자의 꼬붕이 되면,
저자의 사고 스케일을 졸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유 자체가 날개를 펴지 못합니다.
박민영 저자의『즐거움의 가치 사전』에서는
스피노자의 책꽂이에 60권 정도만 꽂혀 있었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그렇게 많은 책을 읽지 않았어도,
스피노자가 거짓의 폭압 앞에
진실을 말하고 선택하는,
당시 유럽 유일의 양심 지성인이자,
지행합일을 이룬 영성가였다는 사실은
중요한 뭔가를 알려줍니다.
일생의 책은 그리 많지 않아도 되고,
양서의 글들은 수차례 곱씹으며
자신의 사유를 잘 성장시킬 필요가 있다는 거죠.
물론, 처음 읽든 몇 번을 반복해 읽든,
책을 읽는 동안에는 제자의 태도를 취하는 게 좋습니다.
겸손히 배우고, 온전히 스승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 태도가 있어야 왜 배웠는지,
무엇을 가져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배움이 끝나면 졸업해야 합니다.
제자처럼 배웠다가,
어느 순간에는 독립해 자기 길을 가는 거죠.
좋은 책일수록, 좋은 스승일수록,
그 ‘떠남’을 기꺼이 축복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맹목적인 컬트 추종자가 아니라,
생각하는 지성인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럼 이만 줄입니다.
더위에 이런저런 생각나는 대로
대화체로 이야기를 건네봤습니다.
다들 건강한 나날 되시길 바라며 이만 마칩니다.
- 2025년 8월 15일, 엠마네오빠.


[n회차 독서기록] 어슐라 K. 르 귄,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어스시 연대기 이야기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 이상향의 비용과 선택
어슐라 K. 르 귄의
『The Ones Who Walk Away from Omelas』(1973)는 매우 짧지만,
인문·철학 토론에서 오랫동안 회자되는 단편이다.
모든 시민이 행복하게 사는
이상향 오멜라스에는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지하실 어딘가에 한 아이가
인간 미만의 대우 속에 고통을 겪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
도시 사람들은 대부분 그 사실을 안다.
일부는 잠시 충격을 받지만,
결국 축제와 번영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아이를 보고,
아무 말 없이 도시를 떠난다.
이 우화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라는 오멜라스를 투명하게 비춘다.
공리주의의 계산법과 자본주의의 번영이 손을 잡고,
‘단 하나의 아이’만 불행해지는 최소 비용의 희생을 감수한다.
그 아이는 사회의 변방, 시스템 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고통으로 밀려난 존재다.
이상향이 영원한 고통의 변방을 필요로 한다면,
그 존재가 아무리 최소치라 해도 그것은 과연 타당한가.
그리고 우리는 그런 아이를 알고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잊고 있는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가. 아니면, 조용히 떠나는 자인가.
혹은 그 아이를 다시 구하러 돌아올 자인가.
원작은 말한다.
“떠나는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그 결말이 아쉬웠다.
떠나는 사람들은 과연 개인주의적 선택만으로 그랬을까?
그래서 내 상상으로 후반부를 덧붙인다.
떠났던 사람들이 먼 곳에 나라를 세운다.
그 나라는 부국강병해지고,
마침내 오멜라스에 해방군을 파병해 최후통첩을 보낸다.
“지하실의 아이를 해방시켜라.
그리고 7일 안에 오멜라스를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궤멸시키겠다.”
그러나 아이는 해방되지 않았다.
7일 동안, 남아 있는 주민들은 무기를 들고
사수를 외치며 결전을 준비한 거다.
결국 사생결단의 전투가 벌어졌고,
떠났던 사람들의 군대는 남은 이들을 무찌르고
지하실의 아이를 구출한다.
이제 오멜라스는 사라졌다.
이 상상은 이상하게도 시원했다.
부정한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
그것은 오래된 체제의 끝이자, 새로운 윤리의 시작이었다.
마치 부패한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의 심정 같았다.
지하실의 아이는 해방군의 품에 안겼고,
오멜라스의 폐허에 돌아온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것이 천국이 될지, 또 다른 오멜라스가 될지는
이제 그들의 몫이다.
“타자를 착취하여 부와 영광을 누리지 말라.
서로 기여하고 돌보며 살라. 예외는 없다.
기여할 수 없는 자는 기여할 수 없음으로 기여하라.”
이것이 파괴된 오멜라스 이후 세워진 새로운 사회의 으뜸 원리라면,
나는 그 도시에 입성하고 싶다.
『어스시』 – 외부 압력과 창작의 흔들림
『어스시의 마법사』(1968)는 ‘완벽한 판타지’로 불리며,
한때『반지의 제왕』,『나니아 연대기』와 함께
세계 3대 판타지 후보군으로 거론됐다.
낭만과 그늘, 마법과 존재, 죽음과 자기 통합,
이 모든 것이 전성기의 어스시에 있었다.
그러나 시리즈는 4권 『Tehanu』부터 변화를 맞는다.
그 배경에는 1975년 ‘여성 공상문학’ 포럼에서 벌어진 한 장면이 있었다.
비평가 조안나 러스(Joanna Russ)는
르 귄의 『The Left Hand of Darkness』를 공개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허용된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글을 쓴다.
전체 구조가 남성 중심이며, 그것이 진짜 한계다.”
이 발언은 단순한 서평이 아니라,
당시 페미니스트 SF 진영의 집단적 문제 제기였고,
르 귄에게 강한 압력으로 작용했다.
르 귄의 좌절과 회복을 위한 분투
외부 비판과 자기 성찰이 이어진 시기,
르 귄은 이념 압박과 시장 압박에 서로 다른 태도를 보였다.
1975년 조안나 러스의 비판과
동시대 여성주의·젠더 진영의 공세에는 순응하며,
『Tehanu』 이후 세계관과 주제 의식을 크게 수정했다.
젠더 대명사 변경과
여성 중심 서사 강화 같은 조치도
이 과정에서 나왔다.
반면, 출판 시장과 대중 독자가 요구한
상업적·트렌드형 변화에는 선을 그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꽤 많이 압박받아왔다. ..
하지만 압박받으면, 나는 반격한다.”
“유행을 따라 작품을 '해리 포터'처럼 만들라는 압박을 받았지만,
그건 의도적으로 거부했다”
또한 지브리 스튜디오와는
'게드 전기 : 어스시의 전설(2006)'로 사이가 틀어져
한바탕 키보드 배틀을 하기도 했다.
그녀의 창작 인생 후반부는,
이념 공세에는 방향을 틀고
시장 압박에는 버티는
모순된 양면성이 공존했다.
그럼에도 르 귄은 평생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다.
이 점은 존중할 만 하다.
“I always was a writer. ..
I just wanted to do my job writing,
and to do it really well.”
“나는 항상 작가였다. ..
다만 글 쓰는 일을
정말 잘 해내고 싶었을 뿐이다.”
출처: The Write Practice.
https://thewritepractice.com/ursula-le-guin/
『어스시』시리즈의 위상 변화
그녀의 이념적 재해석과 주제 전환은
시리즈의 신화성과 서사 장악력을 약화시켰다.
이념을 추종한 비평가들은 '의미 있는 전환'이라 기록했지만,
대중들은 ‘몰입이 깨진 시리즈’라며 실망하고 떠나갔다.
그 결과,『어스시』는
세계 3대 판타지의 확고한 위치를 점하진 못한 채,
“전반부 3권은 빛났지만, 후반부 3권은 존재감이 희미해졌다”는
양가적 평가에 머물렀다.
결론 – 작가의 자유는 작품 속에서만 제약되어야 한다
『어스시』의 자멸 과정은 우리에게 묻는다.
“작가는 외부 세력이나 시대의 가치관에 굴복해야 하는가?”
르 귄의 행보는 그 답이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정치·이념적 압박에 따른 수용과 변화,
그리고 시장의 상업성 요구 압박에 대한 저항.
이 두 태도는 상충하면서도 그녀의 후반부를 규정했다.
작가의 자유는 작품 속에서만 보장되고,
그 안에서만 제약되어야 한다.
외부의 정치·이념적 개입은 창작의 뿌리를 흔들고,
결국 독자들의 경험까지 훼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검열"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시장의 상업성 요구 압박에 대한 저항은
작가로서는 고귀하나, 상업적 흥행은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외부 이념이나 상업적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작가는 자신의 소신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르 귄은 내게 아쉬운 작가다.
『오멜라스』로 관심이 생겨서
틈틈이 그녀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는데,
점점 이상한 변질과 자멸의 모습들이 포착되었고,
그래서 이번 기회에 이렇게 정리해 공개한다.
작가를 꿈꾸는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PS.
다음 n회차 독서기록은
일본의 전업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의 에세이
『인생따위 엿이나 먹어라』이다.
그는 100편의 소설을 썼지만,
나는 그의 에세이만 좋아하고
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다.
그의 에세이에 담긴 독설은 독특한 맛이 있다.
증류하면 좋은 메시지들로 넘쳐난다.
그의 소설도 그런 식이라는데,
그렇다면 굳이 소설로 읽을 이유를 모르겠다.
그의 사고 스케일은
에세이에서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깨 통증으로 늦어졌다.
러셀은 이 책에서 행복을
단순한 감정이나 순간적인 기분이 아니라,
삶의 구조라고 본다.
구조란 결국,
일정한 흐름과 맥락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는 말한다.
“행복한 삶은 대부분 조용한 생활이어야 한다.
참된 환희는 오직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p.68)
조용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러셀은 여러 장에 걸쳐 정리한다.
경쟁, 피로, 질투, 공포, 자기몰입 같은 것들이
사람들을 행복에서 멀어지게 만든다고 본다.
그중 하나가 자극에 대한 과도한 욕구다.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피로의 원인은 대체로 자극에 대한 집착에 있다.
한계를 넘는 자극의 욕구는 왜곡된 성격이나
본능적인 불만족의 조짐이다.” (p.79)
핵심은 간단하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자극받고 싶어 하는 상태,
즉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아야만 견딜 수 있는 상태는
결국 불행의 구조를 고착시킨다는 것이다.
질투에 대한 분석도 꽤 현실적이다.
“질투의 결과로 생기는 정의는
불행한 사람들의 기쁨을 증가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행복한 사람들의 기쁨을
감소시키는 정의가 되기 쉽다.” (p.91)
여기서 러셀이 말하는 질투에 기반한 정의는,
‘공평성’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끌어내리려는 심리다.
이런 정의는 사회를 더 낫게 만들기보다는,
다 같이 불행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
그렇다고 질투를 단순히 악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건강한 질투는 건강한 경쟁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러셀은, 그보다 더 본질적인 길이 있다고 본다.
“우리는 그런 자아를 초월함으로써
우주의 자유를 획득하는 법 또한
배워야만 한다.” (p.94)
러셀은 사랑에 대해서도 비슷한 시각을 유지한다.
“받는 사랑은 주는 사랑을 해방시켜야 하며,
두 가지 사랑이 같은 정도로 존재하는 경우에만
사랑은 그 최대의 가능성을 달성한다.” (p.178)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는 상태는
사랑의 구조를 지속 가능하게 만들지 못한다.
관계가 균형 위에 설 수 있어야,
그 안에서 정서적 평온이 유지된다는 뜻이다.
현대 문명에 대한 통찰도 짧지만 날카롭다.
“서방의 가장 지성적인 계층이 절멸해가는 중이다.” (p.188)
러셀은 이 서구 문명을 남녀가 흡수할수록
불임이 되는 이상한 특성이 있다고 적는다.
그 말의 배경엔,
생산력은 증가했지만
생명력은 줄어드는 사회 구조,
즉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삶에 대한 태도에 있어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이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우주의 시민이라고 느끼며,
생명의 흐름과 본능적으로 깊이 결합될 때,
우리는 가장 큰 환희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p.239)
러셀의 철학은 일관된다.
행복을 정복하려면,
살아 있는 흐름 속에 정직하게 참여하라는 것.
다시 말해,
행복은 목표가 되어선 안 된다.
행복은 어떤 상태에 도달한 결과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의 결과적인 부산물이다.
그 사실을,
두 번째 읽기를 통해
조금 더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PS.
다음 n회차 독서 기록은
에세이와 문학 둘 중에 하나를 저울질하다
문학으로 해보자는 결정을 내렸다.
사실, 문학은 잘 안 읽는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좋으면 읽는다.
이번엔 작가 특집이라고나 할까.
아주 짧고 쉽지만 심오한 사유를 주는
어슐라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메인으로 하고,
그녀의 『어스시』 시리즈가
후기로 갈수록 흐릿해진 지점을 보면서
느꼈던 안타까움도 살짝 다뤄보려 한다.


책을 읽을 땐, 저자의 사고 스케일을 살펴보자
이번 주 n회차 독서기록은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을 다루려 했으나,
월말에 몰려드는 여러 일들을 처리하느라
다음 주로 미루게 되었다.
대신,
오늘은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
소소한 제안을 하나 드리고 싶다.
요즘엔 터무니없는 내용조차
얼마든지 활자화된다.
그렇기에 의도적으로 ‘양서’를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단지 좋은 책을 찾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프라인 독서 소모임 경험에서도 그랬지만,
다음과 같은 장면을 자주 목격한다.
어떤 책을 정해 읽고 나면
사람들 대다수는 저자에게 그냥 순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고 나니,
저자의 사고 프레임으로 소감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독서 소모임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니체를 읽으면 니체가 곧 전부이고,
논어를 읽으면 공자가 성자라면,
대체 책을 왜 읽은 것일까.
책에서 저자의 사고 정수를 증류하지 않고
무엇을 읽었다는 것인가.
책을 읽은 게 아니라,
신화를 소비한 느낌이랄까.
나는 그런 독서를 경계한다.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저자의 서사 맥락을 파악하고,
이 사람의 사고 스케일이 어디쯤인지 살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판단하면 된다.
저자는 비판 받을 수도 있고,
정말 아니면 동의하지 않아도 된다.
그건 독자의 주체성이고, 마땅한 권리다.
예를 들어,
도서 중에는 저자의 사고의 반경이
문명 전체를 품고 있는 경우도 있고,
소확행 사고인 경우도 있다.
이걸 구별하지 않고
읽은 책마다 “좋다”, “대단하다”고 받아들이면
사고는 쉽게 휘둘리게 된다.
독서는
자신의 사고 지평을 넓히고,
사고 수준을 높이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일을 편의상,
‘사고 스케일 독서법’이라고 부른다.
어떤 책이든
처음 읽을 땐 서사의 맥락을 파악하고,
다 읽고 나면 그 저자의 스케일을 파악한다.
그리고 나서 질문한다.
“이 저자는 지금 얼마나 멀리 보는가?”
“이 사람의 인간과 세계 이해는 어느 정도 수준인가?”
“나는 지금, 어디까지 따라갈 수 있는가?”
만약 저자의 스케일이
내 사고 지평보다 훨씬 넓다면,
그 책은 두세 번, 혹은 그 이상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저자의 서사 구조와 맥락,
사고의 프레임과 스케일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그 책을 ‘졸업’할 시기를 판단한다.
그 책이 아무리 명저라도,
이미 저자의 사고 스케일의 끝을 파악했다면
졸업할 때가 된 것이다.
물론 기억 차원에서 다시 펼칠 순 있겠지만,
새로운 사유는 더 이상 주지 못하니까,
졸업하는 게 좋다.
보통 동양고전들은 최소 수십에서 100여 독 이상을 권한다.
조상님들은 일생에 걸쳐 수천 독 이상을 했으니,
100여 독도 사실 별로 많은 것은 아니다.
이런 사고 스케일 독서법은
책에서 감동을 찾는 방식이 아니다.
사유의 기초체력을 단련하는 방법이다.
그렇기에,
“읽고 나니 대단했다”
“문장이 예뻤다”
“감동적이었다”
이런 식의 감성 소비와는 다르다.
그런 감동은 사람을 깊이 있게
변화시키지 못한다.
독서란 결국
자신의 사고 한계를 자각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그 사고 한계를 넘기 위해
저자의 세계를 몇 번이고 왕복하는 일이다.
전체 내용을 다시 정리하며 마치겠다.
1. 책과 저자를 미화하지 말 것.
당신은 저자 꼬붕이 아니다.
2. 저자의 사고 스케일을 파악할 것.
모든 저자는 사고의 한계가 있다. 졸업하라.
3. 사고를 단련하는 독서를 지향할 것.
누구나 자신의 사고력만큼 존재한다.
사고력의 성장은 그만큼 자신을 구원하는 일이다.
이 글이 책을 진지하게 대하려는 당신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 2025년 7월 27일, 엠마네오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