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네오빠의 블로그
고전 양서, 인문, 철학, 미학, 사회학을 주로 읽습니다[n회차 독서기록] 파스칼 브뤼크네르, 『순진함의 유혹』
이번 그믐 n회차 독서 기록은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순진함의 유혹』이다.
(동문선, 1999년 출간)
이 책은 현대 사회의 인간상에 대해
두 가지 경향의 융합이 만연해 있다고 진단한다.
하나는 순진한 유년기적 행동 경향,
다른 하나는 자신을 희생자로 설정하는 경향이다.
오늘날에는 익숙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낯선 개념이었다.
브뤼크네르는 이 두 가지 경향의 융합을
개인주의의 병적 변형으로 본다.
먼저,
자기 행위의 결과로부터 벗어나려는 순진함,
즉, 불편은 감수하지 않고
자유의 혜택만 누리려는 태도다.
이런 순진함에서
두 번째 선택지인 '희생자화' 경향이 나타난다.
현대인은 불행한 희생자의 얼굴을 앞세워
특별한 대우를 요구한다.
이런 ‘순진한 희생자’ 서사는
개인에 그치지 않고,
기업과 종교, 심지어 테러집단까지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더 나아가,
아무도 자신을 슬프게 하지 않았는데도
불행을 연출하는 지경에 이른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실제로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이들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짜로 절망한 사람들은
자신이 평범한 인간과 혼동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구별되기 위해 특권을 요구한다.
정상적인 시민들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정의를 요구한다면,
이들은 ‘특별한 피해자’로서 대우받고자 한다.
니체는 이런 세태를
‘노예도덕의 인간말종’이라 불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걸 '휴머니즘'이라고 부른다.
죄인은 오직 남이고,
나는 언제나 고통받는 피해자.
이런 설정이 만연한 사회는
결국 타락하게 된다.
브뤼크네르는 묻는다.
협잡꾼들이 '희생자(피해자) 서사'를 장악한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진정 고통받는 이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자아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자아란 ‘내가 안다고 믿는 타자’이며,
‘나에게 가장 멀리 있으면서도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는
역설을 품고 있다.
이 말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타자에 의해 형성된다는 뜻이다.
즉, 나의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며,
타자의 시선, 타자의 평가, 타자의 반응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확립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관계성 속에서
자아가 불편하거나 상처를 입을 때
그 책임을 자신이 아닌
타자에게 전가하려는 경향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 결과,
나는 고통받는 피해자이고
타자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공격한 가해자가 된다.
피해자 서사란 결국,
타자를 통해 구성된 자아가
그 타자를 부정하면서
‘나는 억울한 존재’라는 설정으로
자신을 고정시키는 구조인 셈이다.
이 지점에서
브뤼크네르의 말이 가지는 맥락이 드러난다.
자신을 피해자로 설정하는 순간,
타자는 항상 나를 억압하는 존재가 되고
그 관계 안에서는
자기 책임은 증발해버린다.
그에 따라, 책임 없는 자유를 누리려는
병리적인 개인주의가 활개치게 된다.
현대인은 기대와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실망하며 살아간다.
게다가 근대 이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무한의 자유를 누리지만,
그만큼 무한의 책임을 지고
휘청거리고 있다.
개인주의가 지는 책임의 짐은
그 어떤 짐보다 무겁다.
그리고 그 무게는 무한하다.
그러다 보니,
인간 중 어떤 이들은 꼼수를 개발한다.
자유는 무한히 누리고 싶지만,
그에 따른 책임은 회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내리는 결론은 하나.
나는 ‘세상과 타인에게 피해를 입은
순진한 희생자’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이 피해자 서사를
정체성으로 삼는다.
피해자 서사를 먼저 만들고,
그에 따라 세상은 죄인이 되고
자신은 구별받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나만의 특별한 피해 서사’는
‘나만의 특별한 정체성’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그리고 그 이후까지 확장해보자면,
이졸데 카림의 『나르시시즘의 고통』을 읽어보면
보다 깊은 성찰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모두가 그렇게 피해자 서사로 달려가면
결국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적이 되는 사회가 된다는 점이다.
니체가 비판했던
노예도덕의 타락한 사회가
현대 시민사회의 일상으로 구현된다.
괴물 학부모, 진상 고객, 갑질 민폐 협잡꾼,
그리고 무차별 난동자들이
피해자 서사를 등에 업고 등장한다.
개인의 자유를 외치면서도,
타자와 타인의 고통에는 무감각한
자칭 ‘순진한 희생자’들이 넘쳐난다.
니체는 이들이 평등을 추구하는 양떼 인간이라 했지만,
사실 이들은 ‘나는 다르다’는 서사 욕망을 품고 있다.
남들과 같으면서도
‘조금은 다른 나’를 연출하려는 것이다.
그 결과 나타나는 문화가 바로 ‘소확행’이다.
나만의 소중한 무언가가
남들과 구별되는 정체성의 근거가 된다.
이건 단순한 문화 현상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의 달팽이뿔 위에 세운 거점이다.
그 안에서 자강두천,
서로가 서로를 이기지 못하는
자아들의 웅대한 난투극이 벌어진다.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말은 존중이지만,
실상은 구별과 특권의 요구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순진한 희생자’들의 유일한 자유는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표준적이고, 평범하며,
다른 이들과 대등하다는 것을
입증하려 애쓴다.
대신, 책임은 빼고 말이다.
그들은 결국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의 혹독함’에서
도망치려 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영원한 젊음을 약속한다.
모두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서
회춘과 쾌락을 제공받은 듯
불멸의 욕망을 탐닉한다.
하지만 생물학적 시간은 흐르고
노화와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그걸 견디지 못한 인간은
저급한 유혹에 빠진다.
브뤼크네르는 1990년대 중반,
디즈니를 비판하며
이 흐름을 지적했다.
유년기와 결합한 저급함이
강력한 유혹이 된다는 것.
결국 모든 연령대를 유아화시키는 문화다.
유아화된 사람들은
‘순진한 희생자 놀이’에 빠진다.
자신을 제외한 세상과 타인에게는
도덕과 윤리와 책임을 엄격히 요구하면서도
자신은 책임 없이 무한한 자유를
영원히 누릴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소비주의, 일부 인권 담론, 그리고 테러리즘조차
‘희생자 정당화’라는 동일한 심리구조에 기대고 있다는 것.
브뤼크네르는 이 공통된 작동방식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브뤼크네르가 제시하는 해법은 무엇일까?
첫째, 개인 수준에서는
이 희생자(피해자)화 경향에 저항할 것.
둘째, 개인과 사회의
공동선 합의를 형성하고 준수할 것.
개인주의에는
그에 걸맞은 구속이 필요하다.
그 구속 없이
개인과 사회는 모두 시들어버린다.
개인과 사회는
대립 관계가 아니라,
모순과 협력, 긴장이 공존해야 한다.
그래야 좋은 방향으로
개인과 사회가 조화로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요즘 한국사회에선
이혼 전문 변호사가 연예인급 대우를 받고,
불륜을 미화하는 드라마가
수십 년째 방영된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불륜만이 참사랑이라는
사람들까지 등장했다.
그들은 온라인에서 몰래 숨어 모여 들어서
그들끼리 불륜을 예찬한다.
이는 병리사회가 아니고선 설명되지 않는다.
반면, 기원전 사회에서는
리숴(李碩)의『상나라 정벌』이란 책에서도 나와 있지만,
공동체 윤리를 어기면
기본이 사형이었다.
주나라 시대엔 패륜이나 불효자를
공개 처형했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이런 고대 사회는
과도한 인권 침해의 병폐가 있었지만,
오늘날 병리사회는
도덕과 윤리를 아예 조롱한다.
양쪽 모두 극단이다.
현대는 특히 니체 말대로,
자신에게 편리한 도덕만 탐닉하는
노예도덕의 양떼 인간들이
폭증하고 있는 중이다.
이 양극단 사이에서
우리는 ‘중용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개인과 사회가
모순과 긴장을 안고
생산적으로 협력하고 대결하는 관계.
그것은 바로,
“타당하게 견제된 자유만이 진정한 자유다.”
를 실현하는 선택지이다.
애초에, 무한한 자유라는 건 없다.
순진한 희생자화의 퇴보를 막기 위해서는
개인이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려는 의지를 품고,
사회는 그런 개인을 지지할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그건 생크림빵 같은 꽃길이 아니다.
수고로움과 불편함이 영원히 감내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수고로움과 불편함을 견뎌내야만
개인의 존엄과 진정한 자유가 실현된다.
결국, 진정한 자유란
피해자 서사에서 벗어나
자유가 내포하는 책임을 지고,
보편 타당한 윤리와 법적 구속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륜을 미화하는 자들은
보편 윤리에 반하는 이들이고,
진정한 자유를 실현한 이들이 아니다.
엉뚱하게도 이번 주
엠마와 함께 '이혼숙려캠프'의 막장 사례들을
대화하다 보니
불륜 얘기가 자꾸 섞였다.
그래도 주제와 크게 어긋나지는 않았다고 본다.
여기까지가 『순진함의 유혹』에 대한 나의 독서 소감이다.
P.S.
다음 n회차 독서 기록 책은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이다.
그는 버나드 쇼와 함께
영국의 대표 이야기보따리 철학자다.
그의 지혜는 대단하지만,
개인사는 나쁜 남자 자체인데다가,
불륜으로도 탑클래스이다.
아인슈타인과 맞먹는다고나 할까.
그래도 그건 그거고,
우리는 이분의 지혜만
잘 증류하면 된다.
– 2025년 7월 20일, 엠마네오빠


[n회차 독서기록] 박민영, 『낭만의 소멸』 3/3
대망(?)의 3/3 소감 후기이다.
여기까지 써보게 된 건, 박민영 저자 글에 대한 애정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소감은 다음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낭만을 잊은 것이 아니라, 유예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 3/3 소감 후기를 시작하겠다.
---
박민영 저자가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후배가 있었다.
그녀는 결혼 후, 남편의 외도로 오랫동안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았다.
이혼까지도 고민했지만 어린 딸을 생각하면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고 했다.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그날은 그냥 멍하게 거실에 앉아 있었어요. 전날 밤에도 남편하고 크게 싸웠고요. 그런데 라디오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잔니 스키키> 중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가 흘러나왔는데, 갑자기 눈물이 멈추질 않더라고요.”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그 후배는 절망 속에서도 다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사례를 읽으며, 나는 낭만이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
낭만은 현실에서 달콤한 것만 누리려고 하거나, 고통에 도망치거나 눈을 감으려고 하면 누릴 수 없다. 그런 행위에서는 우울, 불안의 고통만이 있을 뿐이다.
낭만은 오히려 고통과 직면해서, 인간이 지지 않고 품위를 잃지 않을 때 체험된다.
그것은 미학적인 고양감이고, 동시에 충실하게 살아야겠다는 생의지이다.
낭만은 느리다.
다정한 기다림 속에서, 손으로 편지를 쓰고, 오래된 음악을 듣고, 누군가를 천천히 이해해가며 생겨나는 감정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생활 시간표는 기계처럼 돌아가고, 인간의 리듬은 그 기계적 시간에 맞춰 끊임없이 조정당한다.
기계적 시간은 생물로서의 인간의 리듬과 속도를 지배한다.
그런 사회생활 시간표 속에서, 낭만은 설 자리를 잃는다.
우리는 때때로 ‘낭만적인 무엇’을 갈망한다.
그래서 K-드라마 속 국뽕 어린 로맨스에 몰입하고, 복고풍 감성에 기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낭만이 아니다.
거기엔 자신이란 존재가 현실에서 직접 체험하는 감각의 고양이 없다.
복고도 마찬가지다.
우치다 타츠루는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면 과거를 미화하거나 조작한다고 했다.
비틀즈를 몰랐던 사람이 나중에는 “그 시절, 나도 들었지”라며 기억을 덧칠한다.
그렇게 조작된 복고는 과거의 모양을 흉내 낼 수는 있어도, 감각과 실존의 깊이는 흉내 내지 못한다.
진짜 낭만은 실존의 능동적인 체험이며, 느림 속에서 자란다.
그 감각은 손으로 무언가를 쓰고, 실존의 리듬을 지켜내는 인내 속에서 살아난다.
낭만은 결코 소비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우리는 낭만적인 순간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환상 속에 살고 있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멋진 호텔, 해외여행, 라이브 공연, 프러포즈 패키지까지.
하지만 그것은 낭만이 아니라 패키징된 자본주의적 유사 낭만 체험이다.
직접 체험하는 합일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쇼맨십이다.
그런 쇼맨십 속에서, 인간관계의 본질인 낭만은 소외된다.
낭만은 존재의 영혼이 감응하는 순간에서 온다.
길을 걷다가 문득 바람에 고개를 드는 일, 오래된 편지를 다시 펼쳐 읽는 일, 그런 느림의 순간들에서 온다.
그 느림은 결코 효율적이지 않다.
그러나 낭만은 늘 그런 비효율 속에서 자란다.
기다림, 서툰 손글씨, 진심의 대화.
그 모든 어설픔과 느림이 인간의 감각을 되살린다.
문제는, 이 자본주의 사회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간표는 촘촘하고, 경쟁은 날카롭다.
지각은 곧 근태가 되고, 느림은 무능력으로 해석된다.
이런 환경에서 『서시』의 윤동주는 나올 수 없다.
그러니 낭만은 자꾸 미뤄지고, 대체된다.
대신 우리는 계산되고 기획된 콘텐츠를 소비한다.
드라마나 연예인의 사랑 이야기를, 공연의 흥과 여운을, 남의 추억이나 운동 경기를.
그러나 거기서 우리는 참고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단지, 느낀 것 같은 착각만 남는다.
그런 식으로, 진짜 낭만은 점점 기억되지 않는 감정이 되어가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정서는 이미지로만 남고, 추억은 사진첩으로 저장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정말 낭만적인 순간은, 사진조차 찍지 못했던 순간에 다가와 느끼게 하고 사라진다는 것을.
정말 서로 좋아하면,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 수 있다.
그 순간, 그들은 단지 느꼈고,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존재의 합일감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것은 연애의 설렘이나 썸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말로는 닿을 수 없는 어떤 감각이, 서로의 내면에서 소리없이 동기화된 순간이다.
그 덕분에 삶은 조금 더 따뜻해졌고, 고통은 조금 더 견딜 만해졌다.
결말 – 낭만은 아직, 우리 안에 있다
낭만은 아직 회복될 수 있다.
그것은 사회가 주는 혜택이 아니라, 개인이 지켜내는 감각이다.
심지어 비극적인 삶의 어느 지점에서라도, 우리는 여전히 신비로운 고양감을 느낄 수 있다.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느릴 수 있고, 기다릴 수 있다면,
낭만은 다시 우리 안에서 시작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다.
비싼 맛집도, 근사한 여행도, 멋진 이벤트도 아니다.
시간이나 세월이 조금 걸리겠지만,
자신 고유의 리듬, 속도, 감각을 되찾으면 된다.
하나의 내면적 명제가 필요하다.
“외부의 기만과 속도에 자신을 종속시키지 말 것.”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있지만,
손익을 너무 열심히 따지며 살다 보니, 따뜻한 마음 하나를 주고받지 못한다.
그러니 어쩌면, 낭만은 지금 우리 곁에 없는 게 아니라,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립지만 외면하고 있는 것.
그럼으로써 기계적인 삶에 종속되어
소외, 고립, 단절되기를 스스로 선택한 것.
각자도생을 외치며
자멸의 방향으로 가는 것.
스스로 낭만을 소멸시키면서
그것을 그리워한다.
물신을 섬기고,
편리한 게 좋고,
삶에 필요한 고통마저 회피하고,
손익만을 따지는 게 더 좋기에,
낭만은 소멸된 것이다.
P.S.
다음 n회차 기록 도서는 프랑스 대중 철학자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순진함의 유혹』이다.
나는 그를 대중 철학자로 분류한다.
이 책은 『낭만의 소멸』과 맥락 면에서 서로 뒷받침해주는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 2025년 7월 14일, 엠마네오빠


[n회차 독서기록] 박민영, 낭만의 소멸』 2/3, 서장부터 2장까지
- 우리가 점점 더 낯설어지는 이유
이 책은 단지 ‘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이 점점 더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이야기이며,
기술이 삶을 편리하게 만든 대가로
감정, 시간, 신뢰, 그리고 사람 자체를
어떻게 지워가는지에 대한 고발이다.
‘잃어버린 세대’는 지금 여기 있다.
책의 서장은 ‘침묵하는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88만원 세대』를 쓴 우석훈조차 2013년에,
자신의 책을 읽고도 저항하지 않는 청년들(현 40대)에게
절망하며 책을 절판했다.
그리고 미국 대공황기의 청년을 그린
『잃어버린 세대(The Lost Generation, 1936)』의
저자 막신 데이비스에 따르면,
당시 청년들에게는 이상(理想)의 추구도,
반항도 발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경제적 안정 외엔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메시지는 이렇다.
청년들은 경제 호황기에는 과감해지고 반항을 잘한다.
현 5060세대가 그런 시절을 통과했다.
반면에 경제 불황기에는 소극적이 되고,
좌절이 기본값이 된다.
그들은 가만히 있으면서, 참고 침묵하는 사람들이 된다.
지금의 2030세대가 그렇다.
그렇다고 그들이 얌전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촉발해줄 지도자를 염원한다.
히틀러 같은 컬트적인 정치 지도자를 말이다.
“잠재적인 나치는 저항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침묵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그의 경고다.
그 침묵은 지금 이곳, 한국의 청년 상당수들에게도 있다.
문제는 그들의 좌절과 체념이
더 나은 삶의 방향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점이다.
약속의 무게는 어디로 갔는가.
1장의 주제는 휴대폰이다.
휴대폰은 ‘약속을 위한 약속’을 가능하게 한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애니콜 시절부터,
휴대폰은 약속의 무게를 실시간으로
변경 가능한 가벼운 것으로 만든다.
카톡이나 문자, 휴대전화로 주고받는
“언젠가 밥 한번 하자”는 말은,
설령 진심이 있더라도
그 ‘언젠가’는 끝내 '미정인 예정'이다.
우리는 지금, ‘약속’이라는 무거움을
‘미정인 예정’이라는 한없는 가벼움으로
대체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상황 속에서 책임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립 서비스'란 말이 나오게 되고,
사람들은 빈말을 쉽게 할 수 있게 됐다.
예전에는 약속 하나를 지키기 위해
몸도 마음도 미리 정비해야 했다.
아프지 않도록 관리하고,
그 약속 하나에 맞춰 하루의 일정을 설계했다.
그러나 지금은?
“잠깐만”, “좀 늦을게”, “다음에 보자.”
이 말들이 너무 익숙하다.
그 말엔 더 이상 상처도, 아쉬움도, 기다림도 없다.
모든 것이 즉흥적이고, 즉각적이며, 가볍다.
그 사이, 서로에게 시간을 공들여 가며 스며드는 감정,
싸우고 화해하며 인내하는 감정의 시간은 사라졌다.
사랑은 기다림을 견디는 과정이었는데,
이제는 ‘답장 속도’가 애정의 기준이 되었다.
휴대전화는 인간관계를 아이처럼 떼쓰게 만들었다.
휴대폰은 시도 때도 장소도 가리지 않고 울릴 수 있다.
이건 그냥 웃고 넘길 말이 아니다.
그 떼쓰는 기계 앞에서
우리는 언제든 대화 중간에 전화를 받고,
공적인 분위기는 깨어진다.
누가 누구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는,
‘눈앞의 사람과의 대화를 계속하느냐’ 아니면
‘그 대화를 끊고 전화를 받느냐’로 매겨진다.
또한, 휴대전화 한 통에 집중력은 무너진다.
하던 말을 잊고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더라?”라고
되묻는 순간. 그리고, 그런 모든 편리한 것들이 모여,
우리는 더 이상 깊은 대화를 하지 않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말로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디지털은 욕망을 키우고, 감정을 파괴한다.
2장은 디지털의 속도와 편리함의 이면을 다룬다.
그렇다. 디지털은 욕망을 키우고, 감정을 파괴한다.
디지털은 인간다운 관계와 낭만을 모조리 파괴하고 있다.
문명은 늘 욕망에서 탄생했지만,
지금의 디지털은 ‘새로운 욕망’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알림, 댓글, 클릭 수는 사람을 기다릴 줄 모르게 만들고,
더 많이, 더 빨리, 더 즉시 반응하도록 훈련시킨다.
한편, 종이편지보다 이메일에서
더 많은 거짓말이 오간다는 연구 결과는
디지털의 간접성이 인간의 죄책감을 줄이고,
정직성마저 훼손시킨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 모두는 그런 첨단 기기를
하루 종일 손에 쥐고 살고 있다.
문제는 기억도, 관계도, 감성도
손으로 하던 시절보다 훨씬 얕아졌음에도
그 얕아짐을 문제라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디지털의 속도와 편리함은
수많은 노인들을 ‘정보 난민’으로 몰아넣고 있다.
디지털은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자라게 만든다.
미국에는 ‘아이패드 키드’라는 신조어가 있다.
흔한 미국 부모는 유아에게 아이패드를 사준다.
아이가 조용히 있으니까 말이다.
그 결과, 유아는 아이패드에 붙들려 하루 종일 지낸다.
소파에 엎드려 세워놓은 아이패드에 눈을 고정하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12번이나 본 미국 유아 여자아이는,
단지 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만 하고 있을 뿐이다.
생각하고 해석하고 곱씹는 ‘인간적 집중’은 없다.
인간의 뇌는 반복과 느림, 감정적 교감을 통해 자란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스마트 기기와 함께한다.
그들은 손으로 글씨를 쓰지 않고,
감정을 눈빛으로 교환하지 않으며,
집중보다는 자극에 길들여진다.
그 결과,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양산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을,
다시 회복할 수 없는 두뇌 시냅스를
아이들은 매일 디지털 기기 앞에서 스스로를 잃어가고 있다.
낭만은 사라진 게 아니다.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낭만의 소멸』은 서장부터 2장까지
다음과 같은 낭만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너희는 왜 기다리지 않니?”
“왜 불의에 저항하지 않니?”
“왜 손으로 쓰지 않니?”
“왜 사람을 이렇게 쉽게 끊고 잠수 타니?”
처음부터 2장까지만 읽어도 우리는 알게 된다.
‘낭만’이란 그저 사랑 이야기 속 단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낭만은 곧,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모든 감정과 인내의 무게였다.
그 무게를 감내하지 못하는 사람은 낭만을 누릴 수 없다.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단지 낭만이 아니다.
그 낭만 속에 담겨 있던 인간미, 존재감,
인내, 집중력, 사유의 깊이, 사랑의 온도, 신뢰의 무게까지,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허물어버렸다.
그러면서 저자 박민영은 이렇게 묻는다.
“그걸 잃고도 괜찮은가?”
PS.
그러나, 이렇게 낭만이 사라진 세계에서
끝까지 낭만을 회복하려는 소수 남녀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책이 독자에게 도달한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청년들 중에 스스로 느림을 선택하고,
일부러 아날로그의 불편함을 감수하려 하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존재의 삶을 선택하려는 움직임을 본다.
나는 그들에게서 죽지 않는 낭만의 힘을 본다.
자본주의가 아무리 낭만을 왜곡하고 죽이려 해도,
진짜 낭만은 어딘가에서, 누군가에 의해
여전히 조용히 이어질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미와 존재감이 있는 유일한 삶이니까.
- 2025년 7월 6일, 엠마네오빠


[n회차 독서기록] 박민영, 『낭만의 소멸』 1/3
- 2014년에 이미 말해버린 사람, 고 박민영 저자를 기리며
이 책은 사실, 아는 사람들에겐 이미 전설이다.
나는 그중 한 명으로서 이 글을 쓸 뿐이다.
그런데, 2회차 독서 기록을 개시하면서
책의 본문이 아니라,
단지 ‘머리말’ 하나만 가지고 글을 쓴다고?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로선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다듬어져 있고,
머리말만으로도 그 정신이 충분히 전달되는 책.
고 박민영 저자의 책들 중에서도
유난히 진솔한 마음과 영혼이 담겨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그의 책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의 모든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몇몇 주제의 서술에는 고개를 갸웃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의 대다수 서술과 제언에는 깊이 공감한다.
그는 진실했고, 무엇보다 섬세했으며,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내가 그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의 문장에는 진실함이 있었고,
섬세한 맥락의 지혜와 아름다운 마음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그를 2023년 겨울,
꽤 늦은 시기에 알게 됐다.
도서관에서 『낭만의 소멸』을 읽고 나서,
나는 그의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이없지만 초기에,
그를 여성 저자로 착각한 적도 있었다.
이름이 여자 같아서 말이다.
게다가 2024년 말인 11월에 이르러서야
그가 이미 고인이 되었음을 알게 됐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이 그리워졌다.
그를 벗(朋)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낭만은 왜 소멸되었는가
박민영은 낭만을 감상이나 향수 따위로 다루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낭만은 ‘합일의 감정’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예술 사이에서
서로에게 녹아드는, 작은 무경계의 순간.
그게 낭만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합일조차
결제 버튼을 누르고 난 뒤에야
겨우 소비 행위로 경험하게 되었다.
만남은 데이트가 되었고,
데이트는 소비가 되었고,
소비는 가성비로 환산된다.
한참 즐겁게 식사하는 중에도
“밥값이 얼마나 들고 있지?”
“오늘 데이트 비용 얼마였지?”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낭만은 사라진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낭만을 소멸시킴으로써 번성한다.
박민영은 말했다.
“지금은 낭만마저도 산업화된 시대다.”
동감한다.
여행이 종교가 된 시대
“오늘날 여행은 하나의 종교다.”
그가 이 말을 남겼을 때는, 인스타그램이 막 뜰 즈음이었다.
그 이전에도 사람들은 여행을 ‘자아발견을 위한 무엇’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그가 말했듯,
여행이 최고의 낭만으로 소비된다는 건
사람들이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낭만을 이미 상실했다는 증거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탈출해,
여행을 탕진잼으로 소비해야만
겨우 “살아있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삶 전체가
감각적으로 죽어 있다는 뜻이다.
박민영은 이 사실을
섬세한 맥락의 서술로 알려준다.
우리 삶이 감응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작가는 정신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박민영은 유협의 『문심조룡』을 인용하며 말한다.
“정신은 바람과 같다.”
보이지 않지만, 모든 걸 흔들 수 있다.
그는 글을 정신의 행위로 본다.
이 말에 나 역시 끄덕인다.
“글쓰기란 자신을 벼리는 숫돌이자,
세상에 맞서는 칼이다.”
이 말은 수사가 아니다.
그가 실제로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유효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글이 ‘사랑의 마음’이었음을 본다.
이 책은 그런,
그의 사랑스러운 저작물 중 하나다.
P.S.
이렇게 팬심을 지나치게 드러낸다 하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는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한국인 저자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다.
- 2025년 6월 27일, 엠마네오빠


김현수 지음, 『괴물 부모의 탄생』 2회차 읽기 시작했는데 완료했다.
괴물은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이 말하는 ‘괴물 부모’ 역시, 처음부터 그런 존재는 아니었다.
2006년 6월, 일본 신주쿠의 한 초등학교.
스물셋의 신입 교사가 학부모 민원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괴물 부모’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고,
같은 구조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이들은 자녀에게는 권위를, 외부에는 과잉보호를 휘두른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나는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고, 내 아이만은 잘되길 바란다”는
상처와 불안이 고여 있다.
여기에 신자유주의 경쟁 구조가 덧씌워지며,
사랑은 거래로, 교육은 투자로, 자녀는 프로젝트로 전락한다.
상당수 자녀들은 그 시달림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원래 부족한 아이예요”라는 역할에 자신을 가둔다.
부족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기이하지만 효과적인 방식으로 자기 생존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렇게 부모와 자녀는 서로를 보호하는 척하며,
서로를 조금씩 해쳐간다.
예전에, 마흔세 살 자녀를 둔 한 지인 가정과 교류한 적이 있었다.
자녀는 심한 심리적 위축과 선택장애, 공황, 우울, 불안 등
복합적인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고,
현재까지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것은, 오랜 세월 과잉 보호와 조건부 양육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괴물 학부모 가정의 미래는
이전 세대인 과잉 학부모 가정보다
결코 밝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김현수 박사는 짚어주되,
괴물 부모 개인을 탓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괴물로 만들도록 조장한
사회적 구조를 가차 없이 드러낸다.
돌봄의 부재 및 외주화, 공동체 해체와 가치 파괴,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성과지상주의와 무한경쟁,
그리고 모든 것을 각자도생으로 밀어붙이는 시대정신.
괴물 부모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런 시대의 초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안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2회차 독서 완료.
책장을 다시 넘겼지만,
무거운 사회현상을 다룬 책치고는
의외로 술술 읽힌다.
독서의 감각은 가볍고, 메시지는 단단하다.
PS.
현재 읽고 있는 어느 책은
12권을 한 권으로 묶은 데다,
깨알 글씨로 사람 눈 피곤하게 하는 ‘얌체본’이다.
훌륭한 저자가 자본주의를 잘 비판하는데,
상술은 자본주의 그 자체인 책 하나를 상대하고 있어서
당분간은 쉬운 책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온라인 쇼핑할 때는 잘 보고 구매해야 한다.
오프라인 서점에서 골랐다면 이런 실수는 없었을 것이다.
– 2025년 6월 21일, 엠마네오빠


최근 방송에서 저속노화 강연으로 알려진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정희원 교수는,
1년에 한 번,
새해가 오기 전이면 '채근담'을 읽는다고 한다.
그는 이 책을 마음 건강에 관한 지혜를 담은 책으로 소개하며
공개적으로 '채근담'을 권했다.
나 역시 정희원 교수의 추천에 공감한다.
중학교 시절,
나는 아버지 책장에서 '채근담'을 꺼내
수시로 읽곤 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맑고 담담해서,
읽고 있으면 마음이 조용해졌다.
성장기 때 사고 안 치고
나름 곱게(?) 자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이 책 덕분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우리 집엔 '채근담'이 세 권이나 있다.
대체 내가 왜 이랬는지 모르겠다.
누렇게 뜬 낡은 책,
덜 누런 낡은 책,
그리고 최신 문고판까지.
게다가 저작권이 없으니
온라인에는 누군가가 타이핑해놓은
아래아한글 문서나 PDF 파일도 있어서
휴대폰과 태블릿에도 저장해두었다.
생각날 때마다 읽자고 했지만,
정작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이미 수차례 읽었기에,
늘 다른 책들이 더 우선순위였다.
그랬는데,
다시 읽고 싶어졌다.
어릴 적 그때처럼,
문장을 곰곰이 곱씹으며 마음에 우려내고 싶어졌다.
그때 느꼈던 '채근담'의 지혜와
지금 다시 마주하게 될 지혜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조금 궁금해졌다.
내가 경험한 독서의 말들은 이랬다.
쉬운 말은 쉬운 말이 아니었고,
어려운 말은 어려운 말이 아니었다.
동양 고전은, 대개 전자에 해당한다.
---
PS.
원문과 해설은 덜 누런 책으로,
문고판에는 우화와 일화가 붙어 있으니
두 권을 나란히 펼쳐 병행해 보기로 했다.
- 2025년 6월 14일, 엠마네오빠


[n회차 독서기록] 우치다 타츠루, 『곤란한 결혼』
“제가 드리고자 하는 이야기는 정반대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회이 원리와 '싸우기' 위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교육하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고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은 생물학적 인간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지요.
'예외적인 능력과 재능이 없으면 배우자를 찾지 못한다'는 규칙을 정해 놓고 게임을 한다면 인류는 이미 수만 년 전에 멸종했을 겁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이 기본값입니다.
적어도 인류의 탄생부터 반세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지금이 이상한 겁니다.”
– 우치다 타츠루,『곤란한 결혼』, p.68~69, 박솔바로 옮김, 도서출판 민들레
이 문장을 다시 마주하고, 책을 처음 읽을 때와는 조금 다른 마음이 들었다.
에리히 프롬의 '건전한 사회' 메시지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곤란한 결혼』은 삶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상치 못한 변화와 위기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욕심을 낼 것인가, 아니면 유쾌하게 잘 살아갈 것인가’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삶에는 언제나 지혜와 용기가 함께 필요하다는 건 분명하다.
지혜만 있어도 부족하고,
용기만으로도 벅차다.
그 둘을 가지고 생각하면,
우리는 어딘가에서 중용의 최적해를 찾게 된다.
그걸 찾지 못하면,
삶은 모순 속에 머물다 소진되기도 한다.
한때 우치다의 책을 여러 권 찾아 읽으며 깊이 빠져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그가 가진 세계관에서 졸업했지만,
그래도 그의 책들에는 형광펜으로 짚어둔 문장들이 많아서,
가끔 다시 펼쳐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앞선 독서에서 프롬의『건전한 사회』는
사유의 무게가 손끝에 오래 남는 책이었다.
이번엔 조금 다른 호흡으로,
가볍게 읽히면서도 삶의 결을 다시 만져볼 수 있는 책을 택했다.
우치다의 문장은 유쾌하고 사유가 노련하며,
그 안에 조용한 체념과 단단한 책임의식이 스며 있다.
나는 우치다 타츠루를 좋아하지만 맹신하지 않는다.
그의 말은 명쾌할 때가 있고, 너무 자기 이야기일 때도 있다.
그래서 읽다 보면, 공감이 빠지는 순간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하지만 그런 흐름 속에서도 가끔 걸려오는 문장이 있다.
그럴 때, 나는 다시 그를 펼치게 된다.
이번 독서는 철학이 아니라 생활 감각.
그 안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당연한 일들’을 다시 바라보려는 작은 시도다.
이렇게 썼지만,
사실 그냥 편하게 읽고 싶었다.
- 2025년 6월 8일, 엠마네오빠


“정신건강은 사회에 대한 개인의 '적응'이라는 관점에서 정의될 수 없다. 반대로, 정신건강은 사회가 인간의 욕구에 대해 어떻게 적응하는가, 정신건강의 발전을 추진시키고 방해함에 있어 사회의 역할은 어떠한가, 하는 관점에서 정의되어야만 한다. 개인의 건강 여부는 개인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사회 구조에 주로 의존한다. ... 불건전한 사회는 상호 간에 적의와 불신감을 일으키고, 타인을 이용해 착취하는 도구로 변모시키는 사회다. 그러한 사회는 인간이 타인에게 복종하여 자동적 인형(오토마타)에 지나지 않게 되어, 인간으로부터 자아의 감각을 빼앗아 가는 사회다. 사회는 두 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 즉, 사회는 인간의 건전한 발달을 조성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사실 대부분의 사회는 이 두 가지 기능을 하고 있다.”
- 에리히 프롬, 『건전한 사회』 중에서
(범우사, 김병익 옮김, p.77)
에리히 프롬의 '건전한 사회'를 다시 펼쳤다.
늦게 읽은 편이고,
몇 년 묵혔다가 꺼내든 지금은 두 번째 읽기다.
책장을 넘기기 전부터 질문 하나가 따라붙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아니, 좀 더 넓게 말하자면,
‘인류는 모두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가?’라는 오래된 물음이었다.
성장기 시절, 주위 어른들이 내게 자주 하던 말이 떠올랐다.
‘잘 적응해야 돼. 잘 참고 견디면 결국엔 잘 적응할 수 있어.’
사회 역시 끊임없이 비슷한 압박을 준다.
‘지루함을 견디고 일하라, 참아라.
의문을 가지지도,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
프롬은 말한다.
사회가 건강해야 개인도 건강할 수 있다.
개인을 고치는 길은 사회를 고치는 길이고,
사회를 고치는 길은 결국 개인을 바로 세우는 길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책은 ‘무엇이 옳다’고 말하기보다는,
그 질문을 함께 붙들고 오래 생각할 벗을 찾는 쪽에 더 가까운 책인지도 모르겠다.
– 2025년 6월 1일, 엠마네오빠


요즘은 생각보다 소리가 먼저 나가는 세상입니다.
무언 가를 충분히 곱씹기 전에 의견이 앞서고,
정작 중요한 질문은 묻히기 일쑤죠.
그럴수록 조용히 한 문장에 깊이 사유하는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그믐'에는, 말보다 ‘사유를 위한 머무름’을 아는 분들이 모여 계신 듯합니다.
가입하고 한참을 망설이며 지켜보다가,
함께 오래 생각할 만한 질문 하나씩 나눠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각자의 속도로, 사유를 오래도록 이어가는
조용한 독서와 대화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드물게, 그 문장 너머의 벗(朋)인 사람과
비록 화면을 사이에 두고 있더라도 깊이 교류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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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31일, 엠마네오빠
P.S.
주로 인문과 사회 분야의 책들을 천천히 읽습니다.
저와 결이 비슷한 질문을 품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더없이 반가울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