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
2025-09-09 15:40:08
“그러나 성은 하얀색이었다. 새하얗고 아름다웠다. 어쩐지 이렇게 아름답고 도달하지 못할 존재는 꿈에서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꿈에서 어두운 숲 속의 구불거리는 길로, 언덕에 있는 밝고 하얀 건물에 도달하기 위해서 황급히 뛰어가면 그곳에 참가하고 싶은 축제, 놓치고 싶지 않은 행복이 있을 것만 같았다. ”
『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공략해야 할 하얀 성의 이름은 The Castle Doppio였다. ‘Doppio’는 이탈리아어로 ‘Double’을 뜻한다. 주제 사라마구의 도플갱어 소설 영어 제목이 The Double인 것을 떠올리면, 하얀 성 역시 쌍둥이처럼 닮은 두 주인공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7세기를 배경으로, 베네치아 출신의 화자는 해적에게 붙잡혀 이스탄불에 노예로 팔려온다. 그곳에서 그는 거울 속 자신을 보는 듯 똑같이 닮은 호자(Hoja)를 만나고,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가게 된다.
작품은 동서양 두 문명이 결국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작가가 말했다고 어디서 들었다. 그런데 내게는 오르한 파묵이 가진 배경―동서양의 경계에 놓인 튀르키예 출신이라는 지정학적 맥락, 그러나 서양 교육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함, 자국에서는 정치적 발언으로 주목받아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평가―때문인지 개인적인 정체성에 관한 소설로 읽혔다. 파묵 자신이 호자와 화자의 혼종 혹은 융합이 아닐까..
여러책을 늘어놓고 그 중 하나를 눈을 감고 고른다 해도 정체성이 주제 중 하나인 소설 이 걸릴 확율은 꽤나 높을 것이다. 다만 이 소설에서는 나는 무엇인가가 아닌 "나는 왜 나일까"라는 명제를 제시한것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인간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보편적인 가치는 관심없고 내가 왜 나인가를 고민한다. 나라는 정체는 기억, 경험에 서사와 미래 까지도 포함하는 고정화 된 것이 아닌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우화처럼 읽을 수 있는데 그리 뻔한 알레고리는 아니라서 독자를 계속 숙고하게 만드는 중단편 이었다.